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예부인 (花惢夫人)
옛날에 한 여성이 정성껏 가꿔 온 가정이 산산히 부서저 버리자 끝내원한으로 얼룩진 그 사연을 모았다.
화예부인 서비(花惢夫人 徐費)는 `나라를 망친 것은 남자들이다. 집안에 사는 여인들이 어찌 안단 말인가?`라는 뜻의 후촉(後蜀-지금 성도)이 망하는 광경을 시로 묘사하였다.
혜비 서씨(慧妃 徐氏 940-976)는 화예부인(花蕊夫人)으로 중국 오대십국당시 시인이자 후촉 황제 맹창(孟昶)의 황후였다. 특히 시서 학문에 능통하고 미모를 겸비하였다.
건덕 2년 11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이끈 군사 3만에 의하여 후촉을 공략하자, 후촉의 군대 14만이 화살 한번 쏘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져 버린 역사가 있다.
훗날 조광윤이 화예부인에게 물었는데 그 대답으로 이시를 지어 `남편인 왕은 항복기를 성두에 꽂는 것도 궁중깊히 있었던 나는 알지도 못했다. 14만명이나 되던 군사가 갑옷을 벗어 버리는 이런 것들이 사내들인가?. 하고` 억울한 심경을 즉시 응답했다.
송나라에 포로로 잡혀 왔지만 서씨의 그 재능과 미모는 조광윤과 그의 동생 조광의와의 질투를 자아내었고, 형제간에 다투어 송나라가 패륜의 왕족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송나라는 형제끼리 서로 죽이고 싸워 왕위쟁탈에 의한 종말을 맞이한다. 화예부인의 계략으로 여길 만 하다.
노여록(爐餘錄)에는 '촉주 맹창이 죽자 송태조의 궁에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하였지만, 동생 조광의도 이 재색을 겸비한 서씨를 그대로 두지 않고 서기 976년 겨울 형 조광윤이 임종이 가까운 것을 짐작하고 잠자는 형을 불렀는데 답이 없자 서씨를 통간하려 한다. 이 사실을 안 조광윤이 분노하여 옥부(玉斧)로 침상을 내리치며 죽으니 조광의는 조광윤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태종이 되고, 화예부인을 다시 비로 남게 하지만 화애부인은 자결한다.
그러나 화예부인의 정신적 생명은 아직도 죽지 않고 시로써 남아 있다.
대개 역사는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곡해 되도록 쓴다. 여성의 정조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비평하는 반면에, 왕조에 누가 되는 기록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 사실이 암시하는 핵심은, `國家 역시 主人인 국민이 지켜주지 못하면 강토와 가족은 이 모습으로 짖밟혀도 속수무책이 되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궁사(宮詞)는 송대의 蘇軾(東波)가 모았다. 화예부인의 시를 비롯하여삼국전후, 양진조 이후 그리고 오호10국 및 송대에 이르기까지 한시를 모아 둔 역작이다
궁중에서 첨예한 감각으로 숨소리까지 모아 정취를 느껴보자.
경령서궁(景靈西宮)은 대내의 밖, 궁성 우액문(右掖門) 밖에 있는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궁전이다. 홍전(紅磚), 녹와(綠瓦)가 휘황한 큰 궁전이었지만 선조 주실(周室)의 부(符-杜鵑)의 황후와 시녀들 두 사람만 머물고 있는 텅 비고 썰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위왕 부언경이 죽고 난 후 조광윤이 부가(符家)에 대한 경계를 거두어들이자 부 황후는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가까이 하기를 꺼려 선조 황제의 남겨진 과부를 찾지 않았다.
이 날, 부 황후는 화예(花蕊) 부인을 화청(花廳)에서 맞았다.
화예부인은 후촉(後蜀) 황제 맹창(孟昶)의 귀비였다. 맹창은 열여섯에 습위(襲位)하여 촉이 망할 때까지 32년 간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송(宋)에 귀속되어 며칠 되지 않아 조광윤에게 독살되지만 화예부인은 살아서 조광윤의 후궁이 되었다.
이 경덕서궁은 알고 보면 원래 화예부인과 맹창의 구제(舊第)였다. 지금 두 여인이 이런 쓸쓸한 궁 안에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간간히 웃음소리도 흘러 나왔지만 망국의 한이 서린 웃음소리였다. 부 황후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화청 안을 배회하다가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이 시는 화예부인이 지은 촉망구(蜀亡句)다.
君王城上豎降旗,왕성(王城)에 항복의 깃발 세운 것을
妾在深宮哪得知,심궁(深宮)의 첩이 어찌 알겠어요.
十四萬人齊解甲,십사만 군사 무장해제를 당했지만
更無一個是男兒,남아다운 자 한 명도 없었네요
또 한수 .
嫩荷香撲釣魚亭,어린 연꽃 향기가 釣魚亭까지 퍼지고,
水面文魚作隊行.수면 위의 잉어 대오를 짓네.
宮女齊來池畔看,궁녀들 나란히 와서 연못가에서 보고,
傍帘呼喚無高聲.주렴옆에 서로 부르지만 높은 소리없네.
每見花開卽苦春.매번 꽃필 때를 보면 괴로운 봄날이로다.
錦鱗躍水出浮萍,아름다운 비늘이 물을 차고 부평초밖으로 튀어오른다,
恰似金梭撺碧沼,베북이 푸른 연못에 던져지는 듯 보기 좋네
白日臥多嬌似病, 대낮에 너무 누우니 아리따움도 병처럼 보여,
시 속에 나오는 ‘文魚’는, 옛 詩 속에서는 잉어(鯉魚) 혹은 금붕어(金魚)로 나오는데, 이 연못가에 궁중 사람에게 낚시하도록 제공한 조정(釣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잉어로 볼 수 있다. 잉어의 성격은 튀어오르기를 좋아하는데, 특히 산란기 때다. 화예부인의 다른 궁사 속에도 잉어가 물위로 튀어 오르는 정경묘사와 여성의 내심도 은근히 비췬다.
다른 <宮詞>
池旁居住有漁家,연못 가에 사는 漁家,
收網搖船到淺沙.그물을 걷어 배를 저어 얕은 모래사장에 대네.
予進活魚供日料,살아있는 고기로 하루동안 고기잡은 세금으로 내고도,
滿筐跳躍白銀花.광주리에 가득 뛰는 것이 하얀 은꽃같네.
또 다른 <궁사>를 보자,
廚船進食簇時新, 주방이 있는 배에서 음식을 내면 모두가 항상 새롭고,
侍宴無非列近臣. 잔치자리엔 近臣이 모두 배열했다.
日午殿頭宣索鱠, 정오에 宮殿 한쪽에 준치를 찾는다고 알리면,
隔花催喚打魚人. 꽃밭 너머에선 漁家를 불러 다그치고.
화예부인의 이 <궁사>가 대표작으로, 문단상에서 정품으로 본다.
같은 이름의 화예부인(723-753)도 시인이다. 같은 서씨로 `소서비(小徐妃)`라고도 한다. 남북조시대 전촉 황제 왕건(王建)의 비다. 역시 시인이요 미인으로 150편의 시를 남겼으나 여기서 화예는 후촉 맹창의 비 화예부인 서비(徐費)를 말하고자 한다.
아래의 궁사는 자신이 낚시를 배운 모습을 쓴 것인데,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명품이다.
慢揮紅袖指纖纖, 붉은 소매 천천히 휘두르니 손가락이 가날기도 하네,
學釣池邊傍水弦. 낚시 배우는 연못 가, 바로 옆에서 나는 활시위 소리.
忍冷不禁還自去, 냉기를 참다못해 돌아오고 나니,
釣竿常被別人牽. 낚싯대는 항상 다른 사람이 손맛을 보고,
낚싯대를 휘두르는 가늘기만 한 궁녀의 손가락까지 묘사할 정도로 여시인의 섬세한 관찰력은 낚싯대에서 나는 ‘활시윗소리`를 묘사한다.
이 소리는 낚시인들이 항상 듣는 정겨운 소리이고,
냉기를 참다가 돌아가고 나니 항상 손맛은 다른 사람이 본다는 말은 자신의일을 낚시에 묘하게 비유한다.
화예부인은 비록 오대십국(五代十國)이 혼란한 시대에 산 사람이지만 서남쪽 촉국(蜀國)에서 잠시 안정된 번화한 지역에서 살았지만 황당한 사건을 겪고나서 <궁사>를 통하여 매우 깊은 묘사를 통하여 비판의식을 보이고 있다. 대부분이 감상하는 시각을 가지고 소일하는 오락을 위주로 하는 듯 하지만 문장 가운데 품은 서리같은 원한은 은근히 복수를 상기시킨다,
대개 궁사는 군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의 편안함과 즐거움에 대해 기록하듯 묘사한다. 당연히 제왕이 낚시하는 장면도 성색(聲色)과 함께 묘사되었는데, 구구절절이 농후한 황족의 냄새를 드러내고 있으며 화예부인의시에서만은 원한을 품은 여인의 소리장도(笑裏裝刀)로 볼 수 있는 대목이 모인다.
釣線沈波漾彩舟, 낚시줄 담긴 물길은 꽃배에 출렁이고,
魚爭芳餌上龍鉤. 고기는 향긋한먹이를 다투다 임금님 낚시바늘을 무네,
內人急捧金盤接, 궁녀가 급히 금쟁반으로 받아,
撥刺紅鱗躍未休. 낚시를 빼니 붉은 고기 쉼없이 튀네.
황제가 유람선에서 하는 낚시는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황제는 바늘에 물린 물고기도 바늘을 직접 빼지 않고, 궁녀가 금쟁반으로 담아서 뺐던 모양이다. 낚싯대를 드리운 낚싯줄은 배로 인해 출렁거리고, 방금 낚인 고기는 낚시바늘을 빼자 마자 펄떡이는 모습은 황제가 낚시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듯이 보여주고 있다.
고기가 반항 하는 모습을 자신의 심중을 감춘(隱諭)표현일가?
이 <궁사>들의 진정한 작자에 대해서, (전촉)前蜀 주(主)의 소서비(小徐妃)인 화예부인(花蕊夫人), 또는 뒤에 맹욱(孟旭)의 비(妃)라고 하는데, 서비(徐費)즉 청성(靑城縣) 서씨(徐氏) 화예부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견이 있다. 특히 157수의 궁사에서 타인의 작품이 그 속에 끼어들었을 여지를 면하지 못하기에 당시의 문화현상으로 봐야 하며, 이 궁사들을 통해 옛 궁정생활을 엿볼 수 있고, 아울러 과거 궁정황실의 낚시하는 정취를 엿볼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여성의 섬세한 감각을 헤아려보는 흥미는 가히 문학의 일부라 볼 것이다.
화예부인은 여성의 끈질김을 보여주는 대목도 이렇게 표현한다.
지신의 가정을 파괴하고 자기의 조국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자신을 화살로 쏘아 죽인, 송 태종 조광의(趙光義)는, 형인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후 나쁜 일을 많이 해 후손을 해쳤는데, 자손이 두 번이나 후사가 없었으며, 전체 황족이 금나라 노예가 되는 크나큰 치욕을 당했다.
화예부인의 나라를 뺏고 역사서를 왜곡한 송 태종의 업보를 추려본다.
송 태종 조광의(976-997)는 여러 번 역사서를 왜곡했지만 많은 역사의 진상은 여전히 숨길 수가 없다. 그가 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으며, 형의 아들과, 황태자 남동생 조정미(趙廷美)도 죽이고, 황위를 자기 아들에게 계승하도록 했다. 그는 또 화예(花蕊)부인을 쏘아 죽였고, 남당(南唐) 마지막 군주 이욱(李煜)을 독살하기 전에 그의 아내 소주(小周)를 폭음하고, 또 본 오월(吳越) 왕 전숙(錢俶)을 독살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자신의 강산(江山)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 원한(怨恨)은 그물처럼 였어저 이 그물이 그의 후손에게 펼쳐졌다.
태종의 장자는 미쳐 죽고, 둘째 아들은 황태자였으나 병들어 죽고, 셋째 아들이 천자의 자리(眞宗)에 올랐으나 그의 손자들이 잇따라 요절하고, 유일한 아들 인종(仁宗)만 남았지만 정치는 않고 그림만 그렸다. 그리고 인종도 후대의 자식이 없었다.
당숙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고 나서 아래로 2세, 3세를 전했으나, 금으로부터 태종의 황실 후예들이 금나라에 잡혀가 노예가 되었고 부녀자는 관기(官妓)가 되었다. 남송왕 조구(趙構)의 생모와 본처도 있었다. 유일하게 조구가 도망가 남송을 건립했으나, 아들과 딸까지 요절했다.
그 후 조구는 금나라 병사에게 놀라 한 번 실패한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으며, 또한 후사가 없다. 역사서에 기재된 바로는, 그의 큰어머니 원우(元祐) 태후는 ‘생꿈(異夢)’에서 깨닫고, 남아 있는 태종의 후예 자식들 대신 황위를 다시 태조의 후손에서 대를 잇게 하였다.
당시 태종 조광의가 왕법을 어기고 악을 저지르고도 징벌을 직접 받지 않았으나 그 징벌이 화예부인과 모진 은원으로 이어진 결과라고 상상함직 한 대목이 수 없이 많다.
이 송나라의 왕가 악폐가 이웃나라인 고려에도 전파되어 고려왕실 역시 폐륜으로 얽힌 시대가 있었지만 모두 망하는 결과로 이어 졌다
한 여성의 저주가 사모치고, 한 사람 송태종이라는 군주가 저지른 죄목이 200년간의 중국 송나라의 편안을 쉴사이없이 조여 왔고, 간신이 속출하여 백성이 도탄에서 해매이게 한 잘못이 역사에 남을 정도인데 이를 귀감삼아 후일 위정자들의 행실을 그냥 눈감고 넘어가는 언론이나 국민이 있다면 다같이 신의 섭리에 보복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화예부인 이글 몇자로 1,000년 원한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2244 李觀熙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