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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 元年 六月

작성자浮雲|작성시간26.06.10|조회수37 목록 댓글 0

무인. 원년(918). 후량(後梁) 말제(末帝) 정명(貞明) 4년, 거란(契丹) 태조(太祖) 신책(神冊) 3년. 여름 6월 병진일에 태조(太祖)가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하고 연호를 고쳐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처음에 세조(世祖)가 송악산의 남쪽에 집을 짓는데, 승려 도선(道詵)이 와서 문 밖의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찬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이 마땅히 성인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조(世祖)가 그 말을 듣고는 황급히 나가 맞아들였다[倒屣出迎]. 함께 송악산에 올랐는데, 도선(道詵)이 〈지리를〉 굽어 살피고 〈천문을〉 우러러 보고는 이에 글 한 편을 써서 세조(世祖)에게 주며 말하기를, “공께서는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니, 장성하거든 이것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글은 비밀에 부쳐져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태조(太祖)가 17세가 되었을 때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뵙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족하께서는 액운의 시기[百六之會]를 만나셨으니, 3대의 말세[三季]에 처한 백성[蒼生]들은 공께서 널리 구제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군대를 일으키고 진(陣)을 치기에 유리한 지리와 때[天時]를 읽는 법과 산천의 신에게 차례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감통(感通)하여 보호와 도움을 받는 이치를 일러주었다.

이 때 신라는 정치가 쇠미하여져서 도둑떼가 앞을 다투어 일어났으며,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남쪽 지역[南州]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고 칭하였고, 궁예(弓裔)는 고구려(高句麗)의 땅을 차지하고 철원(鐵圓)에 도읍하여 국호를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세조(世祖)는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粲)으로서 군(郡)을 거느리고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였다. 궁예(弓裔)가 기뻐하면서 곧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世祖)가 이어 궁예(弓裔)를 설득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자를 성주(城主)로 삼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궁예(弓裔)가 그 말을 따라 태조(太祖)로 하여금 발어참성(勃禦槧城)을 쌓게 하고 이어서 그를 성주로 삼았다. 이 때 태조(太祖)의 나이는 20세였다. 후에 광주(廣州)·충주(忠州)·당성(唐城)·청주(靑州)·괴양(槐壤) 등의 군현을 정벌하여 평정하니, 그 공으로 아찬(阿粲)을 제수받았다. 또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가서 금성군(錦城郡)을 공략하여 함락시키고, 10여 개의 군현을 쳐서 빼앗았으니, 이에 금성(錦城)을 고쳐 나주(羅州)로 삼았다. 양주(良州)에서 위급하다고 고하자 궁예(弓裔)가 태조(太祖)로 하여금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돌아와서 변방을 안정시키고 경계를 확장시킬 계책을 아뢰니,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눈여겨보았으며, 궁예(弓裔) 역시 그를 기특하게 여겨 계(階)를 알찬(閼粲)으로 진급시켰다.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을 공격하여 견훤(甄萱)과 여러 차례 싸워 이겼다.

태조(太祖)가 궁예(弓裔)의 교만함과 포학함을 보고는 다시 뜻을 변방[閫外]에 두었다. 마침 궁예(弓裔)가 나주(羅州)를 걱정하다가 마침내 태조(太祖)로 하여금 가서 진압하게 하고는 한찬 해군대장군(韓粲 海軍大將軍)으로 진급시켰다. 정성으로 군사들을 위무하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푸니 적경(敵境)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복속하였다. 궁예(弓裔)가 알찬 종희(宗希)와 김언(金言) 등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전함을 수리하고 광주(光州) 진도군(珍島郡)과 고이도성(皐夷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덕진포(德眞浦)로 나아가게 하였다. 견훤(甄萱)도 전함을 배치하였는데, 목포(木浦)에서부터 덕진(德眞)에 이르기까지 앞뒤가 서로 잇닿아서, 바다와 육지를 거침없이 오가며 그 군세(軍勢)가 매우 성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태조(太祖)가 말하기를, “군대의 승리는 화합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그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진군시켜 급히 공격하니 적선(敵船)들이 조금 물러났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불을 지르니, 불에 타거나 바다에 빠져 죽은 자들이 태반이었으며, 500여 명을 목 베거나 사로잡았다. 견훤(甄萱)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쳐 돌아갔다. 이전에는 나주(羅州) 관내의 여러 고을들과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적병들이 가로막으면 서로 호응하여 도울 수가 없어 자못 근심과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편안하여졌다. 김언(金言) 등이 스스로 전공은 많은데도 포상이 없다고 여겨서 몹시 마음이 흐트러졌다[解體]. 태조(太祖)가 말하기를, “삼가하고 태만하지 말라. 오로지 힘을 합하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께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어 조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니, 조정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면서 힘을 다하여 왕을 보필하는 것만큼 나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그렇다고 여겼다. 마침내 반남현(潘南縣)의 포구에 이르러 적경(賊境) 지역에서 염탐꾼을 풀었다. 당시 압해현(壓海縣) 도적의 우두머리[賊帥]인 능창(能昌)이 있었는데, 바다 가운데의 섬 출신으로 수전(水戰)에 능하여 수달(水獺)이라고 자칭하며 망명자들을 불러 모으고 갈초도(葛草島)의 군소 도적들과 서로 결탁하여 있었는데, 태조(太祖)가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해치고자 하였다. 태조(太祖)가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능창(能昌)은 이미 내가 도착한 것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섬의 도적들과 함께 모의하여 변을 일으킬 것이다. 적의 무리들이 비록 적기는 하지만 만약 합세하여 앞을 막고 퇴로를 차단하면 승패를 알 수 없다. 물질을 잘 하는 자 10여 명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창을 들게 한 후,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갈초도(葛草島) 나룻가 입구로 가서 오가며 일을 꾸미는 자들을 사로잡음으로써 그들의 계략을 막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 말을 따랐다. 과연 작은 배 한 척을 사로잡았는데, 곧 능창(能昌) 이었다. 잡아서 궁예(弓裔)에게 보내니, 〈궁예(弓裔)가〉 그의 목을 베었다.

궁예(弓裔)가 태조(太祖)에게 파진찬(波珍粲) 시중(侍中)을 제수하고 그를 불러들였다. 이에 지위가 백관(百官)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감정을 억누르며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였다. 참소를 당하는 사람을 볼 때 마다 매번 해명하여 구원하여 주니, 조정의 신하들과 장수 및 병졸들이 흡족해하며 마음으로 그를 따랐다. 태조(太祖)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갈 것을 청하니, 궁예(弓裔) 또한 “수군의 책임자가 가벼워서 적들을 위압하기에 부족하다.”라고 하였다. 태조(太祖)를 시중에서 해임하여 다시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를 지키게 하였다. 백제(百濟)와 해상의 도적들이 태조(太祖)가 다시 왔다는 것을 듣고는 모두 두려워하며 엎드려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태조(太祖)가 돌아와서 배를 다루는 유익한 방법과 변고에 대응하는 마땅한 법도를 아뢰었다. 궁예(弓裔)가 기뻐하여 좌우의 신하들을 보고 말하기를,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견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궁예(弓裔)는 터무니없이 반역죄를 꾸며내서 날마다 많은 사람들[百數]을 죽였다.
하루는 급히 태조(太祖)를 불러서 성난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하기를, “경이 어제 밤에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역을 꾀하였으니,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태조(太祖)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궁예(弓裔)는 일찍이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였으니, 이에 말하기를,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내가 이제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볼 것이다.”라고 하고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진 채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장주(掌奏) 최응(崔凝)이 곁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린 후, 뜰에 내려와 붓을 주워 들고 태조(太祖)를 재빨리 지나치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여 말하기를, “자복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조(太祖)가 곧 깨닫고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궁예(弓裔)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정직하다고 할 만 하다.”라고 하였다. 곧 금과 은으로 장식한 안장을 내려 주었다.
태조(太祖)는 일찍이 9층으로 된 금탑(金塔)이 바다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이 해 3월에 왕창근(王昌瑾)이라는 상인이 당(唐)으로부터 와서 저잣거리의 가게에 머물다가 문득 저자 한 가운데에 어떤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용모가 웅대하고 흰 수염에 머리에는 옛 관을 썼으며, 거사(居士)의 복장을 하고 왼손에는 주발을 들고 오른 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왕창근(王昌瑾)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창근(王昌瑾)이 쌀로 그것을 사서 저잣거리의 담벼락에 걸어두었다. 햇빛이 비스듬히 비치자 겨우 읽을 수 있을 만한 작은 글자들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대략 “삼수(三水) 가운데 있는 사유(四維) 아래로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내니, 먼저 닭[雞]을 잡고 뒤이어 오리[鴨]를 칠 것이다. 뱀의 해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니, 한 마리는 푸른 나무[靑木] 사이에 몸을 숨길 것이며, 〈다른〉 한 마리는 검은 쇠[黑金]의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때로는 성함을 보였다가 때로는 쇠함을 보이기도 할 것이니, 성하고 또 쇠하는 것은 나쁜 때를 없애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왕창근(王昌瑾)이 처음에는 글자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글자를〉 보고 나서는 비상한 일이라고 여겨 궁예(弓裔)에게 헌상하였다. 궁예(弓裔)가 왕창근(王昌瑾)에게 그 사람을 물색하여 찾도록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다만 동주(東州)의 발삽사(勃颯寺)에 오래된 진성상(鎭星像)이 있었는데, 〈거울을 판 거사의〉 모습과 똑같았으며, 좌우의 〈손에는〉 또한 주발과 거울을 들고 있었다. 왕창근(王昌瑾)이 기뻐하며 상세히 그 형상을 아뢰자 궁예(弓裔)가 감탄하며 기이하게 여기고는 문인(文人) 송함홍(宋含弘)·백탁(白卓)·허원(許原) 등에게 〈거울 속의 글을〉 해석하게 하였다. 송함홍(宋含弘) 등이 말하기를, “삼수(三水) 가운데 있는 사유(四維) 아래로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일컫는 것이다. 뱀의 해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푸른 나무[靑木] 사이에 몸을 숨기고 〈다른〉 한 마리는 검은 쇠[黑金]의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靑木]는 곧 소나무[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서 용을 이름으로 삼은 자의 자손이 군주가 될 만 하다는 말이다. 왕시중(王侍中)이 왕후의 상을 갖추고 있으니, 어찌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검은 쇠[黑金]는 곧 철(鐵)이니, 지금의 도읍인 철원(鐵圓)을 일컫는 것이다. 지금의 왕이 처음에는 이곳에서 성하였는데, 아마도 끝내 이곳에서 멸망하겠구나! 먼저 닭[雞]을 잡고 뒤이어 오리[鴨]를 친다는 것은 왕시중(王侍中)이 나라를 다스리게 된 후에 먼저 계림(雞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을 거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세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 “왕이 시기하고 죽이기를 즐기니, 만약 사실대로 고한다면 왕시중(王侍中)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며, 우리들 또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거짓으로 말을 꾸며 아뢰었다.

6월 을묘일에 기장(騎將)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이 은밀히 모의한 후, 밤중에 태조(太祖)의 집으로 가서 추대하고자 하는 뜻을 말하고자 하였다. 부인 유씨(柳氏)가 이 일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유씨(柳氏)에게 말하기를, “텃밭에 어찌 새로 열린 오이가 없겠습니까? 가서 따오십시오.”라고 하였다. 유씨(柳氏)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북쪽 문으로 나와서 몰래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지금의 왕은 정사가 참람하고 형벌을 함부로 하며,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을 주살하니,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져 그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습니다. 걸(桀)·주(紂)의 악행도 〈이보다〉 더 할 것이 없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광명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이니, 바라건대 공께서 은(殷)·주(周)의 일을 행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조가 정색을 하고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는 충의(忠義)를 스스로의 본분으로 삼았으니[自許], 왕이 비록 포악하고 어지럽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다른 마음을 품겠는가? 신하로서 군주를 치는 것을 혁명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진실로 덕이 없는 사람이니 감히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훗날에 장차 구실이 될까 두렵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하루만 군주가 되더라도 종신토록 주군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하물며 연릉계자(延陵季子)가 말하기를,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나의 절개가 아니다.’라고 하고 이에 떠나가 밭을 갈았음에랴. 내가 어찌 연릉계자의 절개보다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만나기 어렵지만 잃기는 쉬우며,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벌을 받게 됩니다. 심한 고통을 받는 나라 안의 사람들[民庶]이 밤낮으로 복수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권력과 지위가 중한 자들은 모두 살육되었으니, 지금 덕망으로써 공보다 위에 있는 자는 아직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공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이니, 공께서 만약 따르지 않으신다면 우리들은 머지않아 죽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왕창근(王昌瑾)의 거울에 나타난 글귀가 저러한데, 어찌 하늘을 배반하고 독부(獨夫)의 손에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씨(柳氏)가 나와서 태조(太祖)에게 말하기를, “의리를 들어 포학함을 대체하는 것은 예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의 뜻을 들으니, 저도 오히려 분기가 일어나는데, 하물며 대장부께서 어떠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직접 갑옷을 가져와서 입혔다. 여러 장수들이 부축하며 에워싸고 나와서, 날이 밝아오자 그를 곡식더미 위에 앉히고는 군신(君臣)의 예(禮)를 행하였다.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왕공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리셨다!”라고 외치게 하였다. 바삐 달려 다다르는 백성들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으며, 먼저 궁문(宮門)에 이르러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기다리는 자들 또한 10,000여 명이었다.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미복(微服) 차림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바위 골짜기로 도망쳤는데, 얼마 후에 부양(斧壤)의 백성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사.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태봉(泰封)의 임금은 사군(四郡)이 흙더미처럼 무너져 내리던 때를 만나 도적들을 평정하고 차츰 영토를 넓혔으나, 〈천하를〉 아우르기도 전에 오로지 흉폭함으로 사람들을 다스리고 간사함으로 지극한 도리를 삼고 위협하고 업신여기는 것을 긴요한 술책으로 삼았으며, 요역은 번잡하고 부세는 무거워 사람들은 피폐해지고 땅은 텅 비게 되었는데도 궁실은 그 법제가 지나치게 크고, 노역은 그치지 않으니 마침내 원망이 일어났다. 존호를 훔쳐 존엄을 자칭하고 처자를 살육하자,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고 신과 인간이 함께 원망하여 왕업(王業)을 추락시켰으니[荒墜厥緖],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짐은 그릇되게도 추대를 받아 외람되게 숭고한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뒤집어진 수레의 전철[覆車之轍]을 경계로 삼고 도끼자루를 베는 법칙[伐柯之則]을 취하여, 백성들과 더불어서 다시 시작하고, 잘못된 풍속을 좋게 바꾸며, 군신이 화합하기를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이 기뻐하며, 강과 바다가 협력하기를 태평한 시대의 경사스러움과 같게 할 것이니, 조정 안팎의 모든 백성들은 마땅히 짐의 뜻을 알지어다.”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삼가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신들이 태봉의 세상을 만났을 때 〈궁예(弓裔)가 〉 어질고 착한 이를 해치고, 죄 없는 자에게 잔학하게 하였으니, 늙은이와 어린 아이들이 슬프게 부르짖으면서 원통함을 품지 않음이 없었는데, 다행히도 이제 성스럽고 밝은 주군을 만나[遭遇聖明] 머리를 보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히 온 힘을 다하여 은혜에 보답하기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왕이 청주(靑州) 사람인 한찬(韓粲) 총일(聰逸)에게 말하기를, “태봉(泰封)의 임금은 청주(靑州)가 비옥하고 풍요로우며 사람들 중에 호걸이 많기 때문에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장차 섬멸하고자 하였다. 이에 군인 윤전(尹全)·애견(愛堅) 등 80여 인을 불러들였는데, 모두 죄가 없는데도 형틀에 매여서 끌려오고 있으니, 경이 급히 가서 풀어주어 고향[田里]으로 돌려보내라.”라고 하였다.

○왕이 청주(靑州) 사람인 한찬(韓粲) 총일(聰逸)에게 말하기를, “태봉(泰封)의 임금은 청주(靑州)가 비옥하고 풍요로우며 사람들 중에 호걸이 많기 때문에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장차 섬멸하고자 하였다. 이에 군인 윤전(尹全)·애견(愛堅) 등 80여 인을 불러들였는데, 모두 죄가 없는데도 형틀에 매여서 끌려오고 있으니, 경이 급히 가서 풀어주어 고향[田里]으로 돌려보내라.”라고 하였다.

○기졸(騎卒) 태평(泰評)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삼았다. 태평(泰評)은 경서(經書)와 역사서를 널리 섭렵하였으며 행정 실무를 잘 익혔다. 처음에 염주(鹽州)의 적수(賊帥) 유긍순(柳矜順)의 기실(記室)로 있었는데, 궁예(弓裔)가 유긍순(柳矜順)을 격파하자 태평(泰評)도 곧 항복하였다. 궁예(弓裔)는 오랫동안 복종하지 않았던 것을 노여워하여 병졸에 속하게 하였다. 마침내 태조(太祖)를 따랐는데, 나라를 세울 때에 참여하여 힘을 썼다.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이 처형[伏誅]되었다. 처음에 환선길(桓宣吉)과 그 아우 환향식(桓香寔)이 모두 〈태조(太祖)를〉 추대한 공이 있어서 왕이 심복으로 삼아 항상 정예병을 거느리고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은 재주와 힘이 남들보다 뛰어나서 사졸(士卒)들도 복종하며, 또 큰 공훈이 있는데도 정권은 다른 사람이 잡고 있으니 억울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환선길(桓宣吉)이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여겼다. 마침내 은밀히 병사들을 모아서 기회를 틈타 변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복지겸(卜智謙)이 그것을 알고 밀고하였으나, 왕은 아직 그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루는 왕이 전상(殿上)에 앉아서 몇몇 학사(學士)들과 국정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환선길(桓宣吉)과 그의 당여(黨與) 50여 명이 무기를 들고 내정(內庭)으로 돌입하여 곧장 왕을 범하려고 하였다. 왕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서 언성을 높여 그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이 자리에 이르렀으나,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천명(天命)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환선길(桓宣吉)이 왕의 음성과 얼굴빛이 태연한 것을 보고 숨겨놓은 병사들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그 무리들과 함께 달아났다. 호위 군사들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환향식(桓香寔)이 뒤늦게 도착하였다가 일이 실패한 것을 알고 역시 도망쳤으나, 추격하던 병사들이 잡아 죽였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벼슬을 두고 직무를 나누는 일은 나라를 다스릴 때 먼저 해야 하는 것이며, 풍속을 교화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데 있어서는 어진 자를 기용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진실로 벼슬이 비어있지 않다면 어찌 정치가 황폐해지는 일이 있겠는가. 짐은 사람을 알아봄이 밝지 못하여 벼슬을 살핌에 실수가 많지 않을까, 자나 깨나 걱정하는 것 이를 일삼을 따름이다. 조정 안팎의 여러 관료들이 각자 그 직무에 잘 부응한다면, 지금 시대가 잘 다스려져서, 후세가 아름답다 칭송할 것이다. 마땅히 여러 공경제관(公卿諸官) [列辟]들을 등용하고 모든 관료들을 두루 시험하여 정밀한 인선에 힘씀으로써 모두가 다 화합하게 할 것이다. 조정에서부터 외방(外方)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짐의 뜻을 알지어다.” 라고 하였다. 이윽고 김행도(金行濤)를 광평시중(廣評侍中)으로, 금강(黔剛)을 내봉령(內奉令)으로, 임명필(林明弼)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희(林曦)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진원(陳原)을 창부령(倉部令)으로, 염장(閻萇)을 의형대령(義刑臺令)으로, 귀평(歸評)을 도항사령(都航司令)으로, 손형(孫逈)을 물장성령(物藏省令)으로, 진경(秦勁)을 내천부령(內泉部令)으로, 진정(秦靖)을 진각성령(珍閣省令)으로 삼았다. 이들은 모두 품성이 곧고 일처리가 공평하고 합당하며, 창업할 당시에 추대한 공이 있는 자들이었다. 임적여(林積璵)를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능준(能駿)과 권식(權寔)을 아울러 내봉경(內奉卿)으로, 김인(金堙)과 영준(英俊)을 아울러 병부경(兵部卿)으로, 최문(崔汶)과 견술(堅術)을 아울러 창부경(倉部卿)으로, 박인원(朴仁遠)과 김언규(金言規)를 아울러 백서성경(白書省卿)으로, 임상난(林湘煖)을 도항사경(都航司卿)으로, 요인휘(姚仁暉)와 향남(香南)을 아울러 물장경(物藏卿)으로, 능혜(能惠)와 희필(曦弼)을 아울러 내군경(內軍卿)으로 삼았다. 이들은 모두 사무에 능숙하고 공무를 받들기에 게으름이 없었으며, 결단을 내림이 민첩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자들이었다. 강윤형(康允珩)을 내봉감(內奉監)으로, 신일(申一)과 임식(林寔)을 아울러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국현(國鉉)을 원외랑(員外郞)으로, 예언(倪言)을 내봉이결(內奉理決)로, 곡긍회(曲矜會)를 평찰(評察)로, 유길권(劉吉權)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삼았다. 그 나머지 사(司)와 성(省)에도 각각 낭(郞)과 사(史)를 설치하였으니, 대개 개국 초기에 어진 인재를 잘 골라 뽑아서 여러 직무를 고루 조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박질영(朴質榮)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소판(蘇判) 종간(宗偘)과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犾鈇)가 처형되었다. 종간(宗偘)과 은부(犾鈇)는 모두 간사한 말과 아첨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아 선량한 이들을 참소하여 해쳤다. 왕이 즉위하자 먼저 이들을 목 베었다.

○은사(隱士) 박유(朴儒)가 와서 알현하였다. 왕이 예를 갖추어 그를 대하며 말하기를, “다스려짐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현인(賢人)을 구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오. 지금 경이 찾아오니 마치 부암(傅巖)과 위빈(渭濱)의 선비[士]를 얻은 것과 같소.”라고 하였다. 이어 갓[冠]과 허리띠를 하사하고 중요한 기밀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왕씨(王氏) 성을 하사하였다. 박유(朴儒)는 품성이 질박하고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하였다. 처음에 궁예(弓裔)를 섬겨 원외(員外)가 되었다가 동궁기실(東宮記室)로 옮겨갔다. 궁예(弓裔)의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마침내 출가하여 산골짜기에 은거하였다가 왕께서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찾아온 것이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은 마땅히 절약과 검소함에 힘써야 한다. 백성들이 부유하고 창고가 충실하면 비록 홍수와 가뭄, 기근의 재앙이 닥치더라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소유한 내장(內莊)과 동궁(東宮)의 식읍(食邑)에 쌓여 있는 곡식들이 썩어 손실되는 것이 많으니, 내봉낭중(內奉郞中) 능범(能梵)을 심곡사(審穀使)로 임명하노라.”
라고 하였다.

○일길찬(一吉粲) 능윤(能允)이 상서로운 지초(芝草) 한 포기를 바쳤다. 자신의 집 뜰에서 얻은 것인데, 아홉 줄기에 꽃 세 송이가 피어 있었다. 왕이 내창(內倉)의 곡식을 하사하였다.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을 참수하여 저자에 내다 버렸다[棄市]. 이흔암(伊昕巖)은 궁술(弓術)과 기마술(騎馬術)이 전문이었는데[業], 이득이 되는 일을 보면 재빨리 취하였다. 궁예(弓裔)를 섬겨 술책으로써 임용되었다. 궁예(弓裔) 말년에 이르러서는 웅주(熊州)를 습격하여 빼앗은 후 그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남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이르니, 사졸(士卒)들이 많이들 도망가 버려서 웅주(熊州)는 다시 백제(百濟)의 소유가 되었다.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 염장(閻萇)이 이흔암(伊昕巖)과 이웃에 살고 있다가 그 음모를 알고는 상세히 아뢰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흔암(伊昕巖)은 지키던 곳을 버리고 스스로 찾아옴으로써 변방의 영역을 상실하게 하였으니, 그 죄가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주군을 섬기면서 평소에 정분이 있었으므로 차마 목을 벨 수가 없다. 또한 그 반역의 움직임이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으니, 그도 필시 할 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염장(閻萇)이 밀령(密令)을 내려 그를 감시할 것을 청하자 왕이 나인(內人)을 보내어 염장(閻萇)의 집에 가서 장막 속에서 몰래 엿보게 하였다. 이흔암(伊昕巖)의 부인 환씨(桓氏)가 뒷간에 와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오줌을 눈 후에 길게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우리 남편의 일이 만약 잘 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겠구나.”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들어갔다. 나인(內人)이 보고를 아뢰자 마침내 이흔암(伊昕巖)을 옥에 가두니, 모두 자복하였다. 백관들에게 그의 죄를 논의할 것을 명령하자 모두들 말하기를,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직접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평소에 흉악한 마음을 길러 스스로 죽을 죄에 빠지게 된 것이다. 법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니, 사사로운 감정으로 어지럽힐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흔암(伊昕巖)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참수하고 그 집안을 적몰(籍沒)하였으나, 그의 당여(黨與)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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