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이야기
이스라엘에 유디트가 있었다면 우리에겐 그 보다 멋진 영웅인 논개가 있습니다. 학창시절 은사중에 한분이 논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 중에 몇구절 옮기겠습니다. 그분은 논개를 기생이라 하는 놈들은 뭣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햇습니다.
논개는 이름, 호는 의암, 성은 신안 주씨이며, 전북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특이하게도 논개는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1574.9.3밤)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답니다. 조선에 우리가 아는 사람중 이와 같은 이가 있으니 영조라고 합니다.
전 운명론을 안믿지만 그 시대에는 엄천 크게 될 사주를 타고 난 여성이었습니다. 이름도 술이 개니 거기엣 나왔다고 하는데 화목한 가정이었지만 다섯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고생을 많이 했고, 놈팽이 숙부 주달무때문에 팔려갈번 하다가 탈출하여 당시 장수 현감인 최경회의 도움으로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후에 논개는 17살의 나이로 두 세대 차이인 최경회가 혼인을 했고 1592년 힘진왜란이 발발하자 상중이던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옛날 현감을 지냈던 장수에 들러 의병을 모집하고 논개도 합류하게 됩니다. 최 의병장이 월강리 앞 들판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킬 때 논개는 동네 부인들을 모아서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습니다. 최 의병장은 부대를 골자부대로 이름 짓고 무주 쪽으로 진격한 뒤 무주 우지치전투에서 첫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산음, 지례, 개령, 성주등 경상도 일대를 누비면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 데에는 최경회가 이끄는 호남 출신 의병들의 성 외곽에서의 맹활약이 크게 주효했습니다. 최경회는 그간의 의병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습니다.
그 소식이 장수에 머물고 있던 논개에게도 들려왔고, 남복으로 변장을 하고 진주로 가 최 병사와 다시 합류하게 됩니다.기븜도 잠시, 6월 19일, 드디어 왜군은 10만여 대군을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해왔습니다.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에 최경회가 잠간 등장합니다. 이 글과는 다르지만 김시민목사가 눈물을 머금고 성문을 열지 못하자 "조선을 위해 너희들과 싸워 영광스럽다. 조선군대의 기개을 보이자"며 왜군진영으로 진격해간 사람이 바로 최경회입니다.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 병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논개는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했고, 칠월 칠석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전승 축하연회를 열때 일본에서는 '신의 칼'이라고 불리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게를 유인해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했습니다. 그놈 쌍판이 저 밑에 있습니다.
한두어가지만 덧붙입니다. 먼저 영정에 관한 것입니다. 처음 영정은 일제부역화가로 알려진 김은호가 그렸습니다. 저위의 영정은 충남대 윤여환교수가 그리신 것으로 2008년 문화관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의 최종 심의를 통과,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아시겠지만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 더 해야합니다. 조국을 위해 논개가 일본에서 지금도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1970년대, 일본놈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는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근처 히꼬산 밭을 갈다가 오래된 묘비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비석에는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이야기가 써 있었습니다.
'신의 칼' 이란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쇼군으로 승승장구한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느나 그의 죽음은 진주성싸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술을마시다 '논개'라는 조선여인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 일본놈은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릅니다. 73년 처음으로 진주를 찾아가 자신은 논개를 존경하는 일본인이라는 마음을 비추면서 한-일간 역사적 화회와 교류, 영혼들의 원풀이라는 주장으로 진주에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져 이를 일본으로 모셔가는 의식을 치룬 후 남강에 국화를 뿌리고 1천마리의 종이학을 띄웠습니다. 그리고 히코산에 게야무라 사당옆에 논개가 순국한 진주에서 나무, 흙, 모래 등을 가져와 논개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또 논개의 영정과 똑같은 영정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그뒤 그는 논개를 게야무라와 영혼결혼식을 시키고 그의 부인과 처제의 영정옆에 첩으로 세워놓았습니다.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전쟁 중에 게야무라와 논개가 만나 전쟁이 끝난 후 논개는 그를 따라 일본까지 따라와서 함께 해로하다 죽었다' 는 기가 막힌 이야기까지 만들어졌고 논개는 일본에서 '부부금실을 좋게 해주는' '섹스의 신' 으로사람들이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이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당시 진주시에서는 우에쓰카에게 감사장까지 선사했다는 것입니다.뒤늦게 시민단체에서 알아내어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이슈화 시켰고 정부와 시 당국에서는 영정과 우에쓰카가 진주에서 가져간 것들을 모두 회수시켰다고 합니다.
하여간 역사 공부 잘해야합니다. 일본놈들 뼈속까지 믿어선 안됩니다.
여기도 tip이 있어야죠. 틈나면 논개 누이를 만나려 가보십시오. 만해 한용운 선사님의 말씀대로 논개의 애인이 되어 주세요.논개 누이가 탄생하신 곳이 마침 농촌체험마을이라 있기도 편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논개누이의 마음을 닮은 철쭉이 가득한 산들도 있답니다.
[출처] 논개 이야기|작성자 A Dreamy Wo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