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녕 - 李 東 寧 1869∼1940년 대한민족독립운동의 최선두 지도자
●호는 석오(石吾), 본관은 연안, 최근 문화재6호(삼족오)로 알려진 판교 연성군의 아우 되는 삼척공의 14세손이다. 조부 석구(묘 파주군), 부친 병옥의 전근지를 따라 천안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그곳에서 자랐다. 성품은 맑고 깨끗하여 사심이 없어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났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체결을 반대, 기독교애국청년단체인 ⌜상동청년회⌟에 가입,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이듬해 을사조약 폐기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겪은 후 북 간도로 건너가 이상설· 여준(呂準) 등과 용정에서 최초의 현대적 정규 학교인 ⌜서전의숙⌟을 설립하여 교포 교육에 적극 힘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김구 등과 항일비밀결사단체 ⌜신민회⌟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 총무가 되고, 1910년에는 최초의 만주⌜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과 교포의 교육에 첫발걸음을 내딛고, 1911년 블라디보스톡에 항일운동단체 ⌜권업회(權業會)⌟ 조직하며, 해외동포를 위해「해조신문(海朝新聞)⌟발행과, 1913년에는 단군사상을 고취하고자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정기 앙양과 이나라 자주독립을 위하여 주야로 힘쓰니 일찍부터 대한독립투쟁의 방향을 잡는 최선두의 지도자였다.
이때 군사모집을 위하여 일가친척을 동원하였는데 연안이씨 문중이 앞장서 호응 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이가 많다.
●1919년 4월13일,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정부가 필수적임을 알고 이 나라 건국정신의 바탕이 된 대한민족자주독립정신(3.1정신)에 입각한⌜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 초대의정원 의장에 추대되고, 내무총장을 겸하였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유능한 인재들을 초치하는데 힘써 이때 이승만 안창호와 같은 미주지역 독립투사들도 영입하여 대통령직등 요직까지 안배하여 독립운동인사의 규합에 총력을 기울려 민족지도자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였다. 임정의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야 하는 내무총장직은 독립자금모금과 망명해온 국무위원과 독립지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니 결코 자기 이름이나 이익을 앞세우는 일이 전혀 없이 언제나 젊은 투사들의 사기진작과 이들을 앞세워 요직을 맡기는 아량을 베푸니 국내외의 인망을 한 몸에 받아 왔다.
●1921년 파벌간 이념분쟁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1922년에는 안창호· 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지도자간 대동단결을 촉진했다. 임시정부에 자금이 고갈되고 내부알력이 깊어지면서 분열되기에 이르렀지만 끝까지 임시정부를 사수하고자 홀로 안간힘을 다 기울였다.
☯1924년경 아무도 어려운 임정살림을 맡으려 하지 않자 다시 국무총리를 맡으면서 군무총장을 겸하며, 이어 대통령 대리도 하였으며, 26년 국무령이 되기도 하였다. 이때의 임시정부내분이 극도로 심화되고 각기 자기주장만 하면서 분열을 일삼았지만 일심전력 잘 무마하여 임시정부 일대의 위기시대를 간신히 극복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의 든든한 모태가 되게 했다.
백범 김구가 국내에서 전전하며 숨어 다니다가 임시정부를 찾았을 때에는 임정요인 중에 김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배척하는 이도 있었지만 이동녕은 김구를 포용하여 적극 신임하고 내무총장직을 주어 임정 살림을 마꼈다. 이를 인연으로 하여 김구는 이동녕을 오로지 부모이상으로 받들고 모셨다.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초대 당수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 결성을 주도하여 일본에 직접 선전포고를 했다. 임시정부를 이끌고 장사(長沙)로 이전했다가 1940년 쓰촨성 (四川省)에서 주야로 조국광복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인고의 71세로 분사하니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를 치루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됐다. 유해는 김구가 아들 신(信)에게 유언으로 남겨 친일정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여곡절 끝에 효창공원에 모시게 하였다.
●부모님 묘소는 원산 공동묘지에, 독자인 의식(義植)은 광복후 민족반역자처단에 앞장섰다가 친일정치조직에 의해 활동이 무산되고, 1950년 한국전이후 아직 그 종적을 알 길이 없다.
그의 하늘을 덮는 빛난 공훈을 우리민족 골수 깊이 아로 삭여 천추만세에 길이 전하고 싶다.
2005년 8월 일 이 관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