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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 가전세유 天部

작성자2244 이관희|작성시간12.07.30|조회수436 목록 댓글 0

 

 

 

글머리에

 

이 기록은 연안이씨 가전세유로 이름하고

모두 천,,,, 4부로 편찬하는데 가전세유 (천부)는 시조공과 시작하되 중시조 를 1세로 한 이후 10세까지 기록한다. 지부는 11세부터 15세까지, 현부는16세부터 22세와 연안이씨 유명인물 전부망라하며, 황부는 별좌공파의 계보를 수록 한다

 

참고한 자료는

대개 을사선보를 비롯하여, 갑술보, 계유보에 이어 이조 말엽과 일제혼란기에 투탁이 성행하던 시기에 제작된 경신보와 갑자보및 관련지파의 파보등의 내용을 검토하여 진위를 감정 수록하고 참고하면서 아울러 최근 공개된 이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존경록, 분봉일기, 가전세보, 세첩보유, 연안이씨세적고를 참고하였다.

 

특히 감안 할 것은

이씨조선 500여년과 일제 36여년, 그리고 해방이후 감히 발설하지 못했던 숨은 연안이씨 관련 사료들을 발굴하여 발표하는데 역점을 두고 또한 최근에 이르는 동안 누락하였던 역사기록을 다시 추고하여 후세에 보다 발전된 사실을 연구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다지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었으니 만큼 다소 의혹이 있거나 완전하지 못한 기록일지라도 이를 어전인수로 해석하거나 이해문제로 소파간의 시비꺼리로 여기지 말고 후일에 엄정한 기록을 추고하여 천추만대에 명명백백한 계보를 갖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니 후일에 이어 계속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후학들의 올바른 추보를 기약하고 가급적 세밀히 옮겨 놓는데 열중하였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20106    

 

편수자 관희

태자첨사공 별좌공파  

,

延安李氏 家傳世遺(天部)

당 중랑장 실기(唐 中郞將 實記)

()는 무()이며 신라(新羅)로부터 받은 식읍(食邑)과 작호)爵號)는 백작(伯爵)에서 후에 후작(侯爵)으로 예우 받았다.

서기 660 (신라 태종19년 당 고종 5)에 소정방이 백제(百濟)를 치고자 당종실 중랑장(中郞將)으로 함께 왔다고 전한다.

 이 사실은 선조 38(1604) 연안이씨로 서는 처음으로 족보를 수단할 당시에 해고(海皐) 이광정(李光庭)공이 보 서문(譜 序文)에서 비로소 밝혀온 바에 따르면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정벌한 다음 받은 식음이 황해도 연안지방이였음으로 본관(本貫)을 연안)延安으로 하였다라고 했음을 연안이씨 제 문중은 시조공에 대해 가장 분명한 근거로 삼아 왔다

 

연안이씨 종사안정에 내실을 탄탄히 닦아 놓은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공도 그의 행장에서 중랑장 공에 대해 이같이 말한 바 있고,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공도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평정하고 나서 신라로부터 황해도 연안땅에 공적을 기려 사패지(賜牌地)를 받아 이 땅에 머무르시니 곧 연안이씨의 비조(鼻祖)가 되신 것이라하였으되 세대를 이어 오는 동안 그 보첩을 갖추어 이어 오지 못하여 같은 연안을 동본으로 하는 연안 이씨로서 계보를 가늠하지 못함이라“  했으며, 퇴계선생(退溪先生文集)을 인용하면이씨는 소정방이 백제를 토벌할 때에 같이 오신 분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연안에 머물게 되어 연안이씨로 본관을 삼았다는 것과기록을 갑산군수 이형례의 묘갈문을 인용하였다하며, 영모종천고(終天永慕考)에 의하면이씨는 당중랑장의 후예라 하였고, 지봉유설(芝峰類說 李晬光) 에서는연안이씨는 중국에서 왔다하였다.

   終天永慕錄고4650-132柳成龍,1929 52, 필사본, 31. 0   22. 5cm.

西厓 柳成龍(1542-1607)이 晩年에 金宗直이 그의 先人을 위해 《彛尊錄》을 지은  것을 본받아 祖先의 遺事, 文字를 모아 1601(선조34)부터  시작하여  1606년에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당서(唐書 毆陽修 宋祈等 纂)에는 백제를 정벌할 당시의 기록에는 출정 장군등의 이름이 올라 있지만 중랑장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이는 당의 종실이기 때문에 공적을 초월한 기밀에 속한 사항으로 보고 기록에 명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하여간 당()이 고구려(高句麗)까지 정벌한 이후 중랑장(中郞將)공은 이땅에 머물렀다는 분명한 사실을 바탕으로서 확실한 근거를 삼아 그분이 우리의 우리의 분명한 시조(始祖)이심을 알고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군위군 장군동(軍威郡 將軍洞)에 소재한 효령사(孝令祠)에는 중랑장공과 김유신 소정방등 삼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데 중랑장 공이 다른 장군과 달리 정사에 기록이 없다하더라도 신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는 역사적 큰 기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시조공묘소에 대한 자료로서는 두곳이 기록에 남아 있는데 이천읍 주봉(伊川邑主峰)인 당후동(堂後洞) 혹 이장군동(李將軍洞)에 묘소가 있다고도 하고, 또는 연안군 북면 용각산 흥림촌 남록(延安郡 北面 龍角山 興林村南麓)에 묘소가 있다고도 하였다.

 

묘소에 대한 기록으로 홍천(洪川)에 사시는 일가 이항(李沆)公에 따르면 이천부 십리상간(伊川府 十里上間)에 정생원 순찬(鄭生員 順贊)과 한 늙은 이속(吏屬)을 소개한 자리에서연안백이(延安伯李)”라는 4字의 비석에지묘(之墓)”가 없는 상태의 비석을 보았다고 하였다. 훗날 참의 이희조(李喜朝), 참봉 이영보(李英輔),부평부사(李獻佐)公등이 현장답사를 하였는데 이천부 주산(伊川府主山)뒤 큰 대총(大冢)이 있고 묘갈(墓碣)은 없지만 비석(碑石)이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존경록(尊敬錄)에서 발췌한 것이다.

 

경기도 이천(伊川)에 대한 자료는 조선시대 초기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대동운옥(大同韻玉 草間 權文海纂) 성씨고에 보면이씨(李氏)는 당나라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토벌할 당시에 중랑장으로 오신 이무가 황해도 연안땅에 머물러 훗날 자손이 이어 와서 그 본을 延安으로 하였다고 한다.    

 

근래에 발견된 자료 흥무왕실기(興武王實記-金庾信)에 따르면 신라로 부터 식읍 1000호를 받았으며 연안백(延安伯- 후에 다시 延安候)로 봉작(封爵)되었다 하는데 이는 공이 당종실의친(唐宗室懿親)이며 중랑장으로 백제를 평정한 후 신라까지 복속시키려는 소정방의 과욕을 억제시킴으로서 라()()간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분쟁을 사전에 제지하니 신라왕(新羅王 金春秋)과 장군 김유신은 신라의 위기국면을 전환시켜 참담한 전화(戰禍)를 미리 방지한 공에게 연년평안(延年平安)의 태평성대를 누리게 한 감사의 표시로 연안후 (延安候= 候爵=爵錄 二等)로 예우하고 황해도지역 1000호를 식읍으로 봉강(封疆- 諸候에게 내리는 세습령토-신하관계가 아닌 독립된 통치체제)하여 훗날 이지역 명칭도 연안(延安)이라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을 소개한다.

 

라당연합군(羅唐 聯合軍)으로 백제를 정벌한다는 명목하에 상륙한 대총관 소정방은 우선 백제섬멸정도는 어렵지 않게 목적을 달성하고 보니 다시금 더욱 큰 전공을 세우고 싶은 공명에 들뜬 무장들 본연의 욕심이 발동되어 그동안 국력을 기울려 전란준비에 골몰하여 지처버린 동맹군 신라까지 복속(服屬)하므로서 돌아가 전공을 자랑코자 하였는데 비록 중랑장급이지만 당 종실(唐宗室)로서 황제(皇帝)의 의표를 대신하는 공께서는 당초에 없던 소정방의 욕심을 미리 간파하고 승패를 가늠키 어려움과 다시금 전란의 소용돌이에 고통받는 창생(蒼生)을 걱정하고 또한 당군의 경솔한 행동을 자제할 목적으로 김유신등 신라군에게 수습할 말미를 주기 위한 책략으로 우선 무예연습을 유도하므로서 아직도 신라군의 사기가 충천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하므로서 감히 신라토벌의 야심을 잠재운 사실이 구체적으로 흥무왕실기에 올라 있다. 비록 최근에 발견된 자료이지만 매우 흥미진진한 자료로서 연안이씨에 대한 누락된 기록을 보완하는데 매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여지승람(與地勝覽 徐居正 노사신 등찬 이행 홍언필등 증보)에 의하면 연안(延安)은 본래 고구려의 동음홀(冬音忽) 또는 고렴성(高殮城)이라 하다가 신라에 이르러 해고군(海皐郡)이라하고 고려초에는 염주(鹽州)로 방어사를 둘 정도로 큰 도시였다가 현종초에는 해주에 패속시키더니 고종때에는 감무를 두고 영응현(永膺縣)으로하고 석주(碩州)로 개칭하였다가 충렬왕때 온주목(溫州牧)으로 그리고 연안부(延安府)로 한것은 조선 태종13년 부터이다.

을사보 인쇄 총책임을 맡았던 판교 이홍로 (板橋 李弘老)공이 말하기를 연안이씨는 삼한의 망벌(望閥)로 천유여년동안 명경현상(名卿賢相)이 대를 이어 나타났건만 이를 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춘천공 적몰지변(春川公 籍沒之變)으로하여 모두 흩어져 그동안 집안 기록이 없어졌다고 기사보서문(己巳譜序文)에 밝혔다.

당나라 종실이 도교(道敎)의 개창조 백양 노선생((開創祖 白陽 老先生-老子) 현원황제 이 이(玄元皇帝 李耳)를 시조(始祖)로하는 만큼 이씨성을 갖게 된 연유를 이로서 명백히 밝히는 바이다.

외래 성씨가운데 이씨성은 대개 농서이씨(隴西李氏)인데 당종실역시 농서에서 발단하였으므로 같은 맥락을 이어 왔고 연안이씨도 당종실에서 당고조의 형제에서 분계된 계보라 하므로 농서를 본으로하는 이씨는 같은 계보로 볼 수 있을 지 모르나 이 땅에서는 이를 엄격히 하여 오로지 연안이씨만이 당나라 종실 혈통을 이어 받은 성이라 칭하고 있다.    

현재 남북이 막혀 묘소를 찾을 바이없어 1965년에 충남대전 유성구갑동에 설단하고 시절마다 제사를 모시고 있다.

神道碑文을 아래에 소개한다.

延安李氏始祖唐中郞將 新羅延安侯文淸公諱茂之神道碑文

연안이씨 시조 당 중랑장 신라 연안후 문청공 휘 무 지 신도비문

 

연안이씨의 시조는 본시 당() 종실의 의친(懿親)으로 諱를 무()라 일컬으신 어른이시다. 하악(河嶽)의 영기를 타고나신 불세출의 대인물로서 덕망이 높으셨고, 기우(器宇)가 관작(寬綽) 하셨다. 三軍을 홀로 호령하실 용혜(勇彗)로 도략(韜略)을 관통하셨지만 경상애하(敬上愛下) 하시며 겸양으로 자수(自守)하셨다. 일찌기 당 고조의 창업을 도와 수선(隋禪)을 넘겨 받는데에 보필(輔弼)하신 공노가 지대하셨고 좌위중랑장의 위서(位序)에 오르셨으니 그 풍광 오죽이나 영매(英邁)하셨으리.. 천년이 흐른 오늘에도 모앙(慕仰)하려는 마음이 절로 솟는다. 당 고종 현경(顯慶)五년 신라에서 김인문을 보내 원군을 청했다. 당시 신라는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고구려 및 백제와의 각축전에서 서북으로 四十여성을 잃어 국기가 흔들릴 지경이었고 당 나라는 건국 초 두 차례의 원정에서 고구려의 강력한 항전으로 국권에 커다란 손상을 입게 된 터라 신라와의 맹약을 다지기에 절실한 때였다. 당 고종은 소정방(蘇正方)으로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憁管)을 삼고 李茂公으로 부총관(副憁管)을 삼아 十三萬의 대병으로 응원케 했다. 唐군은 래주(萊州)로부터 海路를 거쳐 德勿島에 이르렀고 신라는 太子 法敏을 보내 맞게 하였다. 蘇公은 七월 十일을 기하여 백제성 남쪽에서 會合하기로 밀약을 정하고 夫只浦로 상륙하여 禮山 靑陽등지로 진군하였고 그보다 먼저 계림을 떠나 남천정에서 머물던 신라군은 보은 옥천 금산 등지로 진군하였다. 양군이 회동을 마치고는 蘇公은 부소산에 진을 치고 羅唐양군을 四路로 나누어 백제성의 공략을 지휘하는데 李부총관 및 유백영(劉伯英)과 풍사귀(馮士貴)는 각각 一萬兵으로 동북서의 삼면을 맡고 김유신은 二萬兵으로 남쪽을 맡아 일제히 진공케 하니 백제군은 전의를 잃고 허둥거리며 패색이 짙어졌다. 소공(蘇公)김유신에게 다시 웅진성을 추공(追攻)케 하니 마침내 백제왕은 모든 장상(將相)을 거느리고 투항했는데 때는 태종무열왕 七년 세재경신(歲在庚申)(서기660)의 七월十八일이었다. 소공(蘇公)은 개악(凱樂)을 울리며 입성하여 당의 기치를 높이 꽂았다 .무렬왕은 옥백성폐(玉帛盛弊)로 대첩을 치하하고  牛羊酒食으로 군졸들을 대향(大餉)하니 라당(羅唐) 장졸들이 모두 헌하(獻賀)의 예를 올렸다. 한편 蘇公은 내친 김에 신라까지도 습취(襲取) 하리라 마음 먹고서 제장들을 모아 밀모하는데, 李부총관이 진언하기를 "황제께서는 유독 인명을 아끼시는데 어찌 무고한 동국민에게 흉화(兇禍)를 끼치리요. 더구나 신라는 비록 소국이지만 군의신충(君義臣忠)하고 지헝인용(地險人勇)하여 쉽사리 도모하지 못할 것이다" 하니 蘇公은 본국에 상소하여 군사를 더 청해서 단숨에 격파하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부총관은 다시 함부로 서둘다간 백제를 평정한 공마저 헛되고 말 것이니 먼저 신라 장수들의 무예를 시험해 보는게 좋겠다 하였다. 蘇公은 수긍하고서 望海停에 잔치를 베풀고 신라의 군신을 청했다. 그리고 여흥을 핑계로 羅唐 장졸들의 무예를 겨루어 보자 청하면서 제조세전(濟朝世傳)의 보검(寶劍) 一件과 자신이 애장하던 황금갑(황금갑) 일습(一襲)을 현상으로 걸었다. 이어 사후(射侯)를 세우고 궁술로 자웅을 겨루게 하는데 당시(唐矢)는 과녁을 벗어난 화살이 많았으나 라시(羅矢)는 화살마다 정곡(正鵠)을 꿰뚫으니 피아진(彼我陳)없이 탄성이 흔천(흔天)하였고 소공(蘇公)은 얼떨결에 일어나 東國의 장수들은 과시(果是) 모두가 신궁(神弓)이로다 하고 찬사를 보냈으나 불안한 빛이 역력하였다 잔치를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와선 부총관의 손을 잡고 탄식하며 공의 깨우침이 없었다면 十萬王師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뻔 했다 하고는 이내 웅진으로 진영을 옮기고 도독부를 설치하여 부총관과 유인원(劉仁願)을 남겨 濟地를 진무(鎭撫)케 하고 바다를 건너 회군하고 말았으니, 여기에서 時勢를 통찰하고 장래를 예견한 우리 시조이신 부총관의 탁월한 자품(資稟)을 엿볼수 있다 濟城의 완전평정을 확인하고 무열왕은 계림으로 환가(還駕)하여 종묘(宗廟)에 告祭하고 논공행상을 하는데 대각간으로 승자(昇資)김유신이 백제를 평정한 功과 신라를 구제하고 양국을 和好케한 덕량을 들어 부총관에게 가봉예대(加封禮待)하기를 주청(奏請)하니 왕은 옳게 여겨 食采  一千戶로 연안백을 봉하고 빈례(賓禮)로 대우하니 우리 이씨의 延安貫籍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七~八년동안 고구려와의 충돌이 계속되더니 마침내 이적(李勣)을 대총관(大憁管)으로 압록강을 건너 남하한 十三萬의 당군(唐軍) 및 웅진(熊津)을 거점으로 한 부총관(副憁管) 이공(李公)의 三萬 정병(精兵)과 계림(鷄林)으로부터 북진한 김흠순(金欽純) 김인문(金仁問)의 五萬 라군(羅軍)의 협공으로 문무왕 八년[서기 668] 마침내 고구려의 항복을 받으니 실로 삼국통일의 기저가 이날을 기하여 이루이진 것이다 흥덕왕조(興德王朝)에 이르러 연안백 이무공(李茂公)을 연안후(延安候)에다 諡文淸으로 추숭하고 대각간 김유신에겐 흥무왕(興武王)이란 시호를 추증하였으니 모두가 지난날의 훈로(勳勞)를 보사(報謝)하려는 전장(典章)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이던가 赤羅縣[軍威]에서는 蘇李金三將軍의 유덕을 경모한 나머지 삼장군(三將軍)이 유진(留陳)했던 곳이라 전해진 삼정산(三井山) 마루에다 효령사(孝靈祠)라 일컫는 사우(祠宇)를 세우고 해마다 단오날이면 관민이 어울려 기고(旗鼓)로 영신(迎神)하며 받들던 제사가 향풍(鄕風)이 되어 이어지다가 경술 국치에다 누차의 화마로 폐지되었으니 사민자손(士民子孫) 할것없이 통석(痛惜)의 정() 그지없었다. 다행이도 국가의 보조 아래 유지가(有志家)들의 힘을 입어 一九九六년의 단오절에 복원(復元)을 아뢰고 향사(享祀)를 잇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탄식,슬픔)라 세칭(世稱) 삼한관성(三韓冠姓)의 우리 家史를 삼별초란(三別抄亂)으로 잃고 세계(世系)가 묘연(杳然)해졌다 .마침 麗末에 네분의 顯祖가 계셨음이 드러나 譜事를 닦았는데 태자첨사(太子詹事) 諱 습홍(襲洪)公 판소부감(判小府監) 諱 현려(賢呂)公 대장군(大將軍) 諱 송()公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諱 지()公으로 각각 종파를 이루었다. 덕후유광(德厚流光)은 固然한 이치라 各派마다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사책(史策)에 끊일날이 없었으니 영광스럽게도 상신(相臣)이 아홉분으로 영의정(領議政)에 時白 天輔  時秀요 좌의정(左議政)에 貴齡 廷龜 후(王厚) 福源 性源 存秀요 대제학(大提學)이 일곱분으로 好閔 정귀(廷龜) 明漢一相 鼎輔 福源 晩秀요 청백리(靑白吏)가 여덟분으로 仁忠崇元 後白 光庭 基卨 時白 后定 明俊이요 판서(判書)가 四十二분이요 錄勳에다 封君이 열분이요 증시(贈諡)가 오십구(五十九)분으로 조선조(朝鮮朝) 통틀어 대과(大科)에 급제한 二五十분의 인재가 배출 되었다. 특히 독립운동가로 상해임정의 주석 및 의정원 의장을 지낸 東寧은 이 민족의 영원한 추앙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충효열(忠孝烈)의 탁절(卓節)과 아문청덕(雅文淸德)이 속출하여 세속을 순화시켰으니 김포에다 모신 통칭 八紅門家의 十四 정려각(旌閭閣)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무너져 가는 망상(網常)을 굳게 지키고 있어 진정 國中의 望族으로 명실상부하니 은연중에 자긍심도 생기지만 자손되는 자 혁혁(赫赫)하신 大祖의 덕업을 계술(繼述)하는데 어찌 감히 몸가짐을 소홀히 하리요 고맙게도 四友堂公派 所捐의 계룡산하(鷄龍山下) 유성(儒城) 甲洞의 신좌원(辛坐原)에 영원(塋園)을 모시고 인근에다 延源으로 題額한 祠宇를 세워 세천(歲薦)을 올리고 이제 다시 樂石을 다듬어 희생(犧牲)을 매고 영원토록 유덕을 기리려한다. ! 삼국통일 그날의 위업은 천추만세(千秋萬世)에 영광스런 횃불이 되리라 애닯게도 하해(河海)와 같으신 음덕에 보효(報效)하는 정성이 너무나도 미미하기에 국내외의 백만자손들은 여경(餘慶)의 고마움을 폐간(肺肝)에 새겨 일거일동(一擧一動)이 청현세벌(淸顯世閥)의 성망(聲望)에 부합하도록 숙야전긍(夙夜戰兢)하며 대인(對人)처사(處事)에 성찰(省察)의 도리나마 다해야 할 것이다 .불초(不肖)하온 小孫은 천졸(淺拙)한 문식(文識)의 소치로 대조(大祖)의 유덕을 萬의 一도 발휘하지 못함에 무한한 죄책을 통감하는 바이다.

단군(檀君)기원(紀元)四三三二년[西紀一九九九년]기묘(己卯)입추절(立秋節)

始祖公이후 延安을 同本으로하는 李氏가 太子詹事公을 비롯하여 여러파가 있으되 혹 10파라고도 하나 최근 4파로 통합되었다.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중시조 습홍(襲洪), 1604년에 乙巳譜초간.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府使公派)-중시조 漬, 1807년 丁卯譜를 초간.

판소부감공파(判小府監公派) -중시조 賢呂, 1729년처음 己酉譜 초간.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중시조 元柱,(2004년이전 족보 발간 사실불명)

 

太子詹事公派 世系 (태자첨사공파세보)

中始祖 (중시조)  一世  襲洪 (습홍)

 

호를 학옹(學翁)이라 하시다. 자세한 벼슬이름은 (고려검교태자첨사행상약국봉어(高麗檢校太子詹事行上藥局奉御) 詹字는 곧 供字와 같은 의미다.

배위 성씨는 생몰연(生沒年)이 모두 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 정인지 편))에서 태자첨사(太子詹事)는 고려초부터 있던 관제로서 왕자를 받드는 자리로 동궁에 첨사부(詹事府)를 두고 삼품관(三品官) 첨사(詹事) 1人을 둔다고 한 그 직제중 하나이며 상약국어사(上藥局奉御史)는 백관들에게 완의 교지(敎旨)를 전하는 직책이라 한다.

존경록(尊敬錄-16世孫 삼척공파 同樞公 泳에 의하여 편찬되고 陰城公 之水에의하여增補된 延安李氏世譜遺錄을 집대성한 책이다.菊版 760)의 에 따르면 공은 고려 고종조에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내셨다. 중시조(中始祖)이신 태자첨사공(太子詹事公)이후 5대를 년대로 계산한다면 1 30년으로하여 150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의 고종(高宗)시대이며 태자첨사공은 고종시대 인물로 보는바 이는 청송부사(靑松府使 都摠管 李晟私譜)에도 같은 기록이 있고 풍산홍씨족보(豊山洪氏族譜에 版圖尙書公 사위인 洪侑의 忠烈王 26年 壬寅에 登科한) 기록과 일치하여 중시조의 기록연대는 고려 고종의 44년에 해당하여 첨사공생몰년이근사한 기록에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二世 克榮 

 

고려(高麗)때 조의대부판태의감사진다방사(朝議大夫判太醫監事知茶房事)의 벼슬을 하셨다. 배위 성씨 직위와 생몰연등이 모두 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려사를 상고해 볼때 고려충민왕조(高麗忠烈王朝)에 조의대부(朝議大夫)는 정오품(正五品) 위계이며 태의감사(太醫監事)는 종삼품(從三品(상당 직책으로 공은 이로서 고려 충렬왕당시 직에 계신 기록이 있음이 명백하다.  

 

三世 景茂 (경무)  

벼슬은 고려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상서(版圖尙書)를 지내시고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성천 김씨(成川-또는 安老 金氏)이시다.

아드님은 대호군(大護軍) 승안(承顔)과 딸은 대제학(大提學) 홍유(洪侑-父 洪厓 豊山人)이다.

고려에서 봉익(奉翊大夫) (종이품(從二品)으로 충선(忠善), 충정(忠正), 공민왕(恭愍王)에 이르기 까지 봉직하신 분이다.

 

四世 承顔 (승안)  

 

초휘(初諱)는 안(), 호는 이락당(二樂堂)이다

고려 중정대부(中正大夫) 좌우위대호군(左右衛大護軍)을 지내셨다.

배위(配位)는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고려사에서는 중정대부(中正大夫는 恭愍王당시 三品벼슬이며 大將軍을 大護軍으로 개칭하였다). (정삼품(正三品)으로 공민왕때 재직하셨다.

 

五世 靖恭 (정공)

 

고려 전보도감 판관(典寶都監 判官)을 지내시고 후에 (광정대부문하평리상호군(匡正大夫門下評理上護軍)을 추봉(追封)받았다.

배위는 (郡名不明)夫人 남평문씨(南平文氏)이다.

다만 문씨(文氏)는 본래 철야현(鐵冶縣)으로 고려때는 (능성)陵城)에 속하지만 조선에 이르러 남평으로 본을 삼았다고 한다. 공민왕당시에는 전보도감은 정오품(正五品)직이였고 우왕때 없어진 벼슬이름이니 공민왕 후기에 봉직하신 것이다.

강호공(康胡公) 팡조호구(八祖戶口) 한통이 전해 오나 이전 조상의 봉작과과 출생사몰연대가 전해지지 않아 상고하기 어렵다.

아드님은  의정공(議政公- 元發) 한 분이다.

六世 元發 (원발)  

 

 초휘(初諱)는 총()이였으나 후에 원발(元發)로 개명하다. 호는 은봉(隱奉)이며 고려조 봉익대부 전공판서 상호군((奉翊大夫 典工判書 上護軍)을 지내셨다. 조선조에 이르러 재상(宰相)으로 받드려고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으시니 절개(節槪)를 지킨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은 운곡(耘谷- 元天錫의 야사)이다.

(참고자료)운곡 원천석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을 지낸 열()의 손자이며 종부시령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부모를 봉양하고 농사를 지으며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조선의 태종(太宗)이 된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바 있어, 1400년 태종이 즉위한 뒤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직접 그를 집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에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아들 형을 현감에 임명하였는데, 이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른다. 《운곡시사(耘谷詩史)》에 실려 있는 회고시 등을 통해서, 그가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년에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를 두려워한 증손이 불살랐다고 한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망한 고려를 회상하며 쓴 《회고가》가 있다.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훗날 강호공 훈귀로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令 經筵 弘文館 藝文館書雲觀事로 추봉되셨지만 굳게 고려의 절개(節槪)를 지킨 절의의사(節義義士)이다. 역동(易東- 禹卓)의 문인이 지은 세첩보유(世牒譜遺)를 상고하건데 한 선비가 새벽녘에 흰 베옷을 입고 짚신발로 찾아 와서 담소하고 공의 집 문밖을 나와 어디론지갔으나 이후 아무도 그 방문자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게 수하를 단속 하였으며  어느 때는 종에게 포백(布帛)과 전재(錢財)를 후하게 말에 실어 청석동동구(靑石洞洞口-현 용인 시미리)로 은밀히 보내 기다리고 있던 사람에게 가지고 갔던 우마마저 모두 다 주고 오게 하였는데 사소한 일이라도 소문내지 않고 치밀하게 처리하여 뒷탈이 없게 하였는데 이는 당시 고려의 우국지사들을 감시하는 눈초리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사실을 알게 된것은 훗날 이 사람이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으로 元發에게 하직하고 치악[雉岳]으로 떠나는 길이였다 하는 이 사실은 原谷의 기록에 있는 것을 일부 그 자손이 공개하는 바람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긴 하였으나 그후 원곡의 비밀한 야사 6권은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둘때 아들 귀산[貴山]이 강원도관찰사로 재임시에도 봉록을 나누어 운곡(耘谷)의 거처로 봉송하였는데 이는 부친의 명에 따른 때문이라했다.

그는 이성계(李成桂)의 잠저시절(潛邸時節)에 이웃하며 지냈지만 그를 멀리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던 사실은 현재 고려역사선양회(高麗歷史宣揚會)에서 公의 절의(節義)를 높이 평가하여 앞으로 고려숭의대전(高麗崇義大殿-京畿 波州)에 충절지사(忠節志士)로 모신다

公이 만년에는 잠시 전주(全州)에 계시다가 하세하시자 고산현소주치(高山縣 燒酒峙)에 초장(初葬)하셨였다가 세종21[1493] 구성[駒城;지금의 용인의 남쪽 九水洞 지금 二洞面 佛堂골 西里 亥坐原[亥坐原]에 천장(遷葬)하고 표석을 두었다. (元標石은 全州 高山 에 남음)

비문(碑文)에 이르되

<오호라! 사람이 불우함은 명도[命途]요 시대가 불운한 것은 천운이다. 공은 정의(正意)와 대도[大道]로 공민왕조에 벼슬하여 재덕(才德)이 크게 쓰일 듯 하였으나 벼슬은 열경(列卿-判書)에 그쳤으며, 공양왕이 즉위한지 몇해 안되어 시골에 숨게 되었으니 이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랴! 공은 변란의 시대를 당하여서도 우뚝하고 높다랗게 금석(金石)을 꽤뚫어으며, 신명(神明)과 통하였으니 그 출처진퇴는 뇌락광명(磊落光明)하여 지성(至誠)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큰일에 다달아 대의(大義)를 결함에는 지정(至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공은 잠덕(潛德)과 의절(義節)을 겸하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不朽함이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현재 용인시 이동면 서리 (구수동 불당골 30여만평 산야) 108번지에 동양최대의 대전과 다섯동의 건물을 세워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연안이씨의정공파종중을 중심으로하여 전국 연안이씨 문중과 자손들의 성의를 모아 봉사(封祀)하고 있다.

이남 이녀를 두었는데 강호공(貴齡-左議政)과 판서공(貴山判書. 觀察使)와 여 최지(崔知-軍部摠郞 全州人) 여 류량(柳亮-左議政 忠敬公文化人)을 두다.

 

七世 貴齡 (귀령)

 

 고려 충목왕 1(1345)∼1439(世宗 21)에 출생하시고, 고려말 조선조 문신으로, 字는 수지(修之),호는 계은(桂隱),본관은 연안(延安),전공판서 원발(元發)의 아들, 호조판서 귀산(貴山)의 형이다.

고려말에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와 청주등 관군만호를 지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으로 즉위하자 잠저때의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시다.

1394 1394(태조 3)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서 사신(使臣)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병조판서(兵曹判書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변정도감(辨定都監) 제조(提調) 중군삼마를 거쳐 형조와 예조의 전서를 지냈고 지방으로 나아가 길주도안무찰리사(吉州道按撫察理使)와 동북면 도순문병마절제사(都巡問兵馬節制使)를 지냈다.태종때에는 원종공신으로 두 번이나 명나라의 사신으로 다녀왔고 1415년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을 거쳐 이듬해 검교좌의정(檢校左議政)이 되었다가 태종16년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치사(致仕)했다가 사직한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세종21 66에 하세하시니 享年 94세였다.

그의 부음을 전해들은 임금은 친히 명을 내려 예장케하고 강호(康胡)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성망은 일세에 빛났으나 말년에는 용인에 퇴거하여 하동촌(下東村)내곡에 은둔하면서 한사로서 자적하여 동구밖에 쌍괴목(雙槐木)을 심고 누후에 은거하니 사람들이 그 나무를 상공괴(相公槐)라 하였는데 그때의 지명은 이동면 덕성리쌍괴마을에 아직도 전하고 있다. 공은 선고 의정공의 묘소가 전주 고산에 멀리 있음을 한탄하시고 드디어 세종20 1438년 공이 세상을 뜨시기 한해전에 용인 불당골에 세장지를 정하고  천장하시다. 그의 묘는 부 元發의 묘 서쪽 해좌(亥坐)에 있다.

 

七世 貴山 (귀산)

 

 1350( ?)∼1424(世宗 6)

조선의 문신으로, 字는 흥서(興瑞)요 호는 괴은(槐隱,塊隱)이며.

봉익대부(奉翊大夫 典工判書 贈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元發)의 아들이이며 강호공(康胡公) 귀령(貴齡)의 아우이다.(與地勝覽)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말을 익힐 무렵에 이미 책을 읽을 줄 알아 어른들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스승앞에 나아가 수업하기 수년에 스스로 지업(志業-經國濟世의 학문)에 힘써 문장이 일취월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태조때에 과거에 올라 官은 태종 11년 辛卯에 가원전라 관찰사, 甲午에 경상관찰사등 도관찰(都觀察)을 거쳐 형조와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특히 태종 13년 癸巳에 제도(提調)가 되어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조(軍調)와 새 도성수축(都城修築)에 참여하고 각도의 풍해(風害)를 방지하는 장치를 설치한 공이 컷고 십만양병등 많은 창난과 진언을 통해 태조,정종,태종,세종등 4조를 역임하며 국초 창업의 기틀을 닦는데 공헌하였다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말년에 용인 구수동(九水洞)으로 물러나 두그루의 괴목(槐木-느티나무)을 심고 스스로 괴은(槐隱-진안 영모각에는塊隱)이라하며 마치 삿갓 쓰고 밭 갈며 강가에 낚시하니 범인들은 존귀한 분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한다.

세종6년 甲辰 7 19일에 돌아가시니 王이 부의를 후히 전하시면서 이끼던 인재를 잃었다고 매우 애도하였다 .

지금 용인 이동면(龍仁 二東面)에는 쌍괴(雙槐)마을이 있고 그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다.

공과 백씨 강호공(康胡公)은 함께 여지승람 본조인물록(與地勝覽 本朝 人物錄)  올라 있는데이귀령이 우의정으로 태조가 임금이 되기전에 노관지구이며(임금이전 친구사이) 그의 아우 귀산이의 벼슬이 도관찰사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아깝게도 난리를 만나 묘소가 실전되었다

다만 구수동 표석 앞면에도관찰사 이귀산 처 고령부인 김씨(都觀察使 李貴山 妻 高靈夫人金氏)“라는  표석(標石)이 남아 있어 부인과 같이 모시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구족보 을사보에 정통3년 오-1438 *갑술보는 무자로 고쳤다고하나 정통 3년은 무오임으로 을사보가 맞음-에 구수동으로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이 부근에 무주분묘 3기가 있지만 표석이 없고 동자석이 여럿 있는 것을 보건데 판서공의 묘소도 분명 이부근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辛酉年에 다시 개갈(改碣)할 당시 비면에 합장(合享)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니 시향일(時享日)은 十月十日이다.

배위 고령군부인(족보에 현부인이셨으나 후에 공이 정이품으로 승차하여 부인도 같이 승차하였음이 확실하다) 배위 김씨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추 충익대공신 관 개성부사 고양부원군 남득(南得)의 따님이시고 전리좌랑 의의 손녀로서 신라수로왕의 후손이며 외조는 밀직사지신사 金允卿 강릉인 이다

성문경공(成文景公 成璘)의 文集에 夫人金氏의 輓詩가 실렸는데有無能共里 慈惠最宜家라하여 인품을 극찬하였다.

 

그 만시(輓詩)

 

宅近常同井 (택근상동정) 우물물을 함께 길러 마시며 가깝게 이웃하여 살았고

門高幸接葮 (문고행접단) 사돈지간 어려우나 벼슬길 같아 왕래는 깊었다네

有無能共里 (유무능공리) 부귀빈천 가리지 않아 있고 없음을 차별 않으니 

慈惠最宜家 (자혜최의가) 언제나 은혜롭고 자비스러움이 뛰어난 집일세

光景隨流水 (광경수류수) 빛나는 그 모습은 흐르는 물처럼 평탄하더니

音容惜洛花 (음용석낙화) 애석타 그 음성과 그 자태는 꽃잎처럼 살아지네

百年偕老願 (백년해로원) 내외분 백년해로를 모두들 바라고 바랐건만

丹旐夕陽斜 (단기석양사) 붉은 깃발 석양빛에 아득히 기울고 마는 구나

 

이는 곧 부인의 내덕을 진솔하게 표현한 글이라고 본다.

 

(참고자료)성석린(成石璘)본관 창녕(昌寧). 자 자수(自修). 호 독곡(獨谷). 시호 문경(文景). 1357(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한 후 학유(學諭전리총랑(典理摠郞)을 지냈다. 신돈(辛旽)과 대립,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좌천되고, 1384(우왕 10)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수 양백연(楊伯淵)과 출전하여 적을 격퇴하고,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이 되었다. 그후 양백연의 옥사에 연좌되어 함안(咸安)의 수졸(戍卒)로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다.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공양왕을 내세운 공으로 찬화공신(贊化功臣)이 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 일파로 추방되었다. 그후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 등을 거쳐 좌정승에 오르고, 함흥차사로 이성계를 설득하여 데려오는 데 공헌하였다.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진 후, 1415영의정이 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草書)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로 유명하였다.

일남일녀, 아들 속(春川府使-) 과 딸 하형(河逈 또는 泂 晉州人 文孝公 演의 兄-舊譜에 없었으나 1694-甲戌譜編纂時 源流를 찾아 添補)을 두었다.

 

八世 ()  

 

字는 윤현(閏賢)이며 號는 풍남(楓南)이다(참고 =世牒譜遺) 중훈대부(中訓大夫春川都護府使 贈 通訓大夫司僕寺正 兼 內乘을 追贈받았다)

 우리家門이 왕실과는 노관지구교*에 비견할 만큼 이성계가 왕이 되기 이전부터 대를 이어 세교를 깊히 나누던 사이였지만 고려를 파하고 조선을 세울 때에는 기꺼히 벼슬에 응하지 않는 등 功名에 超然하여 王室에 적극 協助하지 않는 점에 대해 태종 이방원은 불만하여 오던중, 왕자시절에 막강한 정적 포은(圃隱- 鄭夢周)을 선죽교에서 격살한 후 그 시신의 행방을 알아 본 결과 (용인 연안이시 세장지(龍仁 延安李氏 歲庄地)에 투장한 사실등을 알게 되자 이에 대한 앙가품을 하고자 노리던 터에 자신의 翁主(庶女)로 公의 제 4자인 근스(根粹)공을 부마(駙馬)삼고자 맹인 지화(池和)를 시켜 공에게 중매를 한 바, 지맹(池盲)이 마침 공이 여러 손님과 함께 바둑을 두며 담소하던 중에 만나서 태종의 말을 전해 듣고 웃으면서 응대하기를고혜고경(藁鞋藁經-짚신은 짚으로 삼아 신어야 좋다)” 하며 은근히 거절하는 뜻을 표하자 지맹(池盲)온 성내며 돌아가서王族과 結婚하는 것은 싫어 하더라는 뜻으로 모함하며 다른 남자의 사주를 보고한지라 이로서 엄청난 불측지죄(不惻之罪)에서 반역죄로 다스려고자 하었다.

이조실록(李朝實錄에) 올라 있는 기록을 보면 지화는 평소에 맹인에게 박대하던 공에게 앙가품할 좋은 때라 여기고 다른 대신들과 관료들에게 왕의 명을 어긴 죄로 모함하여 극형에 처할 것을  충동질 하였지만 태종은 작은 일이 이렇게 까지 크게 번질 줄은 몰랐다가 겨우 노관지구(蘆管之舊-옛사람 노관과 어릴쩍 유방과의 친분)를 생각하여 특별히 관대한 처분을 한다면서 전적을 몰수하고 금고형에 처하며 三代를 不仕하게 하고 가속(家屬)은 관노로 종사하게 하였던 것이다.

(참고자료) 노관지구(또는 蘆管之交)라 함은 한서인물지에 나오는 일사로 노관과 한나라 고조는 한동네에 살았고 한고조의 아버지는 노관의아버지와도 친한 사이였으며 노관과 한고조는 같은 생일에 태어난 사이라고도 한다.그러나 을해년에 탄생한 태조 이성계와 병술년 탄생한 강호공과는 같은 날에 태어난 것은 아니고 다만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본다.

이로서 공은 임실현(任實縣-전라도)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이상의 사실은 이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바 처음은 왕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정도로 서인으로 폐하였으나 하연 조말생등은 왕명을 어긴자는 역모로 다스려야 한다면서 공을 참수하라는 소를 올렸으며 왕이 그럴 수 없다하니 하연이 다시 말하기를 참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따르지 않았다 한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통하여 수십차례에 걸처 논죄를 끊임없이 청하자 공을 임실현으로 당사자인 근수공을 창원관노로 보내게 하였다.

* 河演은 공의 妹弟인 河泂의 弟다. 이러한 사실은 이조500년동안은 함구할 수밖에 없어 족보에도 겨우 몇줄의 기록으로 호도하였으나 당사자이며 그 자손된 자로서는 천추에 남는 한스러운 사연이 아닐 수없다. 1604 원보 을사보에는 없던 기록을 1694-갑술보에 하逈으로 첨보했다가 갑자보에는 하泂으로 고쳐 올렸으며 친 어머니이신 고령김씨 군부인비석에는 사위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생각하건데 --당시 가장 믿던 사위의 동생에 의하여 가혹한 모략중상을 받은 안타까운 심정이 비석에서도 여실히 엿 보인다.

 

태종 이방원 24세 젊은 나이에 당시는 정치강패 같은 오만 부도한 횡포의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충신 포은을 격살한 행동은 천추의 씻지 못할 죄악인데 이렇게 처참히 돌아가신 포은의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지를 선듯 내어주는 등 이른바 충신을 비호한 고려의절 충신의 후손이자 부형과도 친형제 같은(蘆管之舊交) 자손들에게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여 앙가품한 짐승같은 소행은 역사에 길이 남아 비웃음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훗날 연안이씨가 500여년을 통하여 왕실과는 대소혼사에 간여하지 않았으며 그 왕실자체를 위한 일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아끼는데 앞장선 계기가 되고 특유한 기질과 사상과 지혜로서 어려움을 헤처 나가는 굳센 의지를 세우는데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도학문장(道學文章)과 충효절의(忠孝節義)로 맑고 깨끗한 주의주장(主義主張)을 통하여 모든 벼슬아치들의 귀감이 되게 한 동기가 된 것은 모두 이러한 절박한 시기에도 굽힘이 없이 헤처나온 선비의 기질이라 할 것이다.

이로서 연안이씨는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수신제가치국에 솔선하여 모든 문벌과 성씨의 귀감이 되어 존경받은 계기가 된 것이리라.

공의 자손 중에 도학에 솔선수범한 투철한 학자와 충신 열사가 많고 특히 청백리가 많으며 공맹의 가르침을 실천한 충신. 효자, 열녀, 의사가 집중적으로 쏟아진 십삼정려각같은 비교할 수없는 탁월한 가문이 또 어디 있다 던가?

더구나 조선이 망하고 나자 곧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진 분은 물론이고 나라가 망한 때에 일신의 안일과 평안을 과감히 버리고 소중한 몸을 흔연히 던저 의병과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신 분들이 부지기수이며 왜정 36년동안과 그후 친일 추종자들이 계속 집권하던 시절에도 부역한 일이 한사람도 없으니 이러한 충신열사가 많은 것도 이러한 공의 기계를 전수받은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짚신은 짚으로 신는다. 즉 왕조를 찬탈한 무도한 자들과 어찌 혼인을 할 수 있었겠는가?

 

“고혜고경=藁鞋藁經이야 말로 순수한 조상님의 우람한 정신을 이어받아 만세에 그 고결한 의지를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그 후 공의 손자 연안군(延安君 仁文)이 상소(上疏)하여 문종 丙子年부터 과거시에 나가도록 허락받고 단종원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니 형제등거(兄弟登擧)의 영광까지 았았다

두디어 태종15(1415)에 금고를 당했다가 문종 2(1452)년에 풀렸으니 무려 38년간이요 이로서 조상의 전적(典籍)마저 모두 몰 수 당한 피해(被害)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義城金氏-父 司農卿 潞 祖父密直府使 光富)이며 묘소는 실전되었다. *후일 용인 구수동에 모셨다는 말을 하는 용인 남면 기곡에 사는 종인-판관공의 증손 몽성-의 전언은 있으나 확실한 장소는 찾지 못했으나 구수동선고비묘ㅅ하 현지 무분 3위중 1소로 추정 되지만 아직 확인 하지 못했다.)

 아들 네분<根剛, .根建 . 根精 . 根粹.>과 일녀 (柳芳孝-舒山人 父 舒榮君 沂)를 두었다   

 

九世 根剛 (근강)

 

벼슬은 장사랑(將仕郞), 사용(司勇)을 하다. 성종때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으로 錄勳되다.(이조실록)

묘는 용인 구수동 선조비묘하로 표석이 있다. (후보첨보)

배위 安東權-(父判書執知 祖判事嗣宗曾祖花原君仲達 外祖李伯常本 碧珍)

일남 판관공(林泉郡守 仁畦)와 일녀 卞鈞 (草溪人 父 府尹 孝文)을 두다.

 

九世 根建 (근건)

 

字 野叟이다.

성균생원으로  금고로 인하여 과거에 나가지 못하고 금고가 풀린 직후 아들 두분의 급제도 다 못 보시고 세조 원년 병자 2 1일 하세하시다. 손자 연성군(延城君-)의 훈귀로 통정대부 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參議)로 증직되었다.

공의 묘소가 실전되었기 훗날 1960년도에 단소를 성남시 판교동 25번지 숙부인 묘소옆에 단을 세우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丹陽李氏-父 執義 公柔,祖 左議政 丹山府院君 茂,曾祖 版圖判書 居敬,外祖 平原君 趙璞,本 平壤人 麗興府院君 閔霽의 女)

공의 묘소는 실전되어 판교에 단을 세워 모셨고

부인 묘소는 판교원 서향 임좌 표석을 세웠는데 기일은 11월 초3일이나 2005년 토지개발로 용인 묘봉산록에 천장하다.

6세손 성의 사보에 이르기를 공의 묘소는 구수동선영하인데 표석이 없어 실전되고 숙부인 묘소는 성의 조부 숙에 의하여 판교로 모셔서 순신(숙의 부)아래 판교원 서쪽에 있다 하였다.

자녀는 연안군(仁文 僉知), 현감(仁行), 승지(仁忠) 3남과 일녀(金嗣源-順天人 父 有讓, 子允濟,潤濯,潤淬,潤濬,潤灌,潤浩,潤沃,潤渡등 8)을 두었는 딸 내외는 판교에 묘를 정하였다가 판교개발시에 경기도 이천으로 옮겼다..

 

九世 根精 (근정)

 

생몰연대를 상세히 알 수 없다.

祖妣 고령김씨구수동묘갈에는 제4자로 기록되어 있다. 6(仁溫 仁良,福重, 吉重, 末重, 季重,) 3 (金福壽-安東人) 邊克明-原州人) (張五美-子張希孫 張末孫 女鄭鐵成 女朴堪,女 曺淑權)를 두다.

 

九世 根粹 (근수) 秀才公派 派祖

 

태종15년에 혼사문제로 득죄하여 창원향교로 정배당한 후 후손이 창원에 산다. (*이하 구보불록)또는 경기도 이천에서 수단한바 기일은 829일이고 묘소는 이천군 초위묘동에 있다 한다. 배위는 강릉김씨이며 이기록은 최근 이천에 살던 공의 후손에 의하여 후보에 기록을 올린 것이다. 구수동 조비의 묘갈에는 공은 제 3자로 기록된바 있다.    

 

十世 仁畦 (인휴) 判官公派 派祖

 

판관을 지냈으며 생원으로서 무과에 급제하여 임천군수를 역임했다 한다. 실록에 기록컨대 성종 갑인 敍贍寺 僉正을 제수받다.예종 원년에 임금의 전지를 따라 상소를 올렸으며 그 내용이 매우 모범되고 출중하여 국조보감에 실려 있다.

세조 원종공신으로 옥훈받은 바 있고  이조실록에 기록으로이속의 손자 이인휴가 통신사 변효문을 따라 갔던 일을 논죄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이를 죄주지 않았다.”한다

변효문은 매제 卞鈞(변균)의 父親이다.

“예종원년 의금부 경력 이인휴가 상소한바 그내용(요약)은 나라를 다스림에 대한 것으로

 

,정심수신하라. , 조회에서 정사를 듣자. , 직언을 용남하고 받아들이라. , 대간으로하여금 정청에 들게하라. , 어진신하를 가까히 하라. , 분경을 금하라. , 수령임명에 실력있는 자를 선임하라. , 독대를 하자. , 민생을 사랑하는 일. , 문무숭상하는 일. 십일, 부민들의 고소를 금하자. 십이, 도덕을 없에는 일. 십삼, 변경을 방비하는 일. 십사, 외방에도 의원을 설치하자. 십오, 기민을 견제하는일등 인데

 

임금이 이를 보고 일부는 호응하였으되 일부는 先王(世祖)을 거슬리는 점이 있다하여 친히 국문하여 죄를 주었다한다.

 

계속하여 이조실록에

“또한 임금은 후원에서 武科初試者와 이인휴를 포함하여 불러 과시를 보는데 왕년에 변효문을 따라 일본에 갔었던 일을 자문하여 대마도와 일본의 직제및 교역과 연회및 무예,음악등등을 물어 거침없이 상세하게 대답하였다한다.    

 

公은 才氣 出衆하여 睿宗의 인정을 받고 있음을 기화로 주위同官들의 猜忌를 받아 비록 공은 있으나 깊히 인정받지 못했다.

실록에 나타난 사실을 보면 특히 李克敦등 奔競하는 자들의 謀陷에 걸려 임금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곤경에 이르른 일 이 많았다 공의 직위는 經略과 僉正에 이르고 장래에 높이 쓰일 번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예종이 일찍 죽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아들 셋 參奉(), 縣監(), 生員 ()을 두셨다.

**후손이 용인 남면 기곡(현 용인 남사면 완장리)에 살고 있다 한다.

十世 仁文 (인문)

 

字 賢淑, 號 竹岡, 세종7년 을사(乙巳-1425)생이다. 단종원년(1453)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시고, 아우 인충(仁忠)의 갑신등과(甲申登科)에 이어 다음해인 세조 11년 울유(乙酉)(1465)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군기시참첨정(司憲府 監察 軍器寺 僉正), 평안도사(平安 都事),형조좌랑(刑曹佐郞), 양주목사(楊洲牧使)와 철원부사(鐵原牧使)를 지내고 대호군(大護軍)등 내외직(內外職) 38년간을 두루 거치시고 정일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병조참의 첨지 지중추부사(兵曹參議 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연산 9년 계해(癸亥)(1503)2 14일에 돌아가시니 수 79세였다. 훗날 아들 연성군 곤(延城君 坤)의 권귀(勳貴)로 다시 순충보조공신 가선대부 예조참판(純忠補助功臣 嘉善大夫 禮曺參判)으로 증직(贈職)되고 연안군(延安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묘소(墓所)는 구수동(九水洞)에서 다시 연성군(延城君) 공신 사패지인 판교(板橋)로 내외분합장하여 모셨다.

문종원년에 수재공 근수(秀才公 根粹)의 일로 금고(禁錮)된 일을 풀어 달라고 상소하여 풀게하고 일문(一門)이 다시 벼슬에 나갈 수 있게 하였다국조등과록 을유보에 공의 휘자가 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贈 貞夫人 全義李氏 (父 左副率長孝, 祖 判事除監事 儁 曾祖 全城君 思義, 外祖 知安岳郡事朴仲實 本竹山)께서는 成宗8 (1477) 4 4日에 돌아가시니 공보다 23년 을 앞스셨다.

**전의이씨족보 부솔공 長孝의 壻는 李仁文(正郞)으로 적혀 있다.

묘소는 판교에 공과 합장으로 모셨으며

자녀로는 判官公(), 慶州公() ,別坐公(), 延城君(), 三陟公(+) 5남과 許瑞(陽川人 父 衡인데 虛白堂 金楊震이 그의 사위이며 유명한 東皐 李俊慶은 虛白堂의 사위가 됨)등 一女이시고 서자 春孫,.冬孫,歲孫과 여 (延孝褑,李鵬孫,李思恭)이 있다.

제향일(祭享日)은 음력 10 12日이다.

(近況)공의 묘소는 판교지역도시개발로 인하여 다시 용인 묘봉산 산록으로 이장하였는데 이장과정에서 묘소를 살펴 본즉 세겹으로 회를 얇게 덮었으되 외수침투를 막는데 흡족할 만큼 굳지 않았고 혹시 묘지석이 있을가 하여 묘표석 아래부터 파들어 가서 외토가 없는 데 까지 보았으나 묘지석(墓誌石)은 발견되지 않았고 약 십척을 파내려 간 즉 北向으로 왼편에 조부, 오른편에 조모의 관곽이 있어야 할 터인데 왼편 조부 관곽이 나타났는데 상부는 없고 하대만 그대로 있고 하대아래는 물이조금 고여 있는 듯 축축한 흙이 남아 있다. 그 관 하대위에 유골만 그대로 구존된 상태인데 다시 한자를 더 파나려 간 즉 조모의 관곽과 유신중 골편만 일부 남아 있는 상태였다.

무려 500여년이 지난 고묘인지라 유품이나 지석등 기록물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손환일박사등 당대 석학들을 모시고 자세히 관찰하면서 작업을 해 나갔지만 기대하던 특별한 자료는 얻지 못하였다.

토지개발공사의 간단없는 독촉에 따라 부득이 이장하게 된 일은 매우 가슴 아픈 일로서 좀더 이를 사전에 잘 수습하였었다면 이장을 하지 않고 국영공원으로 인정받아 묘소 관리에도 훨신 수월하고 영구히 보존 할 수도 있었지만 좋은 기회를 모두 놓치고 할 수없이 총총한 마음으로 이장을 해야 하는 과정에서 관리책임자들이 수수방관하는 상태에서 연성군파종중이 2005년 10월 12 아침 6에 초졸하게 고유를 마치고 이장절차를 거행한 것이다.

이는 먼저 후손들의 근본적인 무성의와 자손으로 볼 수없는 사이비종인들의 토지수용에 다른 보상에만 혈안이 되어 서로 책임전가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문중의 참담한 비극으로서 이를 지켜보는 자손으로서 죄송스러움을 금할 길 없었다.

연안군 묘비석의 명문은 서지금석학자들의 안목으로 평가하기를 安平이나 石峰의 筆體를 방불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앞면은 모두 大字로서 51자인데 후면 공에 대한 묘갈명이 마모되어 글자 한자도 전혀 알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이날 당대 금석학의 대가 손환일박사의 주선으로 우선 경기박물관에 임시로 보관하도록 조치하였으며 이어 개발사업이 끝나고 이 자리에연안이씨비각-延安李氏碑閣이 세워지면 다시 옮겨 모셔서 영구히 보존하여 자손만대에 보여 자손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교훈이 되리라.

 

延安君 墓碑石 銘文 (연안군 묘비석 명문)

 

贈純忠補祚功臣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延安君行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李公

증순충보조공신가선대부예조참판겸동지경연춘추관사연안군행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이공 

貞夫人全義李氏兩位之 

정부인전의이씨양위지묘

 

十世 仁行 (인행)

관은 현감(縣監)이다. 묘소와 생몰연대가 실전이다.

子女는 아들은  없고 두분의 따님이 계신데 (朴承韓-甲戌譜-後譜에 煥으로 고침-密陽人 郡守 父 贊成을 지낸 捷이며 女는 閔光門으로 參奉을 지내다)

(柳濱-晉州人으로 父는 判書이며 忠正公인 仁溫 아들은 柳庸謹 文 兵使이며  己卯名賢이다. (李潤은 固城人 宣傳官을 지냈으며) ( 加平副正)과 女 (許暹 河陽人으로 父는 副使를 지냈다) 前室 연안이씨의 소생은 無后하였고 모두 후취소생이다. 許暹은 舊譜에 不錄하여 다시 제보에 다라 올린 것이다.

 

十世 仁忠 (인충)

 

字는 誨之, 伯 연안군(仁文)공의 상소로 단종 1년에 집안이 금고에서 풀린 이후 마침내 등과의 기회를 만나게 되자 먼저 공은 세조 10년 甲申年-1464-온양온천에서 행한 친시(親試)에 급제하였다.

丁亥에 저작(著作겸 宣傳官)을 거처 제주판관(濟州判官)이 되고 성종 己亥에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봉직되었으나 權貴로부터 미움을 받아 평양부윤으로 나가다.

마침 윤필상을 따라 건주(建州)의 오랑케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에 록훈되고 癸卯에 경상수사 강릉부사로 나가고 채방사의 장계로 표리(表裏)를 왕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정원(承政院 左副承旨 知遞敎兼 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官)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는데 연안이씨 여러분 청백리가운데에서도 가장 앞서 시범을 보인 샘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풍양 정곡 오좌에 석물로 표석을 두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礪山宋氏 父는 判 漢城府使 福山이며, 祖判 羅州牧使 琠 이며, 曾祖는 兵曹參判允蕃이고, 外祖는 知順州使 李孟卿 本 陜川)이며

묘는 상하분(上下墳)이다.

時祭日은 十月 十五日이다.

 

2006년 2월

延安李氏

天部(상세)

地部(중세 상)  玄部(중세 하) 黃部(근세)

 

 

丙戌 迎春

 

李 觀 熙 編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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