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의 기록 앞에서 나의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한때는 무엇이든 써야만 견딜 수 있을 것 같던 시절이 있었다. 20여 년간 매일의 감정을 눌러 담았던 습작 노트들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펼쳐 보니, 문장들은 가시가 되어 가슴을 콕콕 찔렀다. 나는 과거를 붙들지 않기로 했다. 불을 붙이는 내 손은 떨렸다. 노트가 타는 냄새는 내 가슴을 태우는 냄새이듯이 벌건 불꽃 속에서 타들어간 것은 노트만이 아니었다. 오래 묵혀 둔 마음 또한 함께 재가 되었으리라. 스무 권이 넘는 노트가 한 장 한 장 사라질수록, 내 마음에는 묘한 평안이 찾아왔다. 기록은 때로 추억이라는 이름의 위안이 되지만, 때로는 지나온 고통을 박제해 현재를 옥죄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과거의 문장 속에 머무르기보다,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와 시간을 통과하기로 했다.
ㅡ 「기록의 항해」 중에서
ㅡ 김혜란 기행수필, 『엄마의 발자국, 등대』, 북나비, 2026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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