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李秉岐 : 1891∼1968, 본관 : 연안)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 이론과 창작으로 20세기 시조 중흥에 기여하였으며 국문학의 올과 날을 세움. 가람 이병기는 국문학자 또는 시조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지칭만으로는 무엇인가 아쉽다는 생각이다. 물론 가람은 우리 국문학 연구의 초창기에 올과 날을 챙겨 세운 학자요, 쇠퇴 일로에 있던 우리 시조시를 부흥·발전시킨 시인이었다. 이 두 가지 면에서의 업적만으로도 가람은 우리 문학사와 더불어 길이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자·시인의 지칭만으로 아쉽다는 것은 워낙 가람에겐 독보적인 분야가 많았기 때문이다. 교육자·한글운동가·애란가·애주가로서의 가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렇다.
가람은 16세까지 고향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결혼까지 한 후, 학교공부를 생각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을 하였고, 서울의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할 때의 나이는 20세였다. 가람의 학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사범학교 재학 중 매주 일요일 2시간씩 '조선어강습원'에 나가 주시경의 조선어 강의를 청강하였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가람은 거의 독학으로 국문학연구와 시조시 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가람의 좌우명은‘후회를 하지말고 실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가람이 50여년간 꾸준히 《일기》를 쓴 것도, 78세 생애에 언제나 떳떳하여 흠결을 남기지 않은 것도 이 좌우명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시대에 있어서의 가람의 행적을 보아서도 그렇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어야 했고, 이른바 '창씨개명'에도 응하지 않았다. 임종국의《친일문학론》에 의하면 가람은 일제시대에 쓴 '시와 수필의 어느 한 편에서도 친일문장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얼굴'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맹자는 백세지사(百世之師)를 말한 바 있다. 백대의 후세까지도 사표가 될 사람을 일컬음이다. 이러한 사람의 학풍이나 풍도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사람을 본떠 분발하고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도 했다. 가람 이병기의 한 생을 살피는 동안 줄곧 따라온 낱말의 하나가 바로 이 '백세지사(百世之師)'였다. 올해는 가람의 탄생 110주년이자 가람의 서거 33주년이 되는 해로서 21세기에도 가람은 겨레의 스승으로 우러름을 받아 마땅하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 이론과 창작으로 20세기 시조 중흥에 기여하였으며 국문학의 올과 날을 세움. 가람 이병기는 국문학자 또는 시조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지칭만으로는 무엇인가 아쉽다는 생각이다. 물론 가람은 우리 국문학 연구의 초창기에 올과 날을 챙겨 세운 학자요, 쇠퇴 일로에 있던 우리 시조시를 부흥·발전시킨 시인이었다. 이 두 가지 면에서의 업적만으로도 가람은 우리 문학사와 더불어 길이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자·시인의 지칭만으로 아쉽다는 것은 워낙 가람에겐 독보적인 분야가 많았기 때문이다. 교육자·한글운동가·애란가·애주가로서의 가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렇다.
가람은 16세까지 고향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결혼까지 한 후, 학교공부를 생각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을 하였고, 서울의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할 때의 나이는 20세였다. 가람의 학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사범학교 재학 중 매주 일요일 2시간씩 '조선어강습원'에 나가 주시경의 조선어 강의를 청강하였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가람은 거의 독학으로 국문학연구와 시조시 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가람의 좌우명은‘후회를 하지말고 실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가람이 50여년간 꾸준히 《일기》를 쓴 것도, 78세 생애에 언제나 떳떳하여 흠결을 남기지 않은 것도 이 좌우명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시대에 있어서의 가람의 행적을 보아서도 그렇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어야 했고, 이른바 '창씨개명'에도 응하지 않았다. 임종국의《친일문학론》에 의하면 가람은 일제시대에 쓴 '시와 수필의 어느 한 편에서도 친일문장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얼굴'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맹자는 백세지사(百世之師)를 말한 바 있다. 백대의 후세까지도 사표가 될 사람을 일컬음이다. 이러한 사람의 학풍이나 풍도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사람을 본떠 분발하고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도 했다. 가람 이병기의 한 생을 살피는 동안 줄곧 따라온 낱말의 하나가 바로 이 '백세지사(百世之師)'였다. 올해는 가람의 탄생 110주년이자 가람의 서거 33주년이 되는 해로서 21세기에도 가람은 겨레의 스승으로 우러름을 받아 마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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