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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백제의 역사 ㅡ 부여 석조

작성자浮雲| 작성시간26.06.18| 조회수2|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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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부여 석조(扶餘 石槽)'는 단순한 물통이나 석련지(石蓮池)가 아니라, 부처님의 밥그릇인 '사천왕봉발(四天王奉鉢)' 또는 '불발(佛鉢)'의 형상화로 보는 학설이 불교 미술사 및 백제사 연구에서 매우 설득력 있고 정교한 최신 연구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석조의 구연부 안쪽과 바깥쪽을 따라 촘촘하게 그어진 4개의 테두리 선(금)이 선명하게 보이다. 이것이 바로 이 유물이 '발우(바루)'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이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현장의《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발우의 탄생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전하는데 이를사천왕봉발(四天王奉鉢) 설화라 한다.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이 공양을 받으려 하자, 동·서·남·북의 사천왕이 각각 금, 은, 유리, 마노 등으로 만든 바루를 바쳤다. 하지만 부처님은 수행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절하셨고, 이에 사천왕이 다시 돌(石)로 만든 바루를 하나씩 바쳤다. 부처님이 이 4개의 돌 바루를 받아서 차례로 포개 누르시니 하나로 합쳐졌는데, 그 가장자리에 4개의 테두리(四隆/四際) 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부여 석조 윗부분의 4겹 선은 단순한 장식이나 흠집이 아니라, "사천왕이 바친 4개의 돌 바루가 하나로 합쳐진 부처님의 석발(石鉢)"을 시각적으로 정확히 재현한 고증인 셈이다. 실제로 간다라 미술의 '사천왕봉발도'나 해외의 고대 불발(佛鉢) 공양상에서도 이 4겹의 테두리가 동일하게 표현된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그동안 이 유물은 왕궁이나 사찰에서 물을 담아두던 '석조'나 연꽃을 키우던 '석련지'로 불려왔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몇 가지 의문이 있었다. 일반적인 석조는 바닥이나 측면에 물을 빼내는 배수 구멍이 있기 마련인데, 부여 석조는 물을 뺄 수 있는 구멍이 없다.
    물을 담는 용도라면 사각형이나 원통형이 자연스럽지만, 이 유물은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살짝 오므라드는 전형적인 '사발(바루)'의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실용적인 물통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특정 신앙의 대상(예배 자취)으로 제작된 조형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이 학설이 맞다면, 백제 왕실이 단순한 불상 예배를 넘어 '불발(부처님의 바루) 신앙'을 영위했음을 보여주는 대단히 중요한 증거가 된다.
    고대 아시아에서 '부처님의 바루(불발)'를 소유하거나 그것을 형상화해 모신다는 것은, 그 나라의 왕이 부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정받은 정법왕(正法王)이자 전륜성왕(轉輪聖王)임을 상징했다. 백제 성왕이나 위덕왕 대의 강력한 불교 중심 왕권 강화책과 일맥상통한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백제 장인들은 경전 속 전설적인 이야기를 돌이라는 매체를 통해 완벽하게 시각화했다. 석조 표면에 새겨진 부드러운 곡선과 아가리의 4겹 선은 백제 미술의 높은 수준과 깊은 불교적 이해를 보여준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석조 윗부분의 4줄기 금"은 경전 속 사천왕이 바친 4개의 바루가 합쳐진 자국을 완벽하게 고증한 표현이다.

    ​따라서 이 유물은 단순한 석조라기보다는 백제 왕궁에서 부처님의 전설적인 밥그릇을 재현해 모셔두고 왕실의 안녕과 권위를 빌었던 '불발(사천왕봉발) 조형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고 학술적으로도 깊이 있는 해석이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부여 석조 표면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새긴 '정림사탑 명문'과 유사한 승전 기념 문구(대당평백제국비명 계열)가 새겨져 있다. 당나라군이 백제 왕실의 가장 신성한 상징물이었던 이 '불발(佛鉢)'을 골라 의도적으로 승전 문구를 새김으로써, 백제 왕실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자신들의 승리를 극대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중국 육조시대나 당나라 때 제작된 석불발, 그리고 간다라 미술에서 사천왕이 바친 바루를 표현할 때 구연부에 4줄의 홈이나 선을 긋는 방식(사륭/사제 도상)이 백제에 그대로 유입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작성자 浮雲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6.06.18 기존 관성대로 '석조(물통)'나 '석련지'로만 기술해 오던 고대 미술사학계에 '사천왕봉발' 설은 신선한 충격이자 매우 정교한 논리로 받아들여진다.
    이제 부여 석조는 단순한 생활·조경용 석물을 넘어, 백제의 찬란한 불교 문화와 왕권 신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최고 수준의 '성물(聖物)'로 재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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