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吾窩公行狀
公諱鼎基字衆三號愛吾窩姓李氏延安人高麗太子詹事諱襲
洪之後也六傳至諱元發典工判書入我朝贈左議政是生諱貴
山都觀察使判刑戶兩曹與伯氏左議政康胡公諱貴齡有名於
開國初是生諱續春川府使贈司僕寺正太宗與之爲布衣交衣
後宮所生求婚於公之第四子根粹名文獻備考命監察公盲人
池和行媒公方與客棋以和所素厚戱曰藁鞋藁經好和怒而去
誣以他語因韜不測之罪上以有盧綰之舊特從寬典籍沒禁錮
至孫諱仁文諱仁忠兄弟上言蒙恩始解禁錮後兄弟連歲登文
科之兵曹參議贈補祚功臣延安君又四傳至通禮院引儀諱應
號訥軒辭職落南與伯仲梅村栗里二公俱登退溪先生之門構
武陵亭安東浙江上與蒙齊鶴峯海月雲川諸賢有唱酬時什生
諱德昌內資寺正西厓文人移去醴泉沙谷號沙皐生諱慶長隱
德不仕號沙庭生諱賁徵號耻菴遊眉叟門生諱斗相生諱萬倍
取三從之子諱之貞之贈司僕寺正生諱圭延號松園鄭立齋門
人生諱磻儒於公爲皇考初聘安東權氏易度之女忠定公沖齋
榽后無育繼配安東權氏馨馥女以純祖辛卯十月十三日生公
自幼器度不凡父老甚倚重之戊戌王考松園公患背疽時公年
纔八世請吮之松園公以其年幼禁之公固請吮之吮之多日口
內爲瘇毒所傷不能飮啖然猶恐松園之之禁吮不言口內傷毒
日日吮之得差丁未丁外艱時公之弟妹六房公甫升冠家且不
贍讀禮之暇兼治産業嫁娶諸弟妹及析産皆贍足每當歉荒賑
給親戚朋友諸族中貧窮男女嫁娶必助其資裝別坐公墓所失
傳己久公設壇所供香火爲訥軒公宗嗣修補宗稧訥軒公墳墓
在安東細川山以局內有十餘偸塚積年未掘者也己卯冬留安
東邑三四朔盡爲官掘嶺伯李公根弼府使李公啓魯咸歎其爲
先之誠公奉大夫人以孝雖祈寒柴烘之節必親執其勞不委他
人大夫人享年八十六棄世喪葬之禮無感甲午東徒大熾郡置
執綱所討滅其黨燒火其虞公極力救之金陵全里賴而免禍丙
申倡義時一鄕推公爲軍師武陵先亭圮於水數百年至乙巳春
移建于沙谷公常戒諸子弟曰丁丑春隣眠過門酗酒卽捕欲笞
之見其皮骨戉於歉荒饑饉之餘不忍下一仗但責其罪以歸之
不過十餘日其人遘癘而死觀此而眞知古人百忍字之義也嘗
以錢穀之未捧於人者乃至數千巨款負債之人現皆窮乏一日
公搜其文券盡燒之曰不願吾子孫以此爭訟致怨於衆洪侯用
寬聞其言而歎賞丁巳七月二十九日公考終于寢享年八十七
奉窆于虎鳴面黃池洞僧谷巳坐夫人義城金氏士人秉秋之女
先公二十九年己丑卒先窆于此今乃合祔焉校理柳公道緯輓
曰因事眞心盡接人春氣溫判尹張公華植輓曰其志千仞壁其
儀太古風望肅卽之溫卓犖天賦豊族大父炳華氏因其弟炳南
以公狀草致書義悳囑其狀行之文顧惟年老神昏不足以著述
其萬一其在百世之誼實難固辭玆敢不窺膚淺謹遽世譜及狀
草略加增剛如右以俟夫立言君子之財擇焉
丁巳 七 月
族玄孫 義悳 撰
애오와(愛吾窩)공 행장
공의 휘는 정기(鼎基)요, 자는 중삼(衆三), 호는 애오와(愛吾窩)이며 성은 이씨로 관향은 연안(延安)이다.
고려 태자첨사공 휘 습홍(襲洪)의 후손으로서 고려 전공판서 휘 원발(元發)은 조선에서 좌의정으로 받들고자 하였으나 벼슬을 고사하시고, 다음에 도관찰사와 이조형조판서를 역임하신 휘 귀산(貴山), 다음에 춘천부사를 지내시고 사복시정을 증직 받으신 휘 속(續)이 시다.
이 어른은 태종과는 젊으신 시절부터 함께 사귄 사이으나 어느날 태종이 자기 소생 옹주의 배필을 구하고자 맹인 지화(池和)라는 중매인을 보내어 공의 넷째 아드님인 근수(根粹-문헌비고에 당시 감찰공)를 사위로 삼으려 하고자 하는데, 마침 친구들과 바둑을 두시고 계시던 참이였는지라 내심으로는 그 혼인이 탐탁지 않았으려니와 왕의 억지스런 방법으로 억혼을 하려는 소행임을 짐작하시고, 지나가는 속담을 들어 “짚신은 짚으로 삼아 신어야 좋은게 아니던가?”(藁鞋藁經也) 하였다. 왕명을 받들고 온 자신을 제대로 대접도 하지 않고 하물며 농담하는 것이 맹인인 자신을 경멸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대로 돌아가서 태종에게 “춘천부사가 옹주가 서출이므로 혼인하는 것을 꺼리고 또한 여러 좌중이 있는 자리에서 창피스런 농담까지 하였으니 이는 임금을 모욕한 대역죄로 다스려야 합니다”라고 고자질하게 되자, 태종은 노발대발하며 즉시 부사공의 벼슬을 박탈하고 금고처분을 내리고 전적을 몰수하며 삼대동안 벼슬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던 것인데, 이는 당시 왕실의 위엄을 위하여 대역죄로 다스려야 마땅하다는 조신들의 의견도 분분하였지만 그나마 태조와는 어릴때부터 친하게 지낸 조부와의 연분(盧館之交)을 생각하여 관대하게 처분을 내렸다고 한다.
이 금고가 태종, 문종. 단종 삼대후인 단종 1년에 풀린 뒤, 휘 인문(仁文), 휘 인충(仁忠)형제가 연달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인문공은 병조참의로 보조공신연안군으로 책봉되었고, 그후 4대를 지나 통례원인의를 지내신 호 눌헌 휘 응(應)께서는 벼슬을 그만 두시고 남하하신 매촌, 율리, 두분 형님을 따라 안동절강에 무릉정(武陵亭)을 세우시고 몽제, 학봉, 해월, 운천등 선비들과 교유하시며 퇴계의 문인으로 들어가 학문에 열중하셨고, 다음으로 내자시정 휘 덕창(德昌)을 두셨는데 서애선생의 문인으로 예천사곡(沙谷)으로 근거를 옮기셨다.
다음은 사정공 휘 경장(慶長)은 벼슬에 나가지 않으 시고, 다음 치암공 분징(賁徵)공은 허미수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시고, 다음 휘 두상(斗相), 휘 만배(萬培)공이신데 사복시정으로 추증을 받으신 지정(之貞)공을 후사로 받아 주시고 이어 송원공 규연(圭延)은 정입재의 문인이시며, 다음으로 애오와공의 부친되시는 휘 반유(磻儒)공이신데 처음 배필로 모신 충정공 충제의 후인 안동권씨는 자녀를 생산하시지 못하자 다시 형복의 녀인 안동권씨를 모셔서 신묘 시월열사흩날에 공이 태어나신 것이다.
공은 어려서 이미 그 기품이 범상하지 않으셨으니 무술년 공이 8세가 되시던 해에는 조부이신 송원공께서 등창이 심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조저히 치료할 수 없고 오로지 입으로 빨아야만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의원이 말하는 것을 아시고 조부 송원공 앞에 나아가 입으로 빨아내기를 간청하셨으나 송원공은 오히려 등창의 독기가 어린것에게 해를 끼칠 것을 념려하여 허락하지 않으셨건만 끝끝내 입으로 빨기를 간청하시니 마지못해 하락하시자 여러 날 계속하여 그 환부를 입으로 빨아서 고의 입속에 상처가 생겼지만 공은 남들이 이를 보고 빨기를 그만두게 할 가 봐 입을 열지 않기 위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정성이 드디어 조부 송원공의 병세에 크게 차도가 있어 병이 다 낳았다고 한다.
정미년에 부친 반유(磻儒)께서 별세하시니 모친과 어린 형제 자매를 이끌며 한편 치산에도 힘쓰셔야 할 뿐 아니라 선비의 후예로서 학업도 개을리 할 수 없는 기로에서 많은 형제와 후손을 위해 마침내 치산에 열중하셔서 가업을 일으키시고 한동안 궁핍하던 가계를 떨쳐 일어나게 하며 나아가 일가친척들의 가난한 자제를 위해 장가들고 시집보내는데 필요한 자금을 돕는 일에서 부터 학업을 돕는 일까지 앞장서셨던 것이다.
특히 별좌공묘소가 실전되어 오래동안 향화를 받들지 못하여 온 것을 애닯게 여겨 단소를 설치하시며 보종계(補宗契)를 세우셨고, 눌헌공외조 장공중우(張公仲羽)향화를 받들고자 위양계(渭陽契)를, 사정공이하 삼대 치제를 위해 수종계(修宗契)를, 사정공 치암공양세묘수갈을 위해 일문을 설하고 양노계(養老契)를 세우셨고, 안동세천에 모시고 있는 눌헌공의 묘소주변에 서너달동안 지키시며 투총을 모조리 파내어 조상을 받드는 정성을 몸수 실천하셨는데 이러한 정성을 지켜본 안동부사와 영남도백이 크게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한다.
또한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셔서 거처는 물론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마끼시지 않으시고 친히 먼저 맛을 보시면서 챙기시니 향년 팔십육세로 고종하시기 까지 정성을 다 하셨다 한다.
갑오년에 동학이 극성하여 예천에서도 이 무리들의 본부인 집강소를 불태워 버리고 그 당(黨)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이 떨어 졌으나 공은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는데 이로서 근동이 큰 탈이 없이 편안히 지날 수 있도록 하였다.
병신년 창의시에는 예천군민이 의병참모장으로 추대받아 활동하신바 있고 족제 대기(大基)를 형옥에서 구출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백년간을 방치하여 왔던 안동절강의 무릉선정을 을사년 봄에 예천사곡으로 옮겼다.
정축년 봄 일을 상기 시키면서 흉년을 맞아 피골이 상접한 자가 집 대문앞에서 주정하매 매를 처서 훈계하고자 했으나 이를 참고 그냥 돌려보냈더니 얼마 뒤에 큰 병이 들어 죽어 버렸다는데 하마터면 사람을 해치고 죄를 뒤집어 쓸 뻔 하였 던 일을 평소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백번을 참으라는 글자를 마음속 깊히 새겨 두라고 하셨다.
평소 어려운 이들에게 수시로 전곡을 빌려주어 어려움을 해결하여 주었는데 하루는 이들로부터 받아 놓은 차용증서들을 빌려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질러 태워 버리시면서 이 하잘 것 없는 일로 자손들이 쟁송거리로 삼아 원성을 사게 될 가하여 미리 그 화근을 없에는 것이라 하셨으니 그 관대한 뜻을 듣고 모두 찬탄하였다.
정사년 칠월 스므아흐렛날에 고요히 잠을 주무시는 듯 돌아가시니 향년 팔십칠이셨는데 이십칠년전에 먼저 돌아가신 부인 의성김씨와 호명 황지동에 합장하셨다.
많은 이들이 애통해 하면서 만장을 보내주셨는데 교리 유도위공은 “만사에 진심으로 임하시고 사람을 대하되 인정을 다하여 인정을 배풀었다”고하였고, 판윤 장화식공은 “그 뜻은 천길 높은 벽처럼 웅장하셨고 모습은 태고의 바람처럼 맑으셨노니 우러러 그 탁월함이여 하늘이 이미 정하신 바 일러라”하였다.
집안 대부 병화공과 병남공이 고인의 행장을 말씀하시길래 의덕이 불초하지만 백세지 의를 위하여 족보와 여러자지 자료를 찾아서 삼가 행장을 바쳐 올리옵니다.
족 현손 의덕(義悳) 撰
( 觀熙 韓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