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올려주세요

제23주, 요한복음 6:60-71, 예수님을 떠난 사람 남은 사람

작성자김응환|작성시간26.06.07|조회수57 목록 댓글 0

일시 : 2026년 6월 7일(제23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요한복음 6:60-71

제목 : 예수님을 떠난 사람 남은 사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7-4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마시고 자신의 살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자 사람들은 매우 난감해 하였습니다. 어찌 유대인들이 식인종도 아닌데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겠습니까?

예수님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고 의아해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는 이유만으로도 예수님을 떠났다면, 이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본문 61-62절에서 제자들을 책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무슨 말씀일까요? ‘이 가르침이 너희 마음에 걸리느냐? 만약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도 마음에 걸린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은 이들에게 더욱 더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더라면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너무 몰랐고, 이는 이들의 관심이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도무지 우리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판단과 달라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분명히 인간적인 계산으로 보면 그만 가는 것이 맞는데 말씀의 인도하심은 계속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울 때, 말씀이 걸림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말씀대로 살기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척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길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라야 할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 길은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려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꽁꽁 묶여 잡히게 될 것이란 예언을 듣고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그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본문 6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여기서 말하는 ‘육’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어둠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영’은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는 빛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을 영이며 생명이라고 하신 것은 앞서 말씀하신 살과 피의 가르침이 단순히 육체적인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가르침이셨습니다.

6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이는 제자들 중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약 1년 뒤 미래의 사건 즉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 또한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시면서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65절 말씀을 보세요.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구원받은 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이라는 사실을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도 떠났고, 심지어 제자들 중에도 많은 이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보시며 “너희도 가려느냐”(67절) 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대답을 주목해 보십시오. 68-69절입니다.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베드로는 자신과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세 부류의 무리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말씀이 어려워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웃었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자신들의 삶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비웃으며 떠났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중간에 돌아선 자, 즉 예수님을 떠나는 자와 배신하여 파는 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소원과 욕심을 이루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럴 계획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따르던 시간을 보상받기 위하여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임을 믿었으며,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으며 예수님의 곁을 지킬 것을 다짐했습니다. 68 ...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성도는 말씀이 요구하는 삶이 내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삶과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떠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요?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가룟 유다처럼 내 탐욕을 위해 예수님을 배신해서도 안 됩니다. 베드로처럼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예수님의 곁을 지켜야 합니다. 이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의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며 따라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이런 내용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떠난 사람 남은 사람”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오늘날은 모든 것이 가치로 계산되는 시대입니다. 정치도, 정의도, 음악도, 시간도 돈으로 환산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돈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실상 은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려고 합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2008년 1월 7일 경기도 이천의 냉동 물류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40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중경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망자 40명 중 13명은 한국에 와서 일하던 조선족들이었습니다. 그때 보상가가 1인당 2억 4천만 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그 보상금액을 가지고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내용인 즉 죽더라도 한국에 가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알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가치는 돈으로 계산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종종 사람을 돈으로 팔고 사는 모습이 나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20에 팔아버렸습니다(창37:28). 그 당시 성인 노예가 은 30세겔에 매매되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은 20세겔에 팔린 것은 요셉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모르고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3년이나 따라다니며 보고 배운 제자였는데 참 아쉬운 사람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떨까요? 표현이 좀 거친데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짜리로 여기고 있습니까? 그래도 가룟 유다는 은 30이라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보다도 더 싼값에 수시로 예수님을 팔아먹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아니 목사님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팔아먹나요?” 할지 모릅니다. 입으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팔아먹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혹시 예수님을 만나는 거룩한 주일에 친구들 아들 딸 결혼식 참석하는 만큼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또 회사에서 잘릴까봐 두려워 주일에도 근무하라고 하면 찍소리 못하고 회사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가치로 평가하는 것일까요? 입으로는 주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내게 예수님의 진정한 가치는 얼마일까요?

  본문에 보면 정말 아쉬운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 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 예수님을 떠나간 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가치 계산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6장의 시작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황당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48-51을 보겠습니다.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이런 말씀을 하시자 결국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는 혼란이 오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줄 알고 따랐는데 자꾸 죽는다는 소리를 하고 엉뚱한 이야기만 하니 흔들렸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본문 6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결국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들도 분명 제자들이었습니다.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왜 그들은 예수님을 떠났을까요? 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 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중도 탈락한 것일까요?

  본문을 보면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님을 포기하고 되돌아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주일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 끝까지 충성과 헌신을 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래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누리기를 바랍니다. 왜 누구는 떠나가고 누구는 남은 것일까요?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

무리들 중에 예수님을 떠난 자들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떠난 자들’은 보통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 같은 가르침을 듣고 제자 중 일부가 떠나가는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떠난 자(믿음이 약해 물러난 자)와 남은 자(베드로 등 끝까지 따르는 자)를 대비해, 영적 연합과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왜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떠났을까요?

첫째,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렵다며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포기하였습니다. 60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을 듣고 어렵다고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어렵도다” 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속뜻은 “불쾌하고 싫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들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은 당장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장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고, 당장 압박받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계산과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도구로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과 가치관이 자신들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보면서 흥분하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다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다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이런 기적을 볼 때 바로 이 분이야말로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던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 하에서 해방시켜주고, 자신들의 경제적인 빵의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성취하여 보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가까이 갈수록, 예수님의 생각과 방법이 자신들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씩 둘씩 예수님을 떠나간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 어떤 기대를 하고 나오셨습니까? 그 기대치가 현실적인 것이거나 이 세상 것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래전 어느 선교사 간증이 생각납니다. 선교사 부부가 선교지로 가기 전에 자녀 문제로 고민을 하였습니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서 세계적인 성악가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부부가 자기 어린 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예은이는 무엇을 시켜줄까?” 그때 딸이 “아빠, 저는 짜장면 시켜주세요. 짜장면이 좋아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모가 말하는 차원과 아이가 말하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육적인 차원의 믿음은 영적인 차원의 믿음에 대하여 이해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설교가 종종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설교할 때도 그렇습니다. 십자가 설교, 부활 승천 재림설교를 하면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그러다가 건강, 자녀교육, 축복 이런 이야기 하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이런 믿음은 아직도 어린아이 믿음입니다. 육적인 차원의 믿음은 영적인 유익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쉬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은 전혀 쓸모가 없다.” 여기에 아멘 할 수 있습니까?

  성숙한 믿음은 말씀에 기초를 둔 신앙입니다. 그러나 미숙한 믿음은 말씀보다는 인간중심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평가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본질보다는 외적인 것에 상처받고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납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예수님이 누군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많은 사람 중에 하나인 랍비로 보았거나 위대한 선생님 정도로 보고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의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각종 기적의 배후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면 그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님, 랍비정도로 알고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16:16절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16:16-19절을 보겠습니다.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아마 베드로도 엉겁결에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가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인간적인 정에 얽매여 엉뚱한 소리를 했다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자 ‘그리하지 마옵소서’ 라고 했다가 사탄이라는 책망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말 한마디에 졸지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른 믿음의 고백을 하면 놀라운 복이 있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주님의 길을 가로 막으면 사탄이 되기도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각종 기적을 보세요. 그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을 보세요. 요한복음 2:11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제대로 믿게 하기위해 각종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마지막을 보세요. 30-31절,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의 2가지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다면 본문에 예수님을 떠나간 제자들처럼 비극적인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무조건 아멘하여 죽어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남은 사람들

본문 6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런데도 무리들 중에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67-69절을 보겠습니다.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루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남은 사람들, 남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는 사람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남았습니다.

남은 자들이 예수님의 진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남은 자들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제자들, 다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는데도 왜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첫째,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이 믿어졌기 때문. 성도는 이것을 먼저 정립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알고 나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믿고 나서 알게 됩니다.

자녀가 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를 때에 알고 믿을까요? 믿고 아는 것일까요? 어느 자녀도 부모에게 ‘당신들이 내 아버지 어머니임을 증명해 보세요. 호적 등본을 보여 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 어머니로 믿습니다. 그리고 따릅니다.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인 것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알고 믿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6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믿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알고 믿는 것은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믿고 아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생아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도 없이 난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에 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회교도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기독교 성도들은 예수님을 누구로 믿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믿어지십니까?

  베드로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5:5절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절). ‘주’(큐리오스) 라는 말은 ‘주인,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생명의 절대적인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죽어도 예수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떠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싫어서 떠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몸이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습니다. 안 좋을 때는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싫어서 떠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이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인 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졌기 때문. 예수님께서 남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그때 베드로의 대답이 고백이 무엇입니까? 68절을 보세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잘 보세요. 분명히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믿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의지나 결단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 그리고 그 말씀을 믿으라. 그래야 네 믿음이 세워지고 건강한 믿음이 된다.’

그래서 성도는 설교를 자주 들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한 달만 성경 안보고 설교 안 들으면 그 마음속에 세상 잡초가 가득해 집니다. 왜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들리십니까? 이해가 되고 귀에 들어옵니까?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이해가 안 되고 귀에 들어오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들어야 합니다. 듣고 들으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십니다. 요한계시록에 자주 쓰이는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입니다.

세상 사람도 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귀는 그냥 귀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려오는 귀입니다. 그러면 믿어지고 그러면 깨달아집니다. 말씀이 믿어지니 순종하고, 말씀이 믿어지니 따라가게 되고 말씀이 들리니까 끝가지 남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죽는 일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은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은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떠나는 자가 아니라 남은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몰라서 떠난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