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은 어린이들을 좋아하셨다. 어린이들의 티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씨를 칭찬하며 제자들에게도 본받으라고 가르치셨다.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동산에 올라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구름도 한 점 없어 일출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공자님께서는 깊은 사색을 즐기시면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명언을 후세에 남기시려고 고심하는 중이셨다.(이 순간까지 그 유명한 조문도(朝聞道) 석사가의(夕死可矣)라는 문구는 세상에 없었다. 필자의 註)
이 말씀은 공자님의 여러 가르침을 한마디로 함축시킨 문구로 공자님 이름은 잊어도 이 구절만은 오래도록 기억될 만 해서 석가모니의 해탈(解脫)과 버금가는 의미를 갖는다.
이때였다.
아이들끼리 옥신각신하는 말다툼이 벌어지면서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공자님께서는 깊은 사색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지구와 저 태양과의 거리는 해가 뜰 아침때가 더 가깝다. 왜냐하면 해가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점심때에 더 가깝다. 햇살이 더 따갑게 느껴지는 것을 봐도 지구와 태양은 점심 때 더 가까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이들의 말다툼 요지는 이런 허망한 것이었지만 두 패로 갈라져서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공자님은 방금 사색에서 깨어나시느라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논쟁 자체가 너무나 무의미한 것이었기에 미처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다 하는데 이 정도 문제도 풀지 못하십니까?”
아이들은 선생님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잘 아시는 줄 알았다가 크게 실망하는 낯빛이 되었다.
“어찌 어린아이들도 능히 알만한 일을 도대체 한 마디 말씀도 못하시니 성인도 이름뿐이군요!”
아이들은 묵묵부답의 공자를 보더니 제마음대로 떠들며 까불었다.
노동인간
저녁노을이 무척 곱다.
이때마다 노마는 누나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누나아아--.”
“누-우-나-아-아-아--”
노마가 애타게 찾는 누나는 산울림이 되어 산모퉁이를 돌아 멀리 사라진다.
노마의 아빠는 어느 날 갑자기 일터에서 병신이 되어 안방에 드러눕고 말았다. 한때는 술로 아픔을 참고 위안을 삼더니 어느덧 술주정이 심해지면서 엄마와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심하게 다투던 어느 날 엄마는 집을 나가 영영 노마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신음소리는 더욱 좁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누나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 다닌다고 하더니 어디론지 떠나간 후 소식이 없었다.
오늘도 노마는 누나가 다니던 학교로 가는 길을 따라 나섰다. 노마는 길가에 핀 코스모스 꽃잎을 물고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머언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둥실 떠 있고 구름 속에 누나가 보였다. 누나는 빨간 입술연지를 하고 방실 반기더니 노마 입술에 살포시 입술을 포갰다. 노마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코스모스 꽃잎이 떨어지면서 잠자는 노마의 얼굴을 하얗게 덮었다. 고추잠자리가 노마의 입가에 앉아 꼬리를 치켜올렸다 내렸다 하며 졸고 있지만 이미 노마는 모든 것을 잊고 이 세상을 떠난 후의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노마가 잠든 길섶을 지나지만 깨어날 줄 모르는 천진한 얼굴에서 차마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흘깃거리며 황망히 지나가 버린다. 고약한 전염병이라도 옮길까봐 총총걸음으로 도망가 버린다.
산업재해로 말미암아 어느 날 갑자기 함께 일하던 사람이 사라진다.
이러한 산업재해는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가고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재해를 예방한다지만 건수는 물론 재해손실액도 높아만 간다. 이 상처의 아픔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번져나간다. 번져 나가면서 더욱 더 아픔이 커진다.
이 아픔의 상처는 이웃에게 번져 나간다. 상처가 깊어지면 아픈 줄을 모른다. 마비증세가 오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인간의 마음까지 마비시킨다. 수족을 잘리운 짐승이 아픔을 호소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기만 하듯 인간들 역시 이 표현하기 어려운 진통을 모른 채 하면서 참고 넘긴다.
잃어버린 만큼만 챙겨주어도 다행스럽게 여기라고 말한다. 먹고, 입고, 자고, 그렇게 챙겨주는 것만으로 만족스럽다고 여겨야 한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도 아픔을 갚아주는 방법도 모르는 척 한다. 이것이 오늘의 방식이다.
시각이 수정되어야 한다. 노사문제는 경제문제에서 시작하여 경제문제로 끝내지 말고 노동철학을 생각하며 노동인간을 굽어보는 참된 깨우침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모든 결실이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였고 인간을 위해 있었으며 인간에 의하여 성취된다. 그러나 인간은 제도와 체제와 낡은 이념에 도취되어 인간이 인간을 스스로 억누르고 무시한다.
모든 꿈에서 새롭게 깨어나 인간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서서 노동인간의 참모습을 찾아보자.
‘손톱 밑에 가시가 끼면 아픈 것을 알지만 염통 속에 구더기 우글거리는 것은 모른다.’
마루밑 강아지도 다 알고 있는 우리나라 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