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도 고속도로가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삼국으로 나뉘어 있던 시대에 있어서 특히 신라의 경우는 특별한 교통수단으로 산맥을 이용한 고속도로가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고구려는 대륙의 요동과 두만과 압록 양강을 넘나드는 전역에 걸쳐 영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개는 평야와 수로를 이용한 운반수단을 사용해야 했고 평야지대에는 넓은 도로를 구축한 사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역사의 흔적으로서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백제도 한강이남과 서해로 흐르는 여러강을 발판으로 영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개는 해상과 수로를 이용하여 교통하였을 것으로 보이므로서 도로에 대한 애로는 평범한방법으로 해결되엇을 것입니다만 반도의 동편에치우친 신라의 경우는 불가항력적인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더라도 특단의 교통정책이 없고서는 지금도 여러곳에 남겨진 역사적 통치흔적을 설명하는데 논리상 문제점이 많이 잇습니다.
신라는 태백과 소백의 양산맥을 중심으로하고 겨우 낙동강이라는 외줄기 강을 이용하여 영토중의 교통로를 확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강이나 심지어 함경도 황초령까지 이르는 진흥왕때의 영토관리를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교통수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의 도로사정이나 일반적 판단으로 해아리기 어려워 오로지심증만 있고 증거는 없는 실정입니다.
특히 진흥왕이 세운 진수비들이 모두 산위에 있다는 점은 주목할 단서가 됩니다.
이는 지금은 외진곳이지만 이와 비슷한 고도가 당시로서는 내왕이 빈번하였던 도록인접지역이라는 증거로 볼 수 있으며 당시로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필 수 있는 위치였을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신라가 정복하였던 주요 영토인 내륙은 모두 산악으로 덮혀 있는데 특히 소백과 태백처럼 동에서 서쪽으로 첩첩하게 이어지는 산맥들과 산맥들 사이로 강이 가로놓여 있어서 교통로가 수시로 가로 막혀 고을과 고을사이를 내왕을 하기에는 매우 불편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안압지에서 출토된 바퀴모양의 장식구와 수래를 보았을때 분명히 수례를 이용한 교통수단과 도로가 있어서 진흥왕때는 태백산맥의 정상을 이어가는 수례를 이용한 고속의 교통로가 있었으며 통일 신라시대에는 평양까지 갈 수 있는 교통로와 호남평야를 장악할 수 있는 교통로가 강이나 산을 넘지 않고 산맥의 정상으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신라가 새로 통일한 평안도와 전라도를 장악할 수 잇는 방법이 없어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군대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에많은 차질을 빚게 도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난관극복을 위하여 산맥의정상을 타고가는 도록가 있었다라는 전제하에 수례를 이용한 고속도로가 있었다는 추측이 허무맹랑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경주는 태백산맥의 가장 남단이며 이를 기점으로하여 태백의 산등성이를 오르는 길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고속도로가 될 수 있었고 이미 진흥왕시대에 함경남도 함흥에 가지 이를 수 있었던 방법중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은 태백준령을 타고 산봉우리와 산봉으리를 이어 가는 산도를 맍들었으리라고 생각되며 이 길로 간다면 수로가 없이 일사천리로 달릴 수 있는 빠른 길이 될 수 있어서 신라가 함경도 일부까지 정복 할 수 있었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룩하면서 태백준령을 타고 묘향산맥을 이용하면 항을 건너는 수고를 덜면서 단숨에 평양까지 군수물자를 운반 할 수 있었을 것이나 이러한 비밀된 길을 공개되지 않은 것은 군사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여서 일반인들은 이를 알 수없는 군사비밀이였을 것이며 필요에 의하여 폐쇄된 이후 역사의 뒤안길에 뭍혔을 것이다.
통일신라가 초기에는 태백과 소백과 낭림의 산마루를 이어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강을 건너고 고개를 건너는 반도의 서안 지역을 군사도로로 이용하였다면 다리를 놓아 야 한다던지 아니면 배를 놓아야 하는데 번번히 물건을 실었다 내렸다하는 수고를 덜기위하여는 산맥의 산마루를 이용한다면 오르막도없고 내리막도 없는 평탄한 길로 대량의 수레를 이용하여 물건을 날으는데 어려움을 덜 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이 길을 이용하는 것 보다 낙동강과 한강을 이어가는 조운 법에 의하여 산악을 이용한 고속도로는 폐쇄된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수로를 이용하는 편리성을 중요시하는 바람에 이 고속도로는 잊혀진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지금도 설악산이나 사악 곳곳에 성터와 중요 도로가 있는 것을 보면 신라시대에 이미 고속도로는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어 맞는 것입니다.
무려 일천오백여년이 지나고 고려가 국토의 중심인 송도에 도읍을 정한 이후부터는 해운을 이용하여 교통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오랜도로가 보수되지 않았고 풍화작용으로 마모되어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이당에 살면서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는 반드시 그러한 도로가 있었다라는 확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를 연구하는 학자에 의해서 규명될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관희의 추축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