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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동이열전

작성자2244둘이사네|작성시간15.01.29|조회수113 목록 댓글 0

후한서 동이열전
(後漢書 東夷列傳) 

중국 후한(後漢)의 정사(正史). 120권.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송(宋)나라의 범엽(范曄)이 저술한 책으로, 후한의 13대(代) 196년간의 사실(史實)을 기록하였다. 기(紀) 10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8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지(志) 30권은 진(晉)의 사마표(司馬彪)가 저술한 것이다.
   
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第七十五
 前言

《王制》云:[東方曰<夷>.] 夷者,  也, 言仁而好生, 萬物 地而出.{事見《風俗通》.} 故天性柔順, 易爾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山海經》曰:[<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 《外國圖》曰:[去<琅邪>三萬里.] 《山海經》又曰:[<不死人>在<交脛>東, 其爲人黑色, 壽不死.]  吊方也.} <夷>有九種,{《竹書紀年》曰[<后芬發>卽位三年, 九<夷>來御]也.} [按: 殿本無[發]字. 汲本[三]作[二].] 曰< 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竹書紀年》曰[<后泄>二十一年, 命< 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后相>卽位二年, 征<黃夷>. 七年, <于夷>來賓, 後<少康>卽位, <方夷>來賓]也.} 故<孔子>欲居九<夷>也.

왕제가 말하길 동방은 이(夷)이다. 이(夷)는 근본이다. 어질고, 낳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고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를 다스리기가 쉬우니, 군자요, 불사의 나라이다. [산해경에서 말하길 군자국은 의관을 갖추고 띠를 두르고 검을 차고, 말린고기를 먹으며, 문(文)과 용맹 두가지를 가까이 두고 쫓는다. 외국도에서 말하길 낭사에서 삼만리 걸린다. 산해경에서 또 말하길 불사인은 교경의 동쪽에 있다. 그는 검은색 사람이고 죽지않는다.  아울러 동방에 위치한다.] 이(夷)는 아홉종족이 있으니, [죽서기년에서 말하길 '분발후' 즉위삼년['전본'에는 '발'자가 없다. '급본'에는 '삼'자가 '이'자로 적혔다.] '구이'를 다스리니 '견이',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 이다. [죽서기년에서 말하길 '설후' 이십일년 '견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에게 명했다. '상후' 즉위이년 황이를 취하고, 칠년 '우이'가 방문하였다. 후에 '소경' 즉위년에 '방이'가 방문하였다.] 이러한 고로 '공자'가 구이에 거하고자 하였다.

昔<堯>命<羲仲>宅< 夷>, 曰<暘谷>, 蓋日之所出也.{<孔安國>《尙書》注曰[東方之地曰< 夷>. <暘谷>, 日之所出也].} <夏后氏><太康>失德, <夷>人始畔.{<太康>, <啓>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 >所逐也.} 自<少康>已後, 世服王化, 遂賓於王門, 獻其樂舞.{<少康>, 帝<仲康>之孫, 帝<相>子也. 《竹書紀年》曰:[<后發>卽位元年, 諸<夷>賓于王門, 諸<夷>入舞.]} <桀>爲暴虐, 諸<夷>內侵, <殷湯>革命, 伐而定之. 至于<仲丁>, <藍夷>作寇. {<仲丁>, <殷><大戊>之子也. 《竹書紀年》曰[<仲丁>卽位, 征于<藍夷>]也.} 自是或服或畔, 三百餘年. <武乙>衰 , <東夷> 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土.{<武乙>, 帝<庚丁>之子, 無道, 爲革囊盛血, 仰而射之, 命曰[射天]也.}

옛날 '요임금'이 '희중'에게 명하여 '우이'에 집을 짓게하였다. 말하기 '양곡'이라고도 하니 해가 뜨는 곳이다. [상서 공안국 주에서 말하길 동방의 땅을 말하니, '우이' '양곡'은 해가 뜨는 곳이다.]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어 '이'인과 경계의 시작이다. ['태강'은 '계'의 아들이다. 즐기고 노니, 오래도록 되돌리지 못하여고 백성을 구휼하지 못하자 예가 내 쫓았다.] '소강'이 스스로 뒤를 버리니 이때에 왕화를 입고 손님으로서 왕문에 이르니 음악과 춤을 바쳤다. ['소강'은 '중강'의 손자로 '상'의 아들이다. 죽서기년에 '발후' 즉위원년 '이'가 손님으로 왕위에 오르고 '이'가 들어와 춤췄다.]
'걸'이 포악하니 '이'가 침범하고 '은'의 '탕'이 혁명하여 치니 이를 정하였다. '중정'에 이르러 '남이'가 일어나 도둑질하였다. ['중정'은 '은'의 '대무'의 아들이다. '죽서기년'에 '중정'이 즉위하여 '남이'를 취하였다.] 스스로 혹은 따르고 혹은 배반하니, 3백여년이나 되었다. '무을'이 쇠하여 패하였다.
동이가 차차 성하니 '회', '대'를 나누어 옮기니 차차 중토에 거하였다.[ '무을'은 '경정'의 아들이다. 도가 없어 가죽주머니에 피를 담고, 활을 쏘아 맞추어 마시니 '궁천'이라 했다.]

及<武王>滅<紂>, <肅愼> 來獻石 · 矢. <管>·<蔡> 畔<周>, 乃招誘<夷狄>, <周公>征之, 遂定<東夷>.{《尙書》<武王>崩, 三監及<淮夷>畔, <周公>征之, 作<大誥>. 又曰, <成王>旣伐<管叔>·<蔡叔>, 滅<淮夷>.} <康王>之時, <肅愼>復至.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博物志》曰:[<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祥,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 <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 <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按:《校補》引<柳從辰>說, 謂[持]乃[得]之 , 《博物志》及《卿覽》九百四引《徐偃王志》可證, 各本注失正. 今據改.$/ <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沛>入<泗>. 自<山陽>印, <海陵>以北, 其地當之也.} 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

'무왕'에 이르러 '주'를 멸하자 '숙신'이 와서 석노와 고시를 바쳤다. 관숙, 채숙이 주를 배반하자, 이에 오랑캐들을 불러 유혹하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 드디어 동이를 평정했다.[ 상서에 '무왕'이 죽자, 자주 살폈지만 '회이'가 배반하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 '큰가르침'을 주었다. 또 말하길 '성왕'이 이미 '관숙'과 '채숙'을 치니 회이가 멸하였다.] '강왕' 때에 숙신이 다시 왔다. 뒤에 '서이'가 참람되게 왕호를 부르짓고, 이에 구이를 이끌고 주나라를 쳤다. 서쪽으로 '황하'에 이르자 '목왕'은 그 세력이 바야흐로 성한 것을 두려워 동쪽 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에게 시켜 이들을 지배하게 했다. [박물지에 '서군'은 궁인이 아이를 배 알에서 태어났다. 이를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버렸다. '곡창'이라는 하찮은 이름의 외로운 어미가 버려진 알을 얻어 받들어 어미에게 돌려보내니 어미가 이를 품어 어린 아이나 태어나 눕혔다. 고로 이 이름으로 하였다. 궁인이 이를 들어 이에 고쳐 기록하니 오래도록 '서'가 군을 이었다. 호자가 말하길 '언왕'은 근육은 있으나 뼈가 없다. 고로 '언'이라 한다. '교보'의 '유종신'이 말하길 '持'자가 '得'자로 바뀌었다. 박물지에 '유남' 9백사 '서언왕지'의 증거로 각 판본은 옳지 않으니 이에 고친다. 하였다.] '언왕'은 '황지' 동쪽에 거하니 땅이 오백리이다.['수경주'에 '황수'는 '왕수'의 또다른 이름으로 '패'에 이르서 '사'에 들어간다. '산양'의 동쪽으로서 '해능'의 북쪽으로 그 땅은 이와 같다.] 행실이 인자하고 의로와 육지의 삼십육국이 알현한다.

< 穆王>後得驥 之乘,{《史記》曰:[<造父>以善御幸於<周><繆王>, 得赤驥〃驪·  · 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乃使<造父>御以告<楚>, 令伐<徐>, 一日而至.{<造父>, 解見《蔡邕傳》.}於是<楚><文王>大擧兵而滅之. <偃王>仁而無權, 不忍鬪其人, 故致於敗. 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 因名其山爲<徐山>.{<武原>, 縣, 故城在今<泗州><下 縣>北. <徐山>在其東. 《博物志》曰[<徐王>妖異不常. <武原縣>東十里, 見有<徐山>石室祠處. <偃王>溝通<陳><蔡>之閒, 得朱弓朱矢, 以己得天瑞, 自稱<偃王>. <穆王>聞之, 遣使乘駟, 一日至<楚>, 伐之. <偃王>仁, 不忍鬪, 爲<楚>所敗, 北走此山]也.} < 王>無道, <淮夷>入寇, 王命< 仲>征之, 不克, <宣王>復命<召公>伐而平之. {《毛詩序》曰:[《江漢》, <尹吉甫>美<宣王>也. 能興衰撥亂, 命<召公>平<淮夷>.] 其詩曰:[<江漢>浮浮, 武夫滔滔. 匪安匪游, <淮夷>來求. 王命<召虎>, 式 四方, 徹我土疆.]} 及<幽王>淫亂, 四<夷>交侵, 至<齊桓>修覇, 攘而 焉. 及<楚><靈>會<申>, 亦來豫盟.{《左傳》<楚靈王>·<蔡侯>·<陳侯>·<鄭伯>·<許男>·<淮夷>會于<申>.} 後<越>遷<琅邪>, 與共征戰, 遂陵暴諸<夏>, 侵滅小邦.

'목왕'이 후에 천리마를 얻어 타고[사기에 '조부'는 주나라 '목왕'의 행차를 이끌었다. '적기' '도려' '화류' '녹이'말이 이끄는 수레를 얻어 서쪽으로 순수하니 즐거움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조부'가 이를 몰고 '초'에 고하길, '서'를 치라 명하니, 하루에 초에 이르렀다. ['조부'는 '해옹전'을 보면 해석된다.] 이에 초나라 '문왕'이 크게 병사를 일으켜 '서'를 멸했다. '언왕'은 인자하지만 권세가 없어, 그 사람과 차마 싸움을 하지 못하니 패하게 되었다. 이에 북쪽으로 가서 '팽성' '무원현' 동쪽의 산 밑에 이르러 보니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만 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산을 '서산'이라고 명했다. ['무원'은 현으로 지금 '사주' '하비현' 북쪽의 고성에 있다. '서산'은 그 동쪽이다. 박물지에 말하길 '서왕'은 기이하고 보통과 다르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의 석실 제사터를 볼수 있다. 언왕은 '진'과 '채' 사이에 도랑을 파서 통하게 하여 붉은 활과 화살을 얻음으로써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어 알았다. 스스로 언왕이라 칭하였다. '목왕'이 이를 듣고 사자를 수레에 태워 파견하니 하루밤에 '초'에 이르러 언왕을 정벌하였다. '언왕'은 인자하여, 차마 싸움을 하지 못하여 '초'에게 패하여, 북으로 달아나니 이산이다.] '여왕'이 무도하여 '회이'가 내침하였다. 왕이 명하여 '괵중'이 이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선왕'이 명을 받들어 '소공'이 이를 정벌하였다. [모시서에 말하길 '강한'에 '윤길보'가 선왕을 칭찬하길, 능히 쇠함을 일으키고 환란을 다스렸다. '소공'에 명하여 회이를 평정하였다. 그 시에 말하길, 큰강에 두둥실 굳센자 가득하다, 편안치 않고 놀지 않으니, 회이가 침범하였다. 왕이 '소호'에 명하니 사방이 따르고 우리의 경계가 환해졌다.] '유왕'에 이르러 몹시 음란하자 사방의 오랑캐들이 다투어 침입했고, '제환'에 이르러서 패업을 이루어 이들을 물리쳤다. 초나라 '영왕'이 '신'에서 모임을 가지니 역시 와서 회에 맹세했다.[좌전에 '초령왕' '채후', '진후', '정백', '허남', '회이'가 '신'에서 회합하였다.] 뒤에 월나라가 '낭야'로 옮기자 이들은 함께 가서 정벌하고, 이루어지니 남을 업신 여기고 여러제후국에 사납게 굴었다. 작은 나라를 침입하여 멸하였다.

< 秦>幷六國, 其<淮>·<泗夷>皆散爲民戶. <陳涉>起兵, 天下崩潰, <燕>人<衛滿>避地<朝鮮>,{《前書》曰[<朝鮮王><滿>, <燕>人.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障. <漢>興屬<[燕]>, <燕王><盧 >反入<匈奴>, <滿>亡朦走, 度<浿水>, 居<秦>故空地, 稍役屬<朝鮮><蠻夷>及故<燕>·<齊>亡(任)[在]者, 王之, 都<王險>]也.}/$漢興屬[燕] 據《前書》[朝鮮傳]補.$//$及故燕齊亡(任)[在]者 據<汲>本·殿本改.$/ 因王其國. 百有餘歲, <武帝>滅之, 於是<東夷>始通上京. <王莽>簒位, <貊>人寇邊. {《前書》<莽>發<高句麗>兵當伐<胡>, 不欲行, 郡縣彊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州郡歸咎於<高句麗侯><騶>, <嚴尤>奏言< >人犯法, 不從<騶>起, 宜慰安之.}/$因犯[法]爲寇 據《前書》[王莽傳]補.$/ <建武>之初, 復來朝貢. 時<遼東>太守<祭 >威 北方, 聲行海表, 於是<濊>·<貊>·<倭>·<韓>萬里朝獻, 故<章>·<和>已後, 使聘流通. 逮<永初>多難, 始入寇 ; <桓>·<靈>失政, 漸滋曼焉.

진나라가 육국을 멸하자 '회'와 '사이'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진섭'이 병사를 일으키자 천하가 무너지고 어지로웠다. 진섭이 군사를 일으키자 천하가 허물어지니, 연나라 사람 '위만'이 피하여 조선으로 가서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전한서에 말하길 저선왕 '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연이 전성기때 '진번'과 조선을 엮어 다스렸다. 성을 쌓아 사신이 이르는 것을 가로막았다. 한나라가 일어나 연라를 엮자, 연왕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들어갔다. '만'도 망하여 동쪽으로 갔다. '패수'를 건넜다. '진'의 옛 공지에 거하며, 옛 '연'과 '제'의 유민을 '조선'과 '만이'가 모아 왕위에 오르니 도성이 '왕검'이다. ] 그런 지 백여 년이 되자 무제가 멸망시켰다. 이에 동이가 비로소 서울에 통하게 되었다. '왕망'이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맥'인이 변방을 침략하였다.[전한서에 '망'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호'를 치라 했지만 가고자 하지 않았다. 그 군현이 강하기 때문이다. 모두 망하여 변방으로 쫓겨났다. 인하여 법을 어기고 침범하였다. 고구려후 '추'가 책망하여 고을로 돌아가니 '엄우'가 '맥'인의 죄를 진언하였지만, '추'가 일어나 따르지 않고 이를 위로 하였다.] 건무 초년에 다시 와서 조공을 바쳤다. 이 때 요동태수 '제동'이 위엄이 있으니 북방이 두려워 하였하니 그 소문이 바다 밖에까지 갔다. 이에 예맥, 왜, 한이 만 리 에서 조공을 받쳤다.  '장', '화' 이후로는 사신이 방문하고 서로 유통했고, '영초'에 어려운 일이 많아 비로소 들어와 침략하고 노략하기 시작했다. '환제'와 '영제'가 옳은 정치를 잃자, 이것은 점점 번져 나갔다

自中興之後, 四<夷>來賓, 雖時有乖畔, 而使驛不絶,/$按:《刊誤》謂[驛]當作[譯]. 郵驛中國可有之, 不可通於四<夷>, 自《前書》皆言[使譯], 使卽使者, 譯則譯人.$/ 故國俗風土, 可得略記. <東夷>率皆土著, 憙飮酒歌舞, 或冠弁衣錦, 器用俎豆. 所謂中國失禮, 求之四<夷>者也.{《左傳》曰, <仲尼>學鳥名[官]於< 子>, 旣而告人曰:[吾聞之, 天子失官, 學在四<夷>, 其信也.]}/$仲尼學鳥名[官]於 子 <汲>本·殿本[鳥]作[官]. 按: <仲尼>學鳥名官於< 子>, 見《左傳》<昭公>十七年, 今補一[官]字.$/ 凡<蠻>·<夷>·<戎>·<狄>總名四夷者, 猶公·侯·伯·子·男皆號諸侯云.

스스로 중흥한 뒤로 사방 오랑캐들이 손으로 왔고, 비록 때로 배반하는 일이 있어도 사역이 끓어지지 않았다.[사역에 '驛(역참)'은 마땅히 '譯(통역관)'이다. 역참은 가히 중국에만 있고 사방 오랑깨는 통하지 않는다. '전한서'에는 모두 '使譯'이라 말한다. 사는 사신이고 역은 통역관이다.] 고로 나라의 풍속과 풍토를 가히 얻어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동이들은 모든 토착민들을 인솔하고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어 혹은 변관 쓰고 비단옷 입으며, 그릇은 조두를 썼다. 소위 중국이 예를 잃었기 때문에 이것을 사이에 구했다는 것이다. [좌전에 말하길 '중니'의  벼슬이 '담자'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말하길 내가 이를 들었다.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배움이 사방 오랑캐에 있다. 이것이 믿을만 하다.] 무릇 '만', '이', '융', '적'을 통틀어 모두 사이라고 한 것은 마치 '공' '후'' 백' '자' '남'을 모두 제후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夫餘國(부여국)

< 夫餘國>, 在<玄 >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 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지방이 이천 리로서 본래 '예'땅이다.

初, <北夷><索離國>王出行,{[索]或作 [ ], 音度洛反.} 其侍兒於後姙身,{姙音人 反.} 王還, 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 大如 子, 來降我, 因以有身.] 王囚之, 後遂生男. 王令置於豕牢,{牢, 圈也.} 豕以口氣噓之, 不死. 復徙於馬蘭,{蘭卽欄也.} 馬亦如之. 王以爲神, 乃聽母收養, 名曰<東明>. <東明>長而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奔走, 南至<掩水>,{今<高麗>中有蓋斯水, 疑此水是也.} 以弓擊水, 魚鼈皆聚浮水上, <東明>乘之得度, 因至<夫餘>而王之焉. 於<東夷>之域, 最爲平敞, 土宜五穀. 出名馬·赤玉·貂 ,{ 似豹, 無前足, 音奴八反.}/$ 似豹 按: 原作[貂似 ],  , 逕據<汲>本·殿本改正.$/ 大珠如酸棗. 以員柵爲城, 有宮室·倉庫·牢獄. 其人 大彊勇而謹厚, 不爲寇 . 以弓矢刀矛爲兵. 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狗加,/$《校補》謂《魏志》作[有馬加·牛加· 加·狗加·犬使]. 今按: 《魏志》[犬使]之[犬], <宋>本皆作[大].$/

처음에 '북이' '색리국'이 출행하였는데['색'은 혹은 '탁'으로 음이 '도락'으로 변했다.] 그 시녀가 후에 임신을 하니,['임'음이 '인짐'으로 변했다.] 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말하기를, "전에 하늘 위에 기를 보았는데 큰 계란과 같았다. 와서 나한테 내려오더니, 그런 뒤로 태기가 있습니다"했다. 왕은 시녀를 가두었더니 뒤에 남자 아이를 낳았다. 왕이 명하여 이것을 돼지우리에 버였으나,['뇌'는 '권(우리)'이다.]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으로 옮겼으나['난'은 '란(우리)'이다.] 말도 역시 이와 같았다. 왕은 이로써 이상히 여기어, 이에 그 어미에게 알려 거두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다. 왕은 그 용맹스러운 것을 꺼려서 다시 죽이고자 했다. 동명은 달아나서 남쪽으로 '엄수'['고려'가운데에 '개사수'가 있는데 이물이 맞는지는 의심스럽다.]에 이르러, 활로써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물 위에 떠올라 동명이 이를 타고 물을 건넜다. 이리하여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했다. 동이의 땅 안에서 가장 좋은곳으로, 땅에서는 오곡이 잘 되고, 또 명마와, 붉은 옥, 담비['날'은 표범을 닮았고, 앞다리가 없으며 음이 '노팔'로 바뀌었다.] 등이 난다. 큰 구슬은 대추만하고 나무를 둥글게 둘러 성을 쌓고,  궁실과 창고와 감옥이 있다. 그 사람들은 거칠고 크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칼, 창 같은 것으로 병기를 삼는고, 여섯 가축으로 벼슬 이름을 지으니, '마가', '우가', '구가' 등이 있다.[위지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견가가 있다.]

其邑落皆主屬諸加. 食飮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 以臘月祭天, 大會連日, 飮食歌舞, 名曰[迎鼓]. 是時斷刑獄, 解囚徒. 有軍事亦祭天, 殺牛, 以 占其吉凶.{《魏志》曰:[牛 解者爲凶, 合者爲吉.]} 行人無晝夜, 好歌吟, 音聲不絶. 其俗用刑嚴急, 被誅者皆沒其家人爲奴婢. 盜一責十二. 男女淫皆殺之, 尤治惡 婦,/$按:《校補》謂《通志》作 [尤憎 婦], 此[治]字亦當作[憎], 蓋後人回改之失.$/ 旣殺, 復尸於山上. 兄死妻嫂. 死則有槨(?)無棺./$《校補》謂《魏志》作[有棺無 ], 《通志》同, 此誤. 今按: 百衲本《三國志》亦作[有 無棺], 不誤, 《校補》說非.$/ 殺人殉葬, 多者以百數. 其王葬用玉匣, <漢朝>常豫以玉匣付<玄 郡>, 王死則迎取以葬焉.

읍락의 모든 주인들도 모든 '加'의 이름을 붙였다. 음식을 먹는데는 조두를 쓰고, 모임에는 벼슬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서 술을 권하며 읍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섣달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매일 연이어 큰 모임을 가져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 추고 노는데 이것을 '영고'라고 한다. 이 기간에는 형벌과 옥사를 다스리지 않고 죄수를 석방한다. 군사에 관한 일이 있을 때에도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소를 잡아 그 발굽으로 길하고 흉한 것을 점친다.[위지에 소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모이면 길하다.] 행인은 밤과 낮이 없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소리가 길에 끊어지지 않는다. 그 풍속은 형벌을 행함에 엄하고 급해서 죽음을 당하는 자는 그 집 식구들을 모조리 종으로 삼고, 또 한 사람이 도둑질하면 열 두 갑절을 물리며,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면 모두 죽인다. 이 중에도 질투하는 계집을 미워해서 [통지에 '尤憎 婦'라 하였다. 이 '治'자는 '憎(미워하다)'자로 뒷사람이 잘못하여 고친것이다.]이미 사람이 죽었는데도 다시 그 시체를 산 위에 갖다 내버린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곽은 있어도 관은 없다.[위지에는 '有棺無槨'라 하고 통지도 같다. 이는 잘못이다. 삼국지에 '有槨無棺'라 하니 잘못이 아니다. 교보는 알수없다 했다.] 사람을 죽여 순장시키는데 숫자가 많은 자는 백 명이나 되었다. 왕의 장사에는 옥갑을 사용하였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항상 미리 옥갑을 만들어서 현도군에 보내 두었다가 임금이 죽으면 이것을 갖다가 장사 지내게 했다.  

< 建武>中, <東夷>諸國皆來獻見. 二十五年, <夫餘王>遣使奉貢, <光武>厚 報之, 於是使命歲通.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 <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永寧>元年, 乃遣嗣子<尉仇台>(印)[詣]闕貢獻, 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 <順帝><永和>元年, 其王來朝京師, 帝作黃門鼓吹·角抵戱以遣之. <桓帝><延熹>四年, 遣使朝賀貢獻. <永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 >, <玄 >太守<公孫域>/$按:《集解》引<惠棟>說, 謂《東觀記》·《魏志.公孫度傳》[域]皆作[ ].$/ 擊破之, 斬首千餘級. 至<靈帝><熹平>三年, 復奉章貢獻. <夫餘>本屬<玄 >, <獻帝>時, 其王求屬<遼東>云.

'건무'년중에는 동이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와서 뵈었다. 이십오년에는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서 공물을 바치니 '광무제'는 여기에 후하게 이에 보답하였다. 이에 사신들의 왕래가 해마다 서로 통했다. '안제' 영초 오년에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기병 칠,팔천 명으로 '낙랑'을 노략질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을 살상시키고, 그 뒤에는 다시 돌려보내어 친근해졌다. '영녕' 원년에는 아들 '위구태'를 보내서 대궐에 들어가 뵙고 공물을 바치니 천자는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과 비단을 주었다. '순제' '영화' 원년에 그 임금이 서울에 와서 조회하자 천자는 황문고를 만들어 피리 불고 씨름하며 즐기게 하고서 보냈다. '환제' '연희' 사년에 사신을 보내 조하 드리고 공물을 바쳤다.
'영강' 원년에 왕'부태'가 군사 二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침입하자 현도태수 '공손역'이 [동관기와 위지 공손도전에 ??]쳐서 깨쳐 천여 명을 베었다. '영제' '가평' 삼년에 이르러 다시 글을 받들고 와서 공물을 바쳤다. '부여'는 본래 '현도'에 소속으로, '현제' 때 그 임금이 요동에 소속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  婁>읍루

< 婁>, 古<肅愼>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 人形似<夫餘>, 而言語各異. 有五穀·麻布, 出赤玉·好貂. 無君長, 其邑落各有大人. 處於山林之閒, 土氣極寒, 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好養豕, 食其肉, 衣其皮. 冬以豕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蔽其前後. 其人臭穢不 , 作 於中,  之而居. 自漢興已後, 臣屬<夫餘>. 種衆雖少, 而多勇力, 處山險, 又善射, 發能入人目. 弓長四尺, 力如弩. 矢用 , 長一尺八寸, 靑石爲鏃, 鏃皆施毒, 中人卽死. 便乘船, 好寇盜,  國畏患, 而卒不能服. <東夷><夫餘>飮食類(此)皆用俎豆,/$據《刊誤》刪.$/ 唯< 婁>獨無, 法俗最無綱紀者也.

'읍루'는 예날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동북쪽 천여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대해에 임하고 남으로는 '북옥저'에 접한다. 가히 북쪽 끝은 알수 없다. 땅은 산이 많고 험하며 사람의 형상은 '부여인'과 닮았으나 그 말은 각각 다르다. 오곡과 베가 있고 붉은 옥이 나오고 담비가 좋으며 군장은 없으나 읍락 각각에 '대인'이 있다. 산림사이에 거하며 몹시도 추우며 항시 토굴에 있어 깊은 것을 귀하게 여기어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에 이른다. 돼지 기르기를 즐겨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두터히 나누어 몸에 발라 이로써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 벗고 그 전후에 베로 가린다. 사람이 냄새가 많이 나고 더러움을 알지 못하여 변소를 가운데 짓고 그 주위에 산다. '한'이 흥한 이후로 '부여'에 속하고 무리는 비록 적으나 용력이 많고 산세가 험한곳에 거하고 또한 홀을 잘 쏘니 능히 사람의 눈을 맞추었다. 활의 길이는 넷척이고 노와 같은 힘이 들고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그 길이는 일척팔촌으로 푸른돌을 화살촉으로 하고 촉에는 모두 독을 발라 보통사람은 즉사하였다. 편안히 배를 타고 도둑질을 좋아하니 이웃나라에서 두려워하고 근심하였으나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동이''부여'는 음식의 종류를 모두 조두그릇을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만은 그렇지 않아,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高句麗(고구려)

< 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 多大山深谷, 人隨而爲居. 少田業, 力作不足以自資, 故其俗節於飮食, 而好修宮室.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 拜曳一脚, 行步皆走. 凡有五族, 有<消奴部>,/$按:《集解》引<惠棟>說, 謂[消]《魏志》作[涓].$/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 <桂婁部>.{案今<高驪>五部: 一曰<內部>, 一名<黃部>, 卽<桂婁部>也; 二曰<北部>, 一名<後部>, 卽<絶奴部>也; 三曰<東部>, 一名<左部>, 卽<順奴部>也. 四曰<南部>, 一名<前部>, 卽<灌奴部>也; 五曰<西部>, 一名<右部>, 卽<消奴部>也.} 本<消奴部>爲王, 稍微弱, 後<桂婁部>代之. 其置官, 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按:《魏志》作[古雛加].$/{古鄒大加, <高驪>掌(賀)[賓]客之官, 如鴻 也.}/$據<汲>本·殿本改.$/ 主簿·優台·使者·/$按:《補注》謂《魏志》[使者]上有[丞]字.$/帛衣先人./$《補注》謂《魏志》[帛]作[  ]. 今按:  帛形近易混. <趙一淸>《三國志注補》引 《 宇記》, [ 衣頭大兄, <東夷>相傳所謂 衣先人也], 字亦作[ ].$/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 '예맥'이 있고, 북으로 부여에 접한다. 지방이 이천리이다. 큰산이 많고 계곡이 깊어 사람들이 따라 거한다. 작은 밭일이라 힘써 지어도 족하지 않으니 스스로를 헤아렸다. 고로 그 풍습이 절약하여 밥을 먹고, 집을 크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다른 종류라 한다. 고로 언어와 법등 많은 것이 같아 한쪽 다리를 끌며 꾾어 앉아 절하고 걸음걸이는 모두 달리는 것과 같다. 무릇 다섯종족이 있는데,
'소노부'[혜동에 말하길 '消'는 위지에 '涓(연)'으로 되어 있다.],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로[고려오부는 하나 '내부'로 일명 '황부' 즉 '계루부'이며 둘은 '북부' 일명 '후부' 즉 '절노부'이고 삼은 '동부' 일명 '좌부'로 즉 '순노부'이고 사는 '남부' 일명 '전부' 즉 '관노부'이며 오는 '서부' 일명 '우부' 즉 '소노부'이다.]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계루부'에서 이를 이었다. 그 벼슬을 세워 '상가', '대노', '패자', '고추대가',[위지에는 '고추가'이다. 고려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관직으로 '홍려(관직명)'와 같다.] '주부', '우태', '사자',[위지에 '사자' 위에 '승'이 있다.] '백의', '선인'이 있다.[위지는 '帛'는 ' (조)'자로 서로 비슷하여 혼란되어 바뀌었다. 조일청의 삼국지주보의 환우기에 '조의'의 우두머리는 '대형'이다. '동이'가 서로 전하길 '조의','선인'이다.라고 하였다.]

<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前書》<元封>中, 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 >四(部)[郡].}/$按:<張森楷>《校勘記》謂[部]字當依《前書》作[郡]. 今據改.$/ 使屬<玄 >, 賜鼓吹伎人. 其俗淫, 皆 淨自憙, 暮夜輒男女 聚爲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前書》《音義》:[<龍星>左角曰<天田>, 則農祥也. 辰日祠以牛, 號曰<零星>.] 《風俗通》曰[辰之神爲<靈星>], 故以辰日祠於東南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 神,/$按:《校補》謂[ ]《魏志》·《通志》 作[隧].$/ 亦以十月迎而祭之. 其公會衣服皆錦繡, 金銀以自飾. 大加·主簿皆著 , 如冠 而無後; 其小加著折風, 形如弁. 無牢獄, 有罪, 諸加評議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 其昏姻皆就婦家, 生子長大, 然後將還, 便稍營送終之具. 金銀財幣盡於厚葬, 積石爲封, 亦種松柏. 其人性凶急, 有氣力, 習戰鬪, 好寇 , <沃沮>·<東濊>皆屬焉.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이로써 고구려를 현으로 하였다. [전서에 '원봉'중에 '조선'을 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으로 하였다.] '현도'에 속하게 하고, 북과 피리와 광대를 주었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모두 깨끗한 옷을 두르기를 즐겨 밤이 오면 쉽게 남녀가 모여 가무와 음악을 즐겼다. 귀신과 토지신, 영성 [전서 음의에 '용성'의 좌각을 말하여 '천전'이라하니 즉 농사에 상서로운 것이다 진일에 우성에 제사지내니 불러 '영성'이라 한다. 풍속지에 진의 신을 '영성'이라 한다. 고로 진일에 동남에 제사한다.]에게 제사하길 좋아하여 시월에 큰 모일을 가져 하늘에 제사시내니 일명 '동맹'이라 한다. 기 나라 동쪽에 큰 구멍이 있어 불러 수신이라 한다[위지 통지에 ' '이 '隧'로 적혀있다.]. 또한 시월을 맞이하여 이에 제사지낸다. 공적인 모임에는 의복이 모두 비단으로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치장하였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머리띠를 하는데 관과 같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다. 감옥이 없어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심의하여 이를 살인에 처하고 그 처자는 노비로 삼았다. 혼인은 모두 부인의 집에서 치루고 자식을 낳아 다 크면 그런 연후에 마땅히 돌아온다. 사람을 보낼때가 되면 그 도구를 갖추었다. 금 은 재물 비단이 다될때까지 후하게 장사지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씨를 뿌렸다.  그 백성의 성품이 흉하고 급하고 기력이 있어 전투를 익히고 노략질을 좋아하였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소속되어 있다.

< 句驪>一名<貊>(耳), 有別種,/$《集解》引<沈欽韓>說, 謂案文當云[<句驪>有別種, 一名<貊耳>]. 按:《校補》謂《通志》但云[名<貊>], 無[耳]字, 此[耳]字衍. 今據刪.$/ 依小水爲居, 因名曰<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 有小水南流入海, <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구려'는 일명 '맥'이다. 그 갈라짐이 있으니,[심흠한이 말하길 구려에는 종류가 있으니 일명 '맥이'이다. 통지에 '맥'이라 하고 '이'자가 없다. 이 '이'자는 첨언한것이다.] 작은 물에 의지하여 거하면, 이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좋은 활이 나온다. 이를 소위 '맥궁'이라 한다.[위씨춘추에 말하길 '요동군''서안평현'북쪽이다. 작은 물이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다른 종류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 王莽>初, 發<句驪>兵以伐<匈奴>, 其人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大尹<田譚>追擊, 戰死. <莽>令其將<嚴尤>擊之, 誘<句驪侯><騶>入塞,/$按:《集解》引惠棟說, 謂《魏志》[騶]作[ ],《前書·王莽傳》作[騶].$/ 斬之, 傳首<長安>. <莽>大說, 更名<高句驪王>爲<下句驪侯>, 於是<貊>人寇邊愈甚. <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二十三年冬, <句驪> <蠶支落>大加<戴升> 等萬餘口詣<樂浪>內屬.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 >以恩信招之, 皆復款塞.

'왕망'초에 '구려'의 병사를 보내어 '흉노'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가고자 하지 않았다. 강제로 이에 파견하니 모두 도망하여 변방에서 노략질 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쫓아 공격했으나 전사하였다. '망'이 장수 '암우'에게 이를 공격하라고 명했으나, 구려후 '추'를 꾀어 변방으로 들어가[위지에는 '騶(추)'가 ' (도)'로 되어 있고 전한서 왕망전에는 '騶'로 되어 있다.] 이를 베어 '장안'에 머리를 전했다. 망이 크게 말하길, '고구려왕'의 명을 고쳐 낮추어 '구려후'라 하였다. '맥인'의 변방 약탈이 더욱 심하였다. '건무' 팔년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광무' 다시 왕호를 회복했다. 이십삼년 겨울 '구려' '만우락'대가 '대승'등 만여호가 '낙랑'의 안에 이르러 속했다. 이십오년 붐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 침입하자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믿음으로 이에 구하니 모두 변방으로 돌아갔다.

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 國人懷之,/$殿本《考證》謂《魏志》[懷]作[惡]. 按: 《校補》謂[懷]當爲[怪]之 , 古[懷]字多混爲[ ], 故轉寫易 .$/ 及長勇壯, 數犯邊境. <和帝><元興>元年春, 復入<遼東>, 寇略六縣, 太守<耿夔>擊破之, 斬其渠帥. <安帝><永初>五年, <宮> 遣使貢獻, 求屬<玄 >. <元初>五年, 復與<濊貊>寇<玄 >, 攻<華麗城>.{<華麗>, 縣, 屬<樂浪郡>.} <建光>元年春, <幽州>刺史<馮煥>·<玄 >太守< 姚光>·<遼東>太守<蔡諷>/$《集解》引<惠棟>說, 謂《魏志》·《北史》[諷]作[風]. 今按:《安帝紀》作[諷], 《通鑑》同.$/等將兵出塞擊之, 捕斬<濊貊>渠帥, 獲兵馬財物.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遣使詐降; <光>等信之, <遂成>因據險 以遮大軍, 而潛遣三千人攻<玄 >·<遼東>, 焚城郭, 殺傷二千餘人. 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 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 而貊人已去. 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縣名, 屬<遼東郡>也.}, 殺略吏人. <蔡諷>等追擊於<新昌>, 戰歿, 攻曹<耿耗>·兵曹 <龍瑞>·兵馬 <公孫 >以身 <諷>, 俱沒於陳, 死者百餘人. 秋, <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 >. <夫餘王>遣子<尉仇台>/$按:《集解》引<惠棟>說, 謂[台]一作[治].$/將二萬餘人, 與州郡幷力討破之, 斬首五百餘級.

후에 구려왕 '궁'이 태어나자 눈을 뜨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꺼려하였다. [위지에 '懷'는 '惡(미워하다)'오 기록되어 있다. '懷'는 마땅히 '괴(괴이하다)'가 잘못된 것이다. 옛부터 '懷'자는 많이 ' (두려워하다)'와 섞어 썼다. 고로 잘못되어 바뀐 것이다.] 이에 자라 용맹한 장사가 되니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원흥'원년 봄 요동에 다시 들어와 육현을 빼앗아 노략질 하니 태수 '경기'가 나아가 이를 격파하여 그 큰 장수를 베었다. '안제' '영초' 오년 '궁'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며 '현도'에 속하길 구했다. '원초' 오년 다시 '예맥'이 '현도'를 노략질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화려는 현이고 '낙랑군'에 속한다.] '건원'원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등이[위지 북사에 '諷'이 '風'으로 기록되어 있고 안제기에 '諷'으로 되어있다. 통감도 이와 같다.] 병사로 변방에 나아가 이를 공격했다. '예맥'의 큰 장수들을 베고 포로로 삼으니 병마와 재물을 얻었다. '궁'이 이에 아들 '수성'과 장병 이천여명을 '광'등에게 보내며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자 '광'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이 이에 험하고 좁은 지형으로 대군을 막고 삼천명으로 몰래 들어가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이천여명을 죽이고 상처입혔다.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여국'이 삼천여 기병으로 동시에 이를 구하고자 파견하였으나 맥인은 이미 가버렸다. 여름 '요동''선비'의 팔천여명으로 '요수'를[현의 이름이다. 요동군에 속한다.] 공격하여 빼앗아 사령과 백성을 죽였다. '채풍'등이 뒤쫓아 '신창'으로 나아갔으나 전몰 하였다. 공조'경모', 병조연'용서' 병마연'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막았으나 병사들과 함께 죽었다. 죽은자가 백여명이다. 가을 '궁'이 '마한''예맥'의 수천여기병을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와['台'는 또한 '治'이다.] 장병 이만여명을 파견하고, 주군의 병력을 합하여 이를 깨뜨리고 정벌하니 그 머리를 오백여개나 베었다.

是歲<宮>死, 子<遂成>立. <姚光>上言欲因其喪發兵擊之, 議者皆以爲可許. 尙書<陳忠>曰: [<宮>前桀 , <光>不能討, 死而擊之, 非義也. 宜遣弔問, 因責讓前罪, 赦不加誅, 取其後善.] <安帝>從之. 明年, <遂成>還<漢>生口, 詣<玄 >降. 詔曰: [<遂成>等桀逆無狀, 當斬斷  , 以示百姓, 幸會赦令, 乞罪請降. <鮮卑>·<濊貊>連年寇 , 驅略小民, 動以千數, 而裁送數十百人, 非向化之心也. 自今已後, 不與縣官戰鬪而自以親附送生口者, 皆與贖直,  人四十匹, 小口半之.]

이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올랐다. '요광'이 위에 말하길 '이 상으로 인하여 병사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자' 하니 의논한자들이 모두 이를 가히 허락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길 궁은 전의 '걸'과 같고 교활하니, '광'은 능히 깨지 못할 것이다. 죽음으로 이를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니니 조문의 파견해야 한다. 인하여 전의 죄를 책망하고 용서하여 가히 처벌하지 않아 후에 친선을 취해야 한다. 하니 '안제'가 이를 쫓았다. 다음해 '수성'이 한나라에 살아있는 백성들을 돌려 보내기 위해 '현도'에 항복하니 고하기를 '수성'등이 포악하고 배반함이 형용할수 없어 마땅히 베어 절단하여 절임으로써 백성에게 보여야 하나, 다행히 용서를 받아 죄를 청하여 항복하길 빈다. '선비' '예맥'은 해마다 노략질 하고 백성을 빼앗아 핍박하니, 수천이요, 마름질하여 보내는 자는 수십에 백명이니, 이는 교화될 마음이 아니다. 이 후로 현과 관은 전쟁하지 말것이며 친하고 따르며 살아있는 자를 보내니 모두 바로 그 세를 바쳐야 한다. 사람당 비단 사십필이고 어린이는 그 반이다.

< 遂成>死, 子<伯固>立. 其後<濊貊>率服, 東垂少事. <順帝><陽嘉>元年, 置<玄 郡>屯田六部. <質>·<桓>之閒,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郡國志》<西安平>·<帶方>, 縣,  屬<遼東郡>.} 掠得<樂浪>太守妻子. <建寧>二年, <玄 >太守<耿臨>討之, 斬首數百級, <伯固>降服, 乞屬<玄 >云.

'수성'이 죽자 아들 '백고'가 올랐다. 그후에 '예맥' 복속하여 따랐다. 동쪽으로 작은일들만이 있었다. '순제''양가' 원년 '현토군'에 둔전 육부를 두었다. '질'과 '항'사이에 요동 서안평을 다시 침범하니 '대방'의 령을 죽이고,[군국지에 '서안평' '대방'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한다.] 낙랑태수의 처자을 잡았다. '건녕'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이를 쳤다. 수백의 머리를 베니 '백고'가 다시 항복하여 '현도'에 속하길 구걸했다.

東沃沮(동옥저)

<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蓋馬>, 縣名, 屬<玄 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卽<王險城>也.} 東濱大海; 北與< 婁>·<夫餘>, 南與<濊貊>接. 其地東西夾, 南北長,{夾音狹.} 可折方千里. 土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有邑落長帥. 人性質直彊勇, 便持矛步戰. 言語·食飮·居處·衣服有似<句驪>. 其葬, 作大木 , 長十餘丈, 開一頭爲戶, 新死者先假埋之, 令皮肉盡, 乃取骨置 中. 家人皆共一 , 刻木如(王)[生],/$《校補》謂《魏志》作[刻木如生形], 則[主]乃[生]之 , 作主不須言刻也. 今據改.$/ 隨死者爲數焉.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손한다. 그 산은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검성'이다.] 동쪽으로 바다에 임한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에 있고 남으로 '예맥'이 접하고 그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夾'음은 '狹'이다.] 가히 천리이다. 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이 마땅히 잘되며 밭농사에 좋다. 읍락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인성이 곧고 강직하고 용맹스러워, 창을 가지고 보병전을 한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구려'와 닮음이 있다. 장사는 큰 목곽를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한쪽에 개구부를 만든다. 새로 죽은자는 이를 임시로 묻었다가, 피부와 살이 썩어지면 이에 뼈만을 취하여 넣는다. 가족이 모두 이에 들어간다. 나무에 '生'자를[위지에 '刻木如生形'이라 하니 잘못된 것이다.] 새기어 죽은자의 수를 헤아렸다.

< 武帝>滅<朝鮮>, 以<沃沮>地爲<玄 郡>. 後爲<夷貊>所侵, 徙郡於<高句驪>西北, 更以
<沃沮>爲縣, 屬<樂浪>東部都尉. 至<光武>罷都尉官, 後皆以封其渠帥, 爲<沃沮侯>. 其土迫小, 介於大國之閒, 遂臣屬<句驪>. <句驪>復置其中大人(遂)爲使者,/$《集解》引<何 >說, 謂以《魏志》參校, 衍[遂]字. 今據刪.$/ 以相監領, (貴)[責]其租稅,/$據<汲>本·殿本改.$/ 貂布魚鹽, 海中食物, 發美女爲婢妾焉.

'무제'가 '조선'을 멸하자 '옥저'는 '현도군'에 속했다. 후에 '이맥'이 침입하자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었다. 다시 '옥저'를 현으로 하고 낙랑 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광무'에 이르러, 도위벼슬을 없에고 후에 모두 그 우두머리를 '옥저후'에 봉했다. 그 땅이 좁고 작아 큰 나라 사이게 끼이어 '구려'에 속하여 신하가 되었다. 구려가 다시 그중에 대인을 두어 사자로 하여 서로 감시하게 하고, 조세, 가죽,베, 물고기, 소금, 바다식물, 아름다운 여자종을 바라였다.

北沃沮(북옥저)

又有<北沃沮>, 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皆與南同. 界南接< 婁>. < 婁>人憙乘船寇抄, <北沃沮>畏之, 每夏輒臧於巖穴, 至冬船道不通, 乃下居邑落. 其耆老言, 嘗於海中得一布衣, 其形如中人衣, 而兩袖長三丈. 又於岸際見一人乘破船, 頂中復有面, 與語不通, 不食而死. 又說海中有<女國>, 無男人. 或傳其國有神井,  之輒生子云.{《魏志》曰, < 丘儉>遣<王 >追<句驪王><宮>, 窮<沃沮>東界, 問其耆老所傳云.}

또한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습이 모두 남옥저와 같다. 경계는 남으로 '읍루'이고, '읍루' 사람이 배타는 것과 노략질을 즐기니, '북옥저'가 이를 두려워하여 매양 여름에는 바위구멍에 숨어있다가 겨울에 이르러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네 아래 읍락에 거하였다. 한 늙은 노인이 말하길 바다 가운데에서 베옷을 하나 얻었는데 그 모양은 보통사람 옷과 같으나 양 소매가 삼장이나 되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언덕 위에서 보니 한 사람이 깨진 배를 타고 오는데 목 복판에도 얼굴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죽었다. 또 말하길 바다가운데에 여인국이 있다. 남자가 없다. 혹 전하길 그 나라에는 신정이 있어 이를 보면 쉽게 아이를 낳는다.[위지에 '관구검'이 '왕기'를  파견하여 구려왕 '궁'을 쫓아 '옥저' 동쪽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어 전한것이다.]

濊(예)

< 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前書》曰, <箕子>敎以八條者, 相殺者以當時償殺, 相傷者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八五十萬. 《音義》曰:[ 八條不具見也.]} 其人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飮食以 豆. 其後四十餘世, 至<朝鮮侯><準>, 自稱王. 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而<燕>人<衛滿>擊破<準>而自王<朝鮮>, 傳國至孫<右渠>. <元朔>元年,{<武帝>年也.} <濊>君<南閭>等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至<元封>三年, 滅<朝鮮>, 分置<樂浪>·<臨屯>·<玄 >·<眞番>四(部)[郡]./$據殿本改.$/{番音潘.} 至<昭帝><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 >. <玄 >復徙居<句驪>.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自內屬已後, 風俗稍薄, 法禁亦浸多, 至有六十餘條. <建武>六年, 省都尉官, 遂棄領東地, 悉封其渠帥爲縣侯, 皆歲時朝賀.

'예'의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고 남쪽은 '진한'에 접한다. 동쪽은 대해에 그치고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는 '옥저'와 '구려'에 미치니, 본래은 모두 '조선'의 땅이다. 옛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가 예와 의, 농사와 양잠을 가르쳤다. 또 팔조의 가르침을 지었다. [전서에 말하길 기자의 팔조의 가르침은 죽인자는 이때에 마땅히 죽음으로 갚고, 상해입힌자는 곡식으로 갚으며, 도둑질한자는 남자는 죽이며 가족과 여자는 노비로 하고, 스스로 면제 받으려면 8백 오십만을 내야한다.] 음의에 팔조를 다 갖추어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끝까지 서로 도둑질 하지 않고 문이 없어 이를 닫지 않고, 부인은 절개가 있고 믿음이 있다. 음식은 변두그릇을 사용하였다. 40여세 이후에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한초에 큰 난이 있어 '연','제','조',나라 사람 수만호가 피하여 이땅에 왔다. '연'인 '위만'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왕에 올라, 나라를 전하니 손자 '우거'에 이르렀다. '원삭' 원년['무제'년이다.] '예'의 군주 '남여'가 '우거'를 배반하고, 28만호를 거느리고 '요동'내에 이르러 속하자 '무제'가 이땅을 '창해군'이라하였다. 수년후 방치하였다. '원봉' 삼년에 이르러 '조선'을 멸하고, 나누어 '낙랑','임둔','현도', '진번' 사군을 두었다. ['番'음은 '潘'이다.] '소제' '시원' 오년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없에고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는 다시 '구려'의 거처로 옮겨갔다. '단단대령'의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후에 그 지경이 넓고 멀어 다시 동쪽 칠현으로 나누고,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 속한 이후로 풍속이 점점 박해지고 금하는 법이 또한 많아지니 육십여개에 이르렀다. '건무' 육년 도위관을 없에고, 버려진 동쪽땅에 이르러 그 우두머리를 현후에 봉하니 모두 해마다 조공하고 하례하였다.

無大君長, 其官有侯·邑君·三老.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
. 其人性愚慤, 少嗜欲, 不請 . 男女皆衣曲領.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界,/$按:《校補》謂《魏志》[界]作[分].$/ 不得妄相干涉. 同姓不昏. 多所忌諱, 疾病死亡, 輒捐棄舊宅, 更造新居. 知種麻, 養蠶, 作 布. 曉候星宿, 豫知年歲豊約. 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祠虎以爲神. 邑落有相侵犯者, 輒相罰, 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能步戰,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樂浪>檀弓出其地. 又多文豹, 有果下馬,{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海出班魚, 使來皆獻之.

큰 군장은 없고 관에 후와 읍장과 삼노가 있다. 늙은이가 스스로 이르기를 '구려'와 한 무리이다. 언어와 법과 풍습이 비슷하다. 그 인성이 어리석고 성실하여 작은 것을 즐기고자 하고, 청하여 구걸하지 않고, 남녀 모두 옷깃이 굽은 옷을 입는다. 그 풍속은 산천이 험하여, 산천이 각각 부로 나뉘고 서로 범하고 이르러 헛되이 얻지 않는다. 같은 성끼리는 결혼하지 않고, 꺼리는 것이 많다. 질병으로 죽으면 옛집에 버려두고 새로 거하는 곳을 지었다. 삼베를 알고 양잠을 하고 면포를 지었다. 별자리에 훤하여 그해 풍년을 미리 예견하였다. 항시 시월에 제사지내니, 주야로 음주하고 가무하니 이를 '무천'이라하였다. 또한 호랑이에게 제사지내고 신으로 삼았다. 읍락을 침범하는자가 있으면 그 죄를 물어 꾸짓어 소와 말을 잡으니, 명하여 '책화'라하였다. 사람을 죽인자는 죽음으로 갚고, 도둑질 하는 자가 적었다. 보병전에 능하여 창이 삼장이나 되어 혹 여러사람이 함께 이를 하였다. '낙랑'은 단궁이 나오는 곳이고 또한 표범이 많이 나오고, 과하마가 있으며,[높이가 삼척으로 이를 타면 능히 나무를 밑으로 하고 간다.] 바다에서 반어 나오고, 사자가 오면 이를 모두 받쳤다.

韓(한)

<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殿本《考證》<王會汾>謂《晉》·《梁》二書皆作[弁韓], 當從改. 今按: 《魏志》亦作[弁韓].$/.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吊,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魏志》作[治<月支國>]. 《校補》謂《魏志》及《通志》[目]均作[月], 附載五十餘國亦作[月支國], 則此作[目支]誤也. 今按: <月支>乃<西域>國名, 《魏志》及《通志》之作[月支], 或後人習見[月支]之名而臆改與? 當考.$/,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한'은 세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마한'이요, 둘은 '진한'이요, 셋은 '변진'이다.[왕회분이 진과 양 두 책에 모두 '변한'이라하미 마땅히 고쳐 따라야 한다. 위지도 역시 '변한'이라 기록했다.] '마한'은 서쪽에 있어, 오십사개국이 있으며 북으로 '낙랑'에 접하고, 남으로 '왜'에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어 십이개국이며 북으로 '예맥'에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십이개국으로 남쪽은 역시 '왜'에 접한다. 무릇 78국으로 '백제'는 그 일국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를 거느리고 작은 나라는 수천여가를 거느리니 각각 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땅은 합하여 사천여리이고 동서로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이다. 마한은 가장 커서 함께 그 무리에서 '진왕'을 세워, '목지국'에 도읍하니,[위지에는 '월지국(月支國)에서 다스렸다.'하고 위지에서 통지까지 '目'을 '月'으로 썼고, '오십여개국이 역시 월지국이라 짓고 따르니,' 곧 이것은 '목지'의 잘못이다. '월지'는 '서성'국명이다. 위지에서 통지까지 '월지'로 기록하니 '월지'라는 이름이 후세사람이 혹 보고 익혀 고친 것이 아닐까? 마땅히 생각해봐야 한다. ] 다하도록 삼한땅에서 왕노릇하였다. 그 여러나라의 왕은 모두 '마한'의 종류에서 먼저 시작하였다.


< 馬韓>人知田蠶, 作 布. 出大栗如梨. 有長尾 , 尾長五尺. 邑落雜居, 亦無城郭. 作土室, 形如 , 開戶在上. 不知 拜. 無長幼男女之別. 不貴金寶錦 , 不知騎乘牛馬, 唯重瓔珠, 以綴衣爲飾, 及縣頸垂耳. 大率皆魁頭露 ,{魁頭猶科頭也, 謂以髮 繞成科結也.  音計.} 布袍草履. 其人壯勇, 少年有築室作力者, 輒以繩貫脊皮,  以大木,  呼爲健. 常以五月田竟祭鬼神, 晝夜酒會,  聚歌舞, 舞輒數十人相隨 地爲節.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天君]. 又立蘇塗,{《魏志》曰:[諸國各有別邑, 爲蘇塗,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蘇塗之義, 有似浮屠.]}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

'마한'사람들은 논농사와 양잠을 알고 면포를 지었다. 큰 밤이 나오는데 배만했다. 긴꼬리가 있는 닭이 있어 길이가 오척이나 되었다. 읍락이 섞이어 있으니 또한 성곽이 없다. 흙으로 집을 짓고 사니 모양이 무덤과 같고 출입구가 위로 있다. 꿇어 업드려 절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른과 어린이, 남녀가 다름이 없고, 금은 보화와 비단 그물의 귀함을 모르며 소나 말을 타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오직 큰 구슬로써 옷에 꽤메어 치장하고 귀에 달아 늘어뜨리니 목에까지 이르렀다. 큰 무리를 이끄는 자는 괴두에 상투를 틀고[괴두는 마치 과실수와 같다. 터럭을 둘러 과실과 같이 모여 묶었다. ' '음은 '計'이다.] 베옷에 솜을 틀고, 신을 신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장대하고 용감하여 어린애들도 성을 쌓고 집 짓는데 힘을 쓰고, 문득, 허리에 줄을 매어 큰 나무에 매달리어 소리치며 강건함을 부르짓었다. 항시 오월이면 논경계에서 귀신에 제사지내며 주야로 술마시며 모임을 가지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추다. 문든 수십인이 서로 춤추며 땅을 밝으며 따랐다. 시월 농사일을 마치면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여러나라의 읍락이 한 사람을 주인으로 천신에 제사지내는데 이를 '천군'이라한다. 또한 소도를[위지에 말하길 제국에는 각각 다른 읍이 있으니 '소도'라 한다. 나라가 망하여 도망가 이에 이르면 모두 이를 잡지 못한다. '소도'를 의라하니 이는 '부도(불탑)'와 같음이 있다.] 세워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기었다. 그 남쪽경계는 왜와 가까와 역시 몸에 문신을 하였다.

<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 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按:<王先謙>謂《魏志》[爲]上有[皆]字.$/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 ,/$按:《集解》引惠棟說, 謂《魏志》[ ]作[穢].$/ 次有殺奚, 次有邑借.{皆其官名.} 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 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倭>·<馬韓>  從市之. 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據殿本改. 按: 汲本[貿易]作[質易].$/ 俗憙歌舞飮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扁音補典反.}

'진한'은 늙은 노인이 말하길 '진나라'에서 도망한 사람이다. 고역을 피하여 달아나 '한국'에 이르르니, '마한'이 동쪽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각나라를 '방'이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도적을 '관'이라하고, 술을 '상'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사'라 하니[위지에는 '爲'위에 '皆'자가 있다.] '진'나라 말과 같음이 있다. 고로 혹 말하길 '진한'이라 한다. 성책과 집이 있고, 모두 작은 별읍이 있어 각각 우두머리가 있다. 큰 우두머리를 '신지'라 하고 다음은 '검칙' 다음은 '번지'[위지에는 ' '이 '穢(예)'로 적혀 있다.] 다음은 '살해' 다음은 '읍차'이다.[모두 이는 관명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좋으며 오곡이 마땅하고 양잠을 알아 비단을 지었다. 소와 말을 타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예가 있고 길가는 자는 서로 길을 양보하였다. 나라에 철이 나오니 '예', '왜', '마한'이 함께 쫓으니 이를 거래 하였다. 무릇 철로 무역하니, 모두 철을 재화로 하였다. 풍속이 가무에 음주하고 북치고 거문고 타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우두머리를 시키고자 머리를 편편하게 하니, 모두 돌로써 머리를 눌렀다. ['扁'음은 '보전'으로 바뀌었다.]

< 弁辰> 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其人形皆長大, 美髮, 衣服 淸. 而刑法嚴峻. 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변진'은 '진한'과 섞이서 산다. 성곽과 의복이 모두 같다. 언어 와 풍습은 다름이 있으니 사람의 형태가 모두 장대하고 아름다운 머리를 가지고 있고 의복은 밝은 것을 두르며, 형벌과 법은 엄하다. 나라 가까이 '왜'가 있어 고로 두루 몸에 문신을 한다.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 >等詣<樂浪>貢獻.{<廉斯>, 邑名也.  音是.} <光武>封<蘇馬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靈帝>末, <韓>·<濊> 盛, 郡縣不能制, 百姓苦亂, 多流亡入<韓>者.

처음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깨져 이에 장수와 남은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고 이를 깨뜨린후 스스로 '한왕'에 올랐다. '준'후로 망하여 끊어졌다. '마한'사람들이 다시 스스로 '진왕'이라 하였다. '건무' 이십년 '한', '염사', '소마시' 사람등이 이르러 '낙랑'에 조공하였다.['염사'는 읍의 이름이다. ' '음은 '是'이다.] '광무'가 '소마시'를 한의 '소마읍군'에 봉하고 사신으로 '낙랑군'에 속하게 하니 사시 알현하였다. '영제' 말에 '한','예'가 함께 흥하고, 군현이 능히 제도 하지 못하자 백성들이 괴롭고 어지러워 많이 떠돌아다니다. '한'으로 들어갔다.

< 馬韓>之西, 海島上有<州胡國>. 其人短小,/$按:《集解》引沈欽韓說, 謂《魏志》[人]下有[差]字.$/  頭, 衣韋衣, 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貨市韓中.

마한의 서쪽 바다섬 위에 '주호국'이 있다. 사람들이 작고,[위지에는 '人'자 밑에 '差'자가 있다.] 머리를 깍고 가죽옷을 입는데 위만 있고 아래는 없었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고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에서 재화를 교역하였다.

倭(왜)

<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島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刊誤》謂[驛]當作[譯], 說已見上. 按: 《魏志》作[譯].$/ 國皆稱王, 世世傳統. 其<大倭王>居<邪馬臺國>./$按:《集解》引惠棟說, 謂《魏志》[臺]作[堆].$/{案:今名<邪摩(惟)[堆]>, 音之訛也.}/$邪摩(惟)[堆] 按:汲本·殿本作[邪摩推], 此作[惟], 形近而 . 又《集解》引<惠棟>說, 謂案《北史》[推]當作[堆]. 今據改.$/ <樂浪郡> , 去其國萬二千里, 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 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 與<朱崖>·< 耳>相近, 故其法俗多同.

왜는 한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의 산에 의지하여 거하니, 무릇 백여개국이나 되었다.['驛'은 마땅히'譯(통역하다)'이니 위지에도 '譯'이라 한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자 사자를 '한'으로 30여개국이나 통하였다. 나라를 모두 왕이라 칭하고 세세토록 이었다. '대왜왕'은 '사마대국'에[위지에는 '臺'가 '堆(퇴)'이다. '堆'음은 '訛(와)'이다. 또는 '邪摩推'라 기록되어 있는데 북사에 '推'는 마땅히 '堆'라 한다.] 거하였다. '낙랑국'과는 멀어 그 나라에서 만 이천리를 간다. 서북쪽으로 '구다한국'과 경계하니 칠천여리를 간다. 그 땅을 크게 보면 '회계','동치'의 동쪽에 있고, '주애' '첨이'와 서로 가까운 고로 기 법과 풍속이 많이 같다.

土宜禾稻·麻紵·蠶桑, 知織績爲 布. 出白珠·靑玉. 其山有丹土. 氣溫 , 冬夏生菜茹. 無牛馬虎豹羊鵲.{[鵲]或作[ ].} 其兵有矛·楯·木弓, 竹矢或以骨爲鏃./$汲本[竹]作[其].《校補》謂傳本以[其兵][其矢]相次成文, 作[其矢]於義爲長. 今按: 《御覽》七百八十二引作[竹矢]. 《魏志》亦云[兵用矛·楯·木弓, 木弓短下長上, 竹箭或鐵鏃或骨鏃], 似以作[竹矢]爲是.$/ 男子皆 面文身, 以其文左右大小別尊卑之差. 其男衣皆橫幅結束相連. 女人被髮屈 , 衣如單被, 貫頭而著之;  以丹朱 身,{《說文》曰:[ , 塵也.] 音蒲頓反.} 如中國之用粉也. 有城柵屋室. 父母兄弟異處, 唯會同男女無別. 飮食以手, 而用 豆. 俗皆徒跣, 以 踞爲恭敬. 人性嗜酒. 多壽考, 至百餘歲者甚衆. 國多女子, 大人皆有四五妻, 其餘或兩或三. 女人不淫不 . 又俗不盜竊, 少爭訟. 犯法者沒其妻子, 重者滅其門族. 其死停喪十餘日, 家人哭泣, 不進酒食, 而等類就歌舞爲樂. 灼骨以卜, 用決吉凶. 行來度海, 令一人不櫛沐, 不食肉, 不近婦人, 名曰[持衰]./$《校補》謂《魏志》[衰]作[哀]. 今按: 百衲本《三國志》亦作[衰].$/ 若在塗吉利, 則雇以財物; 如病疾遭害, 以爲持衰不謹, 便共殺之./$按:《校補》謂《魏志》[共]作[欲].$/

흙은 벼와 마 양잠에 마땅하여 베짜고 길쌈하여 비단만드는 것을 안다. 흰 구슬과 청옥이 나오고 그 산은 붉은 흙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겨울이나 여름이나 채소가 나온다. 소 말 범 표범 양 까치가 없다. [까치를 혹은 '口'라 적었다.] 병사는 창과 방패와 목궁, 대나무 화살이 있고 뼈로 화살촉을 하였다. 남자는 모두 얼굴에 문신을 하고 이로써 좌우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의 차로 하였다. 남자 옷은 모두 가로로 서로 잇다아 맺어 묶고 여자는 머리털을 굽어 상투틀고 옷은 홋이불과 같은데 머리 부분을 뚥어 이를 표시하였다. 병행하여 주사를 몸에 칠하는데[설문에 말하길 ' '은 '塵(먼지)'이다. 음은 '蒲頓(포돈)'으로 바뀌었다.] 중국에서 분을 칠하는 것과 같다. 성책과 잡이 있어 부모형제가 다른곳에 머므르고 오직 같은 남녀가 차이가 없이 모인다. 음식은 손으로 먹고, 변두 그릇을 사용하며 풍속은 모두 맨발이고, 웅크리고 모으는 것으로 공경을 표한다. 인성이 술을 즐기고 목숨이 길어, 백여세에 이르는 사람도 많다. 나라에 여자가 많아 성인이 되면 모두 사오명의 처가 있고 , 혹은 이 삼명 정도이다. 여인들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으며 또한 풍속에 도둑이 없다. 작은 다툼에 송사하여 범법자이면 그 처자까지 죽이고, 중하면 그 문족을 멸한다. 사람이 죽으면 십여일을 장사하고, 집안 사람들은 울면서 술과 음식을 하지 않으며 이러한 것이 끝나면 가무로 즐거움을 즐긴다. 뼈를 구워 길흉을 판단한다. 가다가 바다를 건너게 되면 한 사람을 시켜서 머리에 빗질도 못하게 하고 목욕도 못하게 하며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을 '지쇠'라고[위지에는 '衰''哀'이고 삼국지에는 '衰'이다.] 한다. 이 사람이 잘해서 길하고 이로운 일이 있으면 곧 재물로써 갚고 만일 병이 생긴다거나 해로운 일을 당하는 날이면 이것은 '지쇠'를 경계하지 않았음으로 그를 여럿이서 죽였다.[위지에는 '共'이 '欲'으로 되어 있다.]  

< 建武中元>二年, <倭奴國> 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건무중원' 이년 '왜노국'이 받들어 조공하고 하례하였다. 사자는 스스로를 '대부'라 칭하니 '왜국' 제일 남쪽지역이다. '원무' 가 인수를 주어 하례하였다. '안제' '영초' 원년 왜국왕 '수승'등이 백성 백육십인을 바치며 만나기를 청하였다.

< 桓>·<靈>閒, <倭國>大亂, 更相攻伐, 歷年無主.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 侍婢千人, 少有見者,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語. 居處宮室樓觀城柵, 皆持兵守衛. 法俗嚴峻.

'환제''영제' 사이에 '왜국'에 큰 난이 있어 서로 공격하고 벌하니 그 여러해 동안 주인이 없었다. 한 여자가 있으니 이름이 '비미호'로  나이가 많으나 시집을 가지 않았다. 귀신의 도를 부리고 능히 기이히여 이로써 무리를 미혹케 하니 이로써 함께 왕으로 추대하였다. 시비가 천인이지만 보았다는 사람이 적다. 오직 남자 한명이 있어, 음식을 나르고 말을 전하였다. 궁실에 거하고 성책의 망루에서 관망하며 모든 병사들이 지키었다. 법과 풍속이 엄하였다.

自<女王國>東度海千餘里至<拘奴國>, 雖皆<倭>種, 而不屬<女王>. 自<女王國>南四千餘里至<朱儒國>, 人長三四尺. 自<朱儒>東南行船一年, 至<裸國>·<黑齒國>, 使驛所傳, 極於此矣./$按:此[驛]字亦當作[譯].$/

'여왕국'으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구노국'에 이른다. 비록 '왜'의 종류이나, '여왕'에는 속하지 않았다. '여왕국' 남족으로 사천여리에 '주유국'에 이른다. 사람이 삼사척이다. '주유'에서 동남쪽으로 배로 일년을 가면 '나국'과 '흑치국'에 이른다. 사신이 전하는바 여기가 끝이다.['驛'자는 마땅히 '譯'이다.]

< 會稽>海外有 <東 人>,{ 音達奚反.} 分爲二十餘國./$按:《校補》引<錢大昭>說, 謂< >本[二]作[三].$/ 又有<夷洲>及< 洲>. 傳言<秦始皇>遣方士<徐福>將童男女數千人入海,{事見《史記》.} 求<蓬萊>神仙不得, <徐復>畏誅不敢還, 遂止此洲, 世世相承, 有數萬家. 人民時至<會稽>市. <會稽><東冶縣>人有入海行遭風, 流移至< 洲>者. 所在絶遠, 不可往來.{<沈瑩>《臨海水土志》曰[<夷洲>在<臨海>東南, 去郡二千里. 土地無霜雪, 草木不死. 四面是山谿. 人皆 髮穿耳, 女人不穿耳. 土地饒沃, 旣生五穀, 又多魚肉. 有犬, 尾短如 尾狀. 此<夷>舅姑子婦臥息共一大牀, 略不相避. 地有銅鐵, 唯用鹿格爲矛以戰鬪, 摩礪靑石以作(弓)矢[鏃]. 取生魚肉雜貯大瓦器中, 以鹽鹵之, 歷月所日, 乃啖食之, 以爲上肴]也.}/$摩礪靑石以作(弓)矢[鏃] 據《御覽》七百八十引改.$/

'회계'에서 바다 밖으로 '동제인'이 있다.[' '음은 '達奚(달해)'로 바뀌었다.] 나누어 이십여국이다. [전대소가 말하길 '민'본에는 '二'자가 '三'자로 쓰여있다.] 또한 '이주'에 미치어 '단주'가 있다. 전하길 '진시황'이 방사 '서복'을 파견하여 어린 남녀 수천인과 바다로 들어가 '봉래'의 신선을 구하구했지만 얻지 못하자, '서복'이 주살될까 두려워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이주에 멈추어 이르르니, 세세토록 서로 계승하여 수만가를 이루었다. 백성들이 이때에 이르러 '회계'에서 장사하고, '회계''동치현' 사람들이 바다에 들어가서 가다 바람을 맞나 흘러들어가 '단주'에 이르러 피하였다. 그 곳이 먼 곳에 있어 가이 왕래하지는 못하였다.[침영이 임해수토지에서 말하길 '이주'는 '임해'의 동남에 있다. 군에서 이천리를 가고 토지에 서리와 눈이 없고 초목이 죽지 않는다. 사방에 산과 냇물이 있고 사람들은 머리를 깍고 귀에 구멍을 뚫으나 여자는 뚫지 않았다. 토지는 물대기에 용이하고 이미 오곡이 나며 또한 물고기와 고기가 많다. 개가 있는데 꼬리가 짧아 노루꼬리 형상과 같다.이 '이'는 시부모와 아들 며느리가 큰 침상에서 함께 누워 숨시는데 서로 피하지 않는다. 땅에 동과 철이 있고 사슴뿔을 사용하여 창을 만들어 전쟁에 쓰고, 푸른돌을 갈아 화살촉을 만든다. 물고기와 고기를 날로 취하여 큰 그릇 가운데에 담아 소금을 넣고 몇 달이 지나면 이를 밥으로 먹으며 좋은 안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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