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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고경-藁鞋藁經-짚으로 만든 짚신만 신겠노라.

작성자왕따노망|작성시간12.07.30|조회수91 목록 댓글 0

알고 있는 사실도 정확하게 알고 전해야 합니다.

 

연안이씨의 연안(延安)이란 이름은 延=“끊어지지않고 영원히“라는 의미가 있고 安 =은 ”만사가 걱정없이 평안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러나 이 따에 뿌리를 내린지 1천오백녕동안 이름 그대로 연년평안(延年平安)을 상징하는 명문거족의 화려한 명성만 누렸던 것은 아니였다.

우선 이조실록에도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근거로 살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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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해고경-藁鞋藁經-짚으로 만든 짚신만 신겠노라.

 

실로 가긍할 수난과 풍전등화의 참담한 위기를 만나 어느때는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면서 ●숨 죽여 살아 온 고달픈 역정도 없지 않았으며, (藁鞋藁經)

●결코 위세와 권력에 아첨하여 영화를 누리지 않았다(厭戚拒婚)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함경도 불쪽 끝 경원땅에서 야인들을 규합한 무력으로 입신한 이성계가 "왕씨고려"를 빼앗아 새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이나라를 강제통치하는 과정에서 쉽게 따르지 않는 민심을 억지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야말로 왕권찬탈과 형제박살등등,인도(人道)로서는 수긍키 어려운 만행을 자행하면서 무력으로 실세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이리하여 왕군통치(王軍統治)로 밀고 나갔였는데,이러한 광경은 이조 오백년 역사에 계속하여 정권찬탈의 수단으로 이용된 방법의한이기도 하였으며, 해방후에도 반복하여 이방원의 후손 이승만과 이기붕이 다시 권력의 맛을 못잊어 거리의 폭도들을 앞세워 민주헌법을 농락하고 대통령자리를 세습하려한 장면과 흡사했던 것이다.

 

공명심과 눈앞의 이익에 들뜬 불량자들을 규합이용 젊은 왕자 이방원은 정몽주등 당대 유력한 지도인사들을 대낮에 암살하고 순순히 따르지 않는 강성벌족을 상대하여 가차없이 재산을 몰수하고 유력자를 죽이거나 왕실의 위엄마저 유린하고 모함하여 적통임금마저 신돈의 씨라면서 폐하고 저항 할 수 없도록 무능한공양왕을 앞세우고 따르지 않는 지도층에 터무늬 없는 모함을 쒸워 벼슬과 재산을 배앗는 일이 예사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신라 고려를 이어 천여년 굳게 자리 잡아온 우리 연안이씨 역시 그 수난을 면하기 어려웠으니 "고혜고경(藁鞋藁經)"사건은 이같은 터무니없는 탄압을 말해 주는 실증적인 사례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경쟁자인 그 형제왕자들까지 도륙하고 왕이 되어 후에 태종이라 불리운 임금이 되었는데 평소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연안이씨 춘천부사 이 속(李 續)에게 늑혼(옹주사위삼기로 강혼) 할 것을 요구하자 "짚신은 짚으로 삼아 신어야 하지 않겠는가?"(藁鞋藁經)라는 비유적으로 농담한 것을 트집잡아 모든 문적을 몰수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자손3대를 금고처분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등, 당대 귀족을 역적으로 몰아 서민으로 강등시킨 가혹한 처단을 내렸으며 조상에게까지 모욕적인 공박을 주었다. 실록과 고령현부인 비석에 나타난 기록을 참고하면 춘천부사공(李 續)을 극렬하게 탄핵하는 과정에서 특히 심복들을 대거 동원하였는바 그 가운데 조말생과 하연(河演)이 더 악랄하였다. 하연은 곧 부사공의 매제 河泂의 동생으로 사건이후에는 그 형의 처까지 파혼하여 돌려 보낸다. 이런 참담한 와중에서도 이웃에 살던 정의를 잊지못한 원천석(운곡) 성석린(독곡)등 당대 지사와 문신들은 과감히 그때의 상황을 시와 일기로 그리며 남겨 지극한 동정을 금치 못하였다.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자기가 타살한 정몽주의 무덤이 연고지인 영천으로 가지 않고 도중인 용인 연안이씨 묘역입구로 안정하였다는 점도 범상치 않는 일일 뿐 아니라. 선친간에 노관지교를 들어 권력을 잡은 왕에 대하여 고분고분하지 않은 연안이씨 가문의 초연히 아첨하지 않는 태도에 그냥 보고 넘기기 싫었던 모양이다.

 

야설에 의하면 포은 정몽주(당시 55세)가 선죽교에서 이방원(당시 25세)이 졸개를 시켜 무자비하게 타살한 광경을 목격한 재상 한분(연안이씨라고 전함)이 자신이 타고 가던 교자에 포은의 시신을 거두어 갔다하고 그 상여가 포은의 고향인 경상도 영천으로 방향을 잡고 가던 중 지금의 용인 풍덕천에 이르자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며 영정이 날라가더니 인근 모현 능원리 현재의 묘상에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이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는데 이 자리는 우연스럽게도 연안이씨 묘역입구이며 이러한 기록의 이면에는 이방원의 악랄한 눈을 속이기 위한 궁여지책중 하나였을 것으로서, 그 역사의 이면에는 이러한 곡절이 추상된다.

 

당대 거유이자 이성계와 상대할 수 있는 지도자 포은 선생의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지지 않고 경기근교에 안전하게 모시게 하고 이 위치를 중심으로 재야 인사들의 집결지로 이방원과의 재대결을 위한 의미있는 재포석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역사의 이면이 역사에 뭍이고 말았지만 뜻있는 당대 인사들의 글에서 간간히 당시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오백년역사는 왕군수호(王權守護)와 신권신장(臣權伸長)의 갈등을 겪은 역사로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신권이상주의 정치를 향한 일념이 꾸준하게 이어온 역사로 부연되고 있다.오늘의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신속히 받아들이고 독제군주를 탈피하고 개혁국가로 성장할 수 있게 된 바탕역시 포은의 새로운 도학정치를 수호하려는 정치사상에 기초를 두었으므로서 더욱 빨리 성정할 수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추고컨데 터무늬없는 핑계를 잡아 대 가문을 억지 모함을 걸어 금고처분 하는 것도 이러한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신이 타고가던 교자에 포은의 남루한 시신을 수습한 그 재상역시 연안이씨중 한 분이었다고 원운곡기록에 있었다고 하나 그 운곡의 후손이 태워 버렸다하며 기록에 원운곡이 용인 구수동구 시미리 쌍훼나무마을 어귀에 머뭇거리며 당대 의기지사와 교유하며 남긴 글에서 보더라도 당시의 민감한 상황속에서 노출되어서는 않될 이러한 기록을 재대로 남긴다면 화를 당할 우려도 있어 구전으로 전하는 일외에는 추측일 뿐이다. 당시상황으로 보아 정몽주의 시신을 누구하나 용기있게 수습할 수 있었던 의인이 드물었고 그 시신조차 누구의 땅에 보안하는냐하는 문제도 서슬퍼런 이방원의 세도하에 생명이 좌우되는 문제이므로 아무도 이를 감행할 용기가 없으리라는 점은 지금이라도 역력하게 상상할 수있다. 지금도 누군가에 의해 해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역사의 기록에 생생히 남아 있다.

 

성독곡(成文景公 石璘)의 文集에 高靈郡夫人金氏의 輓詩가 실렸는데 김씨부인은 춘천부사공의 모친이다.

 

宅近常同井 (택근상동정) 우물물을 함께 길러 마시며 가깝게 이웃하여 살았고

門高幸接葮 (문고행접단) 사돈지간 어려우나 벼슬길 같아 왕래는 깊었다네

有無能共里 (유무능공리) 부귀빈천 가리지 않아 있고 없음을 차별 않으니

慈惠最宜家 (자혜최의가) 언제나 은혜롭고 자비스러움이 뛰어난 집일세

光景隨流水 (광경수류수) 빛나는 그 모습은 흐르는 물처럼 평탄하더니

音容惜洛花 (음용석낙화) 애석타 그 음성과 그 자태는 꽃잎처럼 살아지네

百年偕老願 (백년해로원) 내외분 백년해로를 모두들 바라고 바랐건만

丹旐夕陽斜 (단기석양사) 붉은 깃발 석양빛에 아득히 기울고 마는 구나

 

이 고혜고경으로 인하여 판서공후손은 모두 극도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판서공(貴山)→춘천부사공(續)→ 3형제 근강(判官公) 근건(參議公).근수(秀才公)는 3대금고로 벼슬길이 막히고 전주와 창녕등지에 관노가 되는 비극까지 밟게 되는데 이때에 손자들듸 뼈저린 고생을 지켜보시는 의정공(元. 發.)께서는 잠시 전주로 옮겨 사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묘소를 우선 완주 고산현(高山縣) 소주고개(속칭 소주치)에 모셨다가 나중에 용인구수동 현 위치로 찬장하였지만 이 사건은 태종17년에 일어나서 단종 1년까지 이니 35년간 이고 참의공(근.건.)의 차자 승지공(인.충.)과 (장자 연안군(인.문.)이 한해차이 차례로 문과에 급제하시니 이로서 참혹한 금고는 풀리게 된 것이다.

 

1400년대

1500년대

1600년대

 

延安君

 

25

 

 

 

 

 

 

 

03

 

 

 

 

 

 

 

 

 

 

 

 

 

 

 

 

 

 

 

경주공

 

 

 

 

55

 

 

 

 

 

 

 

31

 

 

 

 

 

 

 

 

 

 

 

 

 

 

별좌공

 

 

 

 

58

 

 

 

 

 

11

 

 

 

 

 

 

 

 

 

 

 

 

 

 

 

 

연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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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삼척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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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93

 

 

 

 

??

 

 

 

 

 

 

 

 

 

 

 

 

 

 

 

世安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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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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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立

 

 

 

 

 

 

 

 

 

 

 

 

 

 

 

69

 

 

 

 

 

31

 

 

 

 

 

 

 

葳壽

 

 

 

 

 

 

 

 

9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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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92

 

 

 

 

 

 

 

 

 

 

 

 

 

 

 

 

 

 

 

 

36

 

 

 

 

 

 

97

 

 

 

 

 

 

 

 

 

 

慶宗

 

 

 

 

 

 

 

 

07

 

 

 

 

 

 

70

 

 

 

 

 

 

 

 

 

 

 

 

澍盆峰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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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庭

 

 

 

 

 

 

 

 

 

 

 

 

52

 

 

 

 

 

 

 

39

 

 

 

 

 

 

 

 

 

 

 

 

 

 

 

 

 

 

 

 

 

84

 

 

 

38

 

 

 

 

 

 

 

昌庭

 

 

 

 

 

 

 

 

 

 

 

 

73

 

 

 

26

 

 

 

 

 

 

 

 

德昌

 

 

 

 

 

 

 

 

 

 

 

69

 

 

 

16

 

 

 

 

 

 

 

 

 

慶元

 

 

 

 

 

 

 

 

 

 

 

 

 

 

00

 

 

 

 

 

 

 

71

 

 

獻徵

 

 

 

 

 

 

 

 

 

 

 

 

 

 

 

 

 

 

 

38

 

 

 

 

 

 

07

 

 

 

 

 

 

 

 

 

 

 

 

 

 

 

 

 

97

 

 

 

 

 

 

 

 

 

04

觀徵

 

 

 

 

 

 

 

 

 

 

 

 

 

 

 

 

 

 

 

18

 

 

 

 

 

 

 

96

斗相

 

 

 

 

 

 

 

 

 

 

 

 

 

 

 

 

 

 

 

 

 

 

 

 

61

 

 

 

 

이 표는 당시의 의정공 후손이시던 조상님들간 연세를 참고하여 시대적으로 비교해 둔 것인 만큼 참고할 있는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그후 활동상황을 알아 보기에 필요할 것이다. 당시 정치적 현실은 주요 사화와 변란이데 이 당시 어떻게 처신하시고 잘 대응하셨는지에 대한 고찰을 위하여 만들었다.

*그림의 숫자는 예를 들면 25는 1525년이고, 03은 1603녅이다.연세는 그 사이 뒷수에서 앞수를 빼면 된다.

 

 

●이씨왕조의 벼슬은 모두 버리고

투수남행 (投綬南行)은 별좌공 후손의 처절한 투쟁사이다. 극악한 압제와 모질고도 끈질긴 질곡의 세월을 보낸 흔적도 아직까지 남아 있고...,

 

이성계 이방원의 아들 손자가 권력을 악착스럽게 전단해온 500년 비운의 역사에서도 오로지 인간다운 역사에 충실하기 보다는 권력에 아첨하며 살아아 온 풍조가 휩쓸었고, 이러한 사실을 온갖 미사려구로 호도(糊途)하는 글들이 넘쳐나는 풍토에서 그나마 모진 세파를 지혜롭게 헤어나며 인간다운 기백과 정신을 이어 오늘의 떳떳함을 보여주신 조상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이 조선땅에 매우 드물것이다. 이와 견줄만한 사연이 다음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別坐 (李 垙)公은 종동서 아우인 燕山君의 妻家가 거창愼氏인 점이 주목되는바 이미 연산의 사람됨을 알게 된 공은 그를 될 수 있는 한 멀리하기 위하여 벼슬길을 멀리한다.

공은 스스로 호를 半聾齋라 하여 벼슬길을 스스로 삼가 하시고 상의원 별좌 직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당시에 명성이 자자한 산림학자 佔畢齊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寒喧堂 金宏弼과 同榜 生員을 하신 기록이 있다.

 

역사기록으로 볼때 연산군은 점필제 김종직 문하의 많은 선비를 모함하여 죽인 무오, 갑자사화(戊午 甲子士禍)이후부터 용인 구수동에 은거하여 지냈다. 폭군 연산군이 누차 불렀으나 스스로 반농제(귀먹은 이)라는 자호를 쓸 정도로 못들은 척하여 지내시다가 용인에서 돌아 가셨다. 거창신씨 일가가 전부몰락하는 상황에서 공 내외분은 오로지 학문조차 폐하고 선영하에서 유유자적하시다가 한양 100리 밖 조상묘하에서 일생을 마치신 것이다.

이러한 기개는 조선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이어지며 자손들도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한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자부하고 있다.

 

한편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과 별좌공공의 장인 신승복과는 사촌간이다. 그러나 별좌공(垙)은 연산군과의 처가로 종동서간이지만 한편 친가로는 바로 아래 아우이신 연성군(坤)은 연산군을 몰아내어 그글 귀양지까지 안치시킨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서 중종반정을 완벽하게 성공시킨 공신이 되었는 바 바로 아래 친동생되시는 분이 졸지에 공신이 되는 이러한 와중에서도 벼슬에 오르는 길보다는 초야를 선택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특히 별좌공(광)의 차자인 교위(위수)공은 교위직(內禁衛彰信校衛)을 스스로 버리시고 낙남(落南)하여(投綬南行) 처음에는 예천금곡에 덕천당(德川堂)을 세우고 후세교육에 힘쓰시는 한편 안동 절강 무릉(浙江 武陵)에 이르러 무릉정이라는 정자를 짖고 당시 영남일대의 사림들과 교유하면서 매촌(愈), 율리(熹), 눌헌(應),등 삼형제를 퇴계문하에 보내어 훌륭한 도학을 잌혀 후일 나라의 위기에 동량이 되도록 하였다.

 

불행하게도 임진왜란이란 불가항력적인 전란에 임하여 수령들이 겁을 먹고 버리고 간 예천고을을 당시 용궁현감에 계시면서 예천성을 수성하였지만 재차 삼차 공격을 해온 적과의 예천성전투에서 전 가족도 함께 몰사하는 변고를 당하였을 뿐 아니라(매촌공) 한편 왕을 호종하던 차에 삭녕지방에서 적을 만나 항전하시다가 순절하신 분(율리공), 의병을 모집하여 경상도지역을 방어하시는 등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고을과 나라를 지키는 데 힘쓰셨고(눌헌공), 전란이후에 겨우 수습한 가솔을 거두어 지금의 예천 송곡에 처음으로 자리를 정하였다

 

校衛公 (李葳壽)

 

자는 華甫이다, 성종 22년신해(1491)생이시고 벼슬은 內禁衛彰信校衛로 시작하였으나 이를 버리고(투수-投綏) 남하하여 慶北 醴泉 沙谷에 자리를 잡았다.

공께서는 용인 九水洞에서 공명을 초월하여 선영을 받들고 사시는 부친 별좌공 (垙)이 중종 6년1511)에 돌아가시자 창신교위의 벼슬을 버리시고 남하하여(投綬南行) 경상도 예천 사곡(현재 경북 예천군 호명면 송곡동)에 은거하신 것이다.

부친이신 별좌공(垙)께서 이미 점필제(金宗直)의 문하로서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어 온 만큼 영남성리학파에 대해 호감을 갖이시고 세분의 아드님과 사위분들은 모두 퇴계(이황)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고 이분들은 모두 퇴계문인록에 올라 있다.

공은 조부이신 연안군과 당시 숙부이신 연성군(坤)은 물론이고 이시애란평정공신이신 안양공(장말손)공의 맏 손서로서 당대에 권력의 중심에서 영달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사화와 선비들의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여 부친의 유지를 따라 영남으로 남하하신 일은 참으로 현명한 하였다고 사료된다.

 

梅村 공(李 愈)>

 

자는 子欽이요 호는 梅村이다. 중종 17년 임오(1522)생이시다. 명종 2년 정미(1547)년에 栗里, 訥軒 동생분과 함께 생원으로 함께 生員進士에이르시고 삼형제가 같이 퇴계문인으로 나아갔다.

퇴계선생의 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에 기록하였으되 “이유는 자 자흠이요 호를 매촌이라 하는데 연안인(延安人)으로 醴泉出生이다. 가정 임오에 형제가 함께 진사가 되고 퇴계문하가되었다. 4개의 읍을 다스려 치적을 쌓고 임진년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부임하자 군사를 모아 외적에 대항하였다.

난리를 만나 뿔뿔히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겨우 수백에 지나지 못하는 군사이지만 용궁 정재령(政在嶺)은 국가의 주요 보급로로서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막중한바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임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雪泲爲誓衝冒矢石) 다수의 적의 목을 베고 신속하에 움직일 수있도록 보급로를 열어 차질이 없게 하였는데 다시 예천의병장으로 토적(土賊)을 잡아 一郡이 일단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질서를 잡아 나갔으며 이로서 경상도 안찰사인 김수(金晬)는 공에게 진충보국한 공으로 포상하였다“ 하며 이어 한편 기록에는 ”공의자는 자수인데 첨추(僉正벼슬과 中樞府使를 지내신)仁文公의 曾孫으로 수를 72세라“ 이록한바 있고 또한 ”泰川縣監 재임시에 廉使 漢陰(文翼公 李德馨)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주청하자 임금은 귀한 신발과 의상(表裏衣襨)을 하사하였다”한다. 그리고 “임진 5월 경상도 安集使 伯巖 金訒(김인)이 경상도 각읍을 지킨 장수들에 대해 장계를 올렸는데 前縣監 李愈로하여금 醴泉을 지키고 土賊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國朝實記에도 “용궁현감 이유(李 愈)는 적병과 더불어 교전하여 많은 수급을 노획하였으며 경상감사 백암 김인이 포상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醴泉邑誌(懶隱 李東標찬-숙종때 인물 솔무덤에 유적이 있음)에는 ” 李愈는 義兵將으로서 적과 싸워 토멸하고 마침내 陣中에서 돌아가시니 시신을 찾을 수없어 그의 관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고, 朝鮮 名臣錄에도 ”이유의 호는 매촌이요 위수의 아들이다. 퇴계문인으로 임진란에 적을 참획하여 공을 세웠으며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였다는 기록을 이동표가 이를 장계하였다.

 

공은 간당들만 가득한 조정에 입사하지 않으시다가 명종 22년 정묘년에 在野人材를 천거하라는 교지에 따라 늦게 벼슬길에 오르셨는데 4개읍을 다스렸는데 태천현감으로 재직시에는 한음(이덕형)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장계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의복과 신발(表裏衣襨)를 받았다.고 하였다. 기록은 중복되지만 아직 정사에 기록이 누락되어 부득이 여러 지료를 모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증명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며 이러한 기록은 세첩보유( 눌운 이병화 편)에서 참고한 것이니 앞으로 공의 기록은 사실에 상당한 기록으로 유의하기흘 바라는 바이다.

 

 

무릉정 현판을 걸때 시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暮厓細路覓幽棲 谷遼炯深樹影低 何處桃園花從水 武陵島外唱金鷄

 

栗里公과 訥軒公 두분 아우님,그리고 鄭元忠 玄璞 笑庵姜士弼 邊克寧 鄭元沆 金訒 鄭元黙 李景嶔 曺繼益 權景龍 鄭元健 聚遠堂 曺光益 洪秀民 曺希益 蒙霽 李安道 芝山 曺好益 權景虎 曺謙益 과 더불어 講親契를 세웠는데 공이 강친계의 계주시며 이분들은 姨從兄弟와 姨從媒胥의 사이였다.

강친계첩의 쓰인 제목의 싯구는 이러하다.

思功謂陽日 歡深荊樹春 百年期莫逆 相與講親親

이 강친계는 선략장군 (선략장군 장중우 부 연복군 장말손)의 외손자이거나 외손서들로서 공과 공의 두 아우분을 합하여 수물한분인데 게첩과 계첩에 시문을 올려 세세연년토록 친분을 가지고자 하는 약속을 서명한 것으로 모양은 정방형 석자크기로 네모난 기름먹인 한지 한 장에 올려저 있어 오늘 날 까지 보존되어 왔다.(*내가 이글이 실린 강친계첩을 모고 본 그대로 적지만 글솜씨가 부족하여 다 못 적는다, 이관희)

 

공은 明宗이 정묘 6월에 붕하여 넉달이 지난 10월에 장례를 지내고자하는 왕대비의 고집을 꺾는 상소를 올려 마침내 장일을 바로잡은 일은 율곡집에 있는 바 율곡(이 이)도 공이 이를 분명하게 밝혀 대왕대비 윤씨의 판단을 옳게 하므로서 조정대신들 조차도 미처 생각지 못한 잘못을 바로 잡았다는 기록은 공이 성리학 이론에 매우 투철하였음을 입증하는 면을 보여 준다.

공의 묘소는 예천호명산 선고비 묘하 동록에 모셨으며 배위는 문화류씨로 묘소는 함께 모셨다.

 

공의 후손은 1녀 진사 李淸(진주인 자 海益 녀 柳澤 진주인 문정의 여 金繼光) 를 두시고 후일 判事(德承 생부 應 묘 안동 임북 세천산 눌헌공 영 후록)공을 계자하였으나 판사공은 三녀와 서자 三인을 두셨는데 서자인 英男공이 아드님(碩) 한분을 두셨으나 族譜상으로 이어 오지 못했다. 후일 을사,갑술,계유보 수단시에 누락되었던 것을 경신보 수단시에 광주상애곡(廣州桑厓谷)에 族人 이 거주하는데 공의 후손(석)과 같은 단자를 보소에 내었기로 이를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돌려 보냈더니 후에 교정공(弘老)의 후로 투탁하였다고 하나 족보와 이조실록에 기록을 비추어 교정공 후손은 불명하다. 사평공파의 휘 碩이 곧 그 사람들이다.

 

栗里 공(李 熹)*참고자료 율리공 글 모음

 

자는 자수 호는 율리이다.중종 27년 임진(1532)생이 시고 명종 16년신유(156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선조 7년갑술(1574)별시 문과에 올라 상주교수, 경상도사,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에 이르고 태상첨정을 지냈으며 퇴계문하에서 수업하엿다는 기록은 퇴계언행록에 있다.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

퇴계선생 문집중에 이자수에게 보낸 편지가 두통있는데 퇴계선생은 성리학에 대해 매우 간곡하게 설명하신 흔적과 안부를 교환하신 정감어린 내용에 후세인들에게 매우 깊은 감동을 준다.

공은 선조 3년 신미(1571)12월 퇴계선생 기세시에 제문을 올렸는데

“...실로 선생은 공자와 기자 이후 도학을 더욱 세롭게 다듬은 진정한 1인자로 추앙하여야한다”는 극찬을 시작으로 퇴계선생의 공적을 지극히 높힌 바 있어 후일 중원의 학문일지언정 동방에서 비로소 대성을 이룬 퇴계선생의 공적을 올바르게 표현한 자강자주적인 표현의 효시(自疆自主的 表現 肴示)가 된 것이다.

상주향교 도선생안(道先生案)과 국조방목(國朝芳目)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반복하어 기록하고 있으며, 공은 임진란에 임금을 모시고 북상하던 중 삭녕지방에 이르러 적을 만나 중과부적으로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는 기록도 이상의 서면에 함께 올라있다.

참으로 퇴계는 그를 알아주는 제자를 많이 두었지만 그중 공과 같은 제자가 천명을 극복하여 오래하였더라면 더욱 그 빛나는 명훈을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렸으리라 매우 한탄스럽도다..

묘소는 매촌공 묘하에 모시고 배위는 원주변씨(원주변씨 부는 응녕 조 참봉 관 증조 필대 외조 문억형 본 감천)이며 묘소는 공의 묘소와 같이하였으되 상하분이다. 의성김씨 연방세고(義城金氏 聯芳世考)에 보면 능천서당을 함께 세웠다 하였다.

능천서당(能川書堂)은 공께서 예천 금곡에 계실 때에 남악공(김복일)과 같이 능천서당을 이르켜 후학을 가르켰다고 하는 기록이 남야집(박손경)에 있다, 이 남야집에 기록하였으되 “금곡 북쪽에 옛 덕진숙사가 있었는데 여기에 글은 첨정공이 짖고 글시는 남악공이 썼다“하였고 남악공 자손이 이것을 오늘에 이르기 가지 보관하여 왔다는 요지로 기록을 하였다.

동국씨족고에 “..(앞에 중복기록 생략) 배위 원주변씨가 무자하여 재종질 북백공(昌庭)을 어릴때부터 길러 왔고 후사를 마낄려고 하던차 임진란이 일어나고 공께서 뜻밖에 일을 당하여 돌아가시자 북백공은 3년의 상을 입고 양자의 예를 다하였으며 갑오년에 도 원주변씨께서 돌아가시니 북백공이 교위공선영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예를 올렸다고 하였다.

 

식산집(이만부-李萬敷)에 가정전례로 알려진 글을 인용하면 "후사까지 부탁하시던 족부 첨정공의 일로 상심하여 직접 시신을 수습하여 모셔 오고 선고묘하로 장례를 지내고 3년상을 입었으나 장차 후사문제를 고민하였으나 다시 친가로 환원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용주 조경이 천한 북백공 신도비에도 남아 있다.

생각건대 식산집에 공의 제사를 모실 사람을 종인이면 누구나 좋겠다고 하면서 북백공이 이를 정하고 스스로 파양하엿다는 기록은 다소 생각해볼 문제다. 첨정공은 순절직전까지 자식이 후사가 없어 북백공 (창정)을 양자로 미리 정하여어릴대부터 길러 왔던 것이 기록에 분명하며 공이 순절하신 임진년부터 그 다음해인 갑오년에 숙인 원주 변씨께서 돌아 가셨는데 11년이 지난 을사보수단시에 첨정공은 후사가 없는 것으로 되었으니 이는 첨정공 후사가 확실히 북백공이후로 단절되었음이 ,더 이상 논난의 여가 없는 것이며 후일 북백공의 손자이신 관찰공 (근곡 이관징)께서 친히 호명 송곡 종택에 오셔서 사당을 짖고 제향을 드린 바 있고 또한 첨정공의 필적이 동애공(浹)사손의 집에 보관되어 왔다는 사실등을 참고해 보면 첨정공은 한성에서 사시던 마을이 율리이며 피란처이던 문경청화산 율수라던지 한성 서문밖 서강의 율도등을 관련지으면 첨정공의 호와도 관계가 없다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니 첨정공의 자손은 북백공이 스스로 철양함으로서 그 후대 사손이 없게 되고 연안이씨 종인이면 아무나 대를 이어 제사를 모시게 했다는 것은 당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도리이며 이로서 족보상에 무후로 된 것이 틀림없다.

공이 이조좌랑시에 任百英, 柳希規, 李熹, 沈源河, 崔濂, 閔善, 朴以容, 柳凞緖 등과 더불어 여덟첩 비단평풍에 각기 시를 지어 친목을 결의한 병명계(屛銘契)가 있다. 병풍에 올린 시귀를 살펴본다.

 

共 遇 祥 刑 世 「서로 만나 세상을 본받으니 반갑고」

同 爲 大 理 官 「다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네.」 

金 蘭 成 勝 會 「친구우정 나누는 오늘의 잔치에

樽 酒 得 團 欒 「술잔을 높이 들어 더욱 다짐하세나」

要 解 三 年 旱 「공부 쌓던 힘든 세월 비로소 알겠구려

何 妨 一 日 歡 「오늘하루 즐긴들 뉘라서 어찌 하리」 

異 時 相 憶 處 「오늘 말고 다른 날 서로 보고 싶을 때는

留 列 短 屛 看 「해어지며 나눈 이 평풍을 바라보세나

 

안동 절강 武陵亭에 간판을 올릴 당시 지으신 싯귀

島下淸江江上棲 繞原紅樹自高低 纖埃不起房櫳靜 啁哳聲聲夜半雞

최근 입수된 자료에 의하면 공은 대왕대비가 불교에 대한 편애로 인하여 국가기강이 문란해짐을 비감하여 상소한 자료가 발견되었기로 별도로 이 자료발간을 위한 작업을 추진중임을 첨언하며 공에 대한 기록이 이외에도 당대 유명한 사대부들과의 교유한 기록등과 특히 퇴계선생과의 사제간 주고 받은 편지내용등은 매우 흥미진진한 것으로 이오에도 무수히 많아서 이루다 적지 못함이 아쉽다.

 

訥軒 공(李 應)

 

자는 子期 號는 訥軒이다. 중종 32년 병신(1536)년 생이 시다. 선조 3년 경오 (1577)년에 사마시에 오르고 선조 8년을해에 수천으로 통례원인의에 오르시였다.매촌공 율리공 백중형과 함께 퇴계선생문하에서 수업하셨다. 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

도산문헌록에 “공은 매촌 율리공의 아우이시며 벼슬을 버리고 안동 무릉도 에 복거하여 김약봉(극일) 김학봉(성일),황해월(여일),이몽제(안도),김운천(용),손삼성재(흥례),등 당대 선비들과 더불어 시읇고 글을 짖으 문장을 닦았다” 하고

양양지(양양지)에 “공은 예천 사곡에 계시던 중 늦게 안동절강강상에 도화곡에 작은 정자를 이루어 무릉이라 편액을 달고 지내셨는데 칠언절구 일수를 남겼다”.

당시 무릉정에 액자를 걸면서 지으신 싯귀

幽居自分一枝棲 松下茅簷不剪低 棊局罷來無箇事 更呼童子護雛雞

이뿐 아니라 당시 여러재사들과 주고받은 싯귀가 부지기수이다.

임진년을 당하여 매촌공은 예천에서 율리공은 삭녕에서 변을 만나 돌아가시고 공게서도 전쟁이 긑나던 그해 정유년에 예천송곡에서 세상을 버리시니 아드님 사고공(덕창)이 절겅리에서 예천으로 거처를 모두 옮기게 된 것이다.

“절강 백여리에 전쟁의 소용도리가 지나가니 마침내 사람의 종적이 간데 없다“하는 글을 어느 시인이 읊은 기록을 보았다.

浙江百餘里一區 雲物管領無人處

을사년(1905) 봄에 공의 운손(雲孫-9세손이후의 자손)(炳華)公이 嗣孫(炳奎)공과 합의하여 무릉정을 사곡촌 후봉 건지산밑으로 옮기는데 편액은 당대 명필 해사(海史-김성근)가 썼다. 편액의 글씨는 미양궁체(米羊宮體)이다.

 

柳田園(道獻)이 重建記를 쓰니 이르기를 “士君子(사군자)는 마땅히 그 스승을 보아 그 행처를 짐작하는 것이라 하더니 退溪先生의 弟子다움에 있어 뛰어남이 첫 번째로 訥軒 李先生을 두고 한말이라 할 것이다.“ 하니 공이 浙江上 桃樹谷에 亭子를 짖고 當代名儒들과 함께 토론하고 詩書를 논하여 交遊하였으며 임진란을 당하여 伯仲二公과 더불어 나라를 위하여 충심갈력하신 바는 후세에 널리 알려저 있으매 이제 황량하던 그 자리를 떠나 9세손 愛吾窩公(鼎基)의 명에 따라 雲孫(炳華-스스로 號를 訥雲이라함)가 嗣孫 (炳奎)와 합의하여 고향땅에 새로이 이르켜 세운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하였으며 눌헌선생의 의표를 본받아 자손만대에 이어 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上樑文은 十一世孫 訥雲公(炳華)에 의하여 올려 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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