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七枝刀)
이 칼은 여섯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땅 모양을 표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칼을 지도(地圖)로 만든 `칼모양 지도`이다.
처음 만든 곳은 우리지만 일본은 이를 저기네 나라 국보로 애지중지한다.
백제인의 기발한 착상이리 힐 수 있다.
백제 13대 근초고왕(346-375)이 바다 건너 동방, 왜(倭)를 복속(服屬)시키면서 자국민을 보내어 개척하고 세력지반을 닦았는데, 몽매한 원주민들을 교화(敎化)는 방법으로 박사 왕인(王仁)으로하여금 천자문을 가르치고, 아직기(阿直岐)로 하여금 한학을 가르친 기록이 있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는데 이당시 백제가 역사서인 서기(書記)를 만들게 하면서 백제 역사에 번안(飜案)하도록 한 것이 일본역사의 원초가 된 것이다. 이는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백제의 비류기록과 큰 차이없이 그대로 뽄 받아 쓴 것이 들어난다.
일본서기의 시작은 백제의 시작과 같다.
주몽의 큰 아들 비류(沸流)의 건국역정을 그대로 반영한 경로에 따라 근원이 시작된 것임을 보더라도 일본의 상고사는 백제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지류의 하나라는 의미를 갖게 하고, 그 상징물이 곧 칠지도라 할 것이다.
이 칠지도는 단철(單鐵)로 만든 양날의 칼로 칼잡이를 합친 전체 길이는 74.9cm이나, 칼날만의 길이는 65cm이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솔가지(松枝)처럼 뻗어 있어 칠지도(七支刀)라 했다.
칼의 양면에는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금상감(金象嵌) 기법으로 새겨져 있는데. 무기로서의 실용성보다는 제의(祭儀) 등에서 상징적인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처음 발견된 시기는 1874년 일본 천리시 한 절에서 오래된 돌상자에 깊숙이 숨겨저 있었던 것이다.
칠지도 형상은 일본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금강송(金剛松) 가지모양이 특징이다.
1935년경에도 백제 부여지방에서 토굴된바 있던 물건이고, 1876년 일본 사찰에서 보관되어 오던 함속에서 이것이 발견되자, 괴상스런 생각을 하는 학자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을 만드는 단서`로 사용하는데 썼다.
어떤 충성된 일본 학자는 칠지도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고 하면서 <일본서기>에 진구황후 49년에 신라를 비롯한 7국을 평정하고 한반도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었으며, 진구황후 52년에는 백제의 사신이 칠지도(七枝刀)ㆍ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가 칠지도(七支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정도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생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물건이나 사실은 그 반대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렇지만 사실은 `일본의 여섯 개의 섬이 마음을 합해서 백제에 기생(寄生)하는 제후(諸候)로 봉하니 왜왕에게 그 관리권을 준다(供)`는 의미하는 신물(信物)이라 하여 양면에 쓰여진 글귀로서 알 수 있다.
제조 일자는 당시 태(泰)자가 붙은 연호에 11월 또는 12월에 병오(丙午)일이 되는 시기는 408년으로 근초고왕의 손자인 백제 동성왕 집정시기와 일치한다.
칼 앞면에는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라 적혀 있음으로 임나일본설은 당치 않는 소리이다.
이러한 물건은 백제에 왔다가 죽은 왜(倭)의 사신들 무덤에서 종중 나오는 것으로서 1867년 명치유신이후에 시대착오적 학자들과 정치가들에 의한 이성(理性)도 살아진 일본사회에 아직도 이를 깨우치지 못한 자들 몇몇이 있어 이웃이 불행하다는 것을 볼 때 마음아프다.
지금도 아직기(阿直岐)의 후손으로 보이는 성(姓)을 단 자가 있는데 이들은 현재까지 일본에서 지도자급지위에서 활동하여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배라는 자도 그중에 하나인 듯 하다.
칠지도를 보면서 일본지도를 보고 또 황성의 달(荒城の 月)이라는 노래를 함께 들어 보면서. 유적에 나타난 역사와 유물, 그리고 입체화 시킨 음악으로써 과거역사의 흐름을 사실감 있게 관찰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황성옛터처럼 `荒城の 月`이라는 노래와 비슷하다.
황성의 달(荒城の 月)이라 이름 지음 이 노래는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애창하는 근대화된 노래인데, 타기 렌다로(瀧 廉太郞)라는 젊은이가 1901년에 九州(구슈-大分県 竹田町郊)에 있는 강성(岡城)을 보면서 작곡하였다는 것이다.
이 노래의 소재가 된 오가성(岡城)은 천년을 넘어선 오래된 고성으로 당시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에 의하여 망한 백제국(百濟國) 유민일부가 백제부흥운동에 실패하고 새로운 왕조 고려(高麗)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게 되자, 신천지를 개척하고자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자리잡은 곳으로 지금으로 부터 1000년전 일다.
그러나 백제가 망한 이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의 경우는 이들기득권자들에 의하여 배척당하거나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였기로 그곳은 더욱 더 투쟁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으니 당연한 시대적 정향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로 뭉친 유민들끼리 늦으막이 도착한 후 현해탄의 거센 물결보다 더욱 억센 압박과 살얼음 속에서 살아 남야야만 했던 것이다.
이때 살아 남기위하여 쌓은 성이 이 오가성(岡城)이다. 어까성이 일본 어느 성보다 견고한 모양을 보이고있는 것도 이들의 살기 위한 집착이 엿보이는 흔적으로 보면된다.
이들이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은 그만큼 힘겹고 실로 처참 그 자체였다.
성의 높이가 높아 갈수록 살아 남고 싶은 애착은 더욱 깊어 갔다
그러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자 혈안이 된 명치유신 당시 이 오까(岡城)성은 군국일체감(君國一體感)을 조성하려는 정책에 맞지 않다고 하여 성을 헐게 되었다.
이즈음 감수성이 강한 타기 렌다로(瀧 廉太郞)는 18세의 어린나이지만 더 이상 군국(軍國)의 도구(道具)가 되어가는 것을 혐오(嫌惡)하면서 이 노래를 작곡하게 된 것이다. 그는 곧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린다.
천재작곡가로 촉망받던 그는 마침내 인생의 선택 역시 천재 답게 뛰어났다.
처음 중학교 창가모집에 응모작품이던 곡조에 7.5調의 가사를 붙인 이는 토이(土伊晩翠)인데 이 17세의 어린 작곡가를 위하여 30세의 토이(土井晩翠, 본명 林吉)이 처음에는 황성월(荒城月)이라 붙여 주었다.
<!--[작사의 동기가 재미 있다.
이 당시 명치유신에 반대하는 각 성주들은 완강한 저항을 하였는데, 이 때 이 성도 도꾸가와의 번주가 지키고 있었는데 명치유신에 강력한 반대를 하였다. 당시 반항의 의미로 번주의 여비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君王城上豎降旗,妾在深宮那得知`라 써서 성벽에 걸고 꽃잎처럼 떨어저 자결하는 여성들의 처절한 이밴트를 상기하면서 가사가 만들어 진것이 전한다.
이 시는 송태조 조광윤이 후촉을 정복할 때, 촉왕 맹창은 항복깃발을 성루에 꼽았다. 이 광경을 본 왕비 서씨(花蕊夫人)는 시를 지어 슬퍼했다. “임금은 항복기 성루에 꽂아도 궁안에 나는 알지도 못했네, 14만 군사가 갑옷 모두 벗다니, 편안만 찾는 자여 네들이 남자더냐?“라고 꾸짖었다.
筆者註 花惢夫人 徐費가 지은 시 `君王城上豎降旗,妾在深宮那得知。十四萬人齊解甲,寧無一個是男兒`는 조국 후촉(지금 성도)이 망하는 광경을 묘사하였다. 혜비 서씨(慧妃 徐氏)는 화예부인(花蕊夫人)이라 한다.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시인이자 후촉 황제 맹창(孟昶)의 황후였다. 특히 시서 학문에 능통하고 미모를 겸비하였다. 건덕 2년 11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부하 왕전빈에게 군사 3만을 주어 후촉을 공략하자, 군대가 14만이나 되는 후촉은 화살 한번 쏘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진다. 훗날 조광윤이 화예부인에게 물었는데 그 대답으로 이시를 지어 ` 나는 깊은 궁궐속에 있어 몰랐더니 남편는 항복기를 꽂고, 남정네들은 편하려고 갑옷을 벗어 버린 탓이라`로 억울한 심경을 들어 내었다.
송나라에 포로로 잡혀 왔지만 서씨의 그 재능과 미모는 조광윤과 그의 동생 조광의와의 질투를 자아내어 형제간에 다투게 만들고 이들끼리 싸워 왕위쟁탈로 이어진 것은 화예부인의 계략이라할 것이다. 서씨를 포로로 잡아 온 조광윤은 재빨리 서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노여록(爐餘錄)에는 '촉주 맹창이 죽자 송태조의 궁에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하였지만, 동생 조광의도 이 재색을 겸비한 서씨를 그대로 두지 않고 서기 976년 겨울 형 조광윤이 임종이 가까운 것을 짐작하고 형을 불렀는데 답이 없자 서씨를 유인하려 접근한다. 이 사실을 안 조광윤이 분노하여 옥부(玉斧)로 바닥을 내리치며 죽으니 조광의는 조광윤을 이어 태종이 된면서 화예부인을 다시 비로 남게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조광의가 화예부인을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형을 이어 왕이 된 동생 조광의는 서씨가 수도로 압송되어 왔을 때부터 형이 그녀에게 매혹되자 불만을 갖었는데, 수차례 걸쳐 간하였으나 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아 서씨를 사냥터에서 화살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것은 조광의가 태종이 된 이후에도 서씨를 취하여 후궁에 두고 함께 지난 기록이 있음으로 진실이 아니다.
대개 역사가는 여성의 잘못을 가혹하게 비평하는 반면에 왕조에 누가 되는 기록을 미화했다.사실을 참작하여 판단 하면, 송이 증국을 통일 하였으나 특히 화예부인의 고향 성도지방에서는 반란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이는 화예부인의 끊임없는 저항이 작용하였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사실이 암시하는 핵심은, `國家 역시 主人인 국민이 지켜주지 못하면 강토와 가족은 이 모습으로 짖밟혀도 속수무책이 되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항차 조상을 받드는 종중이야 더 말할 여지가 있겠는가?荒城の 月 가사를 되짚어 본다
1. 春 高樓の 花の宴(えん) めぐる 盃(さかずき) かげ さして
봄날 고루의 꽃의 향연 돌고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千代の 松が枝(え) わけいでし むかしの 光 いま いずこ
천년의 솔가지 헤치고 비추는 옛날의 영광은 지금 은 어디
2. 秋 陣營の 霜の 色 鳴き行く 雁(かり)の 數 見せて
가을 진영의 서리의 빛 울고 가는 기러기 몇 보이고
植うる 劍(つるぎ)に 照りそいし むかしの 光 いま いずこ
심은 듯한 검에 빛이 비추이고 옛날의 영광은 지금은 어디
3. 今 荒城の 夜半(よわ)の 月 替(かわ)らぬ 光 たが ためぞ
지금 황성의 야반의 달 바뀌지 않는 빛은 누굴 위함인가
垣(かき)に のこるは ただ 葛 松に 歌うは ただ 嵐
울타리에 남은건 다만 덩쿨뿐 소나무에 노래함은 다만 폭풍뿐
4. 天上 影は かわらねど 榮枯(えいこ)は 移る 世の姿
천상모습은 변함없건만 영고는 변하는 세상의 모습
寫さん とてか 今も なお 嗚呼(ああ) 荒城の 夜半の 月
그리고자 함인가 지금도 역시 아아 황성의 야반의 달
이 가사에서 풍기는 내용중에 1절에서 `천년의 솔가지 헤치고 비추는 옛날의 영광`이란 대목은 특히 지난 모질었던 역사적 감각을 뒤풀이 하면서 칠지도에 대한 향수를 그린 것, 2절 `가을 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는 고향을 상기하는 대목,, 3절에서 울타리에 남은 넝쿨`이라함은 너절한 일본땅에 희망을 잃은 심정을 나타낸 것, 그리고 4절을 `천상의 모습`은 곧 고향을 동경하는 귀소(歸巢)를 선망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고려의 새로운 정치체제가 신라중심으로 안정되어가자 소외심을 억제 할 수 없어 탈출을 시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그나마 일부는 바다건네 외(倭)에 대하여 미련을버리지 못하여 바다를 건너게 된 것으로 보이고 바다를 건너 왔지만 여기서도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은 실로 처참 그 자체였다. 성의 높이가 높아 갈수록 살아 남고 싶은 애착은 더욱 깊어 갔다.
아직도 일본에 간 백제유민들은 환상속에 산다.
반은 꿈속에 있고, 나머지 반절은 귀신에 홀려 있어 본정신을 잃었다.
천황이라는 허수아비를 귀신아비로 받들고 살고, 나머지는 향수에 젖어 살면서 때때로 향수가 밀려오면 반도를 침입하리고 하고, 살기가 지겨우면천황을 뒤집어 버리거나 발광을 한다.
이미 7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참혹했던 전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속에 살고 있다. 이것은 위정자들이 그렇게 현혹시켜 국민들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상태이다. 일본은 나라는 부자이지만.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다.
이는 공산주의보다도 더 신묘한 귀신에 홀려 살기 때문이다.
李觀熙 2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