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天官]아가씨의 정체는 무엇인가?
천관(天官)은 "소년 김유신이 사랑하는 여자였다"라고 한 김부식적 국사책 속의 인물이다
매사는 누구나 그저 본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 가장 옳은 생각이라고 본다.
역사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오로지 진실성을 구하는 도(道)의 길이다. 그러나 왕조의 역사는 대개 관료적인 일면이 있는가하면 왕의간섭은 물론이고 눈치코치에 얼버무려진 "탁배기"라 할 것이다.
제대로 읽지못하면 엉뚱한 생각으로 머리가 뒤틀려지는 수가 있는 것이 역사공부이다.
시조공의 기록에서도 우리는 많은 갈등을 한다
"從蘇定方-즉 소정방을 따라왔다"는 말에 대해 옥신각신 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종=從이라는 말의 의미는 흔히 뒤딸아 온 느낌을 주는 뜻이고, 예속적인 느낌도 안겨준다.
당당한 연안이씨의 시조공이 일개 장군의 뒤를 따라왔다?
이 말은 이성계정권이 만든 조선에서 노가와 강가. 서가가 쓴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중에서 인용된 글자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려한 옹졸한 기록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당시 기록을 편찬하는 장면을 보면,용비어천가에서 나오는 엄청난 과대비유와 왕조의 체면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데 있어서 다른 명문대가들의 기폭은 절대적으로 비하시켜야 하는 것이 최대한의 학자들 아첨일 것이며, 더구나 당시 "고해고경"사건으로 가뜩이나 왕실의 눈치를 보는 자들이라면 "從"이라 표현해 준것 만도 많이 봐준 아첨행위였을 것으로서 이런걸 모르고 우리끼리 갑논을박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시조공에 대한 기록은 이기록보다는 1,000년을 더 앞서 있었던 사실이고 이때의 기록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맥락에서 쓰여진 후대의 잘 다듬어진 글을 인용하면 (흥무왕 실기)
" 선생(김유신)이 주청하기를“당나라 장수 이무(李茂)는 우리 신라를 구하였으며, 함께 백제를 멸하였고, 또 당으로 하여금 신라에 화합하게 하여 그 공로가 작지 아니하며, 지금은 서번(西藩: 서쪽 변경, 지금의 황해도 연안 일원으로 추정됨) 진수(鎭守: 군사상 중요한 요지를 든든히 지킴)하고 있으니 의당 작위를 가봉하여 예우하소서” 하니. 왕(문무왕)이 말하기를 ”이는 과인의 뜻이라”하면서 이어서 이무(李茂)로써 연안후(延安侯)로 하고, 식읍 1천호를 내리고 대개 빈객으로 하고 신하라 하지 않으려 했다"는 기록을 보다 더 신신뢰하고자 한다.김유신과 시조공과의 관계가 이렇게 투철하고 소장방이 함께 따라 3장군을 동열의 지위에서 기리는 모습은 결코 "從=따라 왔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이러한 내용을 글을 써야만 머리가 붙어나는 시대에 사는 자들의 글 솜씨이니만큼 우리가 그걸 로 말미암아 좌논우박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체험한 일중에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 있다면 참으로 다행한 것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책은 쓰는 이의 방법에 따라 은유[隱喩]가 깊게 매겨져서 역사책이라고 하기보다는 거짓뿌렁이 이야기들이 듬성듬성한 소설책이라고 하여도 틀리지 않는 말이 되었다.
특히 삼국의 역사나 고려의 역사가 모두 그러한 맥락으로 외곡되여 져서 누구던지 이를 미리 짐작하고 읽지 않으면 더욱 황당한 내용이 되고 만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김유신의 이야기다.
김유신장군이 아직 소년시절에 있을 법한 이야기 하나가 있다.
김유신이 타고 다니던 말[馬]이 말[言]을 하였다.
가야를 버리고 신라로 올 무렵 타고 왔던 그 말의 종자였다.
"....도련님이 그렇게 아끼던 천관아가씨와 인연을 딱 짤라 버린 일이다.물론 어머님되시는 만명부인의 훈계하심도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사랑하던 어여쁜 아씨 천관[天官]낭자를 잊어 버린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도련님이 드디어 8대화랑으로 뽑히셨다.조부 무력왕이 내린 가야검[伽倻劍]대신 신라의 새칼을 차고서 초라한 내 꼬락서니 대신 당나라에서 들여온 늠늠한 호마[胡馬]를 타신다면 더욱 모습이 훌륭했을거라고 생각하며 내가 도련님 곁을 떠난다 해도 조금도 슬프지 않다.....최근 왕족인 춘추[春秋]도련님과 그의 누이 문희와의 공놀이 사단을 보더라도 모두 우리 유신[庾信]도련님의 출세를 위한 발판이 된것이라 여기니 비록 가슴은 아프지만 참아야 한다.주인을 위해서..차라리 도련님이 세로 다듬고 장만한 신라검[新羅劍]에 내 피를 첫번째로 묻혀드리고 싶다...end"
이글은 작가 황순원이 김유신공의 애마[愛馬]를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의인화[擬人化]하여 쓴 작품의 일부인데 비록 소설을 엮는 분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당시의 김유신공의 마음을 뼈속 깊히 들여다보는 듯한 글이다.
옛 기록을 더듬어 보면,경주에 천관사[天官寺]가 있었다.
김유신공이 어릴 적에 사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엄한 훈계를 받고 출입을 끊었더니 어느날 술에 깊히 취한체 늘 타던 말 위에 얹혀 집으로 돌아가는데 말이 자주 찾던 천관아씨네 집앞에와 머물거늘 술이 깬 김유신공은 즉시 말의 목을 버혀버리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 갔다.
좋았다가 실망한 천관아기씨는 슬피 노래하면서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절이름도 천관사라 했다 한다.
이 작은 사건을 한낱 남녀간 작은 로맨스로 엮기에는 너무도 큰 사건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이것을 확대할 형편도 아니것 같아 저자는 암시적인 표현으로 슬적 숨겨 두었는지도 모른다.
옛날의 글들은 가급적이면 줄이고 줄여야 명문이라고 여겨지다보니 요정도의 암시적 단편으로 끝을 마무리한 것처럼 보여 마치 빙산이 그 작은 한 모퉁이만을 보여 준다 해서 빙산의 크기를 그 보이는 크기로 간주할 수 없듯이 당시 청년 김유신공의 심금은 이정도 이상으로 착잡하였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보여 나의 작은 자로 그 역사의 한 모퉁이를 재어 보고자한다.
왜? 부친 서현공은 그의 이름을 유신[庾-노적가리유 信-믿을 신]이라 했을가?
金庾信! 이 이름으로는 도저히 삼국을 통일한 대역사의 장군이라고 볼 수 없는 너무도 평벙하고도 평범한 이름이다.더구나 왕족의 신분이 아닌가? 그대로 넘어 갈 이유가 없다.
누구던지 이름을 지으면서 자식에게 바라는 바는 단순히 넉넉한 경제생활을 꿈꾸며 안일하게 여생을 보내도록 하기 위한 자식사랑의 작은 기대감치고는 이름을 지은 유신공의 아버지심정을 짐작하고 남을 만한 구석이 엿보인다.영원히 머무는 창고도 아닌 "임시로 나마 곡식을 쌓아 둘 노적가리를 믿는다"는 표현은 훗날 삼국통일을 이룩하라는 모험가득한 소년의 이름은커녕 비록 이국의 서글픈 포로 비슷한 볼모살이는 하지만 다소 경제적 안정위주의 기대하며 은자[隱者]답게 살기를 바랐던 자그마한 기대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망국의 설음을 안고 사는 가야의 귀화인들이며 경주고을에서는 이방인취급을 당하면서 먼 남쪽에 두고 온 산하를 그리는 그런 형편에 더 바랄 것이라고는 마음 편히 몸편히 사는 것 그것 이상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과욕이였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비록 "임시로 지은 창고"정도로 지어 비록 가슴속에는 울분이 솟는 망국의 아픔이 있지만 적국 속에 얹혀서 사는 형편에 노골적인 큰 배포를 나타내어 보일 형편도 아니였던 것 같고 마음을 죽이고 다둑거리고 살다보면 차츰 텃세도 덜 받게 되고 의심도 받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인정을 받아 언젠가는 세월이 흐르면 아픔을 잊게 될 것을 기대하였을 심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라면 하나같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할 것이다.
이 모두가 가야에서 신라에 귀화[歸化]사람들의 고뇌[苦惱]의 한 조각이였을 것이며 불평을 들어 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아픔의 치료 방법이였을 것이다.
이미 1300여년전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날고 기는 솜씨를 갖춘들 어려운 일인데 항차 나같은 글장난이나 하는 자가 무얼 알리요만 사람마다 과거일을 짚어보는 생각이 너무들 박제처럼 편협하고 틀에 박힌것처럼 옹졸한것 같아서 그나마 몇 안되는 자료로 뒤적거려 보다보니 삼국통일의 가장 큰 공신이라 할 수 있는 김유신공에 대해서 쪼오끔 야릇한 구석을 통해 그의 소년시절의 자그마한 가슴속을 뒤적거려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역사를 읽는 시각은 보다 움직이는 현실을 직감하는 방법이 동원되지 못하면 늘 과거에 지나치게 얽혀서 현실과 미래를 상고할만한 살아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없게 된다.한낱 조상의 뼈다귀나 훑어 보는 일이 고작인 우리의 역사관은 항상 반복이 교차하는 가운데 비슷한 비극도 반복하여 당하고 사는 것을 보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비록 죽은 박제를 뒤적거리면서도 마치 살아서 힘차게 허공을 박차고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가히 역사를 읽는 맛이 깨소금처럼 맛깔스런 향내가 나게 될 것이다.
김유신은 아버지 서현공이 비록 유능한 장군이기는 하지만 가야인이기 때문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도 못하고 알아주지 않는 변방에 배치를 받아 서울인 경주를 떠나 살아야 했으며 김유신이 소백산 북쪽 진천땅[당시 고구려와의 국경선]에서 태어나게 된것까지 생각해 본다면 신라여인인 그 어머니 만명부인의 고민과 서글픈 객지 생활에 찌든 한 모습이 역역히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신라인이 되었지만 본토박이 신라인이 아니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어릴 때부터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영특하기 짝이 없었던 소년 김유신은 이미 이러한 정신적인 고뇌를 극복하기 위한 갈등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어구 골목에서 또래들에게 쌓여 이방인의 자식이라고 손 꾸락질 당했을 경우도 한 두번이 아니였을 것이나 그렇다고 배짱껏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신라여인인 어머니 만명부인의 주도면밀한 감시감독에 이끌리다보니 자연히 신라인이 되기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 누구나 한번즘은 생각을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외지 변방에서 병영살이만 하고 있는 아버지 보다는 집요한 신라여인인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해야 했던 소년 김유신에게는 인생설계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시대를 사는 우리의 젊은 청년들의 경우도 이러한 고민속에서 고뇌를 감수하지않고는 성장할 수 없듯이 그시대의 가야인이자 신라인이 되어가는 갈등속에 깁유신 역시 한창 넘치는 청년의 기백을 어찌 감추고 살 수 있었을 것이겠는가?
가야인이라면 가야인으로서의 긍지가 있엇을 것이다.
구지봉아래 아홉신선이 모여 나라를 세워 일찌기 남해를 손아귀에 잡고 뒤흔들던 대가야국!벌레처럼 못난 섬나라 왜놈들을 종부리듯 호령하며 철갑옷을 입고 철갑으로 무장한 우람참 말을 타고 아홉 마리의 용이 춤을 추는 듯한 구룡일장기[九龍日章旗=왜놈들해군이 이깃발을 도용해 쓰고 있음]를펄럭이며 가야산을 넘어 신라경주에도 여러차레 넘나들었던 그 씩씩한 가야의 무인들이지만 이제는 그들의 가장 핵심지도자인 구해왕과 그 일족이 신라에 귀화해서 순치[馴致]되어 길들여 지고 있는 형편에 이르고 보니 비록 넘치는 패기를 억누를 길 없는 대가야인의 지도자 김유신이지만 거의 손발이 묶인 상태라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어머니 만명부인이 보기에도 이 폭탄처럼 위험첨만한 소년의 마음을 짐작하고 집요한 가정교육을 아니할 수 없었던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가고 남는것이다.
당시의 천관아가씨는 가야인의 후손이거나 가야를 다시 부흥시켜 보려는 운동권 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한사람이 아니라 여러사람이 모인 집단을 상징하는 단체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김유신이 타고 다니던 말은 하나의 가야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록 귀화는 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다시 가야를 부흥시켜야 하는 반 신라적인 독립정신이 깃든 청년 김유신의 마음 한 구석 이였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김유신이" 칼을 들어 사랑하는 말의 머리를 잘랐다"하는 그 장면은 곧,
"구질구질한 가야의 재건이란 독립운동 일을 팽개치고 차라리 새나라 신라의 기치아래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보다 더 원대한 꿈을 실현해 보고자하는 소년의 정신세계와 같은 장면,
즉 그러한 마음자세가 엿보이는 것 같아 보여 작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삼국통일,민족통일의 위업을 관철시킨 한 영웅의 작은 마음의 갈등이 아니였나 를 짐작해 보고 싶었던 것이 이 글을 더듬는 나의 작은 관찰이다.
역사책 속에는 그대로 읽을 수 없는 뒷 사정이 많이 깔려 있지만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무척 많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당시 동반자와같은 짝 친구 김춘추(金春秋)역시 왕의 서열에서 밀려난 성골이 아닌 진골의 계층에서 불타오르는 중원정복과 대륙의 찬바람 맛을 향수(鄕愁)처럼 동경하던 청년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신라통일의 의지를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는 한무제의 포로장군 김일제(金日濟)의 10대후손이라는 입증이 최근 발굴된 사정을 감안 한다면 이만한 추리는 얼마던지 가능한 부분이며 역사를 보다 바람직하게 읽게하는 방법일 것이다. 역사탐구의 도(道)는 오로지 진실앞에서 돋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정신은 김유신이 말의 머리를 잘라 버림으로서 영원히 버려졌고, 가야의 젊은 청년들의 조국 가야국을 다시 부흥시킬 웅지, 그리고 그 정신을 담은 천관원사(天官怨辭)도 그내용은 임 역사의 그늘속으로 살아 졌을 지라도 그당시 그들의 열기(熱氣)는 식지 않고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웅지(雄志)로 승화시키는데 크나큰 역활을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마침 당시에 민족의 대스승인 원효(元曉)가 기왕 가는 극락정토(極樂淨土)라면,
차라리 택시(소승=小乘)를 버리더라도 대승(버스=大乘)으로 바꾸어 많은 이들이 함께 타고가는 것을 선택하였던 그 시기에 작은 가야를 버리더라도 더욱 크고 넓은 대륙의 꿈을 지닌 그 웅지의 사나이 김유신 소년의 깊은 가슴과 맞닿은 인연이 아니었겠는가?
그 덕분에 우리민족은 그리고도 어언 1,300여년을 하나의 식구가 되어 마침내 단일민족이라는 한 겨레를 갖게 된 것이 어니였던가?
마치 소년 김유신이 천관의 집앞에서 애마의 목을 내려 칠 만큼 큰 각오의결정(結晶)이 였을 것이고, 당시 가야의상징이던 구룡일장기[九龍日章旗]는 그가운데 새로운 이상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의 혼이라고 볼 것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이깃발을 마치 자기네 것인양 펄럭이고 있지만 그 정신속에는 가야의 마음도 함께 할 것이리라.
백제의후손, 고구려의 후손, 가야의 후손들도 그 이후로 바다를 건너가 오늘의 일본이라는 나라를 다시 세원 지금껏 웅원(熊猿)지간이 된 것이 아니던가?
연안이씨 이 관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