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연안이씨 가전세계 地部

작성자2244 이관희|작성시간12.07.30|조회수165 목록 댓글 0

2006년 2월

延安李氏

(地部)

 

 

丙戌 迎春

 

李 觀 熙 編修

 

 

 

 

 

延安李氏 (地部) 觀熙

* 연안이씨총계보로서 태자첨사공파의 기록을 상세히 기술한 표이다 (제작 이관희)

표의 오른편 상단 始祖公(무)과 이하 太子詹事公(襲洪)이하 系譜와,

왼편 상단에 太子詹事公派와 촌수를 확인 할 수 없는 同本의 延安李氏 3派의 系譜(태자첨사공파,통례문부사공파, 판소부감공파 대장군공파)가 있다. 아래 기록될 내용은 계보상 康胡公 (貴齡)의 후손 府使公(策)에서 종가(宗家)로 하여 필두로 삼는다.

 

 

宗 家 世 系

 

康胡公(貴齡)은 두 아들(禮賓寺事-策, ,禮賓少尹-)과,두딸 여 (崔宣-후실 文科奉常尹 全州人으로父 同知密直乙義 기일 7월 1일 2자 최수 최유 여 허추 양천인) 여(趙賚-知敦寧節孝公漢陽人 父漢山君仁沃 5자 조순생, 조관생, 조효생 조촌생 조덕규 2여 박감, 의정택주-헌릉후궁 )을 두셨다.

 

八世 책(策) 康胡公(貴齡)의 長子

 

어릴쩍 이름은 賢奴이며, 관은 通政大夫 判禮賓寺事 (또는 평산부사)를 지내시고, 기일은 11월 27일이다.

배위는 淸風金氏(또는 李氏 父 左尹 伯邦 外祖 郡事 柳惠芳 本 晉州)이다.

세종9년 3월에 평강현감으로 나가기 앞서 왕이 인견하고 “평강은 적은 고을이지만 매년 강무로 인하여 거동하기 때문에 접대하는 일이 번거로울 것이니 의창을 잘 거두어 수령으로서 급무를 잘 처리하라”는 당부를 한 기록에 따라 세종후기 인물로 본다(이조실록)..

묘는 龍仁 內面 橋谷에 표석을 만들어 내외분을 쌍분으로 모셨다.

아들 대호군(大護軍-孝忠)공과 딸(辛信-上將 靈山人 父 府使 應參 자 辛得濟 辛得涵-여 嘉興守 積=父敬寧君 裶 여 魚有沼 贊成 築城君 無后 忠州人父 同知中樞得海 여 張漢之 縣監 扶寧人)乙巳舊譜에는 동생 敦의 여로 記錄되어 있으나 甲戌譜에서 이를 바로 하였다.)

 

八世 돈(敦) 康胡公(貴齡)의 次子

 

예빈시사(禮賓寺事) (策)공의 친 아우이다.

초명,효동(孝童),관은 봉렬대부예빈소윤(奉烈大夫禮賓少尹)을 지내시다.

配位는 晉州柳氏( 父 左贊儀 謙, 祖 寶文大提學 靖平公 均 曾祖 郡守蕙芳 外祖 參贊 良靖公 崔溓 本 忠州)이다.

성종 4년 이시애란 평정에 참여한 공을 기려 賜牌를 받고 免役되었다는 기록이 이조실록에 있다.

성종 2년에 職帖을 받은 기록이 있어 성종시 入仕人物로 본다.

셍졸년대는 부전이나, 묘소는 墓碣銘에 記錄된것을 근거로 龍仁 九水洞 先塋下 白虎嶝 南端 乾坐原에 모셨다 한다.

두 아들 縣監(光名)공과 上將(永明)공, 두딸 趙忠山(上將-子 趙珪一 (혹은 趙圭),趙瑭,趙璋)과 楊守道(主簿 子는 楊堰 楊擙 여 崔子洵)를 두시다.

 

九世 孝忠-禮賓寺事(策)공 의 長子

 

官은 大護軍을 지내시다.

세조 2년에 녹사로 원종공신에 3등에 녹훈자로 오르고, 이로서 성종 13년에 서용되다.(이조실록)

배위는 한양조씨(漢陽趙氏 父 大護軍 漢平府院君 良敬公 熉 曾祖 龍原府院君讓烈公仁璧 外祖 綠事柳瑞生 本 晉州)

3남(寧越郡守(文核)공,(文椽-혹文栓-무후) 충현공(文檜,와 2녀(閔亨孫(上將 後室 麗興人 父 判官 愼之 자 閔),林稠를 두시다.

 

九世 光明-禮賓少尹 돈(敦)- 長子

 

縣監을 지내시고

배위는 文化柳氏(父 兵馬使 行之)

2자 縣令(熙文)공과 무후(熙武), 2녀 宋善忠(縣監 鎭川人 父 判決事 翠 子 宋龍元 宋虎元) 李胤賢(生員 河濱人 父 直講 孟智, 자 李鐵剛 李石剛 女 白益堅 水原人 前室 父王子師傅 參校 思粹)을 두시다.

 

九世 永明-禮賓少尹 돈(敦)- 차자

 

上將을 지내시고

2자 胤曾 順曾과 1녀 趙錦을 두시다

 

 

十世 文核-大護軍 (孝忠) 長子

官은 通訓大夫 寧遠(?越)郡守를 지내시다.

子 府使公 찬(璨-)

 

十世 文檜-大護軍 (孝忠) 次子

忠贊公

배위는 溫陽鄭氏( )이다.

자(琦)

 

十世 熙文-縣監(光明) 長子

縣令(일운 判官)을 지내셨다.

 

 

十一世 瓚-寧越郡守(文核)의 獨子

 

무과급제로 입사하여 府使를 지내시다.

배위는 居昌黃氏(父 判書 炯)

묘는 矜川 佳梨峴(지금 서울 사당동--신림동간 고개)에 모셨다.

2남 副司果公(世義) (世蕃) 3녀 李夢龍 ,李礦(현령) 閔思魯 를 두시다.

 

十一世 琦-忠贊公 (文檜)의 長子

묘소는 下東村 內洞 卯坐이다

 

十一世 球-忠贊公 (文檜)의 次子

성종24년 계축(1493) 3월 5일생,(배위 晉山河氏(父 慶啚), 묘소는 용인구수동 숭산천좌에 배위쌍분으로 모시다. (경신보에 이르기를, 공은 부친 충찬공이 귀향하실즈음에 세상일이 위험하심을 스스로 깨달으시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시다.

자는 이천현감공(世安),(世寬)을 두시다.

 

十一世 寬-縣令 (熙文)의 獨子

官 僉使, 2子 縣監(溫良)과 (恭良)

 

十二世 世義-府使公(璨)의 長子

관은 副司果 배위는 水原崔氏(承旨 潤宗)

1남 寬 1여 許濎(陽川人 여 沈協 李宇)

 

十二世 世蕃-府使公(璨)의 次子

무남,여 申景海(高靈人 子申灌 奉事)

 

十二世 世福- (琦)의 長子

1자 曜

 

十二世 億福-(琦)의 次子

자 금성현령 증병조참의(曄)공의 충절로 숙종시에 이르러 이조참의로 증직되다.

배위 함양박씨이다.

2남 금성현령 증병조팜의(曄)과(暐)를 두시다.

묘는 龍仁 水餘面(?) 건좌에 모시다.

 

十二世 得福-(琦)의 三子

무과로 급제하다

2남 참봉(晛)과 사헌부감찰(昉)이 있다.

 

十二世 連福-(琦)의 四子

1남 서자 伏龍과 2년 金夢元 韓在賢(文 都事)이 있다.

 

十二世 世安-의 長子

중종 갑술 (구보=병신년생) 3월2일 생, 武科에 급제하고 通政大夫 伊川縣監을 지내시고 경인 6월3일 돌아가시다. 묘는 구수동 先塋 右에 岡有標石이 있다. 상고컨대 갑술(1514)생으로 병신(1536)에 무과에 올라 경인(1590)년에 돌아가신 사실이 옳다면 수는 76세임.

배위는 延安金氏(父 光粹 逸溪自知후)이며 계유 5월20일에 태어나 경술 8월15일에 돌아가시고 묘는 雙墳으로 하다.

2자 (성) (경)와 1녀(尹淮)를 두다

 

 

十二世 世寬-의 次子

2남 서자(最)와 (俊)이 있다.

 

十二世 溫良-僉使 (寬)의 長子

현감을 지내다

2자 (葩) (茂) 2녀 (慶守忠봉사 자慶得) (梁思恭 자 梁誠 梁諧)를 두다.

 

十二世 恭良-僉使 (寬)의 次子

관은 충순위,배위는 아산이씨(부 상장 희)이며 묘소는 남평연산에 모시다.

3남 (坤) (塢) (垓)와 1녀(朴文龍)을 두다.

 

 

別提公派 >康胡公>-策>-孝忠>-文核>-璨>-世義>-寬

十三世 寬-부사과 (世義)의 獨子

명종 갑인생이며,관은 司圖署 別提를 지내셨다. 갑인년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矜川佳梨峴 先塋下에 모시다.

배위는 安東金氏( 父 敎官 崶)이다.

 

별제공은 연안이씨 태자첨사공파의 종손계보이지만 그 후손에 대한 근거가 불명확하고 거처가 온전치 못하여 일정한 가문을 형성하지못한 가운데 있어 모든 제향과 조상에 대한 의식절차는 다음 계보인 금성공도 같은 상태이고보니 임 수백년 전부터 차차순으로 이천공 에서 준행하고 있어 사실상의 주손역활을 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별제공파의 선산은 옛날에는 광주땅이지만 지금은 행정구역이 변천되면서 서울시에 편입되고 도시개발에의하여 그 자리는 자취없이 살아지고 말았는데 묘소에 대하여 상고한 바 긍천 가리현은 지금의 사당동에서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작현일대로서 묘지로 추정되는 그 지번에는 이미 신성아파트가 들어섰고 자손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묘지 이장은 모모씨에 의하여 이루어 젔다는 전갈이 있어 이를 현제 추적하여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중이다. 많은 종인들의 동조협력이 있기를 바란다.

 

金城公派 >康胡公>-策>-孝忠>-文檜>-琦>-億福>-曄

 

十三世 曜- (世福)의 獨子

불록

 

十三世 曄-이조참의(億福)의 長子

무과급제로 금성현령을 지내시더니 임진왜란을 만나 전라좌병사 소속 우후로 참전하여 한산전투에서 가등청정에게 사로잡히자 왜의 본영까지 납치되었다가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다시 추격을 받아 해중에서 스스로 배를 갈라 자결하며 바다로 떨어졌다. 이 기록은 유성룡의 단구록과 강항의 간양록(看羊錄)에 있다 한다.(1694년(숙종20년) 갑술보에는 불록이나 1813년 계유보에 기록을 근거로하여 자료를 살펴 본즉 서애(柳成龍)공은 한(漢)때 이릉의 고사를 인용하여 농서대장부(隴西大丈夫)의 기개를 높혀 그 충절을 기리는 글을 정성을 다하여 기록하였고, 존경록에 공의 현손 세온이 가져온 고지(古紙) 한통을 근거로 자료를 상고하였다 하며 위 기록과 아울러 강항(姜沆)이 간양록에 공을 위한 칠언절구를 남겼더라.

 

東海茫茫萬里長 將軍何事自沈忙 殺身己快葬魚腹 埋骨無勞願首陽

七里灘解千古咽 九嵐山色百年荒 君間漢代李都衛 國士心甘拜大羊

 

만리떨어진 망망한 동해물결위에

어찌하여 장군은 스스로 뛰어 드시는고

내몸 흔쾌히 던저 어복에 장사 지냄이여

뼈 묻는 수고 없이 만고충절 지켰구려.

예날 신라 박제상을 기리는 망부석아

오늘도 안타까히 허망하게 기다린 백년

한나라 이릉장군생각마저 돋는 구려

바다를 향해 삼가 허리 굽혀 절하노라

 

공의 현손 세온(世溫)이 가저 온 고지의 내용을 상고하면 아래 와 같다.

“나의 고조부 엽(曄)은 임진란 중에 전라좌병(사)의 우후(虞侯)로서 한산도 싸움에서 패하여 왜장 가등청정에게 잡히니 청정이 항복하라고 협박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니 관백(關伯)에게 압송하여 대장의 집에 머물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상으로 비단등을 많이 주었다.

공은 함께 잡혀온 우리 백성 수십여인과 약속하고 선물을 흩어 팔아서 그 돈으로 배를 구입 고국으로 가고자 배를 타고 도망치는데 지키던 왜군들이 이를 발각하고 뒤 딸아 양면으로 협공하며 오는 지라 미리 차고 있던 칼을 뽑아내어서 자신의 배를 가르고 바다에 스스로 뛰어 들어 자결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한 왜놈들은 다시 공의 시신을 바다에서 끌어내어 환열(수레로 시신을 조각내는 형벌)한 뒤에 거리에 걸었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숙종때 상소하여 추증으로 증병조참의를 받았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난중일기 (이순신 충무공-저)

 

十三世 暐-이조참의(億福)의 次子

不錄

十三世 睍-참봉(득복)의 장자

武將

十三世 昉-참봉(득복)의 次자

官 司憲府監察

 

伊川公派 >康胡公>-策>-孝忠>-文檜>-球>-世安>-晟

十三世 晟-伊川縣監(世安)의 長子

중종 31년(1536) 병신 3월 3일에 출생하시고 別薦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嘉山縣監으로시작하여 嘉善大夫 副護軍에 이르시다. 계사(1593) 11월13일에 돌아가시다.

배위는 貞夫人 溫陽鄭氏()임인 3월29일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龍仁 下東村 三峰山 忠贊公塋下로 雙墳으로 모시다. 제향일은 음력 시월 12일이다.

1남 司馬(宗立)공과 1녀 (박정호 죽산인 부사)

 

十三世 景-이천현감(세안)의 차자

武科 府使

 

 

 

少尹公派 >康胡公>-敦>-光明>-熙文>-寬>-恭良>-塢

十三世 葩-현감(온량)의 장자

불록

十三世 茂-현감(온량)의 장자

불록

十三世 坤-충순위(공량)의 장자

불록

十三世 塢-충순위(공량)의 차자

불록

十三世 垓-충순위(공량)의 三자

배위 陽城李氏

 

 

宗家世事-伊川公派

 

사실상의 연안이씨 종가로서의 역할은 계보상으로볼때 별제공파가 종손가이지만 지난 백수십년여년 동안에 그 주손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이며 또한 다음 계보상 주손일 수 있는 금성공파에서도 족보상 절손이 된 상태에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나마 용인, 안성등지에서 문벌을 면면히 유지하여 온 이천공(世安)이후 (康胡公>-策>-孝忠>-文檜>-球>-)

世安>-晟>-宗立>-善興>-厚培>-萬林>-景閔>-秉延>-弘德>-遇英,鳳基>-錫九>-炳大>-萬寧>-義哲>-肯熙>-)에 의하여 議政公이하 묘소를 지켜오고 이조중.말엽과 왜정치하에서도 선영이 있는 토지임야를 유지관리 해 왔으며 세세연연 빠짐없이 제향하여 왔으므로 종손으로서 역할을 지켜 왔음을 입증된다. (존경록)

 

系派 >

康胡公>-策>-孝忠>-文檜>-球>-世安>-晟

世安>-晟>-宗立>-善興>-厚培>-萬林>-景閔>-秉延>-弘德>-遇英,鳳基>-錫九>-炳大>-萬寧>-義喆>-肯熙>-)

 

十四世 宗立-副護軍(晟)의 長子

 

자 立之, 선조 기사(1569)6월 27일 출생, 司馬官,通訓大夫로 陽智縣監에 이르고, 신미년(1631) 정월 1일 돌아가시다.

배위 숙부인 청해이씨(淑夫人 靑海李氏-父 大成 祖 允元 曾祖 都事良弼 靑海伯之 蘭의后)로 정묘 9월26일에 돌아가셨는데 묘는 龍仁 水餘面 直同村 北麓에 標石을 하여 兩位분을 모셨다.

제향일은 10월14일이다.

 

十五世 穀-陽智公(宗立)의 長子

成均進士 기일은 3월2일이고 묘소는 삼봉산 선조고 영하에 표석을 세워 모시다. 향일은 10월12일이다.

배위는 慶州李氏(부 인길)묘소는 직동 현감공 우허에 모시고 향일 10월14일이다.

十六世 善興-進士公(곡)의 次子(長子 善長 무남1녀 )

通德郞 기일은 10월10일 삼봉산 曾祖墓下에 묘소를 정하다.

배위 連山金氏 묘는 선영하

배위 文化柳氏(생육 4남 1녀)공의 묘에 쌍분이다.

 

十七世 厚培-通德郞(善興)의 장자

기일은 9월6일 묘소는 龍仁 南四面 橋谷 判禮殯禮公 墓下에 정하다.

 

十八世 萬林-생부 ( 涵 )에서 系子

초위는 師允, 자는 伯瞻이다.

生父( 涵 )는 陽智公(宗立)의 次子 (琚)공의 孫子이다.

肅宗3년 정사(1677)에 출생하시고 임술 4월10일에 돌아가시다.

묘소는 龍仁 水餘面 直洞 酒幕北中鹿 南端 子坐에 모시다.

배위는 陽城李氏(父名 材)을묘 정월29일 출생하시고 신미10월 27일에 돌아가시다.

十九世 景閔-(부 萬林)의 長子

자는 孝伯, 숙종26년 경진 8월11일출생하시고 정묘에 문과에급제하여 兵曹正郞을 역임하시다가 갑신 9월 1일에 돌아가시다.

배위는 淑人 全州李氏(父 楫 祖允志曾祖 啓完 外祖 李庭華 全義李氏)는 은 갑술 8월3일에출생하셔서 신축 9월23일에 돌아가시고 묘소는 용인 직동 현감公 左麓 上子坐에 모시다.

배위 安東權氏(父 萬慶 祖 汝慎 曾祖 洗馬 礬)경신 12월23일 출생하여정묘5월6일에 돌아가시다.묘는 直洞 艮坐이다.

배위 淑人 杞溪兪氏(否 義基 祖 副護軍 命禹 曾祖 縕)기유8월13일 출생하여 갑자정월19일 돌아 가셨는데 묘소는 삼봉산 忠贊公瑩右墓上卯坐이며 3남 5녀를 養育하시다.

 

二十世 秉延-병조정랑(景閔)의 長子

자는 彝叔(이숙)이다. 영종9년 계축(1733)5월21일출생하시고 무진 5월29일 돌아가시다.

묘는 龍仁水餘面 直洞 縣監公 瑩下丁亥坐이다.

배위는 漢陽趙氏()辛亥生으로 壬申 12월16일 돌아가시고 묘소는 鎭川驛村後 卯坐에 모셨다.

배위는 慶州鄭氏(父 文同樞觀由)로 병진9월7일에 출생하시고 경오 9월22일에 돌아가시다.

1남 2녀를 생육하시다.

 

二十一世 弘德-부(秉延)의 長子

자는 成緖이다. 영종32년(1756)병자7월29일 출생하시고, 정축 11월6일 돌아가시다.

묘는 三峰山 祠堂谷 先考瑩下에모시고 배위 咸平李氏(父 東郁)는 병자 생이며 을사9월2일에 돌아가시다. 무남 2년를 키우시다.

 

二十二世 鳳基-생부(商德)에서 系子

자는 치화(致和)이다. 생부 상덕(尙德)은 이조정랑(吏曹正郞-景閔)공의 제3자 창정(昌延)공의 장자인바 계유구보(癸酉舊譜)를 상고하면 장자 봉기(鳳基=(一名 遇英)를 종가(宗家)인 홍덕(弘德)의 계자(系子=出后 弘德)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舊譜上에 尙德에게는 1자가 또 있으나 성명이 확실하지 않았다.(遇?로 기록됨)

정종19년(1795)을묘4월25일출생하시고 계사9월21일 돌아가셨다. 묘소는 안성군 대덕면 중모산리 안산오덕가리북록유좌에모셨다.

배위는 수성최씨(부 광옥)병진생이며 무인 9월25일에 돌아가셨다. 묘소는 삼봉산 6대조묘하자해좌에모시고 육 1녀하시다.

배위 晉州柳氏(父 觀陽 祖 璡 )는 정사6월24일생이며 갑인 2월28일 돌아가시고 묘소는 공과 함께(附)하셨고 육 2남 1녀하시다.

二十三世 錫九-부 (鳳基)의 長子

자는 사범(사범)이다.

순조 20년(1820)8월27일 출생하여 경신 11월 27일 돌아가셨는데 묘는 안성군 대덕면 상모산리 후록에 모셨다.

배위는 의령남씨(父 錫考 祖從善 曾祖 星)기일은 6월6일 묘소는 공과 함께 모시(附)다. 배위 영일 정씨(父 德基)임진 3월13일 출생하시고갑인 8월 21일 돌아가시다.

 

二十四世 炳大-부 (錫九)의 長子

字는 紀三, 號는 此山이다.

철종3년 임자(1852)3월19일 출생하여 갑자 7월에 무사 문묘직원이되다.을 축 4월 13일 돌아가시다. 묘소는 상모산리 촌후 좌 표석을 두어 모셨고 배위는 奉化鄭氏(父 羲瑞 祖 注 曾祖 善欽)

)기유 11월18일출생하여 임자 정월 26일 돌아가시다.

묘는 공과함께 (부)하시고 무남 3년를 키우시다

배위 풍양조씨 기일은 9월 10일 묘는 오룡가리묘좌이다.

 

二十五世 萬寧-생부 (炳載)에서 系子

字는 聖邦 號는 梧堂이다.

갑신(1884)9월26일에 출생하여 기유 3월29일에 돌아가시다. 묘소는 上矛山里 村 後麓 辛坐이다.

베위는 廣州安氏(父 鐘淑 祖 昌遠 曾祖 孝憲 順菴 鼎福後裔)이며 임오 7월 8일에 출생하여 임자 정월 27일에 돌아가시다. 묘소는 공과 함께 (부)하시다.

 

二十六世 義喆-부 (萬寧)의 長者

을묘(1915)을묘 12월27일 출생하여 해운공사공무과장을 지내시고

배위는 동래정씨( 父 洛鎭 )이시며 갑인(1913)6월2일에 출생하시다.

 

二十七世 肯熙-父 (義喆)의 長子

임신(1932)년 7월9일출생하시다.

배위는 波平尹氏(漢錦 父 喆熙)이며 갑술(1934)12월 8일 출생하여 기사(1989)년 12월1일 돌아가시다. 묘는 선영하에 모시다.

배위 창영성씨(昌寧成氏-英順 부 仁燮)을미(1955) 7월 26일 출생하시다.

 

二十八世 庸在-父 (肯熙)의 長子

 

 

 

 

 

 

 

 

 

 

 

 

 

 

 

判書公派世事

 

태자첨사(습홍)공을 중시조로 하여 태자첨사공파라는 계파가 비롯되었으나 가문의 기초를 다져서 오늘의 연안이씨를 실체화하는데 근간이 되시는 어른은 고려 봉익대부전공판서 상호군 증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원발)공이시고 이르기를 의정공께서 두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이 두형제분이신 강호공(귀령)과 판서공(귀산)이야 말로 자손들의 귀감이 되어 주시고 자손의 번영을 도모하심에 앞장서 주신 어른이시다.

이 두분의 후손들이 면면히 이어서 오늘의 혁혁한 가문을 이루었고 허다한 난관과 모험을 극복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보람된 삶을 갈고 닦아서 영광스러움을 더 비교할 것이 없지만 또한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역사를 남겨 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삼가 올리는 바이다.

앞서 강호공 후손에 대하여는 종가세사에서 상술한 바 있기로 여기서는 판서공파의 가문을 빛내주신 어른분의 계보를 따라 찾아보려 한다.

 

사실을 상고해 보면 판사공파는 고혜고경사건을 필두로하여 연산군시대에 우여곡절과 중종반정및 사대사화를 거치는 동안 많은 시련을 겪어 온 파에 속한다.

따라서 족보상 기록이 많이 훼손된 부분도 있지만 이를 애써 보존에 힘쓰신 분이 꾸준히 계셨으므로서 다행하게도 다른 파의 무심한 기록보다는 상세한 면이 많이 확보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공식기록은 주로 이조시대에 벼슬을 한 것만으로 근거를 존중해 온 탓으로 대개의 선대 기록들이 많이 훼손되거나 누락되었는데 여기서는 벼슬한 기록도 존중하겠지만 종인들의 동향이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살고 있기 때문에 생활근거를 언급하여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보며 생활근거를 증거로 할 수 있는 근거자료는 선대의 묘소위치기록이 중요한 바 이를 근거로 기록을 조사해 나갈 것이다.

또한 연대의 차이와 간극이 계보의 정확성을 입증하는 것이므로 연대추적에 대한 기록은 역사적인 자료와 향토지에 기록된 자료를 근거로할 것이다.

일찍이 판서공파에 대한 일부 기록은 “고혜고경”이라는 변고로 통하여 가전세유천부에서 기록한 분의 아래 계보부터 하기로 하겠는데 먼저 수서대로 판관공파부터 하겠다.

 

 

(襲洪)> 議政公(元發) (貴山) >->->-判官公 >

後孫.

十世 判官公派 派祖

 

판관을 지냈으므로 판관공파의 파조로 일컬은다. (기록- 본서 천부에 이미기록하였음)

아들 셋 參奉(堤), 縣監(墾), 生員 (垠)을 두셨다.

 

十三世 夢聖 계보>判官公 >墾>定國.

초휘 奉聖이며

배위는 大邱裵氏(父 希慶)이다. 생몰연대를 상고하건데

尊敬錄이 기록되던 시기와 판관공의 玄孫 13세 夢聖(몽성-초휘 奉聖)공이 경기 용인 南面 器谷에 살고 있었다는 연대는 1573년 선조 6년 12월 21일 분봉(盆峰-澍-三陟公의 손)공을 찾아온 기록을 근거로 할때 임진란 이전의 사실기록이므로 상당한 근거가 있어 판관공파의l 연대측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분봉공일기는 “이날 봉성과 그 아우 사성(事聖)이 찾아 왔는데 봉성은 판관공의 증손으로 분봉공과는 십촌 아우( 분봉공의 생년이 중종 29년 갑오(1534) 8월 22일 이므로 년령짐작 가능)가 된다고 하였으며 봉성의 하는 말이 춘천 조부주(續) 묘소가 용인九시동(구수동)에 있으며 강호공(貴齡)과 핀서공(貴山)의 묘소도 이 동네에 있다고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임진란 이전에도 이 부근에서 판관공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분명하다.

자는 진사(홍립)공이 있다. 자손 묘소가 용인 갈천 하대행동에 있음을 보아 공의 묘소도 이부근에 모신 것으로 추정한다.

후손이 용인 남면 기곡(현 용인 남사면 완장리)에 살고 있다는 기록이(존경록) 있으나 이는 이조중엽의 기록이며, 임진란 이후 편찬된 구보를 상고하건데 용인기곡, 갈산과, 경기도 부평, 경상도 풍기 마산, 풍기 송곡, 봉화 내성면 갈마동(봉화읍지),봉화 춘양 서면 등지에 묘소가 산재하여 있음을 보아 주로 경기도 용인과 경상도 봉화지역에 자손이 거주하고 있었다.

 

十三世계보>判官公 >垠>公藝.

 

성종22년, 신해(홍치 4년,1491)생으로 軍資監 參奉을 지내셨다. 임자 3월18일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奉化北面 加次洞이다.

배위는 경주이씨(父 進士 弘準 祖 生員 時敏 曾祖 大司憲 繩稷)이며 기일은 10월이며 묘소는 공과 함깨 모시다.

판관공 이하 계보상 연대가전혀 부전된 상태에서 공의 출생연대를 상고하건데 앞서 再從兄弟되시는 봉성공의 연대가 분봉공(盆峰公-澍-1534년)보다 이후라면 공의 출생은 종가가 아닌 차계인데 더구나 형제간의 차이가 무려 50여년이나 앞서는 모순이 있고, 이는 큰댁 재종형의 종조부 즉 자신의 증조부와 같은 연배로서 계보상으로 보아 너무나 차이가 많아 사실인증에 어려움이 많다.

계속 장자도 아닌 집안에서 다소 차이 나는 점이 있을 수 있다하여도 증조부이신 판관공 (인휴 - 仁畦)의 출생연대가 1420년대에 해당하여 증조부와의 겨우 60여년의 간극이 있어 증조부인 판관공의 이조실록상 성종25년(갑인)에 첨정으로 제수되는 등 이미 60여세정도로 이조실록에서 확실한 근거라면 공의 출생연대에 증조부간 간극이 너무 짧아 사실상 증명이 불가능한 점은 있다.

 

 

 

 

 

 

 

(襲洪)>>->->->-仁文>-振威公 塢>

 

派 後孫.

진위공파는 연안군(仁文)의 장자 진위공(塢) 후손으로 이어온 계보로서 루대를 이어 그 가문을 지켜온 온존한 후손이 계신다면 당연히 연안군의 후사를 이어가야할 위치에 있지만 사실상으로 현재 자손으로 자처하는 분들이 그러한 계보를 갖추지 못하여 소망하는 바와 같은 후사계승이 이어지지 못하는 점이 매우 안타까운 바 크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진위공(塢)은 장자이자 독자인신 연안부사공(塢)를 두기고 연안부사공(貴宗)께서는 한분의 적자(수-邃)공과 일곱 분 서자와 두 분 따님을 두신바 있고 이 한분의 적자역시 서자를 두셔서 조상을 모시는 일에 있어서는 흠결이 없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연안군장자이신 진위공과 연안부사공만 판교에 모시고 후손은 개성에 모신 기록이 있다.

 

十一世 진위공 塢 계보> 延安君(仁文)>

 

진위현령(振威縣令)을 지내시고 묘소는 板橋 板橋先塋 西麓에 표석을 하여 모시다.

배위는 扶安金氏(부안김씨 (父 甫漆 또는 甫添)이다.

 

十二世 貴宗 계보>진위공(振威公 塢)>.

자는 종지 중종2년(1507)사마로 문과별시에 급제하고 관은 교리를 지내고 연안부사에 이르다.

배위는 영산시씨(연산신씨-부 순빙 1녀 이덕재),

배위 송씨( 부 효안)

묘소는 판교선영하에 모시다.

연안부사공이후 200여년간은 계보가 없어졌다가 경신보(1920) 기록에 나타난 것은 충분한 실증이 필요한 문제점이다.

소년시대에도 매우 영리하였다 한다. 부친이 잠시 공사일로 의금부에 갇혔는데 상소하여 제영구부라는 글을 짖고 왕이 감탄“한문제는 한 여자의말을 듣고도 아비를 살려 주었거니와 이제 특별히 이귀중의 혀성과 명민함대문에 앞으로나라에 크게 쓰일 것을 믿어 그 아비와 다른 감찰들도 용서한다” 하여 부친 진위공과 함께 갇혔던 사람들까지 모두 구출한 기록이 있다.

<제영구부-堤榮救父>한나라의 순우공(淳于公)이 형벌을 받아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에게 제영이란 딸이 나아가 자신이 노비가 되어도 좋으니 아버지의 죄를 면해 달라고 간청하여 그 뜻을 가상히 여긴 임금이 사형을 감해 주었다는 고사.

 

十四世 遵美 계보>振威公 塢>邃>貴宗>.

 

후에 희빙으로 이름을 고쳤다한다(계유보불록).

 

十五世계보>振威公 塢>邃>貴宗>遵美.

명종 갑자 1564년 생이나 계유 구보에 없다.

 

二十世 枝億 계보>振威公塢)>邃>貴宗>遵美>塤>仁逸>承賢>有成>世弼.

 

字는 淮天 號는 寒圃이다. 문집이 전하다고 한다. 숙종20년 갑술(1694)생이나 그 상계부터 계유보(1813)에 이르기 까지 구보에 기록이 없다가 경신보(1920), 갑자보(1984)에 이르러 계보에 올랐으나 적자가 없어 祀孫을 할 수 없다.

판교에 있는 진위공묘소에 대한 벌초와 봉제사등의 관리는 연성군종중에서 연면히 이어 받들고 있으며 자손이 찾아온 일이 없다고 한다. 진위공과 경주공 묘소는 2005년 10월 12일에 이장하여 연안군 선영부근에 다시 모시기로 연성군 종중이 총괄 관리하기로 하였다.

 

 

 

(襲洪)>>->->->-仁文>_慶州公 㙉>

派 後孫.

十一世 경주공 㙉 계보> 延安君(仁文)>

 

자는 자후성종23년 임자(1492) 전정 책문에 입격하므로서 별시문과에 등과하여 관은 사간원 헌교, 제주목사, 예조첨의를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렀다.

76세로 장수하다.

배위는 전주이씨(전주이씨 무사,부 도양정 엄 일작 준) 묘소는 bksry 선영하에 공과 합부하였다.

배위 광주정씨(광주정씨 부 주부 윤공) 묘소는 죽산 서일면 통산동에 모셨다.

예조참의로 재직시에는 대마도에 대한 접대절목을 다시 정하고 도주의 무례를 꾸짖어 앞으로 근신할 것을 요구하는 글을 보내었으며 이때가 일본에 대한 마지막 교역이였던 것이다.

광주정씨에 의하여 세분의 아드님을 두셨다고 하는데 진사공(이수) (용수) 첨정공(봉수)이다.

그러나 장자인 진사공은 무후이며 차자의 자인 희괄에 대한 기록이 구보에 불록하여 계유 10권에 추록하였는데 이전까지는 제3자인 참정공의 후손 (휴)공이 사승하여 왔다한다. 휴공의 사마시방목조차 등재기록이 없어 여러면에서 자료가 미진하여 이로서 경주공파의 인물별 기록은 생랙한다.

경주공파후손이 지난 2005년 10월12일 판교 공의 묘소이장시에 몇사람 다녀갔는데 죽산에 살고 있다고 하였으나 수차례 판교 시제에는 한번도 참여하는 것을 보지 못하여 앞으로 이에 대한 방침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

 

(襲洪)>>->->->-仁文>_ >

別坐公派 後孫.

 

十一世 別坐公 垙 계보> 延安君(仁文)>

 

세조3년 무인 (1458)생이 시며 성종12년 경자(148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은 尙衣院 別坐를 지내시고 중종 6년 신미(1511) 4월16일에 용인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4세이다.

묘소는 龍仁 이동면 西里 九水洞에 모셨으나 실전되고 慶尙北道 醴泉郡 虎鳴面 虎鳴山 丁坐에 壇을 세웠다.

배위는 居昌愼氏(거창신씨 父 知事 承福, 祖 觀察使 詮, 曾祖 判懸事 以衷,外祖 尹深) 묘소는 공과 합부하였으며 기일은 11월 28일이다.

공은 燕山君의 妻家가 거창愼氏로서 종동서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공은 스스로 호를 半聾齋라 하였다. 佔畢齊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寒喧堂 金宏弼과 同榜 生員을 하였다.

 

역사적기록으로 볼때 연산군은 김종직 문하의 많은 선비를 모함하여 죽인 戊午 甲子士禍이후부터 용인 구수동에 은거하여 지냈다. 연산이 누차 불렀으나 스스로 반농제라는 자호를 쓸 정도로 못들은 척하여 지내시다가 용인에서 돌아 가셨다. 거창신씨 일가가 전부몰락하는 상황에서 공 내외분은 오로지 학문조차 폐하고 선영하에서 유유자적하시다가 일생을 마치신 것이다.

 

한편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과 공의 장인 신승복과는 사촌간이다. 그러나 별좌공(垙)은 연산군과의 처가로 종동서간이지만 한편 친가로는 바로 아래 아우이신 연성군은 연산군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서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공신이며 이로서 공신전을 받고 조상을 모실 수 있는 사패지를 이어 받아 마침내 용인 구수동에 있던 조상의 묘소일부를 사패지로 받은 판교후산으로 이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진위공과 경주공의 묘소는 옮긴 것으로 보이나 별좌공의 묘소는 그대로 판서공(귀산)묘하에 두게 되었다가 임진왜란이라는 큰 난리를 맞이하여 실전된 것이다. 지금 판서공 묘소조차도 실전된 상태에 있는 만큼 이는 판관공후손이 종가로서 판서공이하 묘소를 관리하여 오다가 그 자손이 모두 절손되는 고로 묘소를 제대로 관리 못하였듯이 별좌공묘소 역시 주손이 별좌(번수)공의 후손과 다음 주손이되는 매촌공(유)의 후손이 절손된 상태에서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이러한 변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진다.

 

특히 별좌공(광)의 차자인 교위(위수)공은 낙남하여 처음에는 예천금곡에 덕천당을 세우고 후세교육에 힘스시는 한편 안동 절겅 무릉에 이르러 무릉정이라는 정자를 짖고 당시 영남일대의 사림들과 교유하면서 매촌(유), 율리(희), 눌헌(응),등 삼형제를 퇴계문하에 보내어 훌륭한 도학을 잌혀 나라에 동량이 되도록 하였다.

 

불행하게도 임진왜란이란 불가항력적인 전란에 임하여 수령들이 겁을 먹고 버리고 간 예천고을을 당시 용궁현감에 계시면서 예천성을 수성하였지만 재차 삼차 공격을 해온 적과의 예천성전투에서 전 가족도 함께 몰사하는 변고를 당하였을 뿐 아니라(매촌공) 한편 왕을 호종하던 차에 삭녕지방에서 적을 만나 항전하시다가 순절하신 분도 있으시며(율리공) 의병을 모집하여 경상도지역을 방어하시는 등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고을과 나라를 지키는 데 힘쓰셨고 전란이후에 겨우 수습한 가솔을 거두어 지금의 예천 송곡에 처음으로 자리를 정하였다(눌헌공)

공의 묘소는 구수동에서 실전되었기에 십일세손 정기(鼎基)에 의하여 예천군 호명면 본포동 호명산에 교위공 瑩 오른 편에 모신 것이다.

子는 別坐(蕃壽)公, 校尉(葳壽)공을 두고

女는 安承順(본 光州)이다.

 

1400년대

1500년대

1600년대

 

延安君

 

25

 

 

 

 

 

 

 

03

 

 

 

 

 

 

 

 

 

 

 

 

 

 

 

 

 

 

 

경주공

 

 

 

 

55

 

 

 

 

 

 

 

31

 

 

 

 

 

 

 

 

 

 

 

 

 

 

별좌공

 

 

 

 

58

 

 

 

 

 

11

 

 

 

 

 

 

 

 

 

 

 

 

 

 

 

 

연성군

 

 

 

 

 

62

 

 

 

 

 

24

 

 

 

 

 

 

 

 

 

 

 

 

 

 

 

삼척공

 

 

 

 

 

66

 

 

 

 

 

26

 

 

 

 

 

 

 

 

 

 

 

 

 

 

 

 

 

 

 

 

 

 

 

 

93

 

 

 

 

??

 

 

 

 

 

 

 

 

 

 

 

 

 

 

 

世安

 

 

 

 

 

 

 

 

 

 

14

 

 

 

 

 

 

 

90

 

 

 

 

 

 

 

 

 

 

 

 

 

 

 

 

 

 

 

 

 

 

36

 

 

 

 

 

93

 

 

 

 

 

 

 

 

 

 

宗立

 

 

 

 

 

 

 

 

 

 

 

 

 

 

 

69

 

 

 

 

 

31

 

 

 

 

 

 

 

葳壽

 

 

 

 

 

 

 

 

91

 

 

 

 

 

 

 

 

 

 

 

 

 

 

 

 

 

 

 

 

 

 

 

 

 

 

 

 

 

 

22

 

 

 

 

 

 

 

94

 

 

 

 

 

 

 

 

 

 

 

 

 

 

 

 

 

 

 

 

32

 

 

 

 

 

 

92

 

 

 

 

 

 

 

 

 

 

 

 

 

 

 

 

 

 

 

 

36

 

 

 

 

 

 

97

 

 

 

 

 

 

 

 

 

 

慶宗

 

 

 

 

 

 

 

 

07

 

 

 

 

 

 

70

 

 

 

 

 

 

 

 

 

 

 

 

澍盆峰

 

 

 

 

 

 

 

 

 

 

 

34

 

 

 

 

 

86

 

 

 

 

 

 

 

 

 

 

 

光庭

 

 

 

 

 

 

 

 

 

 

 

 

52

 

 

 

 

 

 

 

39

 

 

 

 

 

 

 

 

 

 

 

 

 

 

 

 

 

 

 

 

 

84

 

 

 

38

 

 

 

 

 

 

 

昌庭

 

 

 

 

 

 

 

 

 

 

 

 

73

 

 

 

26

 

 

 

 

 

 

 

 

德昌

 

 

 

 

 

 

 

 

 

 

 

69

 

 

 

16

 

 

 

 

 

 

 

 

 

慶元

 

 

 

 

 

 

 

 

 

 

 

 

 

 

00

 

 

 

 

 

 

 

71

 

 

獻徵

 

 

 

 

 

 

 

 

 

 

 

 

 

 

 

 

 

 

 

38

 

 

 

 

 

 

07

 

 

 

 

 

 

 

 

 

 

 

 

 

 

 

 

 

97

 

 

 

 

 

 

 

 

 

04

觀徵

 

 

 

 

 

 

 

 

 

 

 

 

 

 

 

 

 

 

 

18

 

 

 

 

 

 

 

96

斗相

 

 

 

 

 

 

 

 

 

 

 

 

 

 

 

 

 

 

 

 

 

 

 

 

61

 

 

 

 

이 표는 별좌공 형제들의 생몰연대를 비교하여 별좌공의 거취연대를 추정한다.

황색과 분홍은 사화(士禍)시대, 붉은 색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의미하고 의미한다.

당시 별제공 금성공,이천공,판관공제위의 연대는 계보불록이다.

한편 임진왜란 전후 삼척공파간의 공동으로 피란에 대응한 시기를 조감해 보는바 (덕창)공과 경원공 재세시 삼척공파 (창정)공이 문경금성산에 피란하였다는 기록과 일치하다. 관찰사(관징)공이 경상관찰사재임시 예천송곡에 별사를 기증했을 당시는 별좌공파의 (경원)공과 (헌징)공 재세시다.

 

十二世 葳壽 계보> 延安君(仁文)>_별좌공 (垙)

자는 華甫이다, 성종 22년신해(1491)생이시고 벼슬은 內禁衛彰信校衛로 시작하였으나 이를 버리고 남하하여 慶北 醴泉 沙谷에 자리를 잡았다.

배위는 인동장씨(仁同張氏 父宣略將軍 仲羽 祖 延福君 安襄公 末孫,曾祖 縣監 安良, 外祖 申琥 本貫殷豊)시다.

자는 梅村公(愈) 栗里公(熹) 訥軒公(應)이며,

여는 玄璞(昌原人 吏曹判書 錫圭의 玄孫)邊克寧(原州人 父 參奉 璫) 金訒(光山人) 孫溥(平海人 文 參校)이다.

공께서는 용인 九水洞에서 공명을 초월하여 선영을 받들고 사시는 부친 별좌공 (垙)이 중종 6년1511)에 돌아가시자 창신교위의 벼슬을 버리시고 남하하여 경상도 예천 사곡(현재 경북 예천군 호명명 송곡동 사고막골)에 은거하신 것이다.

부친이신 별좌공(垙)께서 이미 점필제(金宗直)의 문하로서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어 온 만큼 영남성리학파에 대해 호감을 갖이시고 세분의 아드님과 사위분들은 모두 퇴계(이황)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고 이분들은 모두 퇴계문인록에 올라 있다.

공은 조부이신 연안군과 당시 숙부이신 연성군(坤)은 물론이고 이시애란평정공신이신 안양공(장말손)공의 맏 손서로서 당대에 권력의 중심에서 영달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사화와 선비들의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여 부친의 유지를 따라 영남으로 남하하신 일은 참으로 현명한 하였다고 사료된다.

 

十三世계보> 延安君(仁文)>)별좌공 (垙)>-교위공(葳壽)

자는 자흠이요 호는 매촌이다. 중종 17년 임오(1522)생이시다. 명종 2년 정미(1547)년에 율리, 눌헌 동생분과 함께 생원으로 함께 생원진사에이르시고 삼형제가 같이 퇴계문인으로 나아갔다.

도산문현록에 기록하였으되 “이유는 자 자흠이요 호를 매촌이라 하는데 연안인인으로 예천출생이다. 가정 임오에 형제가 함께 진사가 되고 퇴계문하가되었다. 4개의 읍을 다스려 치적을 쌓고 임진년에 용궁현감으로 부임하자 군사를 모아 외적에 대항하였다.

난리를 만나 뿔뿔히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겨우 수백에 지나지 못하는 군사이지만 용군정재령은 국가의 주요 보급로로서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막중한바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임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설제위서충모시석) 다수의 적의 목을 베고 신속하에 움직일 수있도록 보급로를 열어 차질이 없게 하였는데 다시 예천의병장으로 토적을 잡아 일군이 일단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질서를 잡아 나갔으며 이로서 경상도 안찰사인 김수(김수)는 공에게 진충보국한 공으로 포상하였다“ 하며 이어 한편 기록에는 ”공의자는 자수인데 첨추(첨정벼슬과 중추부사를 지내신)인문공의 증손으로 수를 72세라“ 이록한바 있고 또한 ”태천현감 재임시에 렴사 한음(문익공 이덕형)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주청하자 임금은 귀한 신발과 의상(표리의대)을 하사하였다”한다. 그리고 “임진 5월 경상도 안집사 백암 김인(김인)이 경상도 각읍을 지킨 장수들에 대해 장계를 올렸는데 전현감 이유로하여금 예천을 지키고 토적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국조실기에도 “용궁현감 이유는 적병과 더불어 교전하여 많은 수급을 노획하였으며 경상감사 백암 김인이 포상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예천읍지(나은 이동표찬)에는 ” 이유는 의병장으로서 적과 싸워 토멸하고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니 시신을 찾을 수없어 그의관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고, 조선 명신록에도 ”이유의 호는 매촌이요 위수의 아들이다. 퇴계문인으로 임진란에 적을 참획하여 공을 세웠으며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였다는 기록을 이동표가 이를 장계하였다.

공은 간당들만 가득한 조정에 입사하지 않으시다가 명종 22년 정묘년에 재야인재를 천거하라는 교지에 따라 늦게 벼슬길에 오르셨는데 4개읍을 다스렸는데 태천현감으로 재직시에는 한음(이덕형)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장계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의복과 신발(表裏衣襨)를 받았다.

 

무릉정 현판을 걸때 시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暮厓細路覓幽棲

谷遼炯深樹影低

何處桃園花從水

武陵島外唱金鷄

 

栗里公과 訥軒公 두분 아우님,그리고 鄭元忠 玄璞 笑庵姜士弼 邊克寧 鄭元沆 金訒 鄭元黙 李景嶔 曺繼益 權景龍 鄭元健 聚遠堂 曺光益 洪秀民 曺希益 蒙霽 李安道 芝山 曺好益 權景虎 曺謙益 과 더불어 講親契를 세웠는데 공이 강친계의 계주시며 이분들은 姨從兄弟와 姨從媒胥의 사이였다.

강친계첩의 쓰인 제목의 싯구는 이러하다.

思功謂陽日

歡深荊樹春

百年期莫逆

相與講親親

이 강친계는 선략장군 (선략장군 장중우 부 연복군 장말손)의 외손자이거나 외손서들로서 공과 공의 두아우분을 합하여 수물한분인데 게첩과 계첩에 시문을 올려 세세연년토록 친분을 가지고자 하는 약속을 서명한 것으로 모양은 정방형 석자크기로 네모난 기름먹인 한지 한 장에 올려저 있어 오늘 날 까지 보존되어 왔다.

 

 

 

 

 

 

十三世계보> 延安君(仁文)>별좌공 (垙)>-교위공(葳壽)

十三世계보> 延安君(仁文)>별좌공 (垙)>-교위공(葳壽)

 

 

 

 

 

 

 

 

 

 

 

 

 

 

 

 

 

 

 

 

김성근 [金聲根, 1835~1918] 자 중원해사안동

본관 안동(安東). 자 중원(仲遠). 호 해사(海士). 1862년(철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벼슬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 때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901년에 장례원경(掌禮院卿)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규장각학사(奎章閣學士) ·홍문관학사를 지냈으며, 1902년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자작(子爵)이 되었다. 청렴결백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였다.

 

 

미남궁체

미불(미불 [米芾, 1051~1107]

자 원장(元章). 호 남궁(南宮)·해악(海岳).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신. 관직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고 궁정의 서화박사(書畵博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기행(奇行)이 심했다. 수묵화뿐만 아니라 문장·서(書)·시(詩)·고미술 일반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고, 소동파(蘇東坡)·황정견(黃庭堅) 등과 친교가 있었다.

글씨에 있어서는 채양(蔡襄)·소동파·황정견 등과 더불어 송4대가로 불리며,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이었다. 그림은 동원(董源)·거연(巨然) 등의 화풍을 배웠으며, 강남의 운연(雲煙) 어린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기 위하여 미점법(米點法)이라는 독자적인 점묘법(點描法)을 창시하여 오진(吳鎭)·황공망(黃公望)·예찬(倪瓚)·왕몽(王蒙) 등 원말 4대가와 명(明)나라의 오파(吳派)에게 그 수법을 전했다.

 

아들 미우인(米友仁)에 이르러 성립된 이 일파의 화풍을 ‘미법산수(米法山水)’라고 한다. 북송 말의 회화사상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화사(畵史)》 외에도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서사(書史)》 《보진영광집(寶晋英光集)》 《해악명언(海岳名言)》 등의 저서가 있고, 《초서9첩(草書九帖)》 《행서3첩(行書三帖)》 등의 작품이 있다.

 

 

2006년 2월

延安李氏

(地部)

 

 

丙戌 迎春

 

李 觀 熙 編修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