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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의 침략비책

작성자2244/이관희|작성시간06.12.15|조회수35 목록 댓글 0

왜적의 침략비책            

   숙명적 조우

   우리와 일본은 숙명적으로 만난 이웃이자 때로는 원수이기도 하다. 비록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오고간 역사가 수 천년에 이르고 형제나라처럼 오순도순 살아오던 세월이 많았지만 400년전부터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는 관계로 변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들로 인하여 입은 피해가 엄청나건만 살을 깎고 뼈를 저리는 아픔도 이웃이란 인연 때문에 꾹꾹 눌러 참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원래 타고난 기질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달라 포악하기가 이리 같고 간사롭기 여우같아서 그들이 우리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별의별 아첨을 떨다가도 어렵고 힘든 고비를 당한 것을 알면 영락없이 해코지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이러한 사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기가 고려말 왜구들의 노략질이고 이로 인해 고려라는 나라를 망치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또 조선 중엽 나약하기 짝이 없던 시기에는 갑작스럽게 떼거리로 몰려 와서 분탕질을 한 것이 곧 임진왜란이다. 이때 풍신수길이라는 매우 잔악한 괴수(魁首)가 앞장서서 저질러 놓았는데 이러한 바람은 끊임이 없이 계속되어 마침내 조선반도를 송두리째 삼켜 먹는 한일합병의 비운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금 그들이 노리고 있는 수작도 이러한 음모를 계속하려는 조짐인데 이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조선반도 안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기르고 있다. 그들이 경제적 군사적 강국이 되면 이웃인 우리는 상대적으로 그 만큼 약소국이 될 뿐이며 언젠가 그들에 의하여 정복되고 예속되어 녹아 없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저 혼자만 살아남기 위하여 앞장서서 친일을 꿈꾸는 자만 늘어만 가고, 더구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더 한층 친일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 가까운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가 늘어가는 현실이니 머지않아 나라와 민족을 송두리째 넘겨주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장차 친일을 하는 자와 친일을 매도하는 자 사이에 파벌싸움이 일어날 것이 뻔하고 그러다가 '닭 쫓던 개 울 넘어다보기'로 영원한 식민지 백성의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음부(陰部)에 꽂힌 비수(匕首) 

  일본사관학교 훈련교과서에 조선반도(半島)는 한낱 전쟁연습을 하는 실습도구에 불과하다. 또 조선의 땅 모양과 지세를 이용하여 기습연습, 방어연습, 폭격연습 등 시믈레이션형의 모의전쟁도장(道場)을 만들어 두었다. 산맥과 강과 마을을 그려놓은 지도 위에서 갖가지 전술을 익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요시라(要時羅)가 그려간 지도를 비롯하여 조선 반도의 지도는 그들의 산악전, 도강전, 시가전, 상륙전 등을 연습함에 있어 시범적으로 활용되는 모델이 되어 왔으며 시험 문제도 가장 흔히 출제되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인의 대부분은 기껏 관광지도나 펴놓고 고속도로가 어디로 뻗어 있으며, 해수욕장은 어디에 있고 어디쯤 휴게소가 있으며, 어디로 가면 명산대천으로 가는가를 살필 뿐이다. 어느 산과 계곡에 어떤 고목이 서 있고, 어떤 모양의 바위가 있으며, 숨을 만한 동굴이 몇 개 있는데 만일에 대열에서 낙오되더라도 어떠한 풀과 나무뿌리를 뜯어먹고 연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어느 성씨가 몇 가구 살고 있고 젊은이가 몇이고 어린아이가 몇 명인지 알고 있는 한국인은 없다.

  그러나 일본 사관학교를 나온 자들이라면 이 정도는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동네는 과거 친일파가 많았고 어느 동네는 독립군 출신 후손이 많아서 민간인에게 대하는 정훈(政訓)활동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까지 정통(精通)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현재 일본의 병력이 50만으로 보면 이 50만명은 모두 중대장급 이상 장교로 사병이 아닌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만일 팬토믹형 군편성 기준으로 얼핏 계산해도 125개 사단을 하루아침에 편성할 수 있는 규모다.

  그들은 조선을 정복하여야만 대륙으로 진출하여 중국이나 소련을 공략할 수 있고, 반면 조선반도를 빼앗기면 그들의 옆구리에 해당하는 구주(九州)가 정면공격 받게 되고 군사적으로 힘을 전혀 쓸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국방'하면 반드시 조선반도를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살펴보면 조선반도는 일본열도의 대륙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 전략상으로 봐도 조선반도의 형상이나 위치는 일본열도의 중심부를 노리는 절구공이와 같은 것이다.

  일본열도는 조선반도를 중심점으로 하여 반호(半弧)를 그리고 있고 조선반도의 끝은 바로 일본열도 반원 모양의 가장 중앙이 되는 곳을 향하여 뻗어 있다. 조선반도라는 절구공이에 으스러져버린 형국으로 그 지형이 부서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열도는 조선반도란 단도에 찔려 버둥거리는 여우를 닮았다.

  조선반도는 그야말로 일본열도의 급소요 정확히 공략할 수 있는 날카로운 비수인 것이다.

조선반도와 일본열도를 두고 대륙으로 도망치는 토끼와 헤엄치며 접근하는 늑대, 또는 태평양을 굽어보며 앞발을 들며 포효하는 호랑이와 말라 비틀어져 볼품없는 여우를 연상한다. 숙명적 만남을 눈여겨 지도를 응시해 봄직하다.

  치명적 급소 

  일본열도의 심장부는 동경을 중심으로 한 본주지방이지만 일본열도의 가장 치명적인 급소로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중공업지대인 구주지방(九州地方)이다. 조선반도의 가장 끝 부분에 해당하는 부산이야말로 이 구주지방을 날카롭게 노리고 있는 칼끝이 되는 것이다.

  이 부산지방이 의미하는 칼끝이 자칫 내질러지기만 하면 일본은 그야말로 급소 중의 급소에 치명타를 맛보게 될 것으로서 그야말로 안성마춤격 형국인 것이다.

  일본 수도를 경도에서 동경으로 옮긴 까닭의 하나는 급소를 노리는 조선반도의 공격목표를 다소 비껴보자는 의도도 없지 않다.

  음양(陰陽)설에 따르면 조선반도는 대륙의 양기(陽氣)가 집중된 남성의 늠름한 성기와 같고 그 향하고 있는 곳이 태평양의 핵심이다. 그 앞에 걸치적거리는 것이 일본열도인데 태평양이라는 여성의 지저분한 음부와 흡사하다. 때때로 해양(海洋)의 기운이 강성한 때가 오면 일본열도에는 음습(陰濕)한 살기가 대륙을 향하여 침범하고, 반대로 대륙(大陸)의 기운이 왕성하면 일본열도로 은근히 스며들어 사악한 짓을 말리고 다독거려 아세아는 평화로운 태평연월을 구가한다.

  일본이 여러 차례 군대를 일으켜 대륙을 침략했던 형상은 곧 음탕한 여인이 젖은 엉덩이를 휘저으며 대륙쪽으로 접근하여 조선반도와 도킹하는 것과 같고, 또는 굶주린 여우가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몸뚱이를 추스르며 헤엄치는 모습과 흡사하다.

  조선반도를 성적 노리개감으로 여기며 접근하는 일본열도는 그야말로 창녀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암내를 풍기며 슬금슬금 따라 붙으려는 암캐 같기도 하다.

  그 창녀는 주기적으로 솟구치는 음탕한 욕정에 휘말려 사리를 분간하지 못한다. 담을 넘어 이웃집을 습격하기도 하고 앗아오기도 한다. 일단 음기가 발동한 그 모습에서 인간다운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흉악한 짐승으로 둔갑한다.

  부끄럽다는 것은 이미 잊은지 오래고 갖고 싶은 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빼앗아야 한다. 흉물스런 긴 손톱으로 대륙의 면상을 할퀴기도 하고, 송곳니를 드러내어 드라큐라처럼 상대방 목덜미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일본열도는 가끔 야수가 되어 대륙을 음해하는 역사적 숙명을 안고 있다. 지금 그들이 또 움직이고 있다. 풀로토늄을 실어다 가공할 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키워 평화군이란 탈을 쓰고 서서히 대륙의 남쪽에 군화발을 들여놓으며 어느 날 갑자기 대륙을 강간하려는 음모를 펴고 있다.

  이 움직임은 장차 무서운 세계적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에만 살고 있는 그들의 천연기념물 일본원숭이의 후손들처럼 생긴 모습의 인물, 풍신수길이라는 자의 망령에 의하여 전율(戰慄)할 날이 멀지 않았으며 많은 희생이 그 대가로 치루게 될 것이라고 예견되고도 남는다.

     혼동비책(混同秘策) 

덕천막부는(德川幕部)1)는 쇄국정책을 써 임진왜란 이후 양국간에 분쟁은 없었지만 일부에는서 조선정벌에 대한 논의가 오르내렸다.

  사또(佐藤信淵)2)란 자는 그의 저서 혼동비책(混同秘策)이란 가상의 전쟁각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쓰에(송강-松江)와 하끼(적-荻) 등 병선에 많은 화기를 싣고 조선국 동쪽에 이르러 함경, 강원, 경상 3도의 여러 고을을 공략할 것이며, 하까다(박다-博多)의 병사는 많은 병선을 동원하여 조선의 남해안에 상륙하여 충청도를 점령, 황국의 군현(郡縣)으로 예속시키고 계속 진군 또 진군하여 발해(勃海)에 일본제국의 군사적 위엄을 만방에 떨쳐…운운.'

  이렇듯 동북아시아에 대한 정복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이에 동종하는 패거리도 많았다.

  하시모도(교본좌내-橋本左內)의 만한경략론(滿韓經略論), 요시다(길전송음-吉田松陰)의 조선공략론(朝鮮攻略論), 히라노(평야국신-平野國臣)의 해외정벌신무필승론(海外征伐神武必勝論)등 비슷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북으로는 북해도(北海道島)를, 남으로는 오끼나와(충승-沖繩)를 아우르며 소련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고 동북지방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를 개시하게 된 것이며 조선반도를 장악하기 위한 음모가 그 중 제일 선두에 꼽히고 있었음은 거듭 말할 여지도 없다.

  이때의 주장은 '부국강병과 아시아 연대'라는 입장이므로 후꾸자와(복택유길-福澤諭吉) 같은 자에 비하면 온건한 파로 인정받는다니 그들의 대륙진공은 필사적인 것이다.

  작고 못난 왜놈의 종자(種子)로서는 동양열강(東洋列强)과 어깨를 겨룰 수 없으므로 유신(維新)을 통해서 대개혁을 이루려 한다면 이 열세한 종자부터 갈아치우자고 주장한 자가 후꾸자와다.

  그리하여 서양종자와 우성결혼(優性結婚)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고, 한편 일본 민족이 사용하고 있는 문자를 없애고 프랑스어를 그대로 옮겨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후꾸자와라는 소위 일본의 선각(先覺)들의 착안이다. 이 극단적인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그들의 화폐 그림에서도 눈여겨 볼 수 있다.

  현재 일본 TV에 나오는 광고 모델은 대개 서양인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들을 내세워 보았자 신통한 이미지를 살릴 수 없을 뿐더러 민족개조라는 대명제 아래 어깨가 딱 벌어지고 키가 크고 다리가 길쭉하게 늘어져 있으며 근육질이 단단하게 박혀 있는 모델을 계속 활용하여 그들 국민들로 하여금 선망(羨望) 하도록 유도하는 획책의 하나다.

  그들이 뽑는 미스일본도 프랑스 여인처럼 생긴 여성을 선호하는 것을 보더라도 상당히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일부 이웃 한국인들 가운데에는 무조건 왜놈 것이면 사족을 못쓰고 그대로 닮아 보려는 폐단이 있어 염려된다.

*註1)德川幕部와 같은 명사는 이미 우리말 나름대로 불러 오던 것이니 만큼 그대로 덕천이라 부른다.

   2)佐藤,또는伊藤은 사또, 이또로 불러도 무방하나 伊藤博文 등은 "이등박문"으로 읽어도 무방함.

   낙엽 한 자락 

  일본이 조선을 넘볼 그때는 바야흐로 동서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식민지 확장을 획책하던 19세기 초엽으로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집어삼키며 거침없이 비대한 제국으로 팽창해가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 일본의 경우도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홀란드, 러시아에 의하여 강제로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있었다. 하지만 약삭빠르게도 이러한 방법을 역이용하여 조선을 불과 20여년이 채 못되는 사이에 병탐하려 들었던 것이니 과히 이러한 방면에는 천재적인 소질을 갖추고 있는 풍신수길의 망령이 스며있는 종자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한번 임진·정유때 풍신수길이 조선에 병력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과 똑같은 '터지기 직전의 고무풍선'처럼 일본 민족에게 주어진 운명적 윤회(輪廻)는 역사의 반복과 더불어 결코 피할 수 없다.

  풍신수길이란 자는 원래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이나 주인인 적전신장(織田新長)에 의하여 우연히 발탁된 요물인 것이다. 모양은 일본원숭이를 닮았다고 하고 체구는 비록 작으나 꾀가 많고 영리해서 그 주인을 홀리기에는 딱 알맞은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추운 어느 날 아침, 수길은 품속에 주인의 신발을 품고 있다가 주인의 환심을 얻게 되고, 바람부는 낙엽이 뒹굴고 있는 어느 가을 날 한 개의 낙엽을 남겨두면서 그의 주인에게,

  "가을이 일찍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낙엽 한 자락을 남겨 두었습니다."

라고 말하여 그의 주인의 마음을 여지없이 휘감아 버린 간악하기로 천재에 가까운 자였다. 마침내 그 주인을 죽이고 주인의 아내까지 강제로 취하였던 배은망덕한 자이다.

  그는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대륙의 강자 명(明)까지 아울러야 한다는 기발한 착상을 늘어놓음으로서 아직까지도 그의 이 망상을 잊지 않고 그를 신이라고 믿을 정도로 맹신(盲信)하는 자가 많다.

  이 불쌍하고 가엾은 종족은 또 다시 근질거려 오는 그 잔인한 습성을 자제하지 못하여 무기를 만들고 병사를 훈련시켜 남의 나라에 쳐들어 갈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볼 때 과거를 들춰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숙명에 따라 패망의 철퇴에 으깨어진 등을 구부리고 현해탄을 건너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들의 누이와 계집들이 정복군의 가랑이 밑에 누어 요분질 떨며 달라벌이를 또 하게 될는지, 아니면 이번에는 종자도 씨도 말라 영원히 잊게 될 까마귀 망령들이 될지도 모를 사건이 서서히 무르익어 가고 있음이 불을 보듯 확실하지 아니한가?

  전 세계를 그들의 영토로 삼겠다는 망상을 한다는 그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이 병, 이 병이야말로 기름을 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무서운 병임에 틀림없건만 이들과 이웃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이웃을 잘 만나야 편한데 우리의 이웃은 극악(極惡)함이 골수에 들어 박혔다.

   정한전략(征韓戰略)

   풍신수길이 망상에 떨며 일으킨 임진·정유왜란에 대하여 학자마다 그 평가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마무리 지워지는 의견은 다음과 같다.

  임진란 이전의 왜와 조선의 관계는 조선이 부모이고 왜는 의붓자식 취급했었다.

  해마다 계절 따라 왜로부터 조공을 받아 왔으며 흉년에 식량을 얻어가기도 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들의 국내가 어수선함을 틈타 계통과 절차를 어기고 도적질을 해 가는 일부 무리도 없지 않았다. 고려말과 조선초에 극성을 부리던 왜구들이 바로 이런 종류의 도적 떼들이었던 것이다.

  국내정황이 점차 안정되었던 조선 초기에는 신하의 예를 갖추고 봉작을 받어가면서 식량을 얻어가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조선을 받들어 모시던 불평등한 관계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마감, 덕천막부가 들어가면서 그들과 조선은 수신사를 보내고 그 이전 예속적 불평등 관계로 전환한 것이 바야흐로 임진왜란 이후의 큰 변화였는데 이것이 훗날 엄청난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외교관계를 통하여 오는 동안 조선은 일본을 알기를 우습게 알고 얕잡아 봤지만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서양에 의하여 강제로 개화되면서부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오히려 조선을 우습게 알고 조선을 병탐하려는 야심을 또 다시 불러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1868년 1월, 막부의 세력이 쇠퇴하고 왕정을 복고한 세력에 의하여 조선에 이 사실을 통고하는데 의례적으로 대마도주를 통하여 문서를 보내게 되었다.

  문서에는 '황상(皇上)' 또는 '봉칙(奉則)'이라는 황당무계한 글귀를 넣어 보냈으니 그 당시 조선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강경파인 무리야마(삼산무-森山茂)등과 교섭사절의 일원인 사다(좌전소일랑-佐田素一郞)는 건의하기를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고 그 부관 히로쓰(광진홍신-廣津弘信)는 무력으로 정복할 것도 요구했다. 그들은 1870년부터 5년동안 줄기차게 주장했는데 이는 임진년 침략때 실패한 경험을 참작해서 다음과 같은 작전을 펴자고 했다.

  "조선은 단연 병력으로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선 10개 대대는 대장이 통솔하되 왕성을 공략하고, 6개 대대는 소장이 이끌고 경상, 전라, 충청도로 진격하고, 또한 소장이 이끄는 다른 4개 대대는 강원 경기로 진격하고, 또 다른 10개 대대는 압록강을 거슬러 평안, 함경, 황해 3도를 진격하면 50일만에 반드시 조선 국왕을 포로로 할 수 있습니다."

  1875년 4월 23일자 건의서에 보면,

  "쇄국정치를 하는 조선을 가볍게 정복하려면 지금 군함 2척을 은밀히 파견, 조선과 대마도 사이 해로를 측량하면서 위세를 보여주면 교섭체결에도 유리할 뿐더러 조선의 복잡한 해역을 미리 측량하여 훗일의 큰일을 도모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여 외교교섭을 하는 척 하면서 이미 공략을 위한 계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안심일도(安心一到)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운양호(雲揚號), 춘일호(春日號), 정묘함(丁卯艦) 3척을 보내어 무력시위를 하게 하였는데 그 당시 그들의 해군은 철함 2척, 철피목함 1척이 전부여서 모두 동원한 셈이다. 이 때 운양호의 함장은 구주(九州)출신 이노우에(정상양형-井上良馨)란 해군소좌였다.

  운양호는 1875년 4월부터 부산 앞바다에 출몰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 있는 함대침략인 것이다.

  5월 25일 부산항에 예고없이 진입하여 연습을 한답시고 대포를 쏘면서 조선 관원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9월에는 영종도 부근에 정박하여 초지진으로 접근하자 조선 군사들이 포격하자 이에 응수하여 9월 21일 마침내 함포 사격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35명을 살해, 16명을 납치하였다. 그러나 사망 1명, 부상 1명이란 보고를 하고, 포격은 조선과의 외교교섭을 성사시키기 위한 계획된 시위이므로 국제간에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일본은 이미 내각차원에서 무력시위를 통하여 조선과의 교섭을 촉진시키는 것은 당연한 행위이며 정당행위라고 감싸고, 오히려 운양호에 대한 포격으로 손해를 보았으니 이를 배상하라는 억지를 부리면서 수호조약까지 체결하려고 획책했다.

  훗날 산변건태랑(山邊健太郞)같은 일본학자도 조선병합소사(朝鮮倂合小史)란 그의 저서에서 논하기를

  "이 배상요구는 괴이하다. 조선 포대의 사정거리가 짧아 운양호까지 도달할 수 없었으므로 운양호는 손해를 볼 수도 없었다. 오히려 예고없이 진입한 운양호쪽이 잘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1876년 2월 26일 전문 12조로 된 문건이 소위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이란 이름의 불평등조약으로서 마침내 왜놈의 식민지가 되는 길로 들어서는 어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강화도 사건의 목적은 배상에 있음이 아니라 조선으로 하여금 먼저 개방을 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1876년 1월 6일 전권대사 구로다(흑전청륭-黑田淸隆) 일행은 품천(동경-品川)을 출발하였다.

  군함 맹춘(孟春) 등 6척의 함대를 이끌고 거포 10발로 해전연습까지 하면서 1월 30일 강화도에 도착하여 협박공갈하자 2월 26일 전문 12조의 강화도조약이 어이없게 맺어졌다.

  이러한 조약방식은 1854년 3월 3일 미국 페리함대의 위협에 굴복한 신내천(神奈川)조약, 1858년 6월과 9월 사이 미, 영, 러 불, 화란 등 5개국과 체결한 안정(安政)조약을 뽄딴 것으로 당시 세계 열강들이 식민지 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실천하는데 불과 20년 만에 터득한 술책을 시험한 것이다.

  이보다 20년 전에 타계한 정약용(丁若鏞)이 장담하기를,

  "앞으로 일본은 결코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비로소 공맹자(孔孟子)의 학문을 배웠으며 길들여졌다. 앞으로 일본은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받들지 언정 침략할 리는 전혀 없을 것이다."

했다. 조선의 제일 가는 석학(碩學)의 판단이 이 정도이니 당시 우리 국내의 판단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강화도조약 7조에는, '조선의 연해도서와 암초를 측량코자 하니 일본국 선박이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인준한다'라고 하여 곧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지도를 만들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일군참모 본부조례 제9조에, '조선과 청국연해의 유사시 참획의 도략을 준비한다'와 같고, 조선정복 코스로 진입함이 틀림없었다.

   공갈일성(恐喝一聲)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준비를 하면서 풍신수길은 조선과 직접 전쟁하는 것을 피하고 바로 중원 대륙 깊숙이 침략함으로서 명나라의 항복을 받으려고 했다. 이는 전략상 군사력의 낭비를 줄이려는 속셈이었다. 당시 조선측 수신사로 다녀온 사람들도 그 눈치를 알아차리기는커녕 충성을 가장한 외고집만을 피움으로서 선조에게 아첨할 기회만 주었으니 천하간웅(天下奸雄)이라 자처하는 풍신수길의 의도(意圖)를 조금도 헤아린 자가 없었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오면서 동래부사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행동도 공격의 구실은 오로지 '명나라를 칠 테니 길만 빌려달라'는 수작으로 두 가지 속셈을 아울러 노리고자 한 것이다.

  300여년이 채 안된 그 때, 또다시 그들은 공격을 하기에 앞서 싸우지 아니하고 조선을 병탐할 궁리의 하나로 외교조약이라는 음흉한 수단을 먼저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강화도조약의 강행도 대륙침공을 위한 첫 단계로서 만일 이 조약이 성사되지 않았으면 조선과의 전쟁도 하여야 한다는 명치 9년(1876년) 1월 9일 작성한 '육군문서'도 있다. 그 핵심은 아래와 같다.

  '조선국과의 개전에 임하여 우선 1개 사단을 출정시키되 군함 5척으로 상륙을 돕게 한다. 전략물품은 탄약과 공성기계, 식료, 피복과 석탄… 으로 하며 제2출정 사단을 편성하여 일본중서국에 배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고, 일왕도 대판(大版)으로 이주토록 하여 출정군의 본영으로 삼을 것'이란 내용을 봐도그 음흉함이 짐작된다.

  이 조약에 의해서 다음 해 10월 하나부사(화방의질-花房義質)가 대리공사의 자격으로 부산에서 남서해안을 끼고 측량하면서 북상, 11월 25일 조선정부가 외국인 성내(城內) 거주를 허락하지 않아 서대문 밖 청수관에 여장을 풀었다. 1878년 5월에는 동해안을 측량하면서 시위를 벌리기도 하고, 12월에는 부산항에서 동래부가 세금을 징수한다는 구실로 육전대를 상륙시켜 강압적으로 세금 징수를 못하게 하였다. 또 이를 구실 삼아 다음 해 4월 야마사끼(산기경칙-山崎景則) 소좌는 동래부사 윤치호와 판관 현석운에게 칼질하여 해를 입히고 주민들이 반항하였다는 구실을 들어 마침내 인천과 원산을 개항시키고 1880년 4월 17일 처음 일본 공사관을 두게 되었다. 공사관원 중에는 6명의 군인을 포함 40명의 관원이 근무하게 되었으니 이 6명은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이 땅에 주류(駐留)한 일본군이기도 하고 2차 왜란을 도발시킨 정복자 일본 군대이기도 한 셈이다. 그 악명은 미즈노(수야승의-水野勝毅) 보병대위, 마쓰오까(송강리치-松岡利治) 보병중위, 4명의 하사관이었다.

  이들은 조선인을 사주하여 조선내의 전략정보를 수집하는 일과 장차 조선 정복을 위한 친일파 양성을 위한 작전과 동족 분쟁을 사주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 이 때부터 친일파라는 종자도 태어나 민족의 오장육부를 요절내고 동포의 심장을 도려내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된다.

  친일종족은 끊임없이 태어나고 끊임없이 명멸하면서 아직까지도 끈질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친일종족의 잉태 

나에게 삼척 보검이 있으니 피맛 못 본지 몇 해이던가 (我有寶刀三尺强 血痕難認譏星霜)
경성의 이 밤에 한바탕 개와 양을 번개처럼 베이리라 (京城今夜一宵夢 紫電光中弊犬羊)

  공사관주재 무관 미즈노 대위가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때 일부 군인이 일본공사관으로 몰려오자 칼을 뽑아들고 독전하면서 외치던 것인데 경성부사(京城府史-제1권  p499)에 남아 있다.

  놈들의 눈에는 조선인이 한낱 개와 양처럼 보였으며 그러한 생각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장차 이 글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해서 똑똑히 증명해 보이리라.

  바야흐로 동족상잔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일본은 친일세력을 양성하고 매수하여 방탄막으로 이용하였다. 친일세력이 점차 정부요직에 천거되고 종교, 문화, 의술, 상업, 사상 등에 관여시킴으로서 일본을 반대하는 세력의 앞잡이로 내세웠다. 동족끼리 다투게 함으로서 방휼지쟁 어부지리(蚌鷸之爭 漁夫之利-황새와 조개가 서로 싸우다 둘 다 어부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고사)를 노리고 있었으며 그 당시 나라를 걱정했던 분들의 글에서 많이 인용되면서 경고하였건만 이를 깨닫는 이가 없었고 다투어 친일파 되기를 자원하는 자가 늘어만 갔다.

  임오군란 역시 동족상잔을 꾀임당한 사건 중 하나이다.

  1881년에 별기군(別技軍)이란 신식군대를 창설하고 일본 공병소위 호리모도(굴본예조-掘本禮造)로 하여금 교련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 처우에 있어서도 구식군대와는 현격한 차이를 두어 구식 군졸들의 반감이 점점 더 고조되어 갔다.

  이것은 군란을 유도하기 위한 계략의 첫 번째이다.

  일본 상인들은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고 한성에는 쌀값이 금값이 되어 군량(軍糧)창고지기들을 매수 당하도록 유도하였으며 이로써 모래 섞은 녹미(祿米)가 배급되니 이것이 그 다음 두 번째 계략이다.

  분통이 극도에 달한 구식 군졸은 별기군 교관 굴본예조 소위를 죽이게 되는 반일감정 자극의 묘책을 써서 군대 증강 투입의 구실을 만들었다. 이러한 공식은 영국이 저지른 아편전쟁, 일본이 꾸민 천진폭동, 상해사변 따위가 모두 이런 유형의 군사침탈 모략방식이며 군사도발 핑계로 이용했다.

  '북한에 핵무기가 있다' 또는 '남북이 통일되면 군사력이 극동에서 가장 강대하다'는 등 떠들며 핵무기를 공식적으로 개발하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의 현대판 음모가 목전에 와 있기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식의 차이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별기군의 모집은 주로 당시 친일파에 속하는 대신들의 자제 100명을 뽑아 편입시킨 것이 특징인데 얼마 안 되는 신식소총을 본 친일파들이 민비를 꼬드겨 이러한 비극의 알을 잉태하였다. 이 알이 뱀알처럼 부화되면서 탈은 조선인의 탈을 썼으되 행세는 엉뚱하게 왜놈 행세를 하면서 같은 동족을 수없이 많이 물어 죽이고 잡아죽였다.

  반만년이래 처음 우리 한민족이 스스로 민족부흥의 기회를 맞이하였었는데 아깝게도 왜놈과 친일놈들의 등살에 못 이겨 민족과 국토마저 팔아먹는 비극을 연출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바보 청춘들(馬鹿靑春) 

  불과 몇 명의 왜놈이 죽은 일을 사건으로 만들어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자구책이라는 명분을 살려 군대 주둔을 적극 추진해서 점점 침략의 마수를 뻗쳐보려고 제 4단계 공식을 인용하려 했다.

  1882년 7월 31일 일본국 각의에서는,

  '만일 담판이 어려울 경우에는 군대로 하여금 인천을 점거하고 거제 또는 울릉도를 점령하므로서 계속 배상을 촉구하는 것이 타당한 방책이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군함 4척의 비호를 받은 1200여명의 대병력이 인천에 도착했고 육군소장 다가시마(高島柄之助) 해군소장 니이레(인례경범-仁禮景範)가 육해군의 우두머리이며 그 중 대라우찌(사내정의-寺內正毅)가 당시 소좌로서 보병대대를 이끌고 따라왔었다. 이 자는 후일 조선 총독으로 와서 못된 짓을 하던 자이다.

  청국군함이 이미 하루전 8월 1일에 4000명의 병력을 끌고 인천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마건충, 오장경, 원세개(馬建忠, 吳長慶, 袁世凱)가 그 우두머리였다. 청국군대는 대원군 이하응이 불러들인 것이다.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성내로 공사관을 옮겼다. 지금 충무로 2가에 있었던 이종승의 집과 을지로 2가에 있는 장락원에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이는 국법으로 금지하였던 것을 어기고 쳐들어 온 것이다.

  이로서 8월 30일 일본함대 위에서 제물포조약이 맺어졌는데 그 내용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본 공사 내에 병사를 약간 둔다. 병영의 설치와 수선은 조선국이 책임진다. 장차 조선국이 법률을 지켜 난동하는 일이 없어 병력이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철수할 수도 있다.'

  조선 대신들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간교한 장난을 쳤으며 오늘의 외교 문서상 웃음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로서 일본은 몇 놈의 고깃덩이를 흥정거리로 걸고 침략의 제 1보인 주병권(駐兵權)을 확보하고 장차 무력으로 조선을 전복할 채비를 완벽하게 쌓아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누어서 팥떡을 먹듯이 조선을 병탐하려는 일본의 술책은 바로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화란 등 서방국가가 식민지를 만들어가던 교과서를 각본 삼아 그대로 빈틈없이 진행되어 갔다.

  그 다음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이란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적 배경은 청국군대 4000명이 한성을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왕실은 대원군에 의하여 반일파가 장악하고 있어 일본으로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 대세를 장악하여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은 1884년 11월 4일 개혁의지에 불타고 있는 젊은이 서광법, 김옥균 등에게,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청병 쫓는 일은 우리 1개 중대로서 가능하다."

라고 했으며 새로 부임한 다께조(竹添進一郞) 공사의 다음과 같은 본국 보고서에도,

  "청국의 현재 병력은 우리 1개 중대로서 충분히 격퇴할 수 있고 그(김옥균?)를 보호할 준비도 되었음."

등 왜놈들이 철없이 마구 짖어대는 호언장담에 이 광경을 바라보던 김옥균을 비롯한 당시 신세대로 자처하던 조선의 젊은이들은 그만 넋을 잃고도 남았을 것이다.

  1884년 12월 4일 21시 우정국 낙성연에 변란을 유도한 일본군은 청군에 의해 도륙이 되면서 김옥균 등을 앞세워 도망간 3일천하란 연극이 역사의 현장으로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섭섭하게 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도 거의 허풍과 무모가 앞선 한낱 무리들의 호언장담이 낳은 결과였다.

  단 150명의 깡패집단으로 4000명의 훈련받는 중국군대를 쳐부술 수 있다는 발악에 가까운 왜인들의 호언에 정신을 잃어버린 김옥균 등 친일개혁파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역사는 아직도 침묵으로 왜곡시킨다.

  왜놈들은 가끔 한두 번씩 적극적으로 들먹이는 과거지사에 대하여 조선의 언론은 거품처럼 흥분하다가 잠이 들고 말지만 놈들의 전략은 지금도 시시때때로 천년을 두고 이어지고 있음을 알면서 사는지, 모르면서 굼벵이처럼 사는지…….

  반복하는 역사의 움직임에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들! 그들도 어른이 되면 건망증에 휘감기는 토끼들이 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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