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이씨 원류 秦國 名將 이신(李信) - 李廣의 先祖
생애[편집]
기원전 226년 왕전과 왕분은 1년 전에 일어난 시황제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연나라를 지목하였다. 이 연 토벌전에 이신이 주력을 맡았다.
기원전 225년 이신은 20만 군사를 인솔하고 초나라를 정벌하려 했으나 대패 그후 왕전장군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1년 만에 초나라를 정벌하였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 정벌전에 참가하였다.
<사기>이래 이신(李信)의 전기(傳記)는 없다.
다만 마비백(馬非百)의 <진집사(秦集史)>에서 오백여자의 <이신전(李信傳)>을 처음 썼다. 여기서 개략 이신의 생애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전기는 연도를 표시하지 않았고, 빠트리거나 와전된 것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고증을 거쳐서 진위를 구분해야 한다.
현존하는 자료에 따르면, 오로지 알 수 있는 것은 이신이 연나라 태자단을 쫓을 때 "연소장용(年少壯勇)"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구체적인 생년은 고증할 방도가 없다. 지금 고증해서 알아볼 수 있는 이신의 사적은 시황17년(기원전230년)에서 시황20년(기원전221년)까지의 10년통일전쟁기간이다.
* 시황17년(신미, 기원전230년): 내사등이 한나라를 멸하고, 한왕 안(安)을 포로로 잡는다. 그리고 그 곳에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한다.
<사기. 진시황 본기> 및 <한세가>에 따르면, 한나라는 진나라가 가장 먼저 멸망시킨 육국의 하나이다. 이후 진나라의 통일은 진전이 가속화된다.
* 시황1 8년(임신. 기원전229년), 이신은 왕전(王翦), 단화(端和)등 장군들과 조(趙)나라를 공격한다.
<사기. 진시황본기>의 이 해의 기록을 보면, "병력을 대거 일으켜 조나라를 공격하다. 왕전은 상지에서 정경으로 내려가고, 단화는 하내에서 강외는 조를 공격하며, 단화는 한단성을 포위한다"라는 기록만 있고, 이신이 참전했다는 내용은 실려있지 않다.
그러나, <사기,자객열전>의 태자단이 형가에게 한 말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지금 진나라는 이미 한왕을 포로로 잡아서 그 땅을 모조리 차지했다.
그리고 병력을 다시 일으켜 남으로 초나라를 공격하고 북으로는 조나라를 공격한다. 왕전은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장, 업을 막고 있고, 이신(李信)은 태원, 운중으로 나왔다.
조나라가 진나라를 막지 못하면 분명히 신하로 들어갈 것이고, 신하로 들어가고 나면, 그 화가 연나라로 바로 미칠 것이다." 이를 보면, 이신이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였다는 것이 명백하다.
* 시황19년(계유. 기원전228년): 왕전등이 조나라군대를 대파하고, 조왕 천(遷)을 포로로 잡는다. 연나라 태자단은 형가를 진나라로 보낸다.
<사기.진시황본기>, <조세가> 및 <자객열전>에 나온다.
* 시황20년(갑술. 기원전227년): 형가는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진나라는 연나라를 역수(易水)의 서쪽에서 격파한다.
<사기. 진시황본기>, <연소공세가> 및 <자객열전>에 나온다.
* 시황21년(을해. 기원전226년): 이신은 병력 수천을 이끌고 연나라 태자단을 연수중(衍水中)까지 쫓아가서 마침내 연자단을 붙잡는다. 이신은 제나라, 제나라를 토벌하는 일에 대한 진왕의 물음에 대답한다.
이신이 연나라 태자단을 추격한 것은 <전국책.연삼> 및 <사기.자객열전>에 보인다. <전국책.연삼>은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한 후, "그리하여 진나라는 연나라에 대노하여, 병력을 추가로 조나라로 보내어 왕전에게 연나라를 토벌하도록 조서를 내린다. 십월에 연나라의 계성을 함락시키고, 연왕희, 태자단등은 정예병력을 이끌고 요동으로 가서 보전한다. 진나라장수 이신은 연왕을 추격한다.
왕은 급해지자 대왕 가의 계책을 써서 태자단을 죽여서 진나라에 바칠 생각을 한다. 진나라는 디시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했다." <사기.왕전열전>에는 이신, 왕전이 진왕의 초나라토벌에 관한 물음에 답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은 삼진(한,위,조)을 멸하고, 연왕을 쫓아버리고, 여러번 형사(초)를 격파하였다.
진장군 이신은 연소장용했다. 일찌기 병력 수천으로 연나라 태자단을 연수중까지 쫓아가서 마침내 격파하고 태자단을 붙잡은 바 있다. 진시황은 그가 현명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시황이 이신에게 묻는다. "나는 형(초)을 공격하여 취하고 싶은데, 장군이 생각하기에 몇 명이면 족할 것같은가?" 이신이 말한다: "이십만명이면 됩니다." 진시황이 왕전에게 묻는다. 왕전이 대답한다. "육십만이 아니면 안됩니다." 시황이 말한다. "왕장군은 늙었구려. 뭐가 겁난단 말이오. 이장군은 과연 기세가 용맹하니 그의 말이 맞다." 그리하여 이신과 몽염에게 이십만을 주어 남하하여 초나라를 치게 하였다. 왕전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빈양으로 돌아가서 쉬었다." <사기.진시황열전>의 기록도 동일하다.
그리고 이신이 진왕의 "제,초중 어디를 먼저 공격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한 것도 있다. 신망(新莽)시대의 엄우(嚴尤)가 쓴 <삼장군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왕전이 연나라를 멸하고, 연왕희가 동이(東夷)로 도망쳤다.
진왕이 말한다. "제,초중 어디를 먼저 쳐야 하는가?" 이신이 말한다. "초나라는 땅이 넓고, 제나라는 땅이 좁다. 초나라는 사람이 용맹하고, 제나라는 사람이 겁이 많다. 먼저 쉬운 곳부터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일은 다른 사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해에 진시황은 이신, 왕전에게 초나라를 칠 때의 병력수를 물어본다. <삼장군론>에 기록된 이신이 진왕의 "제,초중 어디를 먼저 공격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분명히 같은 때일 껏이다. 이 문답으로 보면, 이신은 초나라가 "땅이 넓고, 사람이 용맹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경시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먼저 쉬운 곳부터 치자" 즉, 제나라부터 치자고 말한 것이다. 그후에 초나라를 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의 사실을 보면, 진시황은 이신의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난후이(先難後易). 먼저 어려운 곳을 치고, 뒤에 쉬운 곳을 치는 전략을 택했다. 마비백은 이렇게 말한다: "초나라를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십만이면 된다고 대답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진시황의 뜻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만일 예전에 수천의 병력으로 연나라 태자단을 만리밖으로 쫓아냈는데, 이제 이십만으로 초나라를 공격해야한다고 하면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렇게 요구한 것이다. 일전을 벌여서 패배한 것이 어찌 처음에 생각했던 바이겠는가. 그러나 이런 말도 있다.
실패는 성공이 어머니라고. 이신이 연,제를 공격할 때 공을 세운 것은 초나라를 공격한 전투에서의 교훈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은 정확하다. 후세는 왕왕 이신이 초나라를 경시하여 실패한 것만 기억하는데, 이것은 습관적으로 제대로 살펴보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일 것이다.
* 시황22년(병자. 기원전225년): 왕분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왕 가(假)를 포로로 잡는다. 이신과 몽염은 20만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한다. 이신은 평여를 공격하고, 몽염은 침을 공격하여 초나라군대를 대파한다.
이신은 언,영을 공격하여 격파한다. 그리고 병력을 서쪽으로 끌고 와서 몽염과 성부(城父)에서 회합한다. 초나라사람들이 쫓아와서 삼일밤낮을 쉬지 않고, 이신의 군대를 대패시킨다. 양벽으로 들어가 일곱 도위(都尉)를 죽이고, 이신은 도망쳐 돌아온다.
이 일은 <사기.진시황본기>, <위세가> 및 <왕전열전>에 나온다.
* 시황23년(정축, 기원전224년), 왕전이 이신과 자리를 바꾸어 장군이 되고, 몽무(蒙武)가 비장(裨將)이 되어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군대를 대파하고, 초나라장수 항연(項燕)은 자결한다.
<사기. 진시황본기>, <초세가>, <왕전열전> 및 <몽염열전>에 나온다. 마비백은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이신 및 몽무(원문은 몽염으로 되어 있으나 잘못이다. 몽염열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음)는 이십만을 이끌고 남으로 초나라를 정벌하러 간다.
이신은 평여를 공격하고 몽무는 침을 공격하여, 형군을 대파한다.
이신은 다시 언,영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그래서 병력을 서쪽으로 끌고와서 몽무와 성부에서 회합한다." 그러나, <사기.왕전열전> 및 <몽염열전>을 보면, 제1차로 초나라를 공격한 것은 이신과 몽염이다.
마비백의 수정은 기실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마비맥이 말한 "몽무는 침을 공격하며", "몽무와 성부에서 회합한다"의 '몽무'는 모두 '몽염'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비잭은 전후에 초나라를 공격한 부장을 모두 몽무로 보았으나 이는 잘못이다.
<왕전열전>과 <몽염열전>에서 초나라를 공격한 전투를 보면, 진시황은 먼저 이신, 몽염을 쓰고, 실패한 후 왕전, 몽무(몽염의 부친)를 쓴다. 이를 보면, 진시황의 최초전략은 젊은 혈기와 용맹으로 일거에 기세를 올려서 초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초나라 군대의 실력과 저항정신을 저평가하였다.
그후 이신이 실패하자, 진시황은 과감하게 장수를 교체하여, 두 명의 경험과 모략이 풍부한 노장 왕전과 몽무로 바꾼다. 도랑을 깊이 하고, 방어벽을 높게 쌓아서 적의 변화를 기다리는 전략이었다. 여러 달의 기다림을 거쳐 전기를 잡아 마침내 초군을 격파한다.
* 시황24년(무인, 기원전223년). 왕전, 몽무가 초나라를 공격하고, 초왕 부추(負芻)를 포로로 잡는다. 그리고 그 땅에 초군(楚郡)을 설치한다.
이 일은 <사기. 진시황본기>, <초세가>, <왕전열전> 및 <몽염열전>에 나온다.
* 시황25년(기묘. 기원전222년). 이신과 왕분이 연나라를 격파하고, 연왕 희를 포로로 잡는다. 그리고 대(代)를 공격하여 대왕 가(嘉)를 포로로 잡는다.
<사기. 진시황본기>, <연소공세가> 및 <왕전열전>에 따르면, "크게 병력을 일으켜, 왕분을 장수로 하여 연나라의 요동을 공격하여 연왕 희를 붙잡는다. 그리고 대를 공격하여 대왕 가를 포로로 잡는다.
" 여기에는 이신이 참전했다는 것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왕전열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전의 아들 왕분은 이신과 함께 연, 제의 땅을 격파했다." 이를 보면 이신이 왕분이 주장이 된 마지막 연, 대, 제를 격파하는 전투에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신은 비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전열전>에는 그저, "이신과 연, 제의 땅을 격파하였다"고만 적고, "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는 그저 간략하게 언급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 시황26년(경진, 기원전221년), 이신은 왕분과 연에서 남하하여 제(齊)를 공격하고 제왕 건(建)을 포로로 잡는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다. 이신은 이 공로로 농서후에 봉해진다.
이 일은 <진시황본기>, <전경중완세가> 및 <왕전열전>에 나온다. 이 해가 되어 육국은 모두 멸망한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사기>에는 이신이 농서후에 봉해진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신당서.종실세계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는 신을 낳았고, 자는 유성이다. 대장군, 농서후이다." 이 농서후는 진나라가 천하통일후 이신에 대하여 내린 봉작일 것이다. 그후 이신의 사적은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이신의 후손
"(신)이 초(超)를 낳는데 일명 항(伉)이며 자는 인고(仁高)이며 한(漢)나라의 대장군, 어양태수이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원광(元曠)으로 시중(侍中)을 지낸다;
차남은 중상(仲翔)으로 하동태수, 정서장군이 되어 강족(羌族)의 반란을 소창(素昌)에서 토벌하다 전투에서 사망한다.
태위(太尉)로 추증되고, 농서 적도 동천에 묻히는데, 그곳이 집이기 때문이다. 백고(伯考)를 낳으니, 농서,하동 이군태수를 지낸다. 상(尙)을 낳으니 성기령(成紀令)이다. 성기에 기거했기 때문이다. 동생 향(向)은 범양방(范陽房)의 시조이다.
상은 광(廣)을 낳으니 전장군(前將軍)이다."
그리고 16세 자손이 서량왕 이고(李暠-李玄盛)이다.
2244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