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봄
역사가들은 전봉준이 이끌던 갑오년 동학농민봉기를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음미하고 있다. 왕조사학적 측면에서 본 견해는 일종의 체제도전적인 반란이라고 하고, 민중적 사학자는 민중의 공명정대한 의식의 발산으로 소위 혁명적인 움직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을 떠나서 전략전술적 측면에서 보면 이 운동 역시 많은 교훈을 남겨 주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1894년 정월 보름날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격, 동학교인 전봉준의 지휘아래 고부군아를 점령하고 불법으로 탈취한 양곡을 다시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문제의 만석보를 파괴해버린 사건이 곧 동학난을 발단시킨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건을 무마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는 오히려 사건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이들을 문초하고 살해하는 등의 폭력행사를 하였기 때문에 이에 더욱 분격한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이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에 대한 정면대결을 위한 반기를 들기에 이르는 것이다.
전봉준은 녹두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그들의 총지휘자가 되었고 동학군의 병력 규모는 약 1만 여명에 달했으며 그 세력은 불과 수일 내에 전라도 북부지역을 일사천리로 석권하였고 관군의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전주를 무난히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봉준이 전주를 점령할 즈음에 이미 원세개가 이끄는 청의 구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이어 왜군들도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동했다. 이에 당황한 정부군은 동학군이 제시한 것을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휴전을 제의하기에 이르렀으며 전봉준은 그 휴전제의를 받아들여 일단 해산하였다.
그후 정부측이 휴전조건을 무시해 다시 봉기하여 척왜(斥倭)를 내세워 북진하였지만 마침내 공주에서 현대무기로 무장한 왜군들과 합세한 관군에게 일패도지 당하고 말았다. 동학군이 지니고 있었던 무기는 죽창과 관군으로부터 노획한 화승총 몇 자루뿐이었는데 이러한 장비로는 군함과 대포 거기다가 다연발 현대식 무기의 위력 앞에는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었다.
열약(劣弱)한 전략
경제사학적 입장에서도 갑오동학봉기는 농민전쟁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분명히 이는 국제간의 복합적인 전쟁임에는 틀림없다. 일부 이슬만 마시고 사는 명리논자는 그들이 죽창을 들고서라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현대식 무기 앞에 하루살이처럼 쓰러져 버린 참혹한 죽음들을 위로하기에 급급하지만 이들을 이끌고 앞장섰던 지도자들에게는 역사적인 냉철한 비판의 칼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농민들의 힘이 근대적인 방향으로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충분히 간파하고 이끌어낼 지도자가 없었다고 하는 점 등을 경제사적인 위치에서나 정치사적인 위치에서나 한결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전략적인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때 그 당시에 합당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모처럼 용솟음치던 근대화의 갈림길이 무너지고 말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동학봉기에 대하여 여러 방면에서 판단하고 있으므로 다만 전략전술면에서 이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이를 계획하는 입장에서 평가할 때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오사(五事)와 칠계(七計)를 고루 갖추지 못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당초에 전략전술이 없었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그때 그 당시의 전략을 분석해야 할 입장에서 본다면
첫째, 거사의 취지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표명한 점은 우선 높게 평가할 만큼 그 시대에 적절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러한 목표가 농민에게는 땅을 나누어준다던가 집을 준다는 내용의 손에 잡히는 명분이 약했다. 또한 왜군을 무찔러야 한다는 ‘척왜(斥倭)’를 함께 내세운 것은 시기적으로 너무 빨리 내세운 목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관군이라는 적과 더불어 현대식 무기로 철저히 무장한 앙칼진 여우의 이빨에 목덜미를 물린 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거사목표가 시기에 적절하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잠시 이를 감추어 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이를 들춰내야 한다. 척왜를 부르짖고 나선 동학군에게 그들의 대항군이라고 볼 수 있는 청국군대의 움직임을 충분히 관찰한 다음에 목표를 결정하는 것이 그때의 지도자들이 결정했어야 할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정부를 비호하는 것이 유익한지 아니면 새로운 힘으로 떨쳐 일어나는 농민들의 세력이 더한층 유리할 것인지는 청국군대나 왜군들도 저울질해 본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변화의 요소를 무시하고 농민들의 사기진작책의 하나로 외국군대의 진주를 배격하는 목표를 표방한 것은 엄청난 큰 적을 더욱 많이 끌어들인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앉으면 백산(白山), 서면 죽산(竹山)
둘째, 물량면에서 검토해 보면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다.
우선 농민들이 입고 있는 흰색 무명 바지저고리와 죽창을 든 모습은 군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총알받이에 불과하였다. 비록 농민군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할지라도 오합지졸임에는 틀림없었다. 흰 바지저고리에 긴 죽창을 잡고 모두 앉으면 백산(白山)이 되고 서면 죽산(竹山)이 되었다고 하니 그때의 임전태세를 짐작할 만하다.
예로부터 지도자는 ‘담은 크되 심장은 적게 하여야 한다(心小膽大)’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의욕만 높아서 가슴만 벅차게 흥분하게 되면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방법을 차분하게 생각할 수 없게 되고 그 의욕도 실천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동학군의 지도자는 수많은 농민군이 갑자기 도처에서 호응해 오니까 벅찬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체조직을 다시 점검하거나 상대방에 대응할만한 방법을 구체화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전략에서 가장 필요한 최소한의 군비를 갖추지 못한다면 백 번 싸워도 매번 실패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외로운 군대를 외롭게 운용한 것이 전략면에서 큰 약점을 드러냈다.
당시의 농민군들은 전라북부 지역만이 아니라 경상도 지역과 충청도 지역에서도 호응하여 전라군이 진격해 오면 함께 합류하리라는 계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엄청난 조직이 모두 분산되어 있어서 연락이 용이치 못하고 전세의 추이를 즉시 감지하지 못함으로서 겨우 700명에 불과한 관군들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개훈이 이끄는 관군은 전투의욕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고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도망가는 형편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유리한 여건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전투적인 정보연락이 부재한 까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역에 흩어져 있던 농민군의 조직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스스로 저해하고 스스로 외로운 군대로 전락하여 피곤한 전쟁을 자초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안에도 적, 밖에도 적
넷째, 지도자들간의 의견 불일치와 상벌제도가 미약하는 등 취약점이 노출되었다.
전봉준, 김개남 등은 실력행사를 통하여 보국안민을 주장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 하고 2세교주 최시형은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에 가담한 무리는 모두 사문난적이라고까지 매도하는 등 지도자급끼리의 의견이 정반대로 대립되는 바람에 충천하던 사기를 스스로 잠재우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물론 동학의 기본사상에 입각한다면 무력을 통하여 혁명을 하는 것보다는 정신개조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사회개혁을 하자는 의견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일단 중대사를 결정한 위치에서 우왕좌왕 한다는 것은 적에게 더욱 유리한 조건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뿐 아니다. 농민군이 파죽의 세력으로 진격을 계속 하고 아직 지원을 요청한 청국군이 전세를 갖추기 이전에 관군이 제의한 휴전협정을 승낙한 것은 전술상에서 볼 때에는 가히 영점인 것이다. 휴전 조건 중의 하나가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것이 있었는데 관군은 당시 사정으로는 일조일석에 실현될 수 없었던 약속이지만 급한 김에 모두 들어주기로 하고 무조건 휴전에 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조건은 결코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불과 며칠 후에는 오히려 농민군의 주모자를 색출하여 이를 정치하고 처벌하는 등 휴전협정과는 정반대의 행위까지 하였다. 농민군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황판단에 민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유의하지 못한 지도자의 불찰이 있다. 그것은 순수한 농민군이나 동학교도의 집결체가 아닌 상태에서 내부의 기강을 철저하게 다스리지 못한 것이다. 한꺼번에 10여만 군중이 모여드는 가운데 도둑과 불한당, 그리고 사회적으로 부도덕을 일삼던 무뢰한들이 함께 참여하여 전세가 유리한 때에는 정복지에서 약탈을 일삼고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지도자를 배반하고 간첩질을 하거나 고자질하는 따위의 불리한 행동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민중으로부터 일부 외면당하거나 전력의 약화를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10여만명의 조직이라면 반드시 기강이 서야 하고 기강을 세우려면 상벌을 엄정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심지어 동학군으로 위장 침투한 관군을 색출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동학군 지도자는 이들을 풀어 주면서 종교적 방식으로 설득하였는데 전쟁 중에서 종교적인 제스추어는 오히려 내부의 기강을 혼란하게 하는 요인일 수도 있는 위험한 방법인 것이다.
귀신같은 전술
전략적인 측면에서 본 동학군의 전략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자를 노출하고 이로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나 전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대담하고 기민하여 동서양 고금의 어느 전쟁에서도 보기 힘든 탁월한 면이 돋보였다.
홍개훈이 이끄는 관군은 병선을 타고 군산에 도착하여 동학군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동학군은 이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먼저 전주성으로 입성하지 아니하고 고창, 부안, 무장 등 전라남북지역을 우회하면서 배에서 내린 관군을 더욱 피로하게 했다. 이런 점은 비록 오합지졸이 결집한 농민군이라 하더라도 상당한 민첩성과 전술적 효과를 거둬들인 것이라 볼 수 있다.
피로에 지친 관군을 황토마루에 유인, 이를 포위한 다음 관군이 지니고 있던 현대식 무기들을 쉽게 노획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러한 전술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손자의 ‘예민한 적은 피하여 피로하게 한 다음에 쳐야 한다’는 전술이며 무기와 양식은 적으로부터 얻는다는 방법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전략에서는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완벽을 기하지 못했을지라도 지도자 중에 전술에 탁월한 이가 있어서 이러한 고등전술을 구사하고 이로서 승전을 거듭함에 따라 각지에 흩어져 기회만 보고 있던 농민들이 자진하여 죽창을 들고 모여든 동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여하간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은 농민들의 자발의식이 발로한 민족의 움직임이며 근대화, 민주화의 길을 좀더 앞당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음에는 틀림없으나 주변 강대국들의 탐욕스러운 압력에 의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국제간의 변화를 의식하지 못한 지도자의 잘잘못을 논죄하고자 하는데 이 글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러한 민족의 대운동이 전개될 때에 두 번 다시 이 괴로운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자는데 뜻이 있다.
다만 이 움직임의 효과가 앞으로 노동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운동을 시도한다든지, 민족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의미의 움직임을 시도할지라도 철저한 준비 없이 나선다면 오히려 좋은 기회를 무의미하게 흘러 버릴 염려가 있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기미년 삼일운동 역시 그 지도자 대부분이 동학이나 기독교의 지도자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무저항주의로 시위만 한 것에 그쳤다. 이에 대해 당시 미국을 비롯한 국제여론은 필리핀의 반란에 비교할 정도로 비하시켜 오늘의 평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비록 좁은 땅덩어리에서 작은 일 하나를 하게 되더라도 소꿉장난처럼 흐지부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비록 작은 땅덩어리이긴 해도 야멸찬 고추 맛이 있다는 평을 듣는 것이 한결 듣기에 좋지 않겠는가.
항차 지금은 남북이 갈라진지 오래고 다시 합치기 위한 노력을 쏟아 붓고 있지만 개개인의 욕심이나 명리만 앞세운 태도로 임한다던가 심지어는 당리당략에 따라 좌지우지하는 것은 모처럼 잡게된 민족재생의 절대적 호기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