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수상자 : 송용식
수상 일시 : 2025년 12월 05일 오전 11시
수상 작품 : 마음자리를 찾아가는
마음자리를 찾아가는
산은 그대로인데 산을 찾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대부분 건강관리를, 건강을 찾기 위해 가는 것 같다. 오십 후반부터 매년 지리산을 종주하는 후배 몇몇은, 몇 살까지 종주하게 되는지 내기라도 할 양인 듯 수시로 산을 찾는다. 선명한 꿈이 있는 등산이다. 베토벤을 좋아하는 지인은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러 산에 간다고 했다. 나더러 바람 부는 가을 산의 낙엽 부딪히는 소리를 그냥 상상으로 들어 보란다.
강화도 팸투어를 갔다가 하룻밤을 함께 묵게 된 룸메이트는 또 다른 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직장(直腸)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되자 건강을 찾기 위해 선택한 것이 등산이었다고. 꾸준히 산을 오르면서 잃었던 건강을 다시 찾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산마다 다른 이야기와 표정이 보이더란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남한의 모든산에서 경험한 것을 수필로 써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리고는 ‘대한민국이 엄선한 100대 명산’만을 골라 책으로 묶었단다. 건강을 찾기 위해 시작한 등산이 전문가가 되고 자기 책을 갖는 작가로 연결되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가 산에 미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산에 미칠 수 없는 노릇이니 자기만의방식과 속도로 산을 마주하면 될 것이다.
내가 산을 찾는 것은, 내 삶이 허허로울 때 마음 내려놓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높은 산을 찾는 것도 아니다. 헉헉대고 땀 흘리며 정상을 향하는 등산객을 보면 싱싱한 에너지를 느끼면서도 그러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 나이 될 때까지 남한 3대 명산 어느 한 곳도 가 본 적이 없다. 그 대신 산을 대하는 나만의 태도는 있다. 반나절 산행이다.
반나절에 가까운 산을 다녀오는 습관은 대학시절부터 생겼다. 새벽에 어머니가 아궁이에 연탄을 갈아 넣고 뚜껑 덮는 딸그락 소리에 잠을 깬다. 긴 기지개를 켜고 집을 나선다. 증심사 옆을 지나 무등산 중봉 바람재에서 숨을 돌리는 시각. 동이 터오면서 출렁이는 억새밭 이슬이 윤슬처럼 반짝인다. 붉은 해가 솟아오르는 순간은 거대한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것 같았다. 다시 세인봉 쪽으로 내려와 약사암에서 유부초밥으로 아침을 때운다.
동트기 전 무등산 초입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산길 풀잎에 얹힌 이슬까지도 나의 숨소리를 기억하는 듯했다. 바짓단 젖는 줄 모르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여러 상념이 순서 없이 들고 난다.
생활이 오그라들면서 말 수가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 그 눈빛에서 일찍 떠난 지아비의 원망을 읽는 것이 괴로웠다. 사랑을 앞에 두고 다가서지 못하는 결핍과 열등의식. 시(詩)는 이슬처럼 맑아야 한다는 절대 순수가 두려웠다. 새벽 산길은 아파서 외로운 청춘의 길동무였다. 집에 돌아오면 10시 무렵, 하루의 절반이 다른 일상으로 남았다.
서울 생활에서도 반나절 산행은 계속되었다. 딱히 집에서 나서는 시간이나 시기를 정해 놓은 건 없다. 무언가 선택할 일이 있거나 일이 의도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 무력감에 빠지거나 가슴이 허허로울때면 가까운 산을 찾았다. 혼자 걷는 시간을 좋아하는 성격도 한몫한 것 같다.
“나 산에 다녀 올게.” 하면 익숙하게 물병 하나, 초콜릿 몇 개, 오이와 사과 몇 조각을 조그만 색(Sack)에 챙겨주는 아내. 속으로 ‘이 남자 또 뭘 생각할 일이 생겼나 보다’ 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대모산을 거쳐 구룡산을 오른다. 등산 애호가들은 그것도 산이냐며 산책 코스쯤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내 체력과 오고 가는 시간이 나에겐 딱 맞다. 정상에 이르러 잠깐 쉬고 있으면 산 비둘기 몇 마리가 내 앞에서 고개를 주억거린다. 빨리 모이를 달라는 몸짓이다. 생각의 찌꺼기를 던져주면 부지런히 쪼아 먹는다. 머릿속 헝클어진 생각의 창고가 정리되면서 가지런해진다. 산에서 내려와 국수에 막걸리 한잔을 곁들인다. 일의 실마리가 보이면 느긋한 여유까지 생긴다. 그날 오후는 또 다른 내시간이다.
돌아보면 혼자 가벼이 다녀오는 산 같지만, 산은 내 삶의 마음자리를 찾는 일이다. 힘들었던 가정사, 기술사와 박사 과정의 긴 여정을 산길을 걸으며 견뎌냈다. 숲은 허투루 살지 말라며 경계심을 키워주었다. 산을 오르면서 꿈의 무게를 가늠하고 내려오면서 단순화시켰다. 산에서 길을 잃고 산에서 길을 찾았다.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이라는 것도 산에서 배웠다.
아내가 많이 아프다. 그런데도 산에 다녀온다고 하면, 이것 저것 챙겨주면서“오후에 깍두기 담아야 하니 막걸리 적당히 마시고 와.” 한다.
앞으로도 나의 반나절 산행은 계속 이어지길 바라지만, 남은 삶 남은 반나절은 아무래도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으로 채워질 것 같다.
수상 소감
꼭 받고 싶었던 상
여름 가면 가을 오고 가을 가면 겨울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올해는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겨울이 성큼 와 버렸네요. 내 글처럼.
수필을 아포리즘으로 말해 보라 하기에 ‘겨울 숲에서 우는 바람 소리’라고 답했습니다. 저에겐 긴 겨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원로 수필가 한 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요즘 젊은이들이 우리 수필가들이 쓴 수필을 읽고서는“세상 근심 걱정 하나 없는 사람들의 글”이라고 했다는 말을. 어디에 시선을 두고 무엇을 써야하는지 방향이 보입니다.
꼭 받고 싶었던 상, 언제나 받게 될까, 받기는 할까 했었는데 너무 빨리 현실이 되었네요. 기대 했을 분들에게 미안합니다.
결핍과 열등감의 출구를 만들어 주신 심사위원님과 살아오면서 기꺼이 어깨를 내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송용식 songys819@naver.com
2016년 <한국수필>, 『문학시대』 시(2019)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저서: 에세이집 『놓았던 손 다시 잡으며』. 공저 수필집 『나의 꿈 나의 인생』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