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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외곡 옮김 (지식in)신라,고구려,백제 및 가야의 4국시대

작성자관희2244|작성시간14.01.20|조회수71 목록 댓글 0

신라,고구려,백제 및 가야의 4국시대

[일제가 왜곡한 삼국 및 가락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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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왕의 습격으로 우리나라의 [삼한]이 멸망에 이르자 북부여의 천제 해모수 황제에 의하여 삼한의 영토는 다시 회복된다. 신라와 고구려가 漢(한)의 침공을 받자 북부여 해모수의 아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옛 영토를 다시 회복했다. 신라는 하느님에게 제사하는 장손국의 제사장의 나라로서 제 4대 탈해왕 때까지 국호도 없고 왕이란 칭호도 없이 천부도를 保守(보수)했으나 後漢(후한)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탈해왕 때부터 국호와 왕권을 행사하여 빼앗겼던 옛 삼한 영토를 모두 다 회복하고 천하를 평정했다.

서기 663년 신라의 문무왕은 羅唐(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강역은 실로 광대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우리나라의 역사는 마치 삼국(고구려,백제,신라)시대부터 시작된 것처럼 변조하고,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4국의 광활한 영토 역시 한반도 속으로 축소했다. 삼국사기의 지명들은 실재로 중국 대륙에 있었던 지명을 삼국사기의 지명이 마치 한반도 속에 있었던 지명인 것처럼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의 지명과 억지로 얽어 맞추어 註釋(주석)하여 세뇌 시키고 국사교과서를 편찬했던 것이다. 즉 중국 지명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면 삼한과 삼국의 광활한 영토는 저절로 한반도 속으로 축소된다.

[일제가 왜곡한 신라의 역사]
오늘날의 우리 국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권을 근간으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변도가 편찬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의 3사서를 통하여 일제와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왜곡한 신라 천년의 역사를 살펴보자. 과연 경상북도 월성군 경주가 신라의 1000년 도읍지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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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병도는 신라의 도읍지를 경주로 지정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국의 4국 영토는 한반도 속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사실을 명확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삼국의 신라는 경북 월성군 慶州(경주)에 도읍을 정하고 대구 경상도 지역에서 위치하고, 고구려는 지금의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한반도 북부와 둥북 쪽 지방이고, 백제는 현재의 서울 漢江(한강) 북쪽의 경기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또한 가락국(駕洛國)은 경남 김해를 도읍지로 추정하고 낙동강 하류지역이라 하고 지적했다.

가야(加耶)는 아라가야(阿羅伽耶)는 함안이고, 고령가야(高寧伽耶)는 함창이고, 대가야(大伽耶)는 경북 고령이고, 성산가야(星山伽耶)는 경북 성주에 위치하고, 소가야(小伽耶)는 경남 고성이고 비화가야(非火伽耶)는 경남 창녕이라고 추정하였다. 또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 삼국 통일시대와 발해(渤海)시대를 우리나라의 “ 남북국시대 ” 로 명확히 기술했으나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발해역사는 처음부터 없애고 우리나라의 역사로 간주하지도 않고 발해의 광활한 영토는 지도에서 없애버리고 신라의 삼국통일 강역만 우리나라의 영토로 인정하고 한반도 속의 평양 밑으로 축소하여 국사교과서를 편찬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중국 지명을 한반도 내의 지명으로 얽어 맞춰 고구려, 백제, 신라 및 가락국의 4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 변조했던 것이다. 먼저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중국 지명]을 어떻게 왜곡 조작해서 국사교과서를 편찬했는지 그 왜곡의 실상을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본문을 통하여 관찰하여보자.

2, 혁거세는 선도산 聖母(성모)의 아들이다.
[ 2-l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신라의 시조는 赫居世(혁거세) 居西干(거서간)이다.
시조의 姓(성)은 박씨며 諱(휘)는 赫居世(혁거세)이다. 前漢孝宣帝五鳳元年(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BC:57년) 4월 병진일(일설은 정월 15일)날 13세에 즉위하여 호를 居西干(거서간)이라 하고 국호를 徐那伐(서나벌)이라 하였다. 선대에 조선의 遺民(유민)들이 山谷(산곡)에 나누어 살던 곳으로 六村(6촌)이 있었다.

첫째 閼川(알천) 楊山村(양산촌), 둘째 突山(돌산:전남 여천군 돌산면) 高墟村(고허촌), 셋째 嘴山(취산:선도산) 珍支村(진지촌)(혹은 于珍村(우진촌), 넷째 茂山(무산:전남 茂朱郡(무주군) 茂豊面(무풍면) 大樹村(대수촌), 다섯째 金山(금산:지금의 금강산 백율사의 北山)) 加利村(가리촌), 여섯째, 明活山(명활산) 高耶村(고야촌)이 있었다. 이것을 辰韓(진한)의 六部(육부)라 한다.
註: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明活山(명활산)은 지금의 경주 남산에 있는 광대한 山城(산성) 즉 이것의 유적이니 동의 명활산성 서쪽의 仙桃山城(선도산성:西兄산성)과 아울러 동서남 3방에 鼎峙(정치)한 신라 국도를 지키던 중요한 산성이다. 라고 했다.

突山(돌산)의 高墟村長(고허촌장) 蘇伐公(소벌공)이 楊山(양산:경주 남천) 기슭을 바라보니 蘿井(나정)의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으므로 곧 찾아가 보았더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기에 깨트려 보았더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 곧 蘇伐公(소벌공)이 거두어 길렀더니 나이 10여세가 되자 영리하고 夙成(숙성)하여 6부의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남과 달리 神異(신이)하여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辰(진)나라 사람들은 큰 알을 瓠(박)이라 함으로 처음에 둥근 박과 같다 하여 박씨성이 되었다. 居西干(거서간)은 辰(진)나라 말로 왕이란 뜻이다 (혹은 貴人(귀인)을 칭한다)

4년 여름 4월 辛丑(신축) 초 하루날 日食(일식)이 있었다 . 5년 봄 5월에 閼英井(알영정)의 우물에 龍(용)이 나타나 오른쪽 갈빗대로 女兒(여아)를 탄생시키니 늙은 할멈이 보고는 이상스러워 거두어 양육하고는 우물의 샘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장성하자 아름다운 용모와 德性(덕성)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始祖(시조)가 듣고 王妃(왕비)로 맞이하시니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聖人(성인)이라 하였다.

8년 倭人(왜인)이 장병을 거느리고 변방을 침범하였으나 시조가 神德(신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 돌아갔다. 9년 봄 3월에 孛星(패성)이 王良(왕량)에 있었다. 14년 여름 4월에는 孛星(패성)이 參(삼)에 있었다. 17년에 왕은 6부를 巡撫(순무)하시며 왕비 알영과 함께 농사일을 독려하시며 養蠶(양잠)을 권장하여 지역의 백성들에게 많은 이익이 되게 하셨다. 19년 봄 정월에 卞韓(변한)이 신라국으로 항복해 왔다. 註: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註(주)에서: 여기 소위 卞韓(변한)은 낙동강 방면에 있던 加耶諸國(가야제국)을 이름이나 이 나라들이 이때 徐那伐(서나벌)에 항복하였다는 것은 너무도 믿기 어려움. 라고 했다.

20년(BC:37년)에 京城(경성)을 쌓아 金城(금성)이라 하였다. 이해에 고구려의 시조 東明(동명)왕이 즉위하였다. 24년 여름 6월 임신일 그믐날 일식이 있었다. 26년 봄 정월에 金城(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註 :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註(주)에서 金城(금성)은 輿地勝覽(여지승람) 慶州古跡條(경주고적조)에서 在府東西里(재부동서리).土築(토축) 周(주) 2407척이라 하였으나 지금에는 유적이 뚜렷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金城湯池(금성탕지)의 뜻에서 취하였다기 보다 <검城(성)> 즉 <임금성(왕성)>의 뜻이 아닌가 한다. 라고 하였다.

30년 여름 4월 己亥(기해) 그믐에 日食(일식)날 樂浪(낙랑:평양)의 사람들이 장병을 거느리고 변방을 침범해 왔으나 사람들은 야간에 대문도 없이 들판에 곡식을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기를 이 지방의 백성들은 서로 도적질도 할줄 모르고 있으니 道(도)가 있는 나라 라고 할만하구나, 우리가 몰래 잠입하여 군사로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들과 다를 것이 없으니 부끄러운 짓이 아니냐 하고는 이내 군사를 인솔하여 돌아갔다.
註 :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평양]의 樂浪(낙랑) 사람들이 야간에 경북 월성군 慶州(경주)의 金城(금성)을 침범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 ? >라고 표하고 낙랑은 처음에는 지금의 平南地方(평남지방)에 불과하였으나 후에는 지금의 黃海道(황해도)까지 포함. 라고 하였다.

32년(BC:26년) 가을 8월 乙卯(을묘) 그믐날 일식이 있었다. 38년 봄 2월에 瓠公(호공)이 馬韓(마한)을 빙문하였더니 마한왕은 호공에게 말하기를 진한과 변한의 두 한은 우리나라의 속국이나 근년에 조공을 받힌 일이 없으니 事大禮(사대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호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聖人(성인)이 계시며 일찍이 나라를 개국하여 부흥한 것은 人事(인사)를 修學(수학)하시여 天時(천시)와 화합하여 창고에는 곡식과 과실이 가득히 충만하며 辰韓(진한)의 백성들은 공경하고 있으며, 卞韓(변한)과 樂浪(낙랑) 倭人(왜인)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우리나라의 왕은 겸허하시여 下臣(하신)을 파견하여 修交(수교)차 빙문하였으니 예의가 과분한 것을 오히려 大王(대왕)은 怒(노)하시며 병사로 협박하시니 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하니 왕은 매우 분개하며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에서 諫(간)하니 중지하고 곧 돌아가게 허락하였다. 이전에 중국의 秦(진)나라 사람들이 亂(난)으로 고통을 받다가 많은 군중들이 동쪽으로 와서 馬韓(마한)의 동쪽과 辰韓(진한)에서 셖여서 살아도 조용히 있다가 차츰 번성해 지자 馬韓(마한)이 시기하여 문책하였던 것이다. 瓠公(호공)이란 자는 그 族姓(족성)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 倭人(왜인)이며 처음 호박을 허리에 꿰메 달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瓠公(호공)이라 칭한 것 같다.

39년(BC:19년) 마한왕이 돌아가시니 혹자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西韓王(서한왕:마한왕)이 전에 우리 사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지금 당장 그 喪(상)을 틈타 정복하면 그 나라는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혁거세왕이 말하기를 타인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짓이라 하시며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신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조의를 표시하였다.

41년 백제에 시조 溫祚(온조)가 (BC:17년)에 즉위하였다. 43년 봄 2월 乙酉(을유) 그믐날 日食(일식)이 있었다. 53년에 東沃沮(동옥저)의 使者(사자)가 좋은 말 200필을 올리면서 말하기를 寡君(과인의 임금)은 南韓(남한)에 聖人(성인)이 출세 하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使臣(사신)을 파견하여 보내 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60년 가을 9월에 龍(용) 두 마리가 金城(금성)의 閼英(알영)의 우물 속에 나타나더니 폭우와 우뢰가치며 땅을 진동시키고 城南門(금성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61년(서기 4년) 봄 3월에 居西干(거서간)이 승하하시니 蛇陵(사능)에 장례를 하였다. 曇巖寺(담암사:경주 탑리) 북쪽이다. 본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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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신라에서 호칭한 [거서간 또는 거슬감]의 이름은 현재 몽고에서 전설적인 天王(천왕)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나뭇꾼과 선녀]와 三神思想(삼신사상)이 전래 하고 있다. 곧 고대 西域(서역)과 몽고 지역은 고대 삼한의 강역이다. 즉 甘肅省(감숙성)의 성소재지인 蘭州(난주)를 金城(금성)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金城(금성)에 많이 있었다. 끝.

[ 2- 2 ]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 : 辰韓(진한) 땅에는 옛날에 六村(6촌)이 있었다. 첫째, 閼川楊山村(알천양산촌) 남쪽에 지금의 曇嚴寺(담엄사)가 있고 촌장은 閼平(알평)이다. 처음 瓢巖峰(표암봉)에서 내려왔으며 이곳을 及梁部(급양부)라 하며 李氏(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弩禮王(노례왕) 9년에 及梁部(급량부)라고 이름하여 설치하였으나 本朝(고려) 태조 天福(천복) 5년 경자(940)에 이름을 中興部(중흥부)로 고치고 波潛(파잠)과 東山(동산) 彼上(피상) 東村(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突山高墟村(돌산고허촌)의 촌장은 蘇伐都利(소벌도리)이며, 처음에 兄山(서형산:선도산)에 내려 왔다. 이곳을 沙梁部(사량부)라 하며 [소벌도리]는 鄭氏(정씨)의 조상이 된다. (梁(량)은 吏讀(이두)로 道(도)라 읽으며 혹 탁이라 쓰며 역시 音(음)은 道(도)이다) 지금은 南山部(남산부)라 하며 仇梁伐(구량벌), 麻等烏(마등오), 道北(도북), 廻德(회덕)등 南村(남촌)이 여기에 속 한다. (지금이라 칭한 것은 고려의 태조 시대(서기 940년) 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의 例(예)도 이와 같음을 알라)

셋째, 茂山大樹村(무산대수촌)의 촌장은 俱(仇)禮馬(구례마)이며 처음 伊山(이산: 皆比山(개비산)에 내려 왔으며 이곳을 漸梁部(점량부) 또는 牟梁部(모량부)라 하고 [구례마]는 孫氏(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長福部(장복부)라 하며 朴谷村(박곡촌)등과 西村(서촌)이 여기에 속 한다. 넷째, 嘴山珍支村(취산진지촌:영취산)의 촌장은 智伯虎(지백호)이며 처음 花山(화산)에 내려왔으며 이곳을 本彼部(본피부)라 하며 [지백호]는 崔氏(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通仙部(통선부)라 하며 柴巴(시파)등 東南村(동남촌)이 여기에 속하며 崔致遠(최치원)이 곧 本彼部(본피부)의 사람이다. 지금 皇龍寺(황용사:경북 경주 월성에 있던 절 嘴山(취산:영취산)가 있고 그 남쪽 味呑寺(미탄사:경북 경주 9황리 낭산) 남쪽에 崔候(최후:최치원)의 古宅地(고택지)가 분명히 있다.

다섯째, 金山加利村(금산가리촌:지금의 금강산 백율사의 北山)의 촌장은 祗陀(只他:지타)이며 처음 明活山(명활산)에 내려왔으며 이곳을 漢岐部(한기부) 또는 韓岐部(한기부)라 하며 [祗陀지타]는 裵氏(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加德部(가덕부)라 하며 上西知(상서지) 下西知(하서지) 乃兒(내아)등 東村(동촌)이 여기에 속 한다.

여섯, 明活山高耶村(명활산고야촌)의 촌장은 虎珍(호진)이며 처음 金剛山(금강산)에 내려 왔으며 이곳을 習比部(습비부)라 하며 [호진]은 薛氏(설씨)의 조상이 된다. 지금은 臨川部(임천부)라 하며 勿伊村(물이촌) 仍仇미村(잉구미촌) 闕谷(궐곡 葛谷:갈곡)등 東北村(동북촌)이 여기에 속 한다. 상기본문을 보면 신라 6부 촌장은 다 하늘에서 내려 온 것 같다.

弩禮王(노례왕:儒理王) 9년에 비로소 6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六姓(6성)을 하사 하셨다. 지금의 풍속은 中興部(중흥부)를 母(모)로 하고 長福部(장복부)를 父(부)로 하고 臨川部(임천부)를 子(자)로 하고 加德部(가덕부)를 女(여)로 삼고 있으나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없다.

前漢(전한) 地節(지절) 원년 임자(BC 69년) (古本에는 建虎(건호) 원년 또 建元(건원) 3년등은 모두다 誤記(오기)인 것이다) 3월 초 하루 날이 되면 각 6부의 촌장은 子弟(자제)들은 를 거느리고 그들의 아버지 俱禮馬(구례마)를 모시고 閼川(알천) 언덕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다. 아버지 구례마 의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임금이 없으니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워 백성들은 放恣(방자)하여 제 멋대로 놀고 있다. 德(덕)있는 君主(군주)를 옹립하여 나라에 도읍을 설치하도록 하자.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楊山(양산:강소성) 밑에 蘿井(나정) 곁에 이상한 전기 빛 같은 것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白馬(백마)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을 하는 현상을 하고 있기에 그 곳을 찾아가 살펴보았더니 백마는 사람을 보고는 길게 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고 그 곳에 자주 빛(혹은 청색의 알이 하나 있었다. 그 알을 깨고서 사내아이를 얻으니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東泉寺(동천사: 詞腦野사뇌야 북쪽에 있다.:경북 경주에 있던 절)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상서스러운 광채가 생겨났으며 온갖 새와 짐승들이 무리지어 춤을 추웠으며 천지가 진동치고 해와 달도 淸明(청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왕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필경 鄕里(향리)의 말이다. 혹 혁거세를 弗矩內王(불구내왕)이라 하며 암흑세상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西述聖母(서술성모)가 혁거세를 낳았기 때문에 中華人(중화인)이 仙桃山聖母(선도산성모)를 찬양했다. 는 말이 있고 성모가 동쪽 선도산으로 가시어 어질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을 낳았기 때문에 仙桃山聖母(선도산성모)를 찬양했다. 는 말이 있다. 또한 상서스러운 鷄龍(계룡)이 나타나서 閼英(알영)을 낳았다는 것도 西述(서술) 聖母(성모)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몸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혁거세가 왕위에 즉위 하고 호를 居瑟邯(거슬감 혹 居西干:거서간)이라 하였다. 처음 입을 열 때 자칭 말하기를 한번에 일어나 閼智居西干(알지거서간)이라 하셨다. 이 같이 칭한 말씀으로 인하여 이 뒤부터 왕을 거서간이라 칭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다투어 賀禮(하례)하였다. 지금 天子(천자)가 이미 내려 오셨으니 마땅히 德(덕) 있는 왕후를 찾아서 聖君(성군)의 배필로 맞이해야 옳지 않겠는가? 이날에 沙梁里(사량리)의 閼英井(알영정 혹 娥利英井:아리영정)우물가에 鷄龍(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갈빗대에서 어린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얼굴 모습이 뛰어 나게 아름다웠다.(일설에는 龍(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 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흡사하여 月城(월성)의 북쪽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차차 그 부리가 떨어 졌다. 그로 인하여 그 하천 이름을 撥川(발천)이라 하였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昌林寺(창림사)에 궁실을 세우고 두 성스러운 아이를 양육하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출생하여 그 알이 匏(박)과 같다 하여 鄕里(향리)의 사람들은 박을 朴(박)이라 하는 고로 그로 인하여 성을 朴(박)이라 하고 여자 아이는 우물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우물의 이름으로 이름이 되었다. 두 聖人(성인)은 나이가 13세에 이르러 五鳳(5봉) 원년 甲子(전57년)에 南韓(남한:진한)의 왕위에 옹립하고 여자 아이는 왕후가 되었다. 국호를 徐羅伐(서라벌) 또는 徐伐(서벌) 혹은 斯羅(사라) 또는 斯盧(사로)라 하였으나 (지금은 세속에 京字(경자)를 가르칠 때 서울 京(경)자라 한다.

옛날의 서울을 徐伐(서벌)이라 했기 때문이다.) 처음 왕은 鷄井(계정)의 우물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鷄林國(계림국)이라 한 것은 鷄井(계정)의 우물에서 상서스러운 龍(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脫解王(탈해왕) 시대에 金閼智(김알지)를 얻었는데 숲 속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여 국호를 고쳐 鷄林(계림)이라 했다. 후세에 드디어 국호를 新羅(신라)로 정하였다. 혁거세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3월에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후에 遺體(유체)가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나시니 나라의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하여 五體(5체)를 각각 장례하여 五陵(오능)이 되었다. 역시 능의 이름을 蛇陵(사능)이라 하였다. 曇嚴寺(담엄사)의 북쪽에 이 陵(능)이 있다. 태자 南海(남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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