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圃隱)과 용인(龍仁)은 하나로 묶은 Content에 주목한다.
1. 시작의 이유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민본주의는 곧 오늘의 민주주의와 상통한다.
포은은 1337. 12. 22에 영일정씨 가문에서 태어나서 1392. 4. 4. 55세의 아까운 나이에 폭살당한 고려 말 정치인이자 학자인 정몽주(鄭夢周)선생님 호다.
당시, 사회적 부패를 일신하고자 신진유생들과 협력하고 고질적인 무신잔재와 관변사족, 권문세가등 기성정치권력격멸에 집중하여, 그들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쾌거를 이루지만 동지로 알았던 이성계의 일당들의 역성반란에 마침내 영웅의 포부는 여기서 멈춘 채 어언 500여년을 보냈다.
더구나, 이 억울한 죽음은 승자인 이씨조선에서 “려말충신(麗末忠臣)으로 박제(剝製)되어 그들의 정권을 지탱시켜주는 도구로 이용한 것이였다.
그나마 지금 경기도 용인 능원리에 모신 묘소는 공의 사후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 의하여 충렬(忠烈)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뿌리를 이어 주고 있 음은 후학들에게는 참으로 다행하다 할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조선500년동안전제 왕권의 횡포에 의하여 후학 사림(士林)들의 사분오열로 선생의 도학은 제대로 빛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전제 군주하의 노골적 격리정책은 연산과 중종의 사화, 선조의 동서 분당, 현. 숙종의 당쟁, 영.정조의 탕평책등은 한마디로 지식계층의 세력견제이상의 감정적 대립까지 유도하면서 왕조를 500여년을 지탱하는데 이용되었고 지금까지 어리석은 집안에서는 그 여파를 잠재우지 못하여 깨어나지 못한다.
2. 인본(人本)의 근거(根據)
조선의 왕은 선생의 제자를 임금의 스승으로 삼으며, 체제유지에 이용한 행위는, 포은은 마치 죽이기는 했으되 버리기에는 아까운 존재였을 것이다.
지난 500년의 기나긴 역사에 묻혀 선생의 사상과 인품이 이렇게 위축되게 인식시켜 겨우 고려도 아닌 이조의 충신이라는 당치도 않은 표상으로 인정받아 왔음으로써 후세에 선생의 바른 사상이 충분히 정의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픈 일로서 500년 조선도 망했으니 이러한 상태를 그대로 방관하는 것은 후손들에게도 지탄받을 일이 아닐 수 없다.
포은 성생이 이 나라에 가르친 도학의 기초는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바탕으로하며, 곧 민본(民本)사상으로 반영되고, 그의 손제자인 세종(世宗)이 그의 사상에 입각하여 정치를 하였음으로서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본보기로 칭찬을 받는 제왕이 되고 있을 정도이고,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을 통하여 그의 근본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우리들 마음에 닿아 오늘까지 이어 주었던 것이다.
그간 조선의 학문이 여러 형태의 분파가 우후죽순(雨後竹筍)이지만 모두 포은(圃隱)의 근본 가르침을 비껴간 학자는 하나도 없으며, 그의 깊은 가르침은 연면히 이어져 민중을 깨우치고 정치적 바탕을 바로세우는 오늘날 정치사상과 법치의 기본이 되어 주었다.
마치 물과 흙이 없이 집을 지을 수 없고, 밥을 익히 수 없는 것처럼 포은선생의 깊은 사상은 한국적 근본사상인 배달민족의 정치적 홍익정신으로 근간을 살려 왔고, 일반민중의 소망과 부합되고 , 1919년 3월 1일 민족독립자립운동의 기틀이 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의 국본인 민주주의 근간으로 이어왔다.
3.후세(後世)의 시각(視覺)
선생의 사상이 여러 가닥의 형태로 분파된 까닭에 각기 주장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원조를 따라 기틀인 인자(因子)를 본다면 포은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곧 국가에 대한 충의(忠義)와 인간 본연의 도리를 강조한 것이므로 현제 그의 사상이 일부는 학문이나 종교로도 널리 지켜지고 있어 비록 분파된 형태라 하더라도 대동소이하여 국논을 하나로 뭉칠 수 있게 하는 최대공약수(最大公約數)적 위치에 있다.
한편 이씨의 조선 500년동안 정치의 난맥을 겪은 민중은 세상을 구원할 존재의 강림을 기다리는 여러 징후에 정씨성을 인용한 정감록을 필두로 도참사상도 분분했지만 이는 오늘날 민중운동의 반영에 앞서 민중에게는 기대감, 위정자에게는 공포를 암시한 것일 뿐으로서 도참을 가장한 조선왕조의 불안한 반응을 표출한 것으로 보아야 할 일이다.
포은의 사상은 기호(畿湖)와 영남(嶺南)의 모든 학파를 통틀어 그 동량(棟樑)이며, 종교계파에서도 포은선생의 근본 사상인 인본주의를 따르지 않았다면 모를까 어느 것 하나 그 올바른 궤도를 벗어나고는 존재가치를 갖지 못한다. 특히 퇴계나 율곡의 계파 역시 그 범주에 있음을 자처하고 있으니,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기초사상인 동학혁명(東學革命)의 기치 또한 그 궤도 안에 있다.
이 나라에 와서 이 나라 모든 민중의 지지를 받는 기독교계파, 대승적 불교거나를 막론하고 포은의 인본사상을 부정하면서 학문적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4. 사상(思想)의 영향
오늘날 포은선생의 민본(民本)사상은 곧 기미독립선언서(己氣未獨立宣言書)에서 묻어나고 있는 것은 물론 이고, 독제정권에 대항해온 사상적 배경이 이사상 아닌 것이 없다.
지금 포은선생의 사상이 인본(人本)을 중심으로 하였다면 곧 민주(民主), 자유(自由), 자주(自主), 독립(獨立)의 기초를 이어준 상해 임시정부의 기틀로서 작용되어 이후 4.19. 민주혁명(民主革命)을 이끈 정신적 기치가 되어 준 것이 아니던가?
오늘의 세계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존재토록 한 바탕이 되는 생각, 그 사상, 민주, 자유, 자주, 독립은 앞으로도 이것을 먹고 살아야 할 우리 정신적 양식인 것이다.
다행스럽게 포은선생은 아직 그의 사후 고향(死後故鄕) 용인(龍仁)에 계신다.
용인이 비록 민생이 삶에 지칠지라도 그나마 성생의 높은 뜻을 잊을 리 없을 것이며, 선생의 국민사랑을 저버리는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니 이러한 기운을 바탕으로 한 용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선생의 가르침인 도의정신 (道義精神)을 받들어 생활화 해 간다면 이 나라 모든 국민들의 수범(垂範)의 본보기가 될 것이며, 더구나 선생의 가르침은 지금도 남과 북이 한가지로 바라는 바에 있으니 선망의 조국통일의 길에도 크나큰 인도(引導)가 되리라.
2015. 7. 21. 용인사람 이관희
龍仁地名六百年有感 東齊 李 觀 熙
龍仁稱號得佳名 용인이라 하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니
六百年過大市成 어느덧 六百年 지나며 큰도시 되었네
道學傳承和氣溢 높으신 도학을 이어 화기가 넘치고
儒風尊守友情盈 선비의 길을 지키니 우정도 두텁구려
人叢滿滿銀河水 인구는 총총하여 은하수같이 많고
福祉塡塡玉宇城 복지는 늘어나서 天國처럼 튼튼하네
賢者聖人溶出裡 현자와 성인이 많이많이 나타나서
無窮永世益繁榮 무궁하고 영원토록 더욱 번영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