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사공(炳觀),과 행남공(義悳)
이 두분은 오늘의 우리 종중에서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알려저 있는 말로 소개한다면 국문학자 이숭영 박사의 부친이 춘사공이시고
현제 국사편찬위원회에 계시는 근택(根澤)족인의 징조부가 행남공이십니다
석오 이동영선생이 해외에서 나라를 걱정하시는 사이에도
국내에서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시면서 종중의 안위를 지켜 주신 어른이 춘사공이심.
해방이후, 그리고 한국전쟁이후 씨족이 분열직전에있는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숭영박사가 초대 대종회회장을 맡고 북백공파 식산 종가 정희공이 총간사가 되어 오늘의 대종회(양재동)를 이끌어 낸 후 시조공의 단소를 대전에 모시며, 동란으로 흩어진 일가들을 중세보를 통하여 각기 조상을 알아 보게 한 공적이 모두 앞서 보는 지혜를 갖이진 선각자들의 공로인것임.
(중세보는 소부감판사공파 부여 교육감 만승공(萬承)의 위업이며, 이를 바탕으로 그나마 전쟁후의 흩어질 뻔 했던 일가들을 다시 모이게 된 것임.
1917년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에서 토지를 수탈하기위하여 토지수용령을 내리게 되자 그동안 이나라에는 종중재산을 관리하는 법이 없어 조상의 분묘를 새로은 일본법에 따라 보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는바, 춘사공(이하 `춘사공`이라 함)께서는 당시 같은 궁내부에 계시던 종친 행남공(義悳- 장령공파 호 杏南)과함께 전국의 연안이씨 종친을 모아놓고 금전적 여유가 있는 후손들로 부터 자금을 먼저 확보한 뒤에 (당시 4만판천원 현재 금으로 환산 30억원상당) 이를 전국 종친들에게 지시하여 토지를 매입하게 하고 부근에 사는 종인의이름으로 신탁등기를 하도록 하여 현제 보존되고 있는 연안이씨의 전국 종토가 그대로 보존하도록 되었음.
약 2만7천원(현제금격 환산 17억원)정도가 남은 것은 당시 명칭 연안이씨 종약소 재무의 통장에 보관하도록 하였음.
이자료는 영세보감 1932년까지 기록자료에 있음.
이어서
행남공(義悳)께서는 장령공파 소종중 종손이며, 궁내부특임관까지 승차하신 조선말 실세에 계신 어른으로 춘사공과함께 종중의일을 앞장서서 처리하시고 1032년까지 연안이씨종약소(당시 서울 체부동 소재)부소장 이어 소장으로 책임을 다하신 분임. 자세한 기록은 종중사를 편지로 엮은 글 영세보감을 통하여 알 수 있음
춘사 병관공 가계도
행남 의덕공 가계도
2244 별죄공파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