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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주, 로마서 2:1-11,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 사람이 보는 것

작성자김응환|작성시간26.06.21|조회수60 목록 댓글 0

일시 : 2026년 6월 21일(제25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로마서 2:1-11

제목 :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 사람이 보는 것

민수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중에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각 지파를 대표해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선발해서 가나안 땅을 정탐시켰습니다. 열두 명이 40일 동안 같이 가서 같은 것을 보고 돌아왔지만 보고하는 내용을 보면 전혀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와서 ‘우리가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면서 가나안 사람들, 즉 기골이 장대한 네피림의 후손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똑 같은 것이라고 해도 보는 눈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 사람이 보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

사무엘상 16:7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시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집에 가서 그 아들들 중의 하나에게 왕의 기름을 부으라고 하신 말씀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서 장자 엘리압을 보니 키도 크고 너무 잘 생겨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삼상 16:6)고 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경향과 달리 하나님의 사람의 내면, 즉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모가 아닙니다. 그 중심,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자주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좁은 지상의 일만을 갖고 씨름하는 사람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삶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를 얽어매던 편협한 시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55:8-9절을 보면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8-32에서 하나님은 만물을 통하여 자신을 충분히 계시하셨으나, 이방인들이 그것을 외면한 채 사악함과 방종과 완고함에 빠져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오면 바울 사도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선언입니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부하는 유대인들도 역시 죄를 지었으며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을 갖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기 ‘의’ 때문이었습니다. 곧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의롭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만 정죄하기에 급급했으며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더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6-7절을 보겠습니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할 때는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자기는 그런 불의한 일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보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으로 판단하시고 갚으신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인간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심판 집행의 기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면, 이것은 아무도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로마서의 주제와 모순된다는 오해를 낳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각각 그 행한 대로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사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시대의 행위와 신약 시대의 행위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구약시대의 행위는 바로 구원의 조건이긴 하지만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구원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반면에 신약시대의 행위는 구원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지금 바울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외적인 증거로서 나타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보다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노력하고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 그 창조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는 눈은 전지전능하신 눈입니다. 무엇하나 틀리거나 잘못 보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시는 눈은 영의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에 따라 성도는 두 가지를 스스로에게 자문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전능하시며 영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올려다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을 내려다볼 것인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성도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갖게 되면 그 인생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은 인생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불리한 조건으로서 더 이상 제압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확대시키고 그 당사자들을 괴롭히던 문제들은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둘러싼 문제를 세 가지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첫째는 시험이요, 둘째는 위탁이요, 셋째는 잠시라는 관점입니다.

축복의 통로요 은혜의 통로였던 요셉은 그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고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애굽 총리라는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기까지 13년이란 인생 시험을 견뎠습니다. 다윗도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평정하기까지는 14년의 인생 시험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나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나 하나님의 기준에선 모두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차이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는 이렇듯 사람의 방법으론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믿는 것, 그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남을 판단하는 사람’ 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율법을 지키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눈으로 이방인들을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된다’고 하였습니다(2절).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입니다.

믿음의 눈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입니다. 사람이 보는 눈,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가지면 고난 중에 인내와 소망을 가지며, 기쁨 중에도 겸손함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이 지혜롭고 영리한 것 같으나 사실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이름 없는 미물들도 천재지변을 감지합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동물보다 나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확실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내 생각을 버릴 때 하나님 생각이 떠오르고, 내 방법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납니다. 내 경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내가 보는 기준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삼상 16:7). 이런 믿음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람이 보는 것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건이나 사물, 아니면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가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보는 눈이 모두 옳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가 보는 눈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보는 눈이 언제나 옳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자기 입장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보는 것은 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1절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러므로’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로마서 1:18-32에 나오는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는 부분과 연관된 말입니다. 이제 보는 눈을 이방인에게서 유대인에게로 집중하면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사용한 접속사입니다. 1절의 서두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여기 ‘판단하다’(크리네이스)는 말은 건전한 비판이 아닙니다. 의심하고 정죄하는 측면을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율법을 준수한다는 우월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삶의 태도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즉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관점에서 이방인들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사람의 보는 눈이 얼마나 다른지 측량하거나 짐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입장이나 환경이 다르고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와 처지가 다르며 사람들의 의견과 견지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보눈 눈이 각각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정치나 경제나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면 보는 눈은 더욱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보는 눈이 다르면 생각의 기준도 달라집니다. 생각의 기준이 달라지면 행동도 달라지고 결과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보는 눈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고, 결과에 차이가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요한 12:1-11). 여기에 보면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보는 눈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보는 눈에 따라서 사건을 해석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자신의 보는 눈에 따라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주장은 지금의 세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나사로는 죽었던 자신을 살려주신 예수님을 초대해서 극진히 대접해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을 초대하면서 전혀 돈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눈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가장 큰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마르다는 오빠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차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도 모두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진수성찬도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데에 그녀의 눈이 집중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차서 잠시라도 곁을 떠나고 싶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집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관심을 끌고 싶고 예수님께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리아의 눈은 사랑하는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아주 비싸고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아 드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면 사랑에 완전히 눈이 멀고 미친 여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보는 눈은 달랐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 교회의 회계였으니 그가 보는 것은 물질적 차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이 유다의 보는 눈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라면 하루 품삯을 10만 원만으로 치면 3000만원입니다. 가룟 유다 생각에는 나도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조금만 뿌려도 향내가 진동할 터인데 그렇게 다 써버리다니 낭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사랑에 눈먼 여인쯤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들은 예수님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구경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과 나사로를 싸잡아서 죽이려는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이 사건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모두의 눈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자신의 의견도 잘 조합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관점에서 가룟 유다를 도둑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6절). 

요한의 눈으로 볼 때 가룟 유다가 도둑으로 보였습니다. 요한의 유다에 대한 감정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은 ‘유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깊은 한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을 평생 지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향유 사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보시는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표로 보았습니다. 세상의 구원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제자의 배반, 각 사람들의 보는 눈과 생각 등을 모두 알고 계시면서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일깨워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구의 눈과 같으십니까? 혹시 가룟 유다와 같은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따르지는 않으시나요? 우리가 보는 눈, 내가 보는 눈을 점검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라

그러면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가질 수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2:10은 “...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다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가지려면 육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의 생각을 따르면 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됩니다.

로마서 8:5-9절을 보면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인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계십니다.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의 싸움에서 내가 힘을 실어 주는 쪽이 이깁니다. 성령의 생각을 따르면 하나님의 눈이 보이고 그 눈으로 바라보면 승리의 길이 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육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에 채우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당했는데 어떤 사람은 감사하는데 어떤 사람은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뻐하는데 어떤 사람은 괴로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을 갖는데 어떤 사람은 낙심합니다. 이 차이가 바로 해석의 차이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서 그 일을 어떻게 해석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그 어떤 일로 마음이 곤고하고 낙심이 되어 힘이 빠져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혹 예수님을 빼고 해석한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빼놓고 인생을 해석하면 화가 납니다. 분이 납니다. 맥이 빠집니다. 침통해집니다. 연약해집니다. 예수님 없이 삶을 해석하면 피곤하고 낙심합니다.

성도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넣고 해석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해석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일이라도 예수님 없이 해석하면 그것은 공허합니다. 허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넣어 해석하면 그것은 아주 귀한 일이요 소중한 일이 됩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은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을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였습니다. 고난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교만이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었습니다. 얼굴이 포동포동 살이 찌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이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

그런데 아삽은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아삽의 관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삽이 언제 이런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성소에 들어갈 때 악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악인들이 갑자기 황폐되고 전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악인의 형통함이 한 없이 부러웠는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까 팔려가는 돼지였습니다.

돼지가 팔려가는 날을 아시나요? ‘돼지를 파는 날에는 어머니가 평소보다 더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돼지에게 먹이려고 죽을 쑤었습니다. 겨와 시래기와 콩을 넣어 한 솥 끓여 식혀놨다가 돼지를 사는 사람이 오기 전에 여물통에 부어주면 돼지는 신이 나서 꿀꿀 거리며 먹었습니다. 평소보다 두 배 세 배 많이 주었는데 그것을 다 먹고 나자 배가 빵빵해집니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돼지 장사가 큰 자전거를 끌고 와서 저울에 달아 실고 갔습니다.’

내 인생에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가 보는 눈으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들이대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때는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삶에 대한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서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우주관, 등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9:39-4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우리말에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눈으로 모든 일을 파악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이 메시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아들이요 마리아이 아들로만 보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도 너무나도 일방적인 자기가 보는 눈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들을 향해 그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는 바울의 고발에 유대인들은 환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바울은 그 예리한 고발의 칼날을 유대인을 향해 돌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신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남들을 판단하고 그 잘못을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받은 민족임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율법을 통한 자신들의 의를 한없이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남들로부터 자신이 판단을 받는 것은 매우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치 기준아래서 남들의 잘못을 판단하는 데는 너무나도 빨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고 준엄한 논고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보는 눈에서는 이방인들은 한없이 불의해 보였고 자신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여겨왔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보는 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모두다 불의한 자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그런 짓을 똑같이 해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유대인들 역시 이방인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떨까요? 우리는 다를까요?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는 얼마나 남을 판단하기에 눈과 귀와 입이 빨랐습니까? 그리고 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무딘 눈과 귀와 입을 가졌습니까? 오늘날 인간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중의 하나가 남에 대해서는 너무도 정확하게 판단하는 반면 자신에 대해서는 또한 너무도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이방인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그 죄를 밝히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바로 이 유대인의 죄를 고발했기 때문에 동족인 유대인들로 부터 그 험한 배척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또 예수님 역시 똑같은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실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엄청난 복을 받아 누리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과 인도하심은 이스라엘이 권위주의에 사로잡히라는 뜻이 아니라, 받은 그만큼 더욱 순종하고 베풀라는 하나님의 요구였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이 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의 차이였습니다.

사실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알면서도 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 놀라운 사랑을 베푸심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 것을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져버리고 오히려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던 자들과 똑같이 행한다면 오히려 더욱 큰 징계를 받아야함이 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유대인들을 향한 이 고발을 거울삼아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일을 삼가도록 해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기 보다는 그것을 교훈삼아 나의 삶의 모습을 가다듬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산에 있는 돌을 교훈삼아 나를 바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거울삼아 남을 비판하기보다는 나를 먼저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올바로 세우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너희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 네가 하는 그 비판으로 네가 비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으며, 용서하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한없이 회개의 기회를 마련해 놓고 이스라엘의 회개를 기다리셨던 그 하나님의 은총까지도 이제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이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이는 율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해 주신 증거라고 자부하던 그들에게 오히려 올무가 되어 그들의 삶을 정죄하고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게 된다는 경고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율법아래서 유대인들이 법한 이방인들과 똑같은 잘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은 먼저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자신의 보는 눈을 고수하는 완고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그 삶속에 쌓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본문 6-11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한 행위대로 보응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기본적인 사상인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2절을 함께 읽을 때에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이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선물을 제공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진리에 따라 그에 합당하게 나타나는 열매와 삶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자를 가려내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 보십시오. 그에게 향한 손가락은 하나인데 나머지 세 개는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나 자신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합니다. 남을 판단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나 역시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참 평안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 꿇고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교만함을 부리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눈물로 회개한 자를 더욱 귀하게 들어 쓰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인간의 은밀한 것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항상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와 겸손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떤 사람이 약속 시간에 늦어 과속을 하였습니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단속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깜짝 놀라 재빠르게 속도를 줄였는데 자신의 차가 지나가자 단속 카메라가 “찰칵”하며 촬영 소리를 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속도를 기준 이하로 낮췄는데 카메라에 왜 찍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은 이 사람은 약속도 잊고 다시 돌아가 속도를 늦춘 다음, 카메라가 있는 곳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단속 카메라에 자신의 차가 또 찍혔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다시 한 번 속도를 최대한 낮춘 다음 그 앞을 다시 지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또 ‘찰칵’하고 자신의 차가 찍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며칠 후 이 사람에게 고지서 석 장이 날아왔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안전벨트 미착용’

잠언 21:2절은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자신의 기준이 있고 자신이 그 기준에 맞춰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이 기준에 맞지 않을 경우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 하나님의 보는 눈은 다릅니다. ‘속도’가 아니라 ‘안전벨트 착용 여부’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입니다. 얼마나 버느냐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 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주신 재물을 얼마나 이웃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느냐 입니다. 얼마나 높은 직책에 오르느냐가 아니라 가정과 일터, 공동체에서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느냐 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착각을 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세 가지 착각과 교만에 빠져서 산다고 합니다. 젊을 때는 언제나 청춘이어서 안 늙을 것 같은 착각과 교만, 건강할 때는 자신은 아프지 않고 병이 안들 것 같은 착각과 교만, 돈을 잘 벌고 잘 나갈 때는 영원히 풍요롭게 살 것 같은 착각과 교만에 빠져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와 명예도 주님에게서 나오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보는 눈이 이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바꾸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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