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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忠武)와 권현(權現) & 미도정항(美都情港)통영(統營)

작성자2244/이관희|작성시간06.12.16|조회수16 목록 댓글 0

충무(忠武)와 권현(權現)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것은 곧 불교에서 말하는 팔고(八苦) 중 수원봉고(讐怨逢苦)를 의미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왜군을 대파한 인연으로 그의 사후에 받들어 추존(追尊)하는 시호를 충무공(忠武公)이라 했다 해서 한산도가 속해 있는 통영을 충무시로 명명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충무에서 가장 대표적인 산업이 멸치잡이를 중심으로한 수산업이며 충무의 경제를 이끌고 간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수산업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일본어를 그대로 옮겨 쓰고 있는데, 일본인들이 강점했던 그때 그들에게서 배운 것이어서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퍽 꺼림칙한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기회에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멸치잡이 어업을 기선권현망(機船權現網) 어업이라고 한다는데 여기서 권현(權現)이란 글자는 순수한 일본말이며 우리나라 말로 그대로 옮겨 써서는 결코 안 되는 말이다. 특히 이 고을은 충무라는 이름의 도시이고 보면 권현이란 괴상한 글자는 바다 밑에 깊숙이 깔아 뭉개버려야 마땅하다.

  권현은 일본에서 떠받드는 해신(海神)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조대권현신(東照大權現神-도조다이곤겐가미)이라 부르며 바다를 평화롭게 해 준다는 신이다.

  일본 땅 중동부지방 일광(日光-닛고)에 동조궁(東照宮)이 있고 그 궁은 곧 이 권현신을 받들고 있는 신사(神社)로서 일본인들에게는 대단히 존경받는 자의 묘가 있다.

  그 자가 바로 덕천가강(德川家康-도꾸가와 이에야스)이며 「권현신」은 그가 죽은 후 유언에 따라 붙여진 추존명(追尊名)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큰 공을 세운 공신에게 붙이는 시호(諡號)와 같은 종류의 명칭일 따름이다.

  참으로 기구한 것은 이곳에서 어이없게도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글자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충무공은 이 나라 남해안을 지켜주는 해신으로 추존(追尊)받고 있다. 고기잡이 나가는 모든 어선들은 모든 잡신을 몰아내고 말끔하게 보듬어준 충무공 이순신에게 경건하게 제사하며 해마다 풍어를 빌곤 하는데, 어이없게도 왜놈들 귀신 뼈다귀가 아직도 떠돌아다니면서 못된 장난을 치니 우리 해신께서도 역시 텃세를 아니 하실 리 없다고 생각한다.

  “원하건대 잡신이여, 이제는 썩 물러가고 정축년(丁丑年) 새해에는 미도정항(美都情港)에 그득그득 풍년풍어(豊年豊漁)토록 빌고 또 비옵니다. 괘심하더라도 지난해처럼 모질었던 시샘만은 잠시 거두소서.”

  지금 기름범벅이 되어버린 바다에 원망 그윽한 시선을 떼지 못함은 신들도 인간들이 한 것처럼 투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1992. 1. 통영에서)


미도정항(美都情港)

 

  통영(統營)의 겨울은 따뜻하고 충무(忠武)의 여름은 시원하다. 아름다운 항구 도시 이곳은 그 이름이 두 가지로 통한다. 하나는 통영, 또 하나는 충무이다.

  충무라는 이름이 붙게 된지도 어언 반백년이 흘렀으나 아직도 옛이름 통영을 잊지 못해 ‘나는 통영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는 토박이들의 고집스러움에 외경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충무라 불러도 아름답게 느껴지고 통영이라 일컬어도 정답게 감쳐오는 미도정항(美都情港)!

  여기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선남선녀들!

  여자로 태어나면 미인이 되고, 남자로 태어나면 미남장부다. 인정도 역시 바다처럼 넓고 깊고 두텁다.

  그래서 통영은 맑고 깨끗해서 아름다운(美) 고장이다.

  그래서 충무는 인심이 후하고 정(情)이 넉넉한 고을이다.

  임진왜란때 통영땅 한산도를 중심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 있는 이순신 장군을 흠모하던 한 정부요인이 친구의 선거유세차 왔다가 비로소 ‘충무’라는 이름을 붙여 오늘에 이른 것이 어느덧 세계적인 명승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생전에 쓰시던 유품이 이곳에 잘 보관되어 왔었는데 타의에 의해 부득이 고향지역에 빼앗기다시피 물려주고 충무에는 모조품만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유무는 고사하고 전쟁 당시에 쓰던 유품이 본 자리를 옮긴 것은 매우 불유쾌한 일이라 여겨진다.

  애지중지 기려오던 보물마저 빼앗긴 마당에 고지식함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 모양인지 언제부턴가 충무라 하지 않고 통영이란 이름으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진품이든 모조품이든 그 정신이야 어찌 변하겠는가. 그가 조국에 바친 믿음을 믿는다면 유물이 어디 있은들 멀리서나마 이 고을을 지켜주고 있으리라 믿는다.

  옛부터 충이란 글자 뒤엔 죽음이 따라 반드시 귀신이 붙게 마련이다. 한산도 대첩 때 몰살당한 왜군들의 처절한 죽음은 묻어두고 칠천도 해전 때 미처 도망가지 못해 목이 달아나고 수중의 고혼이 된 무수한 조선 수군들의 원혼이 섬과 섬 사이를 넘나들기도 하고 고개와 언덕에 굴러다니며 조약돌 마다에 이끼처럼 묻어 다니기도 할 것이다. 해안 절벽이나 모래와 자갈틈 사이에도 잠겨 있어 원한 깃든 귀신이 우글우글 하는 것이 사람 눈에도 역력하게 나타난다.

  토성 고갯마루에는 귀신을 상대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충무는 귀신이 도깨비보다 많다. 그래서 도처에 귀신을 다스리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귀신은 족보가 있으나 도깨비는 뿌리가 없는 것이 차이가 있다. 도깨비보다 귀신이 더 많이 살아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다는 근거 없는 비과학적 소문도 떠돌고 있다.


  충무에도 예외는 없다. 그것은 교통문제다.

  해안도로를 끼고 도는 길은 예로부터 비좁다. 구석구석 길거리 빈자리마다 자동차를 세워두었는데 다른 차가 주차하게 되면 더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서 미리미리 방패막이로 차를 한 대씩 사서 세워 두었다는 가게 주인도 더러 있다.

  충무아들이 통영아버지에게 조른다.

  “아버지! 자동차 사줘.”

  통영아버지는 충무아들에게 말한다.

  “요즘 길 막혀 자동차 타고 다닐만 하던? 길 넓힌다는데 그때 사줄 테니까 우선 대중교통 타고 다녀라.”

  통영의 육로 길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산 고개도 넘고 산허리도 감돌아가며 구곡간장(九曲肝腸) 구불구불 고불고불하다.

  산그늘에 조가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옛집들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요즈음 집들은 아파트가 되어 높아만 가니 가뜩이나 길들은 좁혀지는 것만 같다.

  미도정항(美都情港)이 한 조각 추억으로 남는가?    (1992년 7월 통영재직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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