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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제, 2000년을 흐르다 - 끝없는 대결, 백제 vs 신라

작성자관희2244|작성시간14.03.29|조회수66 목록 댓글 0

[대백제]

백제, 2000년을 흐르다

 

 

1300년 전 한 나라가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었다. 국호는 일본. 그전까지 일본은 왜(倭)나라였다. 그때 한 나라의 완성을 부른 것은 또 다른 나라의 멸망이었다. 두 나라의 운명은 그렇게 엮어졌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일본의 천황. 그 천황가의 비밀은 바로 백제였다.

 

 


대백제

저자
대백제 다큐멘터리 제작팀 지음
출판사
차림 | 2010-11-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700년의 역사, 잃어버린 왕국『대백제』. 이 책은 역사다큐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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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1부 끝없는 대결, 백제 vs 신라

 

졸본부여로 망명해 졸본왕의 딸 소서노와 혼인 후 왕위를 계승한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다. 주몽이 전처의 아들 유리를 후계자로 삼자, 소서노는 두 아들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남쪽으로 망명한다.

 

윤명철 교수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경기만에 상륙한 다음 비류와 온조가 각각 입장을 달리하게 됩니다. 온조는 현제 서울을 중심으로 한 곳에 남게 되고요. 비류는 오늘날의 인천 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서울은 당시에 한강에서 들어간 내륙 항구 도시인 성격을 갖고 있었고요. 반면에 비류가 도착한 인천, 당시의 미추홀은 바닷가에 있는 전형적인 해양 도시입니다. 그래서 이미 백제는 처음부터 해양을 중요시하는 강과 바다를 중요시 하는 그런 과정 속에서 탄생을 한 겁니다."

 

그렇게 온조와 비류에 의해 두 백제가 시작됐다. 그런데 형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한 것을 비관해 죽었다는 내용1)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왜냐하면 비류는 처음부터 바닷가에 살기를 원했고 기원후 18년에는 웅진으로 천도해 서남쪽 해상 세력들을 규합했기 때문이다.

 

윤명철 교수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에 있는 많은 해사 세력들을 백제 세력권에 편제시킴으로 해서 국가 발전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에 기록된 비류 백제에 관한 기사2)를 보면 당시 백제의 영토는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동한지지에 이르는 한반도 서남해 5개 권역이었다. 이는 현재에 예성강 유역, 충남북, 전라남북, 경남 그리고 제주에 이르는 서남한 전역을 말한다. 227년 백제장수 목나근자가 이끄는 서남해역 대장정에 의해 서남해역에 있던 해상 담로세력들을 장악해 비류 백제는 명실 공히 해양대국으로 발전했다.

 

신영식 박사 / 서울시 역사자문관

"그 지역(요서)에 진출해서 백제의 조차지(다른 나라의 영토를 빌리는 것) 같은 백제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을 많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물론 한 학설이죠. 그래서 요서 진출 시기가 근초고왕, 침류왕 그 사이는 분명합니다. 그 때가 백제가 왕성하게 뻗어 나갈 때니까요."

 

백제 제 13대 왕인 근초고왕.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부지역의 영토를 대대적으로 넓히는 한편 고구려를 침공해 지금의 황해도 배천인 치양성을 함락시키고 평양까지 진격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는 4세기 중반에 강력한 고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마련한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것을 역전시킨 장본인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374~413, 19대왕)이었다. 그는 392년 7월을 기해 4만 병력을 이끌고 먼저 한강 이북 10여개의 백제성을 공략했다. 그리고 다시 수군으로 경기만을 남하해 58개 백제성과 700여 마을을 공략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엔 두 백제에 대한 침공 내용이 소상히 적혀 있다.

 

한강 이북에 있던 백잔(百殘)온조 백제는 항복하고 충남지역에 잔국(殘國) 비류 백제는 토벌됐다. 두 백제의 흥망은 이렇게 달랐다. 약 400년간 존속했던 비류백제, 광개토대왕의 침공으로 멸망했지만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인 오진왕은 웅진을 탈출해 일본열도로 건너간다. 그는 가야계 스진왕조(1대 진무천황~10대 스진천황/14대 쥬아이천황...15대 오진천황)를 타도하고 망명정권을 세우고 일본천황가의 제2왕조인 오진(應神, 15대 오진천황~26대 게이타이천황)왕조를 이룬다. 일본서기엔 오진왕 이후 일본과 온조 백제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서술돼 있다.

 

“백제 아화왕(아신왕)이 즉위하여... 일본에 태자를 인질로 보냄에 따라 선왕 때의 우호를 회복했다.” - <일본서기> 응진 8년 백제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같지만 다른 내용으로 양국에 관계가 적혀 있다.

 

“아신왕(아화왕)은 왜국과 결호하고 전지태자를 볼모로 보냈던 것이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

 

한반도에서 비류 백제가 멸망하고 온조 백제는 그 후 70년 만에 비류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으로 천도한다. 이는 비류백제가 지난날의 영토를 온조 백제에게 할애하고 온조 백제가 태자를 인질로 보냄으로써 어쩌면 두 백제가 영토인질교환협정을 맺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한반도로부터 수많은 기술자와 인부들 화려한 문화가 현해탄을 건너갔다. 백제와 왜의 혈맹관계는 계속 이어졌고 웅진으로 천도한 온조 백제도 강성해졌다.

 

"백제는 일찍부터 일본과 관계가 좋았다는 것은 일본에 진출해서 문화를 많이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백제가 더 클 수 있었고 일본의 고대문화를 백제의 연장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 660년 온조 백제는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백제 패망 후 3년 뒤인 663년 8월. 백제 부흥군의 상황은 급박해졌다. 2만 7천의 왜 수군이 지원군으로 나선 백강 전투에서 신라, 당 연합군에 기습 공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결과는 백제 부흥군의 전멸로 끝이 났다. 그리고 약 500년 뒤, 일본 역사 속의 양대 무가였던 겐지와 헤이씨 간의 전쟁(1185년 단노우라 전투). 헤이씨 가문의 처절한 멸망으로 막을 내린 이 전쟁의 실체는 백제와 신라 그 숙명적인 대립의 연장이었다.

 

김용운 교수 / 단국대학교

"왜 정권으로 봐서는 자기 큰집이 당했거든요. 그래서 즉각 (군사를) 보냈는데 전멸되어 버렸어요. 일본으로 간 백제가 연합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백제하고 한반도하고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버려요. 백제가 일본이 되어 버렸어요. <일본서기>, <고사기>나 역사를 만들던 역사 정신이라는 것이 ‘신라는 밉다’, ‘신라를 쳐야 되겠다’, ‘언젠가는 원수를 갚아야 되겠다,’"

 

 

 

반 신라정신이 뿌리 깊게 이어져 오고 있는 일본의 역사. 김용운 교수는 일본 역사 최대의 비밀이 천황가에 있다고 한다. 천황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이며 만세일개 즉 그 혈통이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믿음이 일본 천황가의 핵심이다. 침묵하고 있던 거대한 천황 릉에서 하나 둘 베일이 벗겨지고 있는 일본의 정체(왜의 정체 - 강길운 저). 그것은 일본 천황가가 백제의 화원(백제화원 - 우다노부오 저)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천황이 된 백제의 왕자들 - 김용운 저)

 

 

 

 

김현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461년에 백제 개로왕이 자기 동생인 곤지를 일본에 보냈는데 곤지가 일본에 가서 아들 5을 두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동성왕이 (백제)왕이 됐고 또 한 사람인 무령왕이 귀국해서 왕이 됐습니다. 나머지 셋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후에 스다하치만 신사에서 발견된 거울에 의하면 사마가 남제왕, 남자 동생 왕에게 이 거울을 만들어 보낸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사마(斯麻)라고 하는 것은 무령왕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그 거울을 보낸 사람이 무령왕이라고 한다면 무령왕이 남자 동생이라고 불렀던 일본 당시 천황은 누구일까, 잘 계산해 보면 개체천황이 거기에 해당됩니다."

우다 노부오 / 역사저술가

"그 당시 일본의 지배계급은 백제계 있는데 백제의 직계왕자가 온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백제 왕자보다 높은 신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키히토 천황 기자회견(2001. 12)

"나의 선조인 칸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1년. 현 아키히토 천황은 일본 천황가의 믿음을 뒤엎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내용인즉 <속일본기>라는 일본 정사에 입각해 자신에 몸에 백제 무령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키히토 천황이 언급한 칸무천황과 그 어머니는 과연 누구였을까? 일본 제 50대 천황인 칸무천황(재위 781~806년).

 

우다 노부오 / 역사 저술가

"후지와라 가문에서 갑자기 이 사람(칸무)을 천황으로 앉히게 됩니다. 그래서 천황의 혈통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는데 “내 어머니는 백제의 직계 왕족이다.”라는 말로 정통성 문제를 잠재웠습니다."

 

백제 무령왕의 직계 손녀인 화신립은 속일본기에 의하면 본인왕의 부인이자 칸무천황을 낳은 백제출신의 왕비다. 이 황태후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히라노 신사. 히라노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4명의 신은 다음과 같다.3)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은 오랜 연구를 통해 이들이 모두 백제의 왕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칸무천황과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곳 히라노 신사에서 백제왕들을 조상신으로 모시며 제사를 드렸다. 당시 일본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400년을 전후 해 대거 일본 열도로 건너갔던 신라, 백제 사람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김용운 교수

"그 때 중앙의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백제계입니다. 제일 미운 게 신라니까 신라 사람들을 모두 동국(도쿄)에 보내 버립니다."

 

백제 평(平)씨 : 교토를 중심으로

신라 원(源)씨 : 도쿄를 중심으로

귀족적

무사적

상업

농업

해군

육군

 

그리고 그것은 양대 가문의 피할 수 없는 길고 긴 전쟁으로 이어졌다. 1185년 일본의 양대 가문 겐지와 헤이씨. 즉 신라계 원가와 백제계 평가는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최후의 대격전을 펼친다. 이 전투에서 백제 평가의 8살 안덕천황이 수장되고 영화로웠던 평가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일본 역사에선 도요토미 정권(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년)이 평(平)가임을 자처하고 그것을 무너뜨린 도쿠가와(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1616년)가 원(源)가임을 내세우고 있다.

 

칸무천황과 일본 최고의 권력자로 헤이씨 정권을 이룬 칸무천황의 아들 타이라노 기요모리. 그들로 시작되는 백제계 평가는 단노우라 전투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일까?

 

“평씨 마을이요?”

“니혼수기라는 고개를 넘어가면 가게가 나오는데 거기서 물어보세요.”

 

평가마을이라는 단서만을 가지고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단노우라 전투에서 살아남은 평가가 신라계의 원가의 추격군을 피해 이 깊은 산속으로 도피했다. 그 시나리오가 맞는다면 이곳은 피난처로 최적지다. 첩첩산중, 이미 해발 천 미터를 넘었다. 날은 저물고 멀쩡하던 하늘에선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여기서 내려갈 때 오른쪽에 있는 사쿠라소라는 민박이 오가타 씨 집인데 그분의 조상이 그때 (평씨) 장군급이었던 사람입니다.”

 

* 평(平)가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한 평가 일족이 원씨의 토벌을 피하여 시라토리야마에 들어와 정착해서 대대로 이곳에 살고 있다.

 

다행히 제대로 찾아왔다. 평가의 후손이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늦은 밤의 불청객을 그는 온화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오가타 세이이지 / 평씨 49대손

"이 밑에 강이 있고 강 저쪽은 원씨 마을인데 절대로 서로 결혼은 허락이 안 됐었습니다. 처음에 산 능선을 따라 규슈에 들어와서 처음에 정착한 곳이 고카노쇼라는 곳인데 저 위쪽에 시라토리야마라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처음에 산적들의 안내로 그 산에 들어갔어요."

 

신라계 원가 사람들을 피해 왔지만 여전히 강을 사이에 두고 그들과 마주보며 살고 있다는 오가타 씨. 그가 뭔가를 꺼내왔다. 긴 천에 써진 그것은 평가의 족보였다.

 

"여기에 칸무천황이 있어요. 칸무천황이 평씨의 시조입니다. 여기가 저입니다. 49대손. 지금은 평씨가 어디에 얼마나 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는 현 아키히토 천황이 발표한 데로 자신이 백제 왕가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칸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인이라는데 그렇다면 칸무천황도 백제인의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인데 혹시 아시는지요?"

"몰랐습니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그에게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시 무겁게 침묵하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 고카노쇼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야기는 들어 봤는데요. 칸무천황이 어떠했는지는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깊은 산중에서 백제 왕가인 평가의 후손을 만난 감격이 달빛에 촉촉이 젖어 들었다.

 

지난밤 평가의 후손 오가타 씨가 말한 강이 다리 아래 시퍼렇게 흐르고 있다. 신라계 원가의 추격 군이 쫓아오면 언제든지 끊어버릴 수 있도록 다리는 밧줄과 나무만 돼 있었다. 단노우라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후손들은 이 깊은 산중에 삶을 풀었다. 그들이 살던 집은 드라마틱했던 평가의 역사를 말해주는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있다.

 

오가타 세이이지 / 평씨 49대손

"숨은 방인데요, 계단을 위로 올리면 여기가 천장처럼 되고 사람이 와도 위에 방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죠."

 

추격군의 눈을 피해 숨는 방이 필요했던 백제계 평가. 그들 삶이 얼마나 불안했을 지를 짐작해 본다.

 

"원씨의 집에도 이런 방이 있었습니다."

 

설령 자신들의 조상이 백제 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더라 하더라도 이들 무의식 속엔 신라의 대한 대립 감정이 천년이 지나도록 이어져 오고 있다. 1400년 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 온 힘을 다해 지키려 했던 백제 인들은 결국 패망했지만 그 뿌리는 시간과 세대를 넘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후 두 백제는 활발한 해상활동과 중국 일본에 부국을 둔 큰 나라로 성장했다. 광개토대왕의 침공으로 400년 동안 존속하던 비류 백제가 먼저 멸망한다. 그 때 일본열도로 건너가 새로운 망명정권을 세운 왕이 바로 백제계 혈통을 가진 일본 천황가의 시조 오진이다.

 

 

* 글의 저작권은 대전방송 TJB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 주

1)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살기 어려워... 후회안 나머지 죽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2) “백제의 영토는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등한지지에 이르는 서남해 5개 권역이었다.” - <일본서기> 오진 8년 3월조.

3) 제1신 이마카신(백제의 성왕), 제2신 쿠도신(백제의 성왕의 조상), 제3신 후루아키신(백제 비류왕과 근초고왕), 제4신 히메노신(칸무천황의 어머니 백제 화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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