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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주, 사도행전 5:1-11, 그 죽음이 주는 교훈

작성자김응환|작성시간26.06.14|조회수95 목록 댓글 0

일시 : 2026년 6월 14일(제24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사도행전 5:1-11

제목 : 그 죽음이 주는 교훈(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고 하였습니다. 모세 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70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건하면 80까지도 살았던 모양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장수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놓고 보면 2025년 기준 100세 이상 인구는 약 8,726명이라고 합니다. 그 중 여성은 약 83%(6,336명), 남성은 약 17%(2,390명) 였습니다. 100세 시대라고 해도 100살까지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산다면 100살을 살아도 그 누구도 한번은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생을 잘 살아야하겠지요?

은혜를 나누려는 본문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교회 안에서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의 급사 사건입니다. 갑자기 두 성도가 죽은 사건입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바나바가 헌금을 하니까 그것이 교회 안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4:36-37을 보면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많은 성도들에게 은혜와 칭찬과 격려가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이런 일을 하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극을 받아서 우리도 헌금으로 인기를 얻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마음은 일종의 시기심, 질투심, 경쟁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 헌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소유를 팔아서 재산을 정리해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니 갈등이 생겼습니다. 액수가 많지 않을 때는 헌금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액수가 많아지면 쉽지 않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이 문제를 놓고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 아나니아가 그 값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아내 삽비라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땅을 판 값에서 얼마는 감추고 얼마는 헌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를 드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큰 금액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 앞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았다는 것은 교인들이 다 알았을 것인데 얼마를 숨겼다고 해도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금액의 헌금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소유를 팔아 헌금을 드린 아나니아에게 3-4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 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러자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베드로가 3 ...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 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고 말하자마자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쯤 지나 아나니아이 아내 삽비라가 남편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교회에 모임에 들어왔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징계에 들어가지 않고 삽비라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8절, “...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8절). 그때 삽비라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예, 이것뿐입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기회를 거절한 삽비라에게 9절에서 “...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삽비라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10절). 삽리라도 남편 아나니아처럼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만약에 오늘날도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하면 죽을 사람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장례식을 줄줄이 치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양심을 속일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끝내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놓고도 지키지 못할 때도 많지 않습니까?

때로는 부부가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기도 하고, 성도들끼리도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속이는 것, 거짓말로 죽는다고 하면 여러 번 죽지 않았을까요?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 번 죽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 교회의 초창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교회 안의 순결을 위한 특별한 시도를 하신 것이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리라 사건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을 보면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를 청결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교회로 유지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허용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철저한 심판, 둘째는 심한 핍박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두 가지가 바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순결하고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6년 전 이야기지만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세계가 흔들리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이러스가 호흡기를 통해서 감염이 되기 때문에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걸린 사람만 아프거나 죽으면 문제가 덜 심각할 텐데 호흡기를 통해서 감염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였습니다.

당시에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확진 환자는 격리를 시켰습니다. 사람들과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병실까지 따로 사용하게 하였고, 입원할 병원이 없으니까 집에서도 격리시켰습니다. 확진 환자가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이 되기 때문에 아주 위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시작하시면서 그런 신종플루 환자를 격리 입원시키듯이 교회를 거룩하고 순결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심판과 핍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 일이 그들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심각한 문제였지만 교회적으로 볼 때는 경각심과 축복의 사건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때문에 교회가 순결해졌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서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지옥에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다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과상자 안에 썩은 사과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썩은 사과를 좋은 사과들과 함께 놓겠습니까?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사과들의 보존을 위하여 썩은 사과를 그 상자에서 빼낼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의 보존을 위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골라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은밀하게 끝내지 않고 온 교회가 알게 하신 것은 일벌백계의 사건으로 다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벌백계’라는 말은 ‘한 사람이나 한 가지 죄과를 엄하게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을 경계함’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다루지는 않으십니다. 이렇게 다루신다면 하나님 앞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진실의 기준마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널리 긍휼을 베푸셔서 성도의 연약함을 용서하지만 진실의 기준만큼은 여전히 엄격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이것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욕심 많은 사람만의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사건이 주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내용의 말씀을 가지고 “그 죽음이 주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 주는 교훈을 세 가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 잘 보여라

성도는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과 사람의 시각은 같을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의 시각만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본다면 그들은 대단히 헌신적인 사람들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를 판값에서 얼마를 숨겼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재산을 정리했고 그 재산을 교회에 드렸다는 사실만을 알 것입니다. 그들이 드린 헌금은 값의 얼마를 숨겼어도 큰돈이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5억 짜리 아파트를 팔아서 절반을 드렸다면 2억 5천만 원입니다. 그 정도의 헌금을 했다면 굉장한 헌신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드린 금액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을 보며 그들을 칭찬하고 존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는 사탄이 가득하였습니다. 거짓말하여 성령을 속이고 교회를 기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정확합니다.

요한계시록 5:6절을 보면 사도 요한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양이신 주님은 일곱 눈을 가지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얼굴에는 눈이 일곱 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시각, 곧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눈을 가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주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도행전 3-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거나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잘 보이는데 방해가 된다면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마저 포기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 하는 성전 문에 두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그 구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걷지 못하고 구걸하던 거지에게 은과 금은 없어서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에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걷지 못하여 구걸하며 살던 그 사람에게 준 것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명령에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8절). 이 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시기한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고 하룻밤이 지난 후에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대답합니다. 19 ...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살고 싶다면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보다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잘하는 천재들이 있습니다. 미술계의 천재 중의 천재는 ‘미켈란젤로’ 라고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30대 초반일 때 로마 교황인 쥴리우스 2세로부터 12사도들의 그림을 그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일단 일을 받아들이자 미켈란젤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12사도를 넘어 창세기에 나오는 아홉 장면을 뽑아 모두 400명이 넘는 인물을 그려나갔습니다.

그림을 그린 4년 동안 항상 누워서 시스틴 성당의 천장을 그려야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꼬박 4년을 보내며 그림을 그렸고 마친 후에는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늙고 지쳤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나이 아직 37세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친구들은 이미 늙어버린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가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그린 시스틴 성당의 성화는 너무나 정교하여 실물처럼 보였습니다. 그 그림은 그림을 주문한 교황을 기쁘게 하였고 바티칸으로부터 미켈란젤로는 다른 작품을 의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라파엘을 포함한 동료 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풍을 바꾸게 하여 유럽화풍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조각과 건축양식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메겔란젤로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예술적인 재능 때문이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자세도 빼놓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시스틴 성당의 벽화를 그릴 때 어떤 사람으로부터 “왜 그렇게 어두운 시스틴 성당 구석에서,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을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미켈란젤로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하라

성도는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고 사탄이 가득하게 하지 말고 성령으로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판 돈으로 헌금하면서 베드로를 속이고 교회를 속인 것은 그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사탄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한자 성어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흔히 방해되는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보자면 좋은 일에 마귀가 역사한다는 뜻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그랬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사도행전 4:36-37절을 보면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8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그로 인해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크게 인정받고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그 사건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소유를 팔아 헌금하였다가 벌어진 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아마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처음에는 바나나의 일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소유를 팔아 헌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유를 팔아 손에 돈을 쥐자 마음에 사탄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할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사탄이 가득했습니다. 사탄이 가득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마치 컵에 물이 담겨있을 때는 맛도 냄새도 없지만, 술이 가득하면 쏘는 맛에 알콜 냄새가 나는 것처럼 사탄이 가득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먼저 성령을 소멸하고 사탄이 그 마음에 가득하니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성도가 믿음 생활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 첫 번째가 욕심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면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성도와 믿음을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욕심을 비우지 않으면 결국 멸망의 바다에 빠져 죽게 됩니다.

오래전에 터키에 유명한 여시푸라는 레슬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몸무게가 무려 200kg나 되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레슬링을 잘해서 유럽 지역에서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여시푸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최고의 레슬링 선수였던 루이스와 시합을 하여 그를 장난감 집어 던지듯 해치웠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그는 상금으로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달러를 받아가지고 가봐야 환전하는데도 복잡하니까 그 돈을 전부 금으로 달라고 한 후 허리에 둘둘 감은 큰 전대 속에 채워 넣고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바다 한 가운데 왔을 때 그가 탄 배가 그만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시푸는 그 큰 체구에 불거지도록 금이 가득 찬 전대를 둘둘 감은 채로 배에서 뛰어 내렸는데 아무리 운동선수지만 몸에 감은 금의 무게 때문에 미처 구명보트가 도착하기 전에 곧장 대서양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떠오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죽은 것입니다. 그 금만 포기했더라면, 그 금만 벗어놓고 뛰어내렸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욕심 때문에 죽었습니다.

성도의 믿음을 죽이는 것이 욕심입니다. 영적 죽음은 욕심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고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면 나타나는 증상 중에 하나가 거짓말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가득한가 마귀로 가득한가를 보려면 자신의 마음이 ‘진실한가? 거짓으로 가득한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 성령님의 역사는 약해지고 마귀의 역사는 강해집니다.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면 결국 그 마음에 마귀가 가득해서 영원한 심판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거짓말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일곱 눈을 가지신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욕심과 거짓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이 떠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죽음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선한 일에 응답하라

격언 중에 ‘악한 일에 맞장구치지 말고 선한 일에 맞장구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는 만나는 대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절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마지막에 물질 앞에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 부부는 부부간의 사이가 좋아서 문제였습니다. 악한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좋은 일에 잘 맞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소유를 팔았는데 손에 돈이 들어오니까 아나니아가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면 아내 삽비라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막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즉사의 불행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이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만 그러지 말자고 해도 살았을 것인데 서로 맞장구를 쳤습니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하면 이 부부는 코드가 너무 잘 맞아서 문제가 된 부부였습니다. 이가 나쁘면 잇몸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이 부부는 이도 나쁘고 잇몸도 나쁜 아주 이상한 부부였습니다.

좋은 교제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좋은 이야기, ‘헌신하자 기도하자 봉사하자’ 이럴 때는 힘의 집중이 일어나야 합니다. 공감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자고 하면 의견이 갈라져야 합니다. 서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아나니아가 사도들을 속이고 돈의 얼마를 감추자고 제안했을 때 삽비라가 찬성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반대했을 것 같습니까? 제가 볼 때는 삽비라가 반대를 했을 것 같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그러면 안돼요” 라고 반대를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아나니아가 삽비라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강하게 밀어붙였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 우리가 이 재산을 다 드리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 할 수 없어, 이미 말은 꺼냈으니 헌금을 해야 하지만, 다 드릴 수는 없어”라고 했을 것입니다.

보통 교회 안에서 보면 아내들의 믿음이 남편들의 믿음보다 좋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예외가 아니라면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은 믿음 있는 아내 말을 잘 듣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이 문제로 부부 싸움도 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남편이 이겼고 아내는 할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가 사도들을 속이고 성령을 속였다가 즉사하게 되어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7명 정도 모였을 때 남 욕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남 욕을 할 수 있습니다. 비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명이 어떤 사람을 욕하더라도 한 사람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라고 방어해주면 절대 그 모임이 어떤 한 사람을 매도하는 쪽으로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떤 모임이 있을 때 전체 사람들이 남을 비난하고 욕하는 모임이 된다 할지라도 자기 하나가 들어가서 “우리가 더 이상 이런 욕하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 절대 그 모임이 나쁜 쪽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도는 악에 대해서 맞장구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한사람이 들어가면 그룹 전체가 나쁜 곳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그렇게 갔다” 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것이 책임입니다. 묵인으로써 맞장구를 쳐주었기 때문에 나쁜 방향으로 나간 것이지 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해주면 절대로 나쁜 곳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담은 그런 의미에서 큰 책임이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버릴지언정 아내를 따라가면 안 되는 것인데 아담은 하와에게 맞장구를 쳤습니다. 결국 자기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인류가 죄에 빠지게 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물어보십시오. ‘나는 선한 일을 할 때에 조화가 잘되는 사람입니까? 악한 일을 할 때에 조화가 잘되는 사람입니까?’ 선한 일을 할 때 조화가 잘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저항할 줄 아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27:17절을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성도들은 좋지 않은 것의 영향을 쉽게 받습니다. 좋지 않은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되고 좋은 것은 열심히 노력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잘 안되면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열심히 예배생활과 기도생활을 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꿀 힘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3:23절에 보면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흑인이 피부를 하얗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표범이 자신의 반점을 없앨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악에 익숙한 사람들도 악을 선으로 바꿀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믿음 안에서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지만 오직 성령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선한 일에 응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게 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악한 일에 맞장구치지 말고 선한 일에 맞장구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 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승리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인생에서 승리의 길을 가려면 하나님께 잘 보이셔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선한 일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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