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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운 이공 행장 (訥雲 李炳華)

작성자관희2244|작성시간14.01.13|조회수33 목록 댓글 0

訥雲 李公 行狀

 

炳華이다 初諱炳東이며 啓初, 訥雲 또는 於山이다. 延安人으로 新羅 武烈王時 唐中郞將으로 蘇定方과 더불어 百濟征伐하는데 공이 있어 采邑延安땅으로 받았고 이로 인하여 本貫延安이라 하였는바 나라에 공헌하고 世上을 빛낸 조상분들이 많아 新羅, 高麗, 朝鮮三世累代功勳을 이어온 東方巨族으로 稱頌되어 온 家門이다.

先系中始祖 高麗太子詹事 襲洪이후 朝議大夫 克榮, 奉翊大夫 景茂, 中正大夫 二樂堂公 承顔, 匡靖大夫 靖恭, 고려의 節臣으로 朝鮮에서 左議政으로 追尊받은 隱峰公 元發, 그 다음 太宗朝觀察使.戶曹 兩 判書를 지내신 槐隱公 貴山은 형님 되시는 左議政 康胡公 貴齡과 함께 與地勝覽八祖戶口圖確實記錄에 의해 家門正統性著明하다.

이후 中訓大夫 春川都護府使 楓南公 續, 成均生員 野叟公 根健, 純忠補祚功臣 禮朝參判 延安君 竹岡公 仁文, 尙衣院別坐 半聾齊公 垙에 이어, 內禁衛 彰信校衛 華甫公 葳壽暗鬱政局과 거듭되는 士禍를 피하여 佔畢齊 金宗直門下에서 修學하고 寒喧堂 金宏弼同榜 生員이신 부친 別坐公 垙의 뜻에 따라 投綏南下하여 처음 醴泉 沙皐寓居하셨다.

訥軒公 應通禮院引儀를 지내셨으나 부친 華甫公의 뒤를 따라 벼슬을 그만두고, 伯仲 泰川縣監 梅村公 愈僉正을 지내신 栗里公 憙와 함께 嶺南에 내려와서 退溪 李先生門人이 되셨고 安東 麻谷楊子浙江을 본 따 浙江이라 이름하고 江上武陵亭을 지어 많은 親舊분들과 더불어 風流隱然하시며 後學을 위해 講學을 여셨으나 龍巳으로 그만 遺恨을 남기셨다. 다음 沙皐公 德昌安東에서 醴泉 沙皐로 옮기시고 西厓 柳先生 門人이 되셨으며, 다음 司僕寺正公 之貞, 다음 松園公 圭延沙皐의 동편마을 松皐移居하고 ,다음 磻儒, 다음 愛吾窩公 鼎基祖父시며, 아버님은 洛九, 어머님은 豊壤趙氏, 외조부는 趙達榮이시다.

高宗 己巳十一月二十四日 松谷里 本宅에서 태어 나셨는데 度量이 넓고 누구보다도 빼어난 생각을 품으시며 언제나 맑고 깨끗함을 좋아하셨다.

일지기 여러 經傳들을 터득하셨으며 같은 年輩들에 앞서 蔭敍光武 五年 六品承訓郞에 이어 議政府 通訓大夫 監幢官을 마지막으로 나라의 運數가 비색한 때라 편한 벼슬을 마다하고 스스로 사양하여 고향으로 돌아 오셨다.

믿고 의지할 부모님을 일지기 여의신 일을 마음 깊히 恨歎해 마지않아 두 동생과 더불어 할아버님을 모시기를 아들이 어버이 섬기기처럼 춥거나 더울 때도 朝夕으로 한결같이 잠자리와 잡수실 밥상을 일일이 챙겨 드리셨다.

할아버님 되시는 愛吾窩公은 착하고 아름다운 德行을 쌓으신 어른으로 으로서는 祖父 愛吾窩公의 뜻을 이어 매사에 흐트러짐이 없이 家門을 반듯하게 이루어 놓으셨는데 祖孫이 앞뒤를 이어 一門을 위하여 내린 사랑은 그야 말로 하늘이 정하여준 일이라 鄕里에서는 널리 전하여 내려온다.

武陵先亭이 퇴락한 것을 가까운 親戚들과 相議하여 이를 安東浙江에서 醴泉沙谷으로 移舍 重修하였으며 멀고 가까움을 분별함이 없이 一門和睦으로 和合시켜 派譜를 다듬었으며 해마다 끊이지 않는 凶年에도 가난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 거두어 먹고 입을 것을 보태어 주었고 때를 놓치지 않고 시집 장가를 들 수 있도록 婚需費用을 마련하여 주었으니 이러한 美談은 일일이 나열하기에 이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서 이 어른이 거하시는 마을 뒷산 이름마저 사람을 살리는 봉우리라 하여 은해를 입은 이들은 이 산을 서로 불러 活人峯이라 이름 할 정도로 좋은 일과 아름다운 선행을 많이 하셨는데 내가 이 活人峰이라는 乾芝山을 바로 앞에 두고 사는 까닭에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넷째 아드님을 뜻밖에 일로 잃으시고 애석함을 이기지 못해 이를 잊고 마음을 달래시려고 尙州땅으로 잠시 옮겨 살게 되셨다.

尙州는 역시 禮節崇尙하는 곳이라 많은 學者들과 더불어 交遊하시며 경치 좋은 여러 곳을 찾으시며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시기도 하였다. 李參判 春沙炳觀, 杏南公 義悳 두 분은 가장 친하게 지내셨는데 비단 같은 一家之間이고 의기가 서로 합쳐 천리를 마다하고 자주 만나서 마치 상주 땅을 잊을 수 없는 고향처럼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嶺南儒林의 간곡한 뜻을 물리치지 못하여 有數 書院을 두루 맡아 亡國治下에도 儒道暢達을 위하여 後生을 일깨우시는데 힘쓰시었다.

그렇지만 다시 돌이켜 故鄕祖上痕迹을 마음에 두고 마침내 松谷을 못 잊어서 다시 뒤돌아 오고야 말았으니 좋은 터를 구하여 집을 짓고 많은 藏書具備하여 두고 自號를 따라 訥雲山房이라 이름하니 이는 八代祖 訥軒公雲孫이라는 뜻이다.

평소 冊床을 대하여 티끌하나 없도록 周邊을 깔끔하게 整頓하시고 홀로 앉아 계시면서 오로지 父母의 가르침에 따르고 精誠을 다하여 잘 섬기는 家門傳統을 이어 갔다.

말씀한마디마다 결코 함이나 卑俗함이 없되 항상 하고 高邁하였으며 奢侈한 옷을 몸에 걸치지 않았고, 오로지 사람을 대하여 좋은 일에 서슴없이 激勵하고 稱讚하였으며 혹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만히 불러서 깨우치게 타이르는 仔詳함이 특별하였다.

子弟들에게는 늘 儉素함을 가르치며 一家親戚이 늘 和睦하도록 하고 農事짓는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사귀시며 奴僕들에게도 恩威를 고루 베푸셨다.

그 잊을 수 없는 亡國歲月에도 나라를 근심하며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힘을 다하였으니 丙申年 義擧에는 軍師推戴되신 祖父 愛吾窩公陪從하여 비색한 國運을 뒤돌려 보려고 하셨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으며 李儁烈士割腹하자 몸을 던져 나라에 忠誠한 그 뜻을 높히 기리고 함께 夫人에게도 弔意를 보내고 輓詩를 올려 慰勞하였고 巴里自主會談宣言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잠을 주무시지 못한 일도 많았다.

아래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輓 李義士 儁

一刃霜寒宇宙空 海牙當日辦魚熊

千秋不死輪困血 散注同胞肺腑中

서릿발 한 자루 칼 온 宇宙가 서늘하네

드디어 海牙忠魂 다시금 영원토록

同胞五臟六腑에 깊고 널리 스며드네.

丁未 訥雲

光復되기 불과 三年 앞서 辛巳年 동짓달 초나흩날 松谷에서 享年 일흔셋으로 돌아가시니 墓所醴泉虎鳴 閑漁洞 龍馬峰 午座에 모셨다가 다시 沙谷後山 小泉洞 西麓 酉坐에 모셨다..

夫人仁川蔡氏시며 戊辰 四月 열사흩날 태어나시고 丙戌 五月열아흐렛날 돌아가시니 墓所龍馬峰 卯座에 모셨다.

내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世寧, 羲寧, 萬寧, 五寧이고 世寧은 아들 義鐸, 義冕, 義準, 義松, 金基炘, 朴圭三, 朴 金 이다. 羲寧은 아들 義植을 두고, 萬寧弟 炳鏶에게 系子하였는데 아들 義煜, 正浩, 正義, 義宣, 義祥, 義範과 딸 柳佑淳, 孫晟睦, 鄭南鎭, 金仁洙, 洪在喆, 丁理鎭, 睦榮國이다.

嗣孫 義鐸은 아들 元熙와 딸 宋東烈을 두고, 義冕의 아들은 觀熙, 鍾熙, 昌熙를 두었고 딸은 鄭漢鎭, 徐勳鍾이며, 五寧에게 系子하였다. 義準은 아들 中熙와 딸 成樂熙를두고, 義松의 아들은 東勳이다. 義植은 아들 東熙, 國熙를 두었다. 義煜靑熙, 承熙를 두었고, 正浩康熙를 두고, 正義沅錫, 重錫, 鍾錫을 두고, 義宣斗熙를 두었다.

嗣 曾孫 元熙는 아들 庸國, 庸學, 庸杰과 딸 金奉生을 두고, 中熙鎭赫을 두고, 觀熙는 아들 庸斗와 딸 金相圭, 鄭文植을 두었고,(후에 追加) 東熙는 아들 용훈,李東均, 國熙庸俊을 두었다. 靑熙는 아들 庸振을 두고, 康熙는 아들 珉錫을 두었다.

嗣玄孫 庸國은 아들 京澤을 두고 庸學은 아들 廷澤을 두었으며, 庸斗(光漢)는 아들 을 두었다. 이외에도 이루다 적지 못한다

!

공은 대대로 文衡이 빼어나고 三韓이후로 뿌리 깊은 家門에서 곧은 節慨와 뛰어난 才致天稟으로 타고 나서 세운 뜻을 所信껏 펴 나갈 수 있는 모든 餘件을 고루 가추고 계셨건만 나라의 運數가 다하여 이를 억지로 뒤 돌이킬 수도 없어 스스로 모든 것을 順理대로 살아가시고자 하였으니 다만 좁은 松谷땅에서 安心使命을 뜻으로 삼고 외로우신 祖父님을 모시고 그나마 孝道를 다하고자 하여도 일지기 父母님조차 기다려 주시지 않으니 돌이킬 수 없는 모진 아픔만 더할 뿐이니 그나마 따로 조용한 山房을 꾸미고 널리 諸子百家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시고 程朱退溪學問을 더욱 精勵하여 몸소 익히며 다스리시고 뜻을 같이 하는 當代의 유명한 人物親舊交際하며 正直하고 誠實하며 부지런하여 한마디 반걸음조차 조심하여 연못에 얼음을 밟듯 하였으며 옛것을 좋아하시되 지나치지 않으며 兄弟들과 더불어 따로 깊이 생각함이 있어 늘 知慧롭고 融通性思慮 깊은 삶을 지키셨고 先祖遺業을 지키시며 一生의 힘을 다 쏟아 부어서 세상의 사람이 당연히 하여야 할 바이지만 사람이 하기가 어려울 도리를 항상 다른 사람과는 다름이 있게 사셨다.

年歲가 많아지시면서 은 어질고 學問行蹟이 뛰어나시며 언제나 嶺南 각 고을 儒林에서 重望을 두루 맡아 지니 온전히 옛것을 지키시며 세상이 末世처럼 변하는 過程에서도 드물게 보일 善處일뿐만 아니라 여러 옛사람에 비추어 보더라도 참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묵묵하게 꾸준히 지켜오셨으며 말로서는 다할 수 없었을 참담한 시대를 맞아 벼슬조차도 단 한번으로 그친 것이 크게 아쉬움이 남는 바이다.

공의 著述에 나타난 文章됨이 簡潔하되 燦燦하여 장차 出版하여 오래전하여야 할 것이다. 書法은 처음 顔氏體를 따랐으나 스스로 一家를 이루어서 잠시 글씨 한 조각을 얻어 그 사랑스러움이 구슬처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顯著功績이 믿을 만한 書籍과 여러 자료에서도 올려 저 있음을 보았다. 내가 醴泉에 여러대로 이어 살 때 사시는 동내 가까운 곳에서 찾아뵙는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언제나 敦篤히 맞으시고 결코 세월의 흐름에도 변함이 없이 厚德하셨다.

요사이 孫子義冕이 그 아들 觀熙를 보내어 좋은 글을 써 주기를 부탁하였지만 나로서는 글을 쓸만한 適切한 사람이 아니고 韓國戰爭이후 資料를 대부분 逸失하여 躊躇하였지만 수십차례 訪問하여 懇曲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내 나이 八十을 넘어가는 처지로서 공의 후덕을 입은 정에 마지못하여 허락하고 行跡을 눈길 가는데 만 몇 차래 보완하는데 힘썼으니 다만 取捨選擇함이 좋을 듯하다.

 

                                            壬子仲春

                                           前 成均館長 永嘉 權重海 撰

                                                                                  曾孫 觀熙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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