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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돌강단

요한계시록(17)

작성자벽돌공|작성시간26.06.08|조회수37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7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주일경독시간 인도: 안기철 집사
▶시편찬송 42장(21편1-7 A) 다같이
▶경 독 열왕기하17장 마가복음11장 다같이
▶합심기도 다같이
① 성령과 말씀의 예배 /설교자와 회중을 위해
② 성찬의 예배/ 은혜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예배를 위해
③ 믿음과 순종의 예배/ 배움(교리)과 실천(삶)이 있는 예배를 위해
* 예배부름과 축언
▶목사;“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
▶회중;“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 송영(시편찬송) 106장(시50:1-6,14-15절
* 사도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23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자신을 진실로 죄인으로 인식하며, 겸비하게 그리스도 안에서만 전적으로 사죄의 은혜를 기대하는 그대들에게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사죄를 선언하노라. 아멘”
* 시편찬송 14장(시6편A)
헌 상 안기철 집사
목회기도 담임목사
말씀의 강설 계1:9-16 ①
“요한계시록 강해”(17)
공동기도 다함께
주의만찬 계7:13-17 다함께
* 찬 송 찬송가445장 다함께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미리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 오후 모임: “성경과 교리”
교리와 함께 읽는 베드로전서 본문연구(83)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2부 인간의 구원
제23주일
제59문: 이 모든 것을 믿으면 당신에게 어떠한 유익이 있습니까?
답 :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자가 되며 영생의 후사가 됩니다.
제60문: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질 수 있습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범하였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지키지 못했으며 아직도 죄로 향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고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가치한 나를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치 내가 죄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순종하신 것을 내가 순종한 것처럼 대하시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의와 성결을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마음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것 뿐입니다.
61문: 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질 수 있다고 말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내 믿음에서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와 성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성찬본문 / 계7:13-17

『 (계7:13-17)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

 

▣설교본문 계1:9-16 ①

(계1:9-16)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

 

▣지난 주 말씀 반추하기

현대복음주의는 복음을 과거시제(완료적)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삶은 이 과거완료시제로부터 연속되는 성화역정의 현실로 이어지지 않는 경향이다.‘종말은 창조를 앞선다’는 명제는 믿음이 과거지향적이지 않고, 영원한 현재로서의 미래(종말)를 지향해야 함을 강조한다.

①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계시록의 서문이 복음의 완결을 선포할 때 그 결론을 그리스도의 강림과 심판으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다(계1:7) 믿음은 약속을 신뢰하고, 사랑은 보상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은 언제나 소망에 잇대어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영원한 현재가 되시고 또한 오시고 계신다.(계1:8)‘구름을 타고 오심’은 우주적 종말로서의 재림이 아닌 예루살렘 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임박한 강림을 지시한다.‘재림’으로 번역된 ‘파루시아’는 ‘강림’, ‘임함’으로 번역해야 하며,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 연속적이며 마침내 최종적인 강림(the parusia)을 지향한다. 교회는 공적회집의 시간에 그리스도의 언약적 강림을 경험한다. 또한 역사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강림(승천한 그리스도의 오심)은 현재화된다.

② 예루살렘 멸망, 우주적 심판의 전조 - ‘구름을 타고(함께) 오심’은 언약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대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적인 강림을 표현의미한다.(사19:1-2) 이것은 모든 세대의 교회에게 단절과 틈 없는 소망과 위로를 준다. AD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우주적 재림 사이에 그리스도의 강림(파루시아)은 교회를 향해 반복적이고 연속적으로 오시고 계신다. 예루살렘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강림은 대제사장들에게(마26:64), 감람산 강화안에서 예언되었다.(마24:3;24:1) 특히 원한 깊은 과부의 기도비유는(눅18:3)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는 맥락(눅17:34-37)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박해받는(유대주의와 로마제국에게) 지상교회의 미음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믿음에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1세기(70년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상 가장 순전하고 총체적 구속의 시제를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믿는 자들(요20:29)이었고, 그리스도의 역사적 강림(예루살렘멸망)을 목격한 자들이었다. 이후 300여년 간의 대박해기를 견디고 로마를 복음으로 전복하는 저력을 보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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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서문을 돌아보며

 

계시록의 서론에서 요한은 계시의 수납자요 전달자로서 그가 증언하는 복음의 요체를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시작하는 이 서문은 그리스도의 종인 사도요한에게 위임된 공적인 권위를 근거로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삼위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관해 증언하고, 교회의 정체성과 소명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들의 신앙과 삶의 토대는 삼위하나님에 관한 사도적 진리위에 세워져야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건전한 교리와 선언적 고백을 갖게 합니다. 이른바 공교회적이고 사도적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배우고 믿고 고백하는 것은 지상교회의 믿음의 진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의 정도(正道)가 아니라 정도(程度)에 관심을 더 두곤 합니다. ‘신앙의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성의 문제’로 건너뛰는 것입니다. 현대복음주의 교회들 안에서는 예수를 잘 믿는 것에 관한 수많은 담론들에 관심을 갖지만, 예수를 바로 믿는 것에 관한 주제들에는 냉담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고루할 뿐 아니라 곤란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관한 중추교리는 부담스러운 논쟁을 피할 수 없게 하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직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는 회피하거나 짐짓 못 본 척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마18:1) 그러나 주님의 답은 누가 큰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누가 천국에 들어가느냐에 관해 말씀하십니다.(마18:2-3) 우리가 계시록의 서문을 16주에 걸쳐서 살핀 이유가 이것입니다. 복음은 지루할 수 없고 익숙해지지 않는 낯설음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나 이 세상에 관한 관심사를 압도하는 삼위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수반하고, 마침내 ‘나라와 제사장된 소명’에 관한 책임과 의무를 도전합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신앙, 삶,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들은 계시록의 서문이 선포하는 이 진리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이전에 우리의 믿음의 진위를 점검해야 합니다.

 

☞고대일치신조 중에 하나인 아타나시우스 신조은 삼위일체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을 구원을 받는 참된 신앙의 요체라고 정의하며, 이를 ‘신실하게 믿지 않는 자에게 구원은 없다!’고 단언합니다.1)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참여하는 믿음

 

자, 사도가 계시록의 서문이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객관적이고 사도적인 진리를 선언한다면, 이제 계시록의 본론을 시작하면서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의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요한은 자신을예수의 환난나라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 ‘환난과 나라와 참음’(th'/ qlivyei kai; basileiva/ kai; uJpomonh'/)은 모두 한 관사(th)에 의해 지배되기에 ‘예수의 환난과 예수의 나라와 예수의 참음이라고 번역되어야합니다. 환난과 나라와 참음은 한 단위로 묶여 있고 경험적으로 연속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환난’은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또한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한 ‘예수의 참음’에 참여하는 여정이 필수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교회를 왕 같은 제사장, 곧 예수의 지상적 생애와 소명가운데로 동일하게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생애와 운명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참여하는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나라와 제사장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참여하는 것이 사도의 숙명이거나 소명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인 소명이며 경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는 ‘고난’을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표지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2)

교회환난나라참음
에베소수고(2:2)거니시는 그리스도(2:1)참음(2:2)
서머나사탄의 회와 환난(2:9)죽음을 다스리심(2:8)죽도록 충성하라(2:10)
버가모사탄의 보좌와 죽임
(2:9,13)
양날 선 칼로 다스림(2:12)순교자 안디바(2:13)
두아
디라
큰 환난
(2:22)
철장으로 다스르심(2:27)참음과 굳게 잡음
(2:19,25)
사데죽은 교회
(3:1-2)
일곱 영으로 다스리심(3:1)참지 못하여 영적으로 죽음(3:1)
빌라델비아사탄의 회의 위협(3:9)다윗의 열쇠로 다스리심(3:7)인내의 말씀(3:10)
라오디게아곤고함
(3:17)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림(3:21)미지근하여 참지 못함
(3:16)

▶계2장부터 시작되는 일곱교회에 대한 편지문에는 이 세 가지 주제가 뚜렷하게 반복됩니다.(송영목, 계시록)

일곱교회의 편지에서 묘사되는 교회의 다양한 현실들을 관찰해보면 교회가 당하는 환난과 그리스도의 통치와 교회의 인내의 다양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환난은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박해뿐 아니라, 도덕적 위선, 경제적 결핍, 그리스도를 섬기는 많은 수고들, 갖가지 삶의 괴로움도 예외가 아닙니다. 빌라델비아교회처럼 극빈한 현실을 견디는 것,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요함이 주는 안일함을 저항하는 것,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를 힘을 다해 견지하는 것, 참된 교리를 배우고 거짓 교리를 끊임없이 분별하는 것, 믿음과 행위의 불협화음과 자기모순을 치열하게 성찰하고 교정하는 것등 교회는 그리스도와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삶‘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인내’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환난의 현실과의 투쟁과 싸움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이 환난을 견딤으로서 그분의 나라 곧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들어가며,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교훈은 요한이 본 그의 첫 번째 환상에서 두드러집니다. 요한은 촛대 사이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그분을 아주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인자’(The Sun of Man)라는 표현은 메시야 에 대한 묵시적 칭호(단7:13-14)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고난 받으시는 여호와의 종을 의미하는 다면적인 칭호였습니다. 중요한 요점은 사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실 때 그것은 주로 자신의 비하를 강조하시고(마8:20;막10:45) 또한 자신의 메시야됨을 감추시는 호칭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교회는 ‘인자’라는 호칭 속에서 비하의 상태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셨던 그리스도의 지상적 생애와 십자가의 승리를 고백했습니다.

▶(요0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사도 요한은 지금 환상 중에서 지상의 예수의 실루엣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분은 승천하시고 왕좌에 앉으신 승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촛대 사이에 서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 곧 지상의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시는 모습은 요한에게 낯설지 않은 ‘인자되심’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9:4-5)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주님은 박해받는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마치 지상에 그리스도께서 ‘인자되심’으로 계셨던 때처럼, 여전히 지상의 고난 받는 교회와 함께 고난 받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땅을 떠나 거기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여전이 ‘인자’로서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물론 인성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지만) 요한이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을때, 그분은 지상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하는 ‘인자같은 분’이셨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으신 분’이라고 묘사함으로 지상교회가 마치 지상에 계셨던 그리스도와 동일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자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싸우고,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교회의 지상적 현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요한과 그의 공동체는 지금도 예수의 나라에서 함께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상하는 나라와는 달랐습니다. 환난을 신실하게 견딜 때에만 이 나라에서의 통치가 시작되며 또 지속됩니다. 환난을 신실하게 견디는 것은 현재 예수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수단입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단지 신하에 불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동참하는 자’라는 말은 환난을 견디는 데서만 아니라 환난 중에 왕 노릇하는 데 있어서도 성도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상식을 반하는 방식, 곧 고난을 통해 일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낯선 일(Alien Work)'이라고 말하며, 그분을 ‘가면(Mask)’을 쓰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지상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답습하고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계0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고난, 참된 믿음의 시금석

 

그러므로 바울은 요한과 동일한 영으로 말합니다.

▶(딤후01:0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마치 모든 빛은 존재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십자가와 고난, 자기부인과 옛 사람의 죽음, 인내와 견딤을 가르치지 않는 복음이라면 그것은 단연코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루터는 그의 십자가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고난은 신앙의 변두리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가장 결정적인 표지라고 말합니다. 고난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거짓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하시면서 ‘말씀으로 인해 환난과 박해가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3:21)

그렇다면 왜, 복음은 언제나 환난과 시련을 수반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결을 고백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삶은 환난과 시험의 연속인 것입니까? 왜 요한은 믿음을 인내라는 말로 달리 부르고 있는 것일까요?

▶종교개혁자들은‘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하는 복음의 중추교리를 회복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믿음을 칭의를 얻는 조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개혁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수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구원의 은덕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참여하는 권리(교제)를 부여합니다. 칭의와 양자됨은 객관적인 구원의 은혜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전가의 방식으로 선언되는 은혜입니다. 반면 성화와 견인의 은혜는 주관적으로 체화되는 구원의 은혜로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참여함으로 획득되는 은혜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은혜는 그 성격상 구분하지만, 본질상 동일한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고전1:30)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복음이 가져오는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의 자녀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서 허락된 유익하고 필수적인 영적 훈련"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신자는 4가지 유익을 얻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뿐 아니라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교제(Fellowship)를 나누게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분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고난의 쓴맛을 달콤하게 바꾸어준다."

 

둘째, 자기부인(Mortification)의 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될 때까지 신자는 자아를 신뢰하지 않고 본성적 교만과 정욕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를 기대하게 합니다.

 

셋째, 신자의 모든 소망을 하늘에 두도록 마음을 들어올리십니다. 묵상(Meditation)은 소망의 되새김질입니다.

 

넷째는 신자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Test)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해 욥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의 승리를 입증하셨던 것처럼 신자는 고난을 통하여 그의 믿음과 순종의 신적인 영광을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각성시킵니다. 신자의 믿음은 부패하고 교만한 인간자신의 본성에 쉽게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요. 은혜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은 영원한 파멸에 이르는 것입니다. 고난은 은혜의 달콤함을 탐하도록 우리의 영혼을 자극하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를 이끌어가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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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 이전에 먼저 이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2)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순결하게 지키지 않으면, 틀림없이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이다. 3) 이 신앙이란 다음의 것들이다. 삼위(三位)자체가 일체(一體)이시고, 일체(一體)자체가 삼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 44) 이것이 교회의 참 신앙이며, 이를 신실하게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아멘.

 

2) 루터는 《교회와 공의회에 관하여》(1539년)에서 ‘고난’을 참된 교회를 알아볼 수 있는 7가지표지(말씀/세례/성찬/권징/수임/공예배/고난) 중 하나로 '십자가의 성례'라고 말한다.

 

 

▣ 시편으로 기도하기!(피터 버미글리)

시편29편

1. 오 하늘 아버지시여,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름 받고 또 실제로 자녀가 되기까지 인도함을 받은 우리들 모두가, 본질적으로 당신에게서 나온 그 결과들을 보고서, 당신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멸시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그것들은 너무나 탁월하고 경이로우므로, 그것들을 살펴보는 자들에게 당신의 영광과 위엄의 증거들을 공급해 줍니다. 당신이 소나기의 구름과 번개를 지신과 폭우를 합당하게 내려 보낼 때에, 아무리 높은 산이나 나무라도 격하게 흔들리며, 모든 동물들도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 하나님, 오직 우리들만이 이런 당신의 강력한 능력에도 눈 멀고 귀를 막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악들에서 비롯된 이런 큰 무지를 당신의 선하심으로써 긍휼히 여겨 주옵시고, 우리가 마침내 그 죄악들에서 벗어날 때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찬송을 영원히 당신께 돌려드리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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