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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 元年 七月

작성자浮雲|작성시간26.06.14|조회수16 목록 댓글 0

○가을 7월. 조서에 이르기를,
“태봉(泰封)의 임금은 백성을 내키는 대로 다루어 오로지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것만을 일삼으면서 옛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1경(頃)의 땅에서 조세(租稅)를 6석(碩)이나 거두고 역(驛)에 소속된 호(戶)에게 실[絲]을 3속(束)이나 부과하니,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밭갈이를 버려두고 베 짜기를 그만둔 채 줄줄이 유망(流亡)하게 하였다. 이제부터는 조세를 부과함에 마땅히 천하의 공통된 법을 쓰는 것을 항례(恒例)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광평시랑(廣評侍郞) 순필(荀弼)이 병으로 인해 관직을 그만두니, 병부경(兵部卿) 열평(列評)으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하였다.

청주(靑州)의 영군장군(領軍將軍) 견금(堅金)과 부장(副將) 연익(連翌)·흥현(興鉉)이 와서 알현하였다. 각각 말 1필을 하사하고, 비단[綾帛]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처음에 왕이 청주(靑州)사람들은 변덕이 심하니 일찍이 대비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이에 그 고을 사람인 능달(能達)·문식(文植)·명길(明吉) 등을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다. 능달(能達)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다른 뜻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문식(文植)과 명길(明吉)은 같은 고을 사람인 김근겸(金勤謙)과 관준(寬駿)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능달(能達)이 비록 다른 뜻이 없다고 아뢰었으나, 새로 곡식이 익으면 변란이 일어날까 염려된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근겸(勤謙) 등이 말하기를, “저희 고을의 사람들과 김근겸(金勤謙)·관준(寬駿)·김언규(金言規) 등 개경에 거주하는 자들은 그 마음이 서로 부합하지가 않으니, 이들 몇 명을 제거하시면 근심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살육을 그치게 하는 데에 있으니, 죄가 있는 자라도 오히려 용서해주고자 한다. 하물며 저들은 모두 힘써 의거를 도운 공이 있으니, 하나의 고을을 얻고자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견금(勤謙) 등은 부끄럽고 두려워하면서 물러갔다. 김근겸(金勤謙)과 김언규(金言規) 등이 이 일을 듣고는 아뢰기를, “일전에 능달(能達)이 고하기를, ‘다른 뜻이 없다’고 하였으나, 신들은 진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견금(勤謙) 등이 말한 바를 보니, 다른 뜻이 없음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억류하셔서 변란의 조짐을 살펴보십시오.”라고 아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얼마 뒤, 견금(勤謙) 등에게 말하기를, “지금 그대들이 말한 바를 비록 따를 수는 없으나, 그 충심을 매우 가상히 여기고 있으니, 빨리 돌아가서 뭇사람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견금(勤謙) 등이 말하기를, “신들이 〈외람됨을〉 무릅쓰고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아뢰었다가 도리어 남을 참소한 것처럼 되었음에도 죄라고 여기지 않으시니, 그 은혜가 이보다 클 수 없습니다. 돌아간 후에는 성심으로써 나라를 도울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한 주(州)의 사람이라도 사람마다 각자의 마음이 있는 것이니, 만약 변란이 일어난다면 제어하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관군(官軍)을 보내어 성원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옳다고 여겨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와 유금필(庾黔弼) 등으로 하여금 병사 1,500명을 이끌고 진주(鎭州)에 주둔함으로써 대비하게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도안군(道安郡)에서 아뢰기를, “청주(靑州)가 몰래 백제(百濟)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마군장군(馬軍將軍) 능식(能植)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반역하지 못하였다.

○직예(職預)를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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