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투쟁 Korea's Fight for Freedom
프레데릭 아아더 매켄지(F. A. Mckenzie)
11. 무단정치
[제1장부터 제10장까지 생략]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처음에는 사내(寺內正毅) 백작 지배, 다음은 장곡천(長谷川好道) 장군 지배 일본의 한국 통치는 행정적으로 가장 가혹하고 무자비한 양상을 드러냈다. 1919년 합방이 성립되자 통치에 철저를 기했는데 지금까지 장애가 된다고 인정되는 요인들을 일소해 버렸다. 총독은 자기 마음대로 법령을 공포하고 거기에도 소급 효력까지 부여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장악하게 되었다. 치외법권(治外法權)은 완전히 폐지되고 한국 내의 모든 외국인은 전력으로 일본 법률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일본 위정가들의 전쟁 때의 능률을 평화시에도 보이려고 야심이 대단하였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아울러 다른 나라의 식민지경영방법도 주의 깊게 연구해 왔었다.
1910년 합방으로부터 1919년의 민중 봉기가 일어난 기간 동안에 물질적인 진보는 상당히 이룩되었고 낡고 무기력한 행정은 쇄신되었으며 통화가 건전화되고 철도가 대폭 연장되고 도로가 개선되며 조림(造林)이 대규모로 추진되고 농업이 발달하고 위생 시설이 개선되어 새로운 산업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동안에 일본의 한국통치는 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던 것으로서 핀란드나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과오나 보스니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帝國)이 저지른 과오보다도 더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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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식민지를 통치한 예를 보면 미국의 쿠바 지배가 최선의 예이며 일본의 한국 지배가 최악의 예이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그릇된 정신으로 중대한 과업에 임한 것으로서 그들은 아직 그런 큰 일을 감당해 낼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국인을 경멸하는 정신과 생각으로 지배를 시작했다. 무릇 선정(善政)은 위정자가 동정하는 마음씨를 가져야만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그들은 덮어 놓고 무모하게 얕잡아 보는 자세였으므로 동정심이 우러나올리가 만무했다. 일본인들이 한국 통치에서 착수하려는 일은, 그리고 실천한 일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되 자기네 상전(上典)과는 달리 자격이 없는 가치 없는 하층 계급의 일본인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대체로 전통과 민족 정신이 없는 것도 아니고 소수의 나약한 민족이 아닌 바에야 대등한 민족에게 동화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4천년 동안 존립해 온 민족이 자기네가 경멸하는 열등한 민족에게 동화된다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혹 가정한다면 그 민족의 극소수의 나약 분자를 동화시키는 한편, 민족 정신이 투철한 대다수의 국민을 학대하여 때로는 직접 학살하기도 하고 또는 마약이나 그 밖의 악습을 만연시켜 타락시키는 방법에 의하여 말살한다면 동화가 가능할는지도 모른다.
일본인은 자기네들의 능력은 과대평가하는 반면 한국인의 능력은 과소평가하고 임한 것이다. 일본인은 미국과 유럽, 특히 미국에 박수 부대를 용의 주도하게 조직하여 놓았다. 즉 일본의 한국통치정책의 앞잡이들을 돈을 주고 매수하여 고용했는데 그 중 몇 명은 매우 책임 있는 지위까지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정책을 찬양하고 일본의 활동을 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교묘하게 한편으로는 아첨을 하고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야심을 갖게 하는 등의 아주 미묘 복잡한 방법으로 자기 편을 만들었던 것이다. 외교관과 영사관 직원들, 그 중에도 영국·미국인들에게 반 공갈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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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에 잘 못 보이면 재미 없다’고 귀띰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외국인들이 일본 민족성의 좋은 면에 매혹되어 일본 편을 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외교적·사회적으로 능란한 술책에 비하면 다른 나라들은 어린애와 같았다. 그들은 자화 자찬에 힘을 썼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한국인은 아무데도 쓸모없는 끝장난 민족이다’라는 여론을 조장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그들은 아첨하는 자들의 말에 넘어가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 왔던 것이다. 일본 문명은 세계 최고이며 일본은 장래에 아시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지도자가 될 것이며 한국인은 그러한 일본인 상전을 위해 나무나 하고 물이나 긷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만일 일본이 지혜와 긴 안목이 있어서 미국이 쿠바 인을 다루듯이 또는 영국이 지브로올터 인을 다루듯이 한국인을 다루었다면 두 민족은 동화는 어려울 지라도 진정한 융화는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상 한국인은 한국의 구 정치의 낭비와 악폐와 졸렬함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인의 이익을 앞세우지는 않고 일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그 땅을 통치해 왔던 것이다. 즉 일본인 착취자인 일본 이주민을 우선적으로 배려 했다.
그 후 일본은 이 땅을 전시장으로 만들려고 정교한 건물을 세우고 철도를 개설하며 치안을 유지하는 일 등으로 국가 경제 능력을 훨씬 초과했다.
이러한 사치스러운 개선의 대가로 한국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과 노동력 동원을 강요당해야 했다. 개선이라고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당장 도움이 될 가능성이 없는 것도 많았다. 왜냐 하면 그러한 개선은 일본인을 위해서, 또는 외국인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통치 관리들은 피지배민에게도 이상과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망각하였는데 어린 애들을 막대기로 두둘겨 패면서, 어른들은 감옥에 집어 넣어 고생을 시킴으로써 충성을 강요했던 것이다. 나중에야 그러한 방법이 한국인의 반항만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깨닫고 당황했다. 그들은 한국 문화를 말살시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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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니 한국인이 일본 문화를 즐겨 배우지 않는다고 불만을 하고 있으며 한국인을 공공연히 모욕하고 나서는 한국인이 왜 자기들을 좋아하지 않나 하고 이상하게 풀이했다.
그들의 통치를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일본 통치의 두드러진 특징은 헌병과 경찰이라는 것이 일치된 여론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에 현재형을 쓴다.) 그들은 전국에 배치되어 있으며 명목은 여하간에 실제에 있어서 생살여탈권을 갖고 있다. 영장 없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수색할 수 있으며 마음 내키는대로 아무거나 현장에서 처분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찰이 어느 학생의 방을 임의로 수색하여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자기 마음대로 불태워 버릴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는데 때로는 이웃 사람들까지 보도록 길거리로 가지고 나와 불태우기도 한다.
경찰의 내방에 있어서 시골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 중의 하나는 정기적인 청결검사이다. 청결이 미흡하다고 생각되면 경찰은 사람들을 파출소로 연행하는 대신 즉석에서 채찍질을 한다. 또 기독교 신자들을 처벌하거나 이웃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는 일을 막으려는 지역에서는 경찰의 청결검사가 빈번하였다. 생트집을 잡기 위해서 기독교 신자 집을 찾아가 청결 상황은 채 보지도 않고 사람을 두들겨 패기도 하는데 이 방법은 특히 평안도 지역 일대에서 성행되고 있다.
경찰은 영장 없이 한국인이면 누구든지 체포·수색·구금할 수 있는데 이러한 수색권은 외국인에게도 마음대로 행사한다. 실제로 어떤 한국인이든지 경찰서로 연행해 가면 경찰은 하고 싶은대로 무기한으로 구속하고 재판하는 일도 없으며 생각나는대로 석방하거나 또는 즉결로 처벌할 수도 있다.
가장 흔한 경찰의 처벌은 매질이다. 일본인이나 외국인을 제외하고 전혀 한국인만이 매질을 당하기 마련인데 이 처벌로 병신도 만들고 몇 주일씩 병석에 눕게도 하며 또 때로는 죽이기도 할 수 있다. 법규도 여자, 60세 이상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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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세 이하의 소녀에게는 이 처벌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실제 경찰의 매질은 무차별인 것이다.
수 년 전 일본정부는 악명 높은 매질의 악폐를 막기 위하여 법령을 통과시켰으나 이 법령은 사문서(死文書)로 되어 있다. 공식 성명은 다음과 같다.
‘그것(태형)을 존속시키기로 하였으나 다만 한국인 범법자에게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1912년 3월에 태형에 관한 법과 시행령이 공포되어 지금까지 행해온 방법이 많이 개선되었다. 여자와 15세 이하의 소년 그리고 60세 이상의 노인은 태형이 면제되며 병든 죄수와 정신 이상자에 대하여는 이 형의 집행을 6개월 간 연기할 수 있다. 형벌을 가하는 방법 또한 개선되었으니 보다 큰 박애를 베풀어 불필요한 고통을 가능한 한 피할 수 있게 되었다.’(≪조선의 개선과 진보에 관한 연보≫서울, 1914년)
공식적인 주장은 그 쯤 해 두고 이번에는 실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통계 자료를 입수할 수 있는 마지막 해인 1916~1917년에 8만 2천 1백 21명의 범법자가 경찰의 약식 재판을 받았다. 즉, 재판 없이 경찰의 즉결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처벌의 3분의 2가(태형의 통계가 실제로 남아 있는 마지막 해에) 매질로 되어 있다.
사용된 도구(매)는 대나무 2개를 한데 묶은 것인데 법정 최고량은 90대, 즉 연 3일 간 하루에 30대씩이다. 이것으로써 ‘보다 더 박애’니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고자’ 운운의 그들 성명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매질은 인간의 육체에 최고의 고통을 주며 최대한의 시간을 끌도록 신중히 계산하여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그러한 일에 종사해 온 전문가라면 누구나 내 주장을 지지할 것이다.
병인·여자·소년·노인이 매를 맞는 것이다. 1919년의 소요사건 때 서울의 외국인 병원에서 치료 받던 환자를 경찰이 데려다가 매질을 했다. 의사·간호원의 항의도 소용 없었던 것이다. 노인이 매맞은 경우는 많이 보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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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 특히 젊은 여자를 벗기고 매질한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린이들을 매질한 경우를 보자.
다음 편지는 장로교병원이 있는 선천의 어느 선교사가 1919년 5월 25일자로 보낸 것인데 ‘미국기독교연합회’의 보고서에 들어 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목격자들의 편지도 보았다.
‘강계 소년 11명이 모처로부터 이 곳에 왔읍니다. 11명 모두가 90대씩의 매를 맞았읍니다. 즉 5월 16·17·18일 3일 동안에 하루 30대씩 맞고 5월 18일 석방되었읍니다. 5월 22일에 9명이 이 곳으로 오고 5월 24일에는 2명이 더 왔읍니다.
탁찬국 : 5월 23일 정오 경 사망
김명하 : 오늘 밤 사망
김형순 : 중태
김충순·송탁삼 : 걷기는 하나 심한 골절임
김우식 : 매우 염려되었는데 경과가 호전됨
최충원·김찬국·김성길·고봉수 : 움직일 수는 있으나 2명은 살이 찢어졌음.
김영하는 모처로부터 그의 형이 죽기 1시간 전에 자전거로 싣고 이곳에 도착했읍니다. 병원에 먼저 온 6명은 매맞은 후 4일 동안 끔찍한 상태로 있었읍니다. 붕대도 감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없었읍니다. 방금 샤록스(Sharrocks) 박사는 김명하가 죽은 후 다른 몇 사람의 용태(容態)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괴저(壞疽)라고 합니다. 소년들 중 하나는 천도교인이고 또 한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며 나머지는 모두 기독교 신자입니다.
레임프(Lampe)씨가 사진을 갖고 있는데 엉덩이에 매질을 하여 살이 흐물흐물해졌읍니다.’
보다 큰 박애!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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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절대주의의 방법은 틀림없어 극심한 악폐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사실에 있어서 그것은 끔찍한 독재가 되는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지의 1절은 그러한 폐단을 잘 보여 준다.
‘의회의 마지막 회기에서 몇몇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그는 한국에 있는 고위 검찰 간부의 강경한 증언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헌병이 범인을 수색하러 한국인 집에 들어가서 부녀자들을 능욕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가져가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이러한 야만적인 난행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침탈당한 한국인이 피해 보상을 받을 도리가 없음은 물론 범죄의 증거는 반드시 헌병에게 의존해야만 하므로 사직 당국은 소송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경찰 독재는 매질 뿐이 아니었다. 체포된 사람은 즉시 친지들과의 접촉이 단절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본인에게도 혐의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친지들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변호사의 조언을 받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친지들은 경찰에 잡혀서 사라졌다는 사실만을 알 뿐 재판을 받거나 석방될 때까지는 몇 달이고 소식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구속 기간을 통하여 본인은 자기에게 사건을 불리하도록 조사하는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데 경찰의 일이란 자백을 강요하는 일인 것이다. 경찰은 자백을 받기 위해서 으례히 고문을 하는데 일반적으로 아주 교묘한 방법을 쓴다. 피의자가 정치범의 혐의가 있을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경찰이 사건 조사를 마친 후 피의자는 검찰에 넘겨진다. 검찰의 올바른 기능은 경찰에 대한 통제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경찰이 검찰의 역할을 하는 때가 많으며 아니면 경찰과 검찰이 서로 합치되어 다룬다.
피의자는 법정에 끌려나갈 때 영국·미국 법정에서 부여하는 일반적인 보호도 거의 받지 못한다. 피의 사실에 대하여 무죄임을 증명하는 일은 피의자의 책임이다. 판사는 총독이 임명한 총독의 앞잡이며 실제로 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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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 판사는 총독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듣는다. 한국인의 친구들 중 가장 온건하고 경험 많은 사람들의 불평을 들어 보면 당국이 공정을 기하려고 하지 않는 한 공정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범죄 건수는 격증 일로에 있는데 그것은 경찰이 조작하기 때문이다. 공식 통계가 이를 가장 잘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1912년 가을 사내(寺內正毅) 백작은 한국 기독교 신자 수 천 명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보도에 대하여 답변하기를
“조사해 본 결과 전국 감옥에 재감 중인 한국인은 불과 2백87 명이다”(1912년 10월 3일자 ≪뉴우요오크 선≫지)라고 했다.
그의 계산이 엉터리임은 거의 확실한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계산하던 날 재감자를 모두 석방하고 그럴듯한 효과를 위해 약간만 남긴 것일 것이다. 후에 발표된 상세한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12년 한국인 재감자의 실제 수효는 1만2천 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했을 경우에도 그 후의 연도와 대조해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다음 공식 통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체포 유죄 판결은 연도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한국인의 생활은 아주 사소한 점까지 통제 간섭을 받는데 부유한 사람의 경우는 대개 일본인 청지기를 두어 그의 감독을 받게 마련이다. 은행에 예금을 하면 한 번에 조금씩 밖에 인출하지 못해 많은 액을 꺼내려면 그에 대한 사유를 설명하는 규제가 있다.
집회·언론·출판의 자유도 없다. 신문이나 도서는 출판 전에 검열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 검열제도의 실시는 어처구니 없는 양상이었다. 그것은 교과서에서 시작하여 글자 한 자, 말 한 마디에까지 미친다.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적용된다. 심지어 국민학교 졸업식의 식사(式辭)도 검열을 받는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 언론인이 감히 총독정치를 비판하면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즉각 감옥에 끌려간다. 일본인 신문 기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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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다 못하여 그러한 검열 하에서 일할 것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현재 한국에서 한국어로 출판되는 신문은 단 하나인데 일본인이 발행하고 있다.
어느 미국인 선교사가 잡지를 출판하고 시사 문제에 대하여 온건한 논평을 약간 썼는데 일본 당국자로부터 ‘다시는 그러한 짓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헐버어트(Hulbert) 선생이 만든 많은 교과서는 조금도 편파적이 아니었는데도 없애 버렸다.
광적인 검열 중에서도 가장 우스꽝스러웠던 일은 게일(Gale) 박사가 당한 경우인데 그는 한국에 있던 선교사 중에서 가장 연로하고 가장 박식하며 존경받던 사람의 하나이다. 그는 영국인으로서 1919년 일본인의 야만적인 행위를 목격하고 비로소 소신이 꺾였지만 그 이전에는 오랫동안 일본의 입장을 옹호해 왔었다. 그러나 그런 게일 박사와 같은 사람이 일본인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옹호자라는 사실로써도 일본의 검열을 막지는 못했다. 언젠가 게일 박사는 자기가 교과서로 만든 ≪조선어독본≫이 사용 금지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검열 책임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그 책의 내용에 ‘불온사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게일 박사는 더욱 얼떨해져서,
“불온사상을 내포한 구절을 지적해 주시오”
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이에 검열관은 책 속에 실려 있는 키플링(Kipling)의 유명한 ‘코끼리 이야기’의 번역문을 보여 주었다.
“그 얘기에서 말이요, 코끼리는 두번째 주인을 섬기기를 거부하였소”
라고 하며 험악한 태도로 내뱉었다.
게일 박사는 이처럼 교묘한 방법으로 두 번째 주인, 즉 일본 황제를 섬기지 말라고 한국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려 한 데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한국인은 언론인이 되기만 하면 곧 점찍혀져 끊임 없이 감시를 받고 체포되게 마련이있는데 그 까닭은 무슨 일을 했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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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했거나 하리라고 경찰이 추측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하여 당연한 결과로 한국인은 정상적인 언론 활동에서 추방되어 비밀리에 지하신문(地下新聞)을 만들게 되었다.
한국인 재감자 연도
기결 수
미결 수
합계
1911
7,342
9,465
16,807
1912
9,652
9,842
19,494
1913
11,652
10,194
21,846
1914
12,962
11,472
24,434
1915
14,411
12,844
27,255
1916
17,577
15,259
32,836
한국인이 겪는 두번째 커다란 압박은 일괄하여 ‘착취’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일본의 계획은 한국인으로부터 되도록이면 보다 많은 땅을 빼앗아 일본인에게 넘겨주려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갖은 속임수를 다 썼다. 일본은 점령 초기에 내세웠던 구실로서 그들의 육군이나 해군이 작전에 필요하다고 광대한 토지를 점유하였다가 대부분을 일본인에게 양도하는 것이었다. 이등(伊藤博文) 통치기관의 가담자이며 그의 지지자였던 미국의 스티븐스(Stevens)씨도 이 점을 시인했다. 즉,
‘처음에 한국에 있던 일본군 당국이 필요량 이상으로 많은 토지를 징발할 의향을 표시한 일은 조금도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당초에 일본이 한국의 공유지를 무더기로 빼앗으려 한 소위 장삼(長森藤吉郞)안(案)은 너무나 강렬한 분격을 자아냈기 때문에 철회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착수했다. 한국 토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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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이러한 땅을 총독부에서 덮어 놓고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런 한국 토지의 대부분은 오랜 옛날부터 매우 애매한 소작제도 하에서 경작인이 점유해 온 공유지(公有地)였던 것이다. 그들은 토지차용계약(土地借用契約)을 조사한 다음 농민들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는 방법을 썼다.
일본이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설립한 목적은 일본인을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한국에 이주시킨 다음 정착(定着)할 토지와 농기구, 그리고 그밖에 편의를 제공하여 한국을 일본인의 손으로 개발하고 일본인을 한국에 정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회사는 직접 일본정부와 제휴하여 운영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거대한 금융업을 겸한 독점적 기업으로서 연간 5만 파운드의 일본정부 보조를 받았다. 이와 보조를 맞춘 조선은행(朝鮮銀行)은 반관반민의 은행으로서 한국 재정상 최고 권능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기관(조선은행)의 소행에 대하여는 ≪뉴우요오크 타임즈≫기자가 잘 설명하였다(1919년 1월 29일자).
‘이 사람들은 그들이 물려받은 땅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일본정부의 권력이 완전히 아시아적인 방식을 느끼게 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였다. ……이 강력한 금융 기관은 지점들을 통하여 ……국내의 모든 화폐를 회수함으로써 유통 수단에 관한 한 사실상 토지가 무가치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화폐가 고갈되자 당장 한국인들은 현금이 필요하여 이를 얻기 위해서 자기가 갖고 있는 땅을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따라 토지 가격은 급격히 하락했으며 어느 경우에는 조선은행이 대리인을 시켜서 전에 자기들이 사정한 가격의 5분의 1의 가격으로 사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사용한 방법에 대해서는 시비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현재 한국의 가장 비옥한 토지의 5분의 1이 일본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토지 수탈과 병행하여 신작로(新作路) 공사를 위한 부역, 즉 시골 농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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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동원하여 노동을 시켰다. 적당하게 하였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겠으나 일본 관헌이 강권을 발동한 것이었으므로 끔찍스러운 무리가 따랐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좋은 도로망을 만들 계획을 가졌고 그것을 농민의 부역으로 실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토지 수탈과 부역에 대하여는 오히려 일본 측 자료에서 가장 확실한 증거를 입수할 수 있는 것이다.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교수로서 일본 국고에서 봉급을 받고 있는 길야(吉野) 박사는 한국에 대하여 특별 연구를 발표했다. 그가 ≪다쭈오공론(Taschuo-Koron)≫에 기고를 발표한 것을 보면,
‘한국인은 신작로를 만드는 그 자체보다도 그 일을 실행하는 방법이 전제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땅을 징발하기 위하여 사정 없이 무자비하게 법적 수단을 사용했기 때문에 거기에 관련된 한국인은 아무런 보상도 받음이 없이 가산을 빼앗겨야만 하였다. 그들은 또한 아무 보수도 없이 도로 공사에 강제로 동원되는 경우도 많았다. 더욱 가혹했던 일은 동원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무보수로 동원되는 인부들의 편의는 조금도 고려됨이 없이 오직 관료들의 편리만을 근본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자기들을 탄압하러 오는 일본군의 편의를 위해서 도로를 만든 결과가 되었고 그러는 동안 가족은 굶주리고 파산하는 것이 예사였다.
한국인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인들이 개선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선은 일본인 자신들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농업을 개량한다고 한국 농민을 몰아내고 대신 일본인들을 들어 앉힌 것이다. 서울 시가지의 도로를 포장한다고 하지만 한국인 가게는 없어지고 일본인 상점들이 들어서고 있다. 상업을 장려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일본인 상업을 장려하며 한국인 상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탄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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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완전히 일본화 되었다. 즉 학교의 첫째 목표는 한국의 어린이들을 선량한 일본 신민(臣民)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었다. 교육은 거의 다 일본인들이 일본 말로 했으며, 모든 의식과 일과는 전혀 일본을 찬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불평하는 것은 이러한 것보다도 같은 한국에서의 교육제도인데도 한국인을 위한 것이 일본인을 위한 그것보다도 질(質)을 낮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자녀는 학교가 서로 달랐고 한국인을 위한 교육 과정은 4년인데 일본인의 경우에는 6년이었다. 일본인 학교는 인구 비례로 보아 한국인 학교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았으며 운영비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한국의 교육은 아직 발전 초기 단계에 있으며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욱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공립학교에서 한국 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한국의 과거에 대한 애착심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고 하는데 대하여 한국인들은 몹시 불평했다. 그런데 일본 당국의 그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실패에 돌아가고 말았다. 그 사실로서 공립학교 학생들이 기독교계통 학교 학생들보다도 3·1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사실로써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일본 언론인은 한 공립여학교 교장이 수신(修身) 시간에 3단 논법을 펴서 여학생들의 분격을 샀다는 사건을 보도한 일이 있다. 즉 그는 ‘야만인은 건강하다. 한국인은 건강하다. 고로 한국인은 야만인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선생들은 고종 황제가 붕어한 후에 하급 천인(賤人)들에게나 쓰는 말을 그에게 사용하여 학생들을 격분케 했다. 동양에서는 경어(敬語)와 정확한 호칭이 매우 중요시되므로 그보다 더한 모욕은 상상조차할 수 없었다.
총독부의 학정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자유를 말살하고 궁정을 부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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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庶民)을 실제로 정부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자존심을 과시하여 안하 무인 격으로 휘두르며 특정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악의 씨를 키움으로써 한국 대중을 조직적으로 타락시켜 온 일들이다. 사실 상 이제까지 아편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현재에 있어서는 당국의 장려 하에 아편이 대규모로 재배되고 있으며 수 많은 일본인 행상들이 모르핀을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쁜 짓이란 숨어서 했던 것이다. 오늘날 수도 서울의 밤거리에 가장 눈에 띄는 일은 눈부시게 휘황한 불을 밝힌 공창가(公娼街)로서 당국이 만들어 일본인이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인 젊은 여성들이 이 곳으로 많이 끌려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도 공창 지대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일본인 포주(抱主)들은 성병에 걸린 여자들을 한 패거리씩 인솔하고 시골을 순회하고 있다. 한번은 저자가 선천에 갔을 때 당국이 일본인 창녀들을 가정에 숙박시키라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명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 있는 일부 한국인이 일본의 한국 통치에 있어서 도덕적인 문제를 다룬 청원서를 북경주재미국공사에게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결혼에 관한 규제를 없애고 예식을 갖추지 않고 연령에 상관 없이 결혼하도록 함으로써 윤리의 타락을 조장했읍니다. 심지어는 12세 밖에 안 되는 나이에 결혼하기도 했읍니다. 합방 이후 한국에는 이혼■수가 8만 건이나 되었읍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 매춘부들을 중국의 도시에 파는 일을 장려하여 세입(歲入)의 재원으로 삼았읍니다. 이것은 일본인의 계획적인 인종말살정책이며 그렇게 하여 한국인을 말살시키고자 합니다. 원컨대 하느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굽어 살피시기를 비옵니다.
일본 당국은 아편 판매를 전담하는 관청을 두고 의약품으로 쓰인다는 구실 하에 한국인과 대만인들로 하여금 아편 재배에 종사케 하였읍니다. 아편은 선박으로 몰래 중국으로 보내집니다. 일본인들이 이 교역을 장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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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한국인 중에서도 그 사용자가 증가되고 있읍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위한 학교도 중학교까지만 허용하였으며 선교사들이 설립한 상급학교에 대하여는 가혹한 통제를 가했읍니다. 극동의 문명은 중국에서 일어나서 처음에 한국에 전파되고 그곳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읍니다. 고서(古書)는 일본보다 한국에 더 많으나 합방 이래 일본인들은 이러한 책을 없애 버리고 한국인이 공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읍니다. 이러한 ‘살유분서(殺儒焚書)’는 한국인을 타락시키고 전통 문화를 말살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읍니다.
우리 민족은 어떻게 해야 말살을 면할 수 있을까요? 비록 일본정부가 선정(善政)을 베푼다 하여도 일본인이 어떻게 다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읍니까? 일본정부가 학정을 베풀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민족의 소멸이 아니면 또 무엇이 있겠읍니까?‘
일본인들은 한국과 국교재개(國交再開) 이래 개인적으로 접촉할 때 한국인을 대하기를 마치 발가락 사이의 때만큼도 못하게 했으며 마치 농가에 태어난 야비하고 심술쟁이 여자가 남편이 요행으로 벼락 부자가 되자 자기가 고용하게 된 불행한 귀부인을 못살게 구는 것 같았다. 일본인은 기왕에도 못할 짓을 실컷 하였는데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이후로는 그 행패는 더욱 심해졌다.
일본인은 품팔이군도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다니다가 한국인이 거리적거리기만하면 무조건 주먹질을 하였다. 배나 기차 속에서 한국 남자가 가까이 오기만하면 일본인 장사꾼의 여편네들은 자기가 배운 한국 말 욕설을 함부로 내뱉는다. 말단 일본인 공무원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인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태도이다. 일본 신문은 한국에서 일본인 헌병들이 한국 학생들에게 최고의 경의(敬意)를 강요하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황족에게나 적합할 정도라고 일본 국회의원의 발언을 신문에 보도했다.
일본인이라면 밑바닥 품팔이꾼도 신분이 높은 한국인을 제멋대로 차고 때리고 갈기는 권리를 행사하지만 한국인은 이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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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처음부터 주먹에는 주먹으로 상대했더라면 상당수가 죽었을 것은 물론이지만 일본인의 버릇은 고쳤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싸울 만한 중대한 이유가 없으면 싫어하는 것을 기화로 일본인들은 더욱 한국인을 못살게 굴었고 조금도 삼가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실례로 보아 일본 관리들은 자기의 지배를 받는 사람에게 대하여 경멸을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일본인 교사들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일본 당국의 관리가 그러하듯이 이들 학교 선생들은 권력의 상징인 칼을 차고 다녔다. 꼬마들 학급의 담임 선생이 자기 반 어린이들을 겁나게 하려고 칼을 덜그럭거리는 장면이나 그 칼을 꺼내 보여 소녀들을 공포에 떨게 하려고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사내(寺內正毅)의 무단정치는 책임자 장곡천(長谷川好道)이 계승하였는데 이 때문에 산 속에서 주로 활약해 온 의병의 항쟁은 종식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다시 모여서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기독교 신자들과 비신자들은 공동의 유대를 찾아 단결하였다. 그들의 영생(營生)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자 무절제한 전제 하에서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죽는 길이 나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결과 마침내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집을 빼앗기고 또는 더 이상 일본에 복종치 않겠다고 결심하고 만주로 망명했는데 그 방법은 모두 험준한 산길을 거쳐야 하는 어렵고 위험한 여행이었다. 봉천(심양)에 있는 만주기독교대학의 쿠크(W. T. Coo■) 목사의 보고서를 보면 이 여행의 의의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주로 오는 한국 이민들이 겪는 형언할 수 없는 수난은 그들의 참상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일지라도 충분히 인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하 40도의 엄동 설한에 삼라 만상이 얼어 붙은 속에 흰 옷을 입은 모습들이 10명씩, 20명씩, 50명씩 무리지어 미끄러운 산길을 넘어 조용히 기어 들어온다. 그들은 먹고 살 새 세상을 찾아서 만주의 나무 많고 돌 많은 산비탈을 거친 흙과 목숨을 걸고 싸워 볼 결심으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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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먹고 살고자 애를 쓰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경작지보다 높은 지대에 메마른 산비탈에 곡괭이와 괭이질을 하고 씨를 뿌리며 나무 뿌리 사이에 드문드문 열린 곡식을 맨손으로 거두지만 그것은 먹고 살기에 부족할 경우가 많다.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는 경우도 많다. 부녀자와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청년들도 얼어 죽기도 했다. 새로운 환경에 몸을 내던지고 보니 질병도 일어났다. 한국인들이 강변 건널목의 깨어진 얼음 위에 맨발로 바지를 걷어 올리고 깊이 2자나 되는 얼음과 같은 차가운 넓은 강물을 건너 저편에 가서 급히 옷을 매만지고 신발을 신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옷도 변변히 못 입어 살을 드러낸 여자들은 어린이를 등에 업고 가는데 서로 약간 따뜻하기는 하겠으나 포대기 밖으로 삐죽 나온 어린이의 두 발을 얼고 마침내는 부어서 그 작은 발가락이 애처럽게도 한데 달라붙는다. 허리가 굽은 주름살 투성이의 노인들은 묵묵히 걸어가다가 노쇠한 팔다리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면 주저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늙은이·젊은이·약한 사람·튼튼한 사람·큰 사람·작은 사람 모두 함께 가족 단위로 온다. ……어린이들은 길가다가 주막 집에서 태어난다.
이리하여 7만 5천 명이 넘는 한국인이 들어와 현재 만주의 북부와 서부에 사는 한국인의 수효는 50만에 이르고 있다.’(장로교외국선교부에 제출한 보고서)
(제12장·제13장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