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을 우리나라에서는 이태백(李太白)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이백은 당나라시대 인물로 탁월한 시인으로 마치 신선과같은 모습으로 살았다하여 천상의 태상노군(太上老君)에 비유하여 이태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안다.
이백의 가계를 살피면 서량의 황제 이고(李暠)의 9세손이라는 것 밖에 알지 못한다.
다만 노자의 후손이라는 점과 농서이씨라는 점에서 그리고 당나라 왕실과는 동성동본일 뿐 그 후손이 아닌 점은 우리와 같다
이백(리바이, 李白, 중국어 병음: Lǐ Bái, 701년 ~ 762년)은 중국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 쓰촨 성쑤이예 출생이다.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다.
생애
이백은 촉나라 쓰촨 성 쑤이예에서 태어났다.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시아에서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25세까지 고향인 촉나라에서 살면서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과 쓰촨 성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였다.
25세에 고향을 떠나 강남(江南)을 여행하였으며, 아버지의 유산을 이용하여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744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어 장안(長安)에 머물렀으나 관리의 따분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44세에 현종의 측근인 고역사(高力士)와 다투고 사직하였다.
사직 후에 낙양에서 산둥까지 두보와 함께 여행하였다.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열여섯 번째 아들인 영왕 인(永王 璘)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이백도 야랑(夜郞, 지금의 구이저우 성)에 유배되었다.
다행히 삼협(三峽) 부근까지 왔을 때에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61세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 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이백이 장강(長江)에 비치는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도 남아있어 풍류객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작품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백의 글씨
이백은 고시(古詩)와 절구(絶句)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神品)'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詩才)는 천래(天來)의 재, 즉 '천재(天才)'라고 했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또한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이다. 또한 그의 시는 매우 자유로우며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한 번에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동시대에 살았던 11세 연하의 시인 두보(杜甫)가 1자 1구의 조탁(彫琢)에 뼈를 깎는 고심을 기울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영향[편집]
서유럽에 처음으로 번역된 것은 1862년 《당 시대의 시들》(Poésies de l'Époque des Thang)이다. 영어권에는 허버트 앨런 길레스가 1901년 중국 문학사를 펴면서 처음 실렸다. 자유로우며 시적으로 영향력있던 번역은 에즈라 파운드가 일본어로 번역된 이태백 시를 중역한 것이었다.
2244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