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허무러진성의 달
1. 화려했던 그시절 잔치 열리고, 돌고 도는 술잔에 죽은 그림자.
천년의 솔가지 틈새 비추네, 옛날의 영광은 지금은 어디.
2. 늦가을 군영에 찬서리 내려, 울고 가는 기러기 창공에 숨어.
여기저기 칼빛은 비춰 주건만, 옛날의 영광은 지금은 어디.
3. 황성은 폐허로 변해 버렸고, 달빛만 누구 위해 비추는 건지.
울타리에 남은 건 다만 넝쿨 뿐, 솔가지에 노래함은 세찬 바람뿐.
4. 천상의 모습은 변함 없건만, 영고성쇠 변화는 세상의 보습.
그러고자 함인가 지금은 역시, 아 - 아 - 황성의 한밤중 달빛.
1. Shadows that opened in feast of those days that were gorgeous, Died in a round cup.
2. Late autumn, go to a cold-frosted cry, Hide in the expanse of a geese crying.
The sword shines here and there, But the glory of the old days is now.
3. Hwangseong has turned into ruins, Only the moonlight shines for whom.
The only thing left on the fence is the vine, The singing in the bell is only a breeze.
4. The heavenly form does not change, But the change of quality is the moisturization of the world.
Now, too, is the moonlight of the night - Ah - Ah - sang.
칠지도(七枝刀) 일본지도는 칼의지도
칼 양 날에 세 개씩 여섯개의 가지(枝.支)를 붙여 다듬은 모양이다.
이 칼은 여섯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땅 모양을 표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칼을 지도(地圖)로 만든 `칼모양 지도`이다
처음 만든 곳은 우리지만 일본은 이를 저기네 나라 국보로 애지중지한다.
백제인의 기발한 착상이리 힐 수 있다.
백제 13대 근초고왕(346-375)이 바다 건너 동방, 왜(倭)를 복속(服屬)시키면서 자국민을 보내어 개척하고 세력지반을 닦았는데, 몽매한 원주민들을 교화(敎化)는 방법으로 박사 왕인(王仁)으로하여금 천자문을 가르치고, 아직기(阿直岐)로 하여금 한학을 가르친 기록이 있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는데 이당시 백제가 역사서인 서기(書記)를 만들게 하면서 백제 역사에 번안(飜案)하도록 한 것이 일본역사의 원초가 된 것이다. 이는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백제의 비류기록과 큰 차이없이 그대로 뽄 받아 쓴 것이 들어난다.
일본서기의 시작은 백제의 시작과 같다.
주몽의 큰 아들 비류(沸流)의 건국역정을 그대로 반영한 경로에 따라 근원이 시작된 것임을 보더라도 일본의 상고사는 백제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지류의 하나라는 의미를 갖게 하고, 그 상징물이 곧 칠지도라 할 것이다.
이 칠지도는 단철(單鐵)로 만든 양날의 칼로 칼잡이를 합친 전체 길이는 74.9cm이나, 칼날만의 길이는 65cm이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솔가지(松枝)처럼 뻗어 있어 칠지도(七支刀)라 했다.
칼의 양면에는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금상감(金象嵌) 기법으로 새겨져 있는데. 무기로서의 실용성보다는 제의(祭儀) 등에서 상징적인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처음 발견된 시기는 1874년 일본 천리시 한 절에서 오래된 돌상자에 깊숙이 숨겨저 있었던 것이다.
칠지도 형상은 일본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금강송(金剛松) 가지모양이 특징이다.
1935년경에도 백제 부여지방에서 토굴된바 있던 물건이고, 1876년 일본 사찰에서 보관되어 오던 함속에서 이것이 발견되자, 괴상스런 생각을 하는 학자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을 만드는 단서`로 사용하는데 썼다.
어떤 충성된 일본 학자는 칠지도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고 하면서 <일본서기>에 진구황후 49년에 신라를 비롯한 7국을 평정하고 한반도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었으며, 진구황후 52년에는 백제의 사신이 칠지도(七枝刀)ㆍ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가 칠지도(七支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정도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생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물건이나 사실은 그 반대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렇지만 사실은 `일본의 여섯 개의 섬이 마음을 합해서 백제에 기생(寄生)하는 제후(諸候)로 봉하니 왜왕에게 그 관리권을 준다(供)`는 의미하는 신물(信物)이라 하여 양면에 쓰여진 글귀로서 알 수 있다.
제조 일자는 당시 태(泰)자가 붙은 연호에 11월 또는 12월에 병오(丙午)일이 되는 시기는 408년으로 근초고왕의 손자인 백제 동성왕 집정시기와 일치한다.
칼 앞면에는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라 적혀 있음으로 임나일본설은 당치 않는 소리이다.
이러한 물건은 백제에 왔다가 죽은 왜(倭)의 사신들 무덤에서 종중 나오는 것으로서 1867년 명치유신이후에 시대착오적 학자들과 정치가들에 의한 이성(理性)도 살아진 일본사회에 아직도 이를 깨우치지 못한 자들 몇몇이 있어 이웃이 불행하다는 것을 볼 때 마음아프다.
지금도 아직기(阿直岐)의 후손으로 보이는 성(姓)을 단 자가 있는데 이들은 현재까지 일본에서 지도자급지위에서 활동하여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배라는 자도 그중에 하나인 듯 하다.
칠지도를 보면서 일본지도를 보고 또 황성의 달(荒城の 月)이라는 노래를 함께 들어 보면서. 유적에 나타난 역사와 유물, 그리고 입체화 시킨 음악으로써 과거역사의 흐름을 사실감 있게 관찰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황성옛터처럼 `荒城の 月`이라는 노래와 비슷하다.
황성의 달(荒城の 月)이라 이름 지음 이 노래는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애창하는 근대화된 노래인데, 타기 렌다로(瀧 廉太郞)라는 젊은이가 1901년에 九州(구슈-大分県 竹田町郊)에 있는 강성(岡城)을 보면서 작곡하였다는 것이다.
이 노래의 소재가 된 오가성(岡城)은 천년을 넘어선 오래된 고성으로 당시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에 의하여 망한 백제국(百濟國) 유민일부가 백제부흥운동에 실패하고 새로운 왕조 고려(高麗)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게 되자, 신천지를 개척하고자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자리잡은 곳으로 지금으로 부터 1000년전 일다.
그러나 백제가 망한 이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의 경우는 이들기득권자들에 의하여 배척당하거나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였기로 그곳은 더욱 더 투쟁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으니 당연한 시대적 정향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로 뭉친 유민들끼리 늦으막이 도착한 후 현해탄의 거센 물결보다 더욱 억센 압박과 살얼음 속에서 살아 남야야만 했던 것이다.
이때 살아 남기위하여 쌓은 성이 이 오가성(岡城)이다. 어까성이 일본 어느 성보다 견고한 모양을 보이고있는 것도 이들의 살기 위한 집착이 엿보이는 흔적으로 보면된다.
이들이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은 그만큼 힘겹고 실로 처참 그 자체였다.
성의 높이가 높아 갈수록 살아 남고 싶은 애착은 더욱 깊어 갔다
그러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자 혈안이 된 명치유신 당시 이 오까(岡城)성은 군국일체감(君國一體感)을 조성하려는 정책에 맞지 않다고 하여 성을 헐게 되었다.
그때 즈음 감수성이 강한 타기 렌다로(瀧 廉太郞)는 18세의 어린나이지만 더 이상 군국(軍國)의 도구(道具)가 되어가는 것을 혐오(嫌惡)하면서 이 노래를 작곡하게 된 것이다. 그는 곧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린다.
천재작곡가로 촉망받던 그는 마침내 인생의 선택 역시 천재 답게 뛰어났다.
처음 중학교 창가모집에 응모작품이던 곡조에 7.5調의 가사를 붙인 이는 토이(土伊晩翠)인데 이 17세의 어린 작곡가를 위하여 30세의 토이(土井晩翠, 본명 林吉)이 처음에는 황성월(荒城月)이라 붙여 주었다.
작사의 동기가 재미 있다.
이 당시 명치유신에 반대하는 각 성주들은 완강한 저항을 하였는데, 이 때 이 성도 도꾸가와의 번주가 지키고 있었는데 명치유신에 강력한 반대를 하였다. 당시 반항의 의미로 번주의 여비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君王城上豎降旗,妾在深宮那得知`라 써서 성벽에 걸고 꽃잎처럼 떨어저 자결하는 여성들의 처절한 이밴트를 상기하면서 가사가 만들어 진것이 전한다.
이 시는 송태조 조광윤이 후촉을 정복할 때, 촉왕 맹창은 항복깃발을 성루에 꼽았다. 이 광경을 본 왕비 서씨(花蕊夫人)는 시를 지어 슬퍼했다. “임금은 항복기 성루에 꽂아도 궁안에 나는 알지도 못했네, 14만 군사가 갑옷 모두 벗다니, 편안만 찾는 자여 네들이 남자더냐?“라고 꾸짖었다.
筆者註 花惢夫人 徐費가 지은 시 `君王城上豎降旗,妾在深宮那得知。十四萬人齊解甲,寧無一個是男兒`는 조국 후촉(지금 성도)이 망하는 광경을 묘사하였다. 혜비 서씨(慧妃 徐氏)는 화예부인(花蕊夫人)이라 한다.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시인이자 후촉 황제 맹창(孟昶)의 황후였다. 특히 시서 학문에 능통하고 미모를 겸비하였다. 건덕 2년 11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부하 왕전빈에게 군사 3만을 주어 후촉을 공략하자, 군대가 14만이나 되는 후촉은 화살 한번 쏘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진다. 훗날 조광윤이 화예부인에게 물었는데 그 대답으로 이시를 지어 ` 나는 깊은 궁궐속에 있어 몰랐더니 남편는 항복기를 꽂고, 남정네들은 편하려고 갑옷을 벗어 버린 탓이라`로 억울한 심경을 들어 내었다.
송나라에 포로로 잡혀 왔지만 서씨의 그 재능과 미모는 조광윤과 그의 동생 조광의와의 질투를 자아내어 형제간에 다투게 만들고 이들끼리 싸워 왕위쟁탈로 이어진 것은 화예부인의 계략이라할 것이다. 서씨를 포로로 잡아 온 조광윤은 재빨리 서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노여록(爐餘錄)에는 '촉주 맹창이 죽자 송태조의 궁에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하였지만, 동생 조광의도 이 재색을 겸비한 서씨를 그대로 두지 않고 서기 976년 겨울 형 조광윤이 임종이 가까운 것을 짐작하고 형을 불렀는데 답이 없자 서씨를 유인하려 접근한다. 이 사실을 안 조광윤이 분노하여 옥부(玉斧)로 바닥을 내리치며 죽으니 조광의는 조광윤을 이어 태종이 된면서 화예부인을 다시 비로 남게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조광의가 화예부인을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형을 이어 왕이 된 동생 조광의는 서씨가 수도로 압송되어 왔을 때부터 형이 그녀에게 매혹되자 불만을 갖었는데, 수차례 걸쳐 간하였으나 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아 서씨를 사냥터에서 화살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것은 조광의가 태종이 된 이후에도 서씨를 취하여 후궁에 두고 함께 지난 기록이 있음으로 진실이 아니다.
대개 역사가는 여성의 잘못을 가혹하게 비평하는 반면에 왕조에 누가 되는 기록을 미화했다.사실을 참작하여 판단 하면, 송이 증국을 통일 하였으나 특히 화예부인의 고향 성도지방에서는 반란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이는 화예부인의 끊임없는 저항이 작용하였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사실이 암시하는 핵심은, `國家 역시 主人인 국민이 지켜주지 못하면 강토와 가족은 이 모습으로 짖밟혀도 속수무책이 되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荒城の 月 가사를 되짚어 본다
1. 春 高樓の 花の宴(えん) めぐる 盃(さかずき) かげ さして
봄날 고루의 꽃의 향연 돌고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千代の 松が枝(え) わけいでし むかしの 光 いま いずこ
천년의 솔가지 헤치고 비추는 옛날의 영광은 지금 은 어디
2. 秋 陣營の 霜の 色 鳴き行く 雁(かり)の 數 見せて
가을 진영의 서리의 빛 울고 가는 기러기 몇 보이고
植うる 劍(つるぎ)に 照りそいし むかしの 光 いま いずこ
심은 듯한 검에 빛이 비추이고 옛날의 영광은 지금은 어디
3. 今 荒城の 夜半(よわ)の 月 替(かわ)らぬ 光 たが ためぞ
지금 황성의 야반의 달 바뀌지 않는 빛은 누굴 위함인가
垣(かき)に のこるは ただ 葛 松に 歌うは ただ 嵐
울타리에 남은건 다만 덩쿨뿐 소나무에 노래함은 다만 폭풍뿐
4. 天上 影は かわらねど 榮枯(えいこ)は 移る 世の姿
천상모습은 변함없건만 영고는 변하는 세상의 모습
寫さん とてか 今も なお 嗚呼(ああ) 荒城の 夜半の 月
그리고자 함인가 지금도 역시 아아 황성의 야반의 달
이 가사에서 풍기는 내용중에 1절에서 `천년의 솔가지 헤치고 비추는 옛날의 영광`이란 대목은 특히 지난 모질었던 역사적 감각을 뒤풀이 하면서 칠지도에 대한 향수를 그린 것, 2절 `가을 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는 고향을 상기하는 대목,, 3절에서 울타리에 남은 넝쿨`이라함은 너절한 일본땅에 희망을 잃은 심정을 나타낸 것, 그리고 4절을 `천상의 모습`은 곧 고향을 동경하는 귀소(歸巢)를 선망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고려의 새로운 정치체제가 신라중심으로 안정되어가자 소외심을 억제 할 수 없어 탈출을 시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그나마 일부는 바다건너 왜(倭)에 대하여 미련을버리지 못하여 바다를 건너게 된 것으로 보이고 바다를 건너 왔지만 여기서도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은 실로 처참 그 자체였다.
성의 높이가 높아 갈수록 살고 싶은 애착은 더욱 깊어 갔다.
1,000을 지나고도 아직 일본에 간 백제유민들은 환상속에 살았다.
반은 꿈속에 있고, 나머지 반절은 귀신에 홀려 있어 본정신을 잃었다.
천황이라는 허수아비를 귀신아비로 받들고 살고, 나머지는 향수에 젖어 살면서 때때로 향수가 밀려오면 반도를 침입하리고 하고, 살기가 지겨우면천황을 뒤집어 버리거나 발광을 한다.
이미 7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참혹했던 전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속에 살고 있다. 이것은 위정자들이 그렇게 현혹시켜 국민들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상태이다. 일본은 나라는 부자이지만.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다.
이는 공산주의보다도 더 신묘한 귀신에 홀려 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구태여 일본을 과거의 원수로 여기면서 분풀이를 하자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자손만대를 생각하면 어차피 이웃에 있는 일본은 우리에게도 어찌하면 행복을 나누게 될 사이 일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쓴 글이다.
글속에서 3.1.정신을 담은 점이 짐작했겠지만 우리의 삼일정신은 첫째. 수천년 세습해온 전제군주, 임금과 그 측근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그 나라가 우리 국민들의 나라가 되고, (民主), 둘쩨. 중국등의 외세로부터 침탈받던 사대의 수모에서 벗어나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가 되었으며, (自主) , 세째. 귀족들의 수탈과 횡포로부터 평등과 자유를 찾아 양반과 상민과 종,그리고, 남녀차별이 없어졌으며, (自由) ,네쩨. 일본제국주의의 유례없이 악랄하고도 모질던 마수로 부터 우리민족이 완전해방을 소원하던 절규(獨立)라는 점에서 마침 20세기를 들어서는 길목에서 운좋게도 선각자들이 깨달은 바에 따라 우매했던 우리 민족 전부가 호응하였던 때문에 터득하게 된 것이고 다행히 중국, 인도는 물론이고 세계만방에도 널리 알려서 다같은 이익을 얻고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웃인 일본은 구세기의 낡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여 고생하고 있는 점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비록 일본과 우리는 과거를 뒤도리켜 보더라도 나뿐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좋은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명함을 갖고 있는 우리들이 가같이 앞으로 우호적인 활동으로 과거의 어두움을 벗어 던지는 것이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현명함을 후세에 저아는 기회가 되지 않을가 생각해 본다.
지금도 우리는 당신들이 뿌려 놓았던 장애물에 의하여 반신불수의 형태에 있지만 우리는 그대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복소심보다는 사랑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간혹 못된 지도자가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잘 선택하는 것이 국민의 할 일이요 책임이다.
앞날을 미루어 생각 해 보면,
현재 한국, 일본, 만주, 몽고, 시베리아의 넓은 지역이 모두 하나의언어를 쓰던 민족에 의하여 지배되었던 시기가 수천년동안 있었다.
그때는 생존경쟁에 시달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당시는 親兄弟 기억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나, 분명히 한분의 조상을 모시고 살아 왔었던 것은, 각각의민족이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를 많이 갖고 있다.
그렇지만 古陋한 민족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앞으로 서로 생존을 향한 방법모색에 있어서 필수적인 방안으로 구상해야 할 방안이 여기서 나온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무리 멀다 해도 거리를 의식하지 않는 환경에 있고, 사분오열된 언어를 갖고 있다해도 쉽게 소통이 가능한 방법이 있음으로써 어느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동질감을 찾기 좋은 관계에 있으면서 마다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생존하기 위한 동맹을 미국, 중국,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은 말릴 수 없지만,그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동질성을 배반하는 일은 없어야한다.
과거의 역사는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친밀하고 동질감을 갖는 사이끼리 단결하여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동방의 밝은 빛을 향하여 매진하여 온 우리들 조상님들의 정성을 생각하며, 넓은 의미에서 동질성에 따라 단결하는 지혜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보아 장차 어리석은 조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李觀熙 2244
七支刀
両刃の剣で三つずつ六つのか支をつけた形である。
このナイフは、6つの大きな島からなる日本の地が百済国に隷属したことを示した。
すなわち刀を地图で作成された `剣の形の地図`です。
刀の長い部分は百済を象徴するもの6つ持つ日本の6つの島で見るものである。
初めて作ったのは百済であり、日本はこれをそこにあなたの国の国宝として珍重されている。
百済人の奇抜な着想来ヒルことができる。
百済13代近肖古王(346-375)が海を渡って東方、倭を服属させながら、自国民を送って開拓して勢力地盤を磨いたが、蒙昧な先住民を敎化の方法で博士王仁にとって千字文を教え、阿直岐にとって漢学を教えた記録がある。日本の歴史書 `日本書紀`が作成ジドン時期だったこの当時、百済が歴史書である日本書紀を作るようにしながら百済の歴史飜案ようにしたのが日本の歴史の原初になったのだ。これは、日本書紀を読んでみると百済の沸流王の記録と大差なくそのままポン受けて書いたものが入って来る。
日本書紀の開始は、百済の開始と同じである。
朱蒙の大きな息子沸流の建国の軌跡をそのまま反映した経路に沿って根元が開始されたことを見ても、日本の上古史は百済との深い関係を持っており、その支流の一つであるという意味を持たせて、その象徴が、すぐに打つドラである。
この七支刀は、細工した鍛鉄で作られた両刃のナイフナイフ使いを合わせた全体の長さは74.9cmや、刃だけの長さは65cmである。ナイフの左右にそれぞれ3個ずつの刃が松の枝(松枝)のように伸びていて七支刀とした。
剣の両面には、60文字の長さの铭文が金象嵌技法で刻まれている。武器としての実用性ではなく、祭仪で象徴的な用途に使われたと思われる。最初に発見された時期は、1874年に日本千里時に一節では、古い石造りのボックスに深く隠して私いたのだ。
打つも形状は、日本では生産されない金刚松の形が特徴である。
1935年頃にも百済付与地方で地下されたバーていたもので、1876年の日本の寺院で保管されてきたハムソクでこれが発見されると、異様な思いをする学者たちは `日本が朝鮮を侵略するための口実を作る手がかり`で使用する書いた。
いくつかの忠実な日本の学者は、七支刀が任那日本府の実体を裏付ける証拠だとしながら「日本書紀」に神功皇后49年に、新羅をはじめとする7局を平定し、韓半島に任那日本府を置いたし、神功皇后52年には百済の使者が七枝刀ㆍ七子镜をはじめとする様々な宝物を献上したと記録されているが、この記録に出てくる七枝刀が七支刀と同じだということだ。また、これらの主張は、日本の植民地支配を合理化する根拠として使用されるほど、日本という国の生理をそのまま反映したものや、実際にはその逆に見ることが正確である
しかし、実際には `日本の六つの島が心を合わせて百済に寄生する诸候に棒だから倭王にその管理権を与える(供)`は意味する信物とし、両面に書かれた文句として知ることができる。
製造日は、当時の状況(泰)が付いた年号の11月か12月に丙午日になる時期は408年に、近肖古王の孫である百済東城王執政時期と一致する。
刀の前面には、裏面には先世以来未有此刀百济□世□奇生圣音故为倭王旨造□□□世ラ記載されていることに任那日本府説は妥当ではない音である。
これらのものは、百済に来て、死んだ倭の使者の墓から種の中出てくるもので、1867年明治維新以後に時代錯誤の学者たちと政治家たちによる理性も生きた日本社会にまだこれをケオチジなかった人たち何人かのがあり、近所の人が不幸であることを見たときに心が痛い。
今阿直岐の子孫に見える姓をつけた者がいますが、これらは、現在まで日本で指導給紙の上で活動してきたことを意味する。阿陪もその中の一つであるようだ。
塗り地図を見ながら日本地図を見て、また荒城の月(荒城の月)という歌を一緒に入って見て。遺跡に現れた歴史と遺物、そして立体化させた音楽として、過去の歴史の流れをリアルに観察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
韓国の皇城のように `荒城の月 'という歌と似ている。
荒城の月(荒城の月)と名前書かれたこの曲は、日本人たちが早くから愛唱する近代化された歌なのに、泷廉太郞という名の若者が1901年に九州 大分県竹田町郊の冈城を見ながら作曲したのである。
この歌の素材になった冈城は千年を超えた古い城壁に当時の唐と新羅の挟撃によって滅びた百济国流民の一部が百済復興運動に失敗し、新しい王朝高丽から差別を受けることになると、新天地を開拓しよう海を渡って、最初に据えたところで、今から1000年前のことである。
しかし、百済が滅びた後に日本に渡った百済の流民たちの場合は、これらの既得権者たちによって排斥されたり、差別を受けなければならハヨトギで、そこはますます闘争しなければ生き残れない状況にあったから当たり前の時代状況である。
高句麗と百済の流民たちで団結した流民たち同士遅れて到着するが、玄界灘の荒々しい波よりも無骨な圧迫と薄氷の中で生きている男ヤヤだけだったのだ。
この時、生き残るために築いた城で、この冈城である。日本のどの性より強固な形を見せているが城もこれらの生きるためのこだわりが伺える痕跡である。
これら生き残るための苦闘はそれほどヒムギョプゴ実に悲惨そのものだった。
性の高さが高く、ますます生き残りたい愛着は深まっていった
しかし、近代化に拍車をかけたい血眼になった明治維新当時、この冈城性は軍国一体感(君国一体感)を助成する方針に合わないとして城をホルゲされた。
この頃感受性が強い泷廉太郞は、18歳の子供やだが、これ以上军国の道具になっていくことを嫌惡しながらこの曲を作曲したのだ。彼はすぐに23歳でこの世を捨てる。
天才作曲家として嘱望された彼は、最終的に人生の選択も天才らしく優れていた。
初めて中学校窓際募集に応募作品だった曲調に7.5调の歌詞をつけたこれは土伊晩翠だが、この17歳の子供作曲家のために30歳の土井(韓國姓 林 吉)が、最初は荒城月と付けた。
作詞の動機が面白い。
この当時、明治維新に反対する各城主は頑強な抵抗をしたが、このとき、この城も徳川の藩主が守っていた明治維新の強力な反対をしました。当時反抗の意味で藩主の女卑が指を噛んで血書きで `君王城上竖降旗、妾在深宫那得知`ラ使って城壁に掛けて花びらのように落ちその自決する女性たちの壮絶なイベントゥを思い出しながら歌詞が作成負けたことが伝えられる。
この時は、宋の太祖趙匡胤が后蜀を征服したとき、王孟昶は降伏の旗を城头に挙げた。この光景を見た王妃花蕊夫人は、時を作って嘆いた。 「王は降旗を城头に挿してもグンアンに私は知っていてもみなかった、14万軍の鎧の両方友なんて、快適だけ探す者よネが人きたのか」と非難した。
1. 春 高樓の 花の宴(えん) めぐる 盃(さかずき) かげ さして
千代の 松が枝(え) わけいでし むかしの 光 いま いずこ
2. 秋 陣營の 霜の 色 鳴き行く 雁(かり)の 數 見せて
植うる 劍(つるぎ)に 照りそいし むかしの 光 いま いずこ
3. 今 荒城の 夜半(よわ)の 月 替(かわ)らぬ 光 たが ためぞ
垣(かき)に のこるは ただ 葛 松に 歌うは ただ 嵐
4. 天上 影は かわらねど 榮枯(えいこ)は 移る 世の姿寫さん
とてか 今も なお 嗚呼(ああ) 荒城の 夜半の 月
この歌詞から漂う内容の中に
1節で`千年の松の枝をかき分けて映し出す昔の栄光`とくだりは特に最後の毛質だった歴史的な感覚を打ち上げながら塗り地図への郷愁を描いたもの、
2節、`秋の北に飛んで行く雁`は故郷を思い出させる大木、、
3節でフェンスに残った蔓`とは、急いで日本に希望を失った心情を表したもの、そして、
4節を`天上の姿 `は、すぐに故郷に憧れる归巢を羨望してている。
高句麗と百済の流民は考慮の新たな政治体制が新羅を中心に安定していこう疎外心を抑えることができない脱出を試みていないことができず、それさえも一部は海を越えてなぜ(倭)に対して未練を捨てず、海を渡るようにされたとみられて海を渡ってきたが、ここでも生き残るための苦闘は実に悲惨そのものだった。
性の高さが高く、ますます住みたい愛着はさらに深まっていった。
1000年を過ぎてもまだ日本に行った百済の流民たちは幻想の中に住んでいた。
半分は夢の中にいて、残りの半分は鬼に取り憑かれており、この精神を失った。
天皇というかかしを鬼父に奉じて生きて、残りは香水に濡れて住み、時々香りが押し寄せてきたら半島に侵入ハリとし、住みが疲れたなら、天皇をひっくり返してしまったり、発光をする。
長い年月の後、今もその残酷だった戦争をしていると錯覚の中に生きている。これは、為政者がそのように幻惑させ、国民の懐を遅れをとっている状態である。日本は国は豊かだが。国民は世界で最も貧しい人々である。
これは共産主義よりも神妙な幽霊に取り憑かれ生きるからである。
この記事は、わざわざ日本を敵ににしながら、腹いせをしようというものではない。
これから子孫万代を考えると、どうせ近所にある日本は、私たちにもどうすれば幸せを分かち合うことの間であ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期待感で書いた文である。
このから3.1の精神を盛り込んだ点が推測だろうが、我々の三.一の精神は、初の。何千年も世襲してきた専制君主、王とその側近たちの手を離れて、その国が私たち国民の国になって、(民主)、二の。中国などの外国勢力からの侵奪受けていた四大の屈辱から抜け出し、韓国が自主独立国家となり、(自主) 、三番目。貴族の収奪と横暴から平等と自由を求めて両班と常民と種、そして、男女差別がなくなり、(自由)、四の。日本帝国主義の類例のない悪辣でも毛質た魔獣から私たちの民族が完全解放を願った絶叫(独立)という点で、
20世紀を入っ街角で幸運にも先覚者たちが気づいたところにより、愚昧た私たちの国すべてが承認されたのので、悟るようにしたものであり、幸いにも、中国、インドはもとより、世界万国にも広く知らせても同じ利益を得て生きるようになったのだ。
しかし、まだ隣人である日本は、旧世紀の古い考えを捨てずに苦労している点に切なさを禁じえない。
ただし、日本と我々は過去を後道理に見ても、私だけで仕事がないわけではなかったが、良いことが多いと思う。
このような知性を持っている私たちがが一緒にこれから友好的な活動として、過去の暗さを投げ捨てることは、今を生きる人々の知性を後世にあの子はチャンスがありませつもりはない考えてみる。
今、我々はあなたがまいておいた障害物による半身不随の形態が、我々は君らにそれに相応する複数小心より愛を回復させることができる方法を探しているのだ。
たまにいたずら指導があるが、これをよく選択することが、国民の仕事であり、責任である。
将来を推して考えてみると、
現在、韓国、日本、満州、モンゴル、シベリアの広い地域が全て一つの言語を使っていた民族によって支配された時期が何千年もの間あった。
それは生存競争に苦しんでいた時期だったので、当時は亲兄弟の記憶をしたくないだけや、明らかに一人の祖先を祀って生きて来たのは、それぞれの民族が共通に認めることができる証拠をたくさん持っている。
しかし、古陋した民族主義的なアプローチではなく、今後、お互いの生存に向けた方法模索における重要な方策として構想する必要がある案がここで出てくると見るのである。
今ではどんなに遠くだって距離を意識しない環境にあって、分裂した言語を持っていても、簡単にコミュニケーションが可能な方法があることで、誰よりも切実に同質感を検索の良好な関係にありながら、拒む理由はないと思われる。
今生存するための同盟を米国、中国、ロシアと手を握るのは干すことができないが、彼らの利益を代弁して親和性を裏切ることはあってはならない。過去の歴史は、多くの教訓を与えている。親密な同質感を持つ間同士団結しなければすることが、より効率的な方法になる可能性があると教えて相次いでいるのだ。
東方の明るい光に向かって邁進してきた私たちの先祖たちの誠意を考えており、広い意味での同質性に基づいて団結する知恵を持つ方が良いと見て、将来の愚かな先祖がされていないことを願う
李 觀熙 2244 (自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