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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동의 혁신유림 革新儒林

작성자이관희-태자-별좌|작성시간07.10.08|조회수53 목록 댓글 0
안동은 1881년 영남만인소를 시작으로 1894년에는 한말 최초의 항일 의병을 일으킨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며 그후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고, 뛰어난 지도자를 배출한 곳으로서 가장 늦게까지 독립운동을 한 곳이다.
갑오 의병이후 안동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이 이어져오다가 1910년 이후에는 수많은 명문거족들이 고향의 선영과 전답을 버리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독립투쟁에 나서게 된다.

당시 안동지역인사들이 얼마나 많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가는 전국 자치 단체별 평균에 비해 무려 20배가 넘는 독립 유공자의 숫자에서 알 수 있다. (예 : 서울이 202명, 충북 전체 332명, 안동시 247명)

강점기 독립운동 단체를 구성하고 이끌어 온 인사의 절반이 안동 출신 인사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양적, 질적으로 조국의 독립에 기여한 인사를 많이 배출하였다. 특별한 경제적 기반도 없고, 서구 문물의 수용도 늦은 안동 땅에서 그토록 많은 독립 인사들이 배출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또 그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어디에서 어떤 활동들을 했을까?

그 해답은 안동에 흐르고 있던 퇴계학의 정신에 있었다.
그들은 바로 퇴계학맥을 이어온 정통 유학자들이었고, 당시의 안동은 퇴계학통이
온전히 계승되어 그 사상이 뿌리깊게 남아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유교란 격식에만 얽매이는 고루하고, 현학적이고, 이상주의적이고, 보수적이란 이미지로 왜곡되어 있지만 19세기 말 20세기초까지 퇴계 유학의 근본이 살아있던 시기에 유학은 참된 인(仁)과 의(義)를 소중히 생각하는 가장 '민본적'이고 '민주적'인 사상이었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정통 유학자들에게 유교적 이상의 구현이 바로 독립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대표적 인사들 중 한 갈래는 이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동산 유인식등 안동의 명문거족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요람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며 독립지사를 양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셨던 분들이다.

다른 한 갈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운동가 혹은 아나키스트로서 항일 활동을 벌이며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가일의 권오설, 풍산 하리의 이준태, 탁청정 후손인 김남수, 안상길 등 양반 유림출신 지주들이 일인지주나 친일 지주에 대항하여 소작인들의 권익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국가유공자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일부 학자들의 연구서 속에서만 숨을 쉬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또 다른 갈래로는 국내외 의열 투쟁의 선두에서 활약하였는데 김지섭과 김시현, 김정섭 등은 동경 일본왕궁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열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안동은 그 어떤 개화 운동가들 보다 혁명적이고 진보적 사상을 지닌 인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들을 우리는 "혁신 유림"이라 부른다.

이들 "혁신유림"들은 그 사상과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 항일 독립투쟁의 맨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혁신유림은 가장 보수적인 유림이었지만 스스로가 보수를 뚫고 혁신으로 나아가며, 개화와 계몽운동에 앞장서고 독립운동을 통하여 근대화에 앞장섰던 위대한 사상가이며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그것은 안동의 유교정신이 근왕주의에 빠진 보수적 유학이 아닌 '민본'에 바탕을 둔 이상적 유학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유교적 이상을 실천하려 했던 "혁신유림"들의 계몽과정에서부터 그들이 민족과 백성을 위해 자신의 영달을 버리고 황량한 이국땅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과정을 되짚어보며, 일제이후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유교적 정신을 100여 년만에 되찾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만주의 독립운동과, 새롭게 인되어야 할 혁신유림의 활동과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인들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좌표를 정립코자 한다.




보수에서 혁신으로

방송일시
2004년 8월 14일 오후 9시 45분

(1) 프롤로그...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대표적 무장 독립투쟁으로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를 손꼽는다. 이 두 전투를 이야기 할 때면 국민 누구나 김좌진장군과 홍범도장군을 떠올린다. 걸출한 두 장군의 뛰어난 지략으로 역사에 남을 전승을 거두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온 사실은 두 장군의 휘하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며 전선에 뛰어들었던 이름 없는 수많은 장병들이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 해답이 바로 신흥 무관학교에 있다.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 참여했던 독립군의 초급 및 고급 지휘관 가운데 350여명이 신흥 무관학교 출신이었다.
1911년 이국 땅 만주에서 망명객들에 의해 설립된 신흥 무관학교는 1921년 폐교될 때까지 박두희, 백종렬, 오상세, 지청천, 이범석, 김원봉을 비롯 3,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 3,500 명의 졸업생들 중 대부분이 훗날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의 주력이 되고, 일부는 임시정부의 핵심요원들이 된다. 뿐만 아니라 13명의 의열단원 가운데 8명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결국 신흥무관학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우리 독립운동사에 지대한 역할을 한 신흥무관 학교는 누가 세웠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그 해답 속에 안동 출신 '혁신유림'이 있다.

(2) 안동 출신 혁신유림들의 만주에서 독립운동

- 도만과 정착
1910년 한 겨울, 고희를 바라보는 노학자 백하 김대락과 역시 환갑을 넘긴 석주 이상룡 등 안동의 유림들이 가까운 일가와 동지 50여 가구를 거느리고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통해 서울의 양기탁, 신채호등과 교류하며 조국광복을 위한 국외의 독립기지 건설에 뜻을 함께 하기로 했었다. 경술년 일제에 의해 이땅의 국권이 찬탈 당하는 비보를 접한 노 선비들은 선영과 문전옥답을 버리고 험난한 망명의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일행 가운데는 만삭의 임산부인 백하 김대락의 손부도 있었다. 백하는 더렵혀진 땅에서 손자가 태어나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서간도에는 우당 이회영 가문의 6형제와 가솔들이 먼저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11년 서간도로 온 이들의 첫 사업은 국권회복과 민단 자치의 중추기관으로 추가가에 '경학사'를 설치하였고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짓게 하여 동포들의 굶주림을 벗어나게 하였다. 석주는 경학사의 사장으로 추대된다. 이후 경학사는 독립운동 망명객들이 조직한 자치단체 부민단으로 3·1운동 전후에는 한족회로 개편 발전하였다.

-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혁신유림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독립운동과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휴(용맹한 군대)라 칭한 무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비용은 우당 6형제가 준비한 막대한 자금에서 충당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은 이미 오래전 서울의 상동교회에서 양기탁, 이동녕, 이회영등 선각자들이 모여 해외 무장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안동의 유림들도 그 뜻을 같이하여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 설립 초기 안동 유림들의 역할
초대 교장에 석주 이상룡, 교관엔 협동학교 교사였던 이관직, 동산 유인식의 '대동사', 이원태의 '지리서'와 석주의 '대동역사'가 교재로 쓰였다. 교가는 석주의 아들 이준형이 작사하는 등 안동출신 인사들이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체로 활약하였음을 보여준다

- 신흥무관학교의 교과과정과 학습내용은?
교과과정은 초급군사과정에서부터 고급 장교과정까지 나누어져 있고 학비는 무료였다. '아리랑'의 작가 김산도 신흥 무관학교 출신이다. 그의 회고록과 졸업생들의 회고를 통해 교과과정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연변대학과 독립기념관에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서도 교육내용과 생도들의 생활을 알 수 있다.

- 신흥무관학교의 변천과 안동 출신 유림들의 역할

추가가에서 마지막 백서농장까지 처음 문을 연 이래 10년 동안 이곳 저곳 옮겨다니며 갖은 고초 속에서도 독립군 양성의 맥을 이어갔던 현장들. 특히 우당이 귀국해 일경에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백서농장을 꾸렸던 일송 김동삼을 비롯한 안동출신 인사들의 신흥무관 학교에 대한 애착들을 엿볼 수 있다.

- 만주에서의 삶

그 과정에서 안동에서 도만한 노학자들과 가솔들의 삶을 석주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의 생전 육성과 우당 선생의 부인 김은숙 여사의 회고록을 통해 알아본다.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간난 신고의 세월을 살아온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활약

신흥무관학교의 개교는 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분수령이 되었다. 1911년 5월 개교부터 1920년 7월 안도현 산림지역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만주라는 척박한 땅과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3,500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신흥무관학교의 교육 이념에 따라 숭고한 정신으로 무장하여 중국전역, 러시아령, 국내까지 잠입하여 해방 전까지 항일독립전사가 되었다.
1920년의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의 주역도 이들이요,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의열단까지 이들이 모두 주역이었다. 또한 이들은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독립군 사관생도 모집 활동도 전개하는 등 구국 대열에 주저없이 몸을 던졌다.

이러한 사실은 연변대학과 독립기념관에 남아있는 신흥무관 학교 졸업생 명단, 만주에서 항일무장 투쟁 사료, 그리고 일본 정부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된 청산리 봉오동전투 보고서 등에 나타나 있다.

- 신흥무관학교 폐교 후 안동 유림들의 행로

192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에서 독립운동은 여러 단체간 노선의 차이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무렵 신흥무관학교도 문을 닫게 된다. 이때 사분 오열되던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석주는 동분서주하고 마침내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초대 국무령에 취임한다. 동산 유인식, 일송 김동삼 등도 초대 임정에 핵심적 인사로 참여 한다.

- 만주로 건너 갔던 혁신유림들의 못다 이룬 꿈

그러나 생전에 보지 못한 조국 광복의 꿈. 백하, 석주와 함께 만주로 건너갔던 유림들은 모두 서러운 이국 땅에서 한 맺힌 생을 마감해야 했다. 가난과 싸우면서도 조국 광복의 꿈을 놓지 않고 선비적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그들의 마지막 여정들을 돌아본다.

(3) 2004년 여름 임청각에서...

석주 선생의 구택으로 99간 고가인 안동시 법흥동에 위치한 임청각. 그 한 켠에 단아한 정자가 하나 있다. 바로 군자정이다. 1910년 나라를 찾기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떠났던 군자정의 주인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근 백년의 세월이 지나, 선생의 후손들은 쇠락해 가는 고가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이 집을 안동시에 헌납하겠다고 했다. 조국이 광복된지 60년, 비록 반쪽이긴 하지만 석주를 비롯한 혁신유림들의 꿈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국을 위한 그들의 헌신에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보답해 왔는지 주인을 잃고 쇠락해 가는 군자정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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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들

방송일시
2004년 8월 15일 오후 9시 45분

(1) 국내에서 안동 혁신유림들의 활발한 독립운동

안동출신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지닌 인사들이 만주에서 집단촌을 건설하고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 역할을 한 반면 국내에서도 많은 인사들의 주도하에 계몽운동과 다양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안동의 3.1운동은 어느 지역보다 격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안동의 시위는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당시 일본외무성 기록으로는 경북의 피살자 수를 25인이라 기록하였으나 안동에서만 40인이라고 전해지며 명단이 전해지는 인사만 해도 임동면 시위 7인, 임하면 시위 5인, 길안면 시위 2인 등 14인에 달한다.

임동 시위는 면 단위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소송에 회부되었고,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최고 형량이 3년인데 비하여 임동 시위를 주도한 전주인 유연성은 7년형을 선고 받았다가 끝내 옥사하기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안동인은 유림단의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특히 파리장서라 불리는 제1차 유림단 의거에 향산 이만도(퇴계선생의 후손)의 아들인 이중업과 손자인 동흠과 종흠, 김응섭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파리장서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개최된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인이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청원서를 보낸 일로서 김창숙 이중업 곽윤등이 주도하였는데, 여기에는 당대의 유림 137인이 서명하였다. 안동인으로는 하계의 이만규 주진의 유필영(동산의 부친), 천전의 김병식 무실의 유연박, 금계의 김양모 등 많은 사람이 서명하였다.

(2) 안동 유림들의 독립운동 형태의 변화 과정

- 위정척사운동 : 척사유림

안동은 1881년 전개되었던 영남만인소의 지원지였다. 이 영남만인소는 전국의 유림이 위정척사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반외세를 목표로 연대투쟁을 전개한 시발이 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 위정척사상은 의병전쟁의 사상적 바탕으로 작용하고 일부인사들이 의병으로 변심함으로써 위정척사운동은 의병전쟁이라는 또 다른 모습을 나타나게 된다. 1894년 갑오의병은 청풍의 유생 서상철이 안동으로 와 의병을 일으켰음은 안동지역의 반외세적 특성과 관련이 크다. 서상철의 안동의병은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으로 평가된다.

을미의병은 1895년 8월 명성황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을 비롯하여 을미개혁 즉 단발령을 도화로 김도화, 김흥락, 류치호등 대표적인 영남유생들이 의병을 모아 안동 관찰부를 공격, 점령하였다. 이러한 항일의병운동은 1945년 독립 때까지 국내·외에서 계속 전개되었다.

- 퇴계 후학들의 순국 : 개신유림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를 읽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한 인물이 가장 많이 나타난 곳이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목숨을 끊어 순절한 인물이 전국적으로 66인이었는데 안동에서 순절한 인물이 10인으로 풍산인 죽포 김순흠을 비롯 향산 이만도, 동은 이중언, 회은 유도발 부자 권용하, 우헌 이현섭, 김택진, 이명우 부부 등이 자결하였으며, 영해 앞 바다에서 절명시를 읊고 入海殉死한 벽산 김도현은 안동인은 아니지만 안동을 주무대로 활동한 인물로서 향산 이만도의 제자이기도 하다.

- 계몽운동 : 혁신유림의 등장

안동의 대표적 계몽운동가 류인식은 일생에 걸쳐 척사유림에서 개신유림으로, 혁신유림으로의 길을 밟는다. 그는 성균관에서 신채호를 만나 교류하면서 사상과 행동에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그는 귀향하여 경북북부지역 계몽운동의 효시인 협동학교를 설립한다. 이런 혁신유림의 대표적 인사들이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등 안동의 명문거족을 대표하던 분들이다.

이들은 신서적을 읽고 혁신적인 사고를 가지며 진보적인 활동에 앞장섰다. 먼저 노비문서를 모두 불살라 노비를 해방하고 협동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실시하고 단발을 하였으며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앞장서게된다.

협동학교는 경북북부지역 계몽운동의 효시로 3년제 중등학교로 출발하여 17개 과목으로 1908년부터 1918년까지 약 8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 졸업생은 대다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협동학교는 근대 지향적 사상이나, 외세 침략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자주적 노선에서 모두 선두에 서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우리나라 근대 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3) 안동이 배출한 또 하나의 혁신 유림

- 사회주의와 아니키스트들의 활동

안동지역 독립운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이다.가일의 권오설, 풍산 하리의 이준태, 탁청정 후손인 김남수, 안상길 등 혁신유림이 바로 그 주인공 들이다.

당시 다른 지역의 소작인 운동이나 노동·농민 운동은 하층 계급인들이 주도하였지만 안동에서는 양반 유림출신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지주들이 일인지주나 친일 지주에 대항하여 소작인들의 권익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안동출신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안동지역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그 영역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오미동 출신 김재봉은 조선공산당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고, 권오설은 고려 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되어 6·10만세시위를 준비하다 피체되어 1930년에 옥사하였다.
또 국내외 의열 투쟁에서도 활약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동경의 일본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과 김시현, 김정섭 등 열사들이다.

이밖에도 안동지역의 독립운동은 일제 말기에 들어 전시수탈체제하에서는 신사 참배에 결사적으로 반대한 도산출신 이원영 목사나, 창씨 개명에 항거하여 단식 36일만에 목숨을 끊은 예안 교동출신 이현구 같은 이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육사 같은 분은 문단의 대표적 인물들이 대다수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던 1943년에 오히려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나서 중국에서 새로운 투쟁을 계획하다가 가족의 소상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후 서울에서 피체 되어 1944년 순국하기도 했다.

이처럼 안동에서는 끊임없이 항일 투쟁이 전개되었고, 또 다양한 사상을 대표할 혁신인사를 많이 배출하였다.
순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뿐 아니라 김재봉, 권오설 오직 형제, 이준태, 김남수, 안상길, 이회원, 유연술 등 공산주의운동가, 혹은 아나키스트(유림)로서 항일 활동을 벌이던 이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토양이 이토록 많고 다양한 혁신세력들을 길러낸 모태가 되었을까?
거기에는 안동의 역사와 전통, 문화가 깊은 영향을 미쳐 왔기 때문이다.

(4) 안동지방에서 혁신유림 성장의 역사적 배경

안동지방이 독립운동에서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다양한 사상을 꽃 피운 배경은 조선시대 후반기에 남인의 정치 행로가 막힌 뒤 학문생활에 몰입하면서 안동지방 유림들이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고, 학문적으로 퇴계 학통이란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통 성리학의 적장자인 퇴계의 학문은 가장 '민본적'이고 '민주적' 이념이었다.맹자이래 정통 유학은 가장 진보적 학문이고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퇴계의 학풍이 온전하게 계승되던 안동땅의 학자들이 변화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5) 근대 격변기에 나타났던 안돈의 혁신유림에 대한 평가는?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보수로 대표되는 곳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식민사관의 잔재일 뿐이다. 실제로 안동은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며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고 뛰어난 지도자를 배출한 곳으로서 가장 늦게까지 독립운동을 한 곳 일뿐 아니라 합방직후 가장 많은 순절자를 배출한 곳이다.
그리고 1960년 7월 총선 때까지 가장 진보적 성향의 투표결과를 보이던 가장 진보적인 곳이었다. 이 땅에 바로 혁신유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혁신유림"은 가장 보수적인 유림이었지만 스스로가 보수를 뚫고 혁신으로 나아가며, 그 방법과 과정에 일부 차이는 있었지만 개화와 계몽운동에 앞장서고 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위대한 사상가이며 독립운동가들이었던 것이다.

조국의 위기상황에 분연히 일어났고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며 스스로를 개혁하여 조국 독립을 위하여 온 몸을 불살랐던 혁신유림. 이들을 지배하고 있던 사상은 유학이었다.
그러나 혁신유림이 등장한지 100년, 조국이 해방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 혁신유림과 그들이 견지했던 유교적 이념에 대한 평가는 올바로 내려지지 않고 왜곡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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