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末 외세 侵略에 대한 嶺南 儒林의 義理學的 대응
Ⅰ. 서 언
한말에 있어서 서구 및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가장 원초적(본능적)이고 원시적인 민족적 대응은 '斥邪衛正'의 이념에 바탕을 둔 斥洋斥倭였다. 그 후 일본의 독점적인 조선에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斥倭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항일의거 내지 항일전쟁의 양상으로 바뀌어갔다. 이 항일운동의 주체는 儒林(士林)과 농민, 그리고 解散兵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조 신분사회에서 이들의 계급적 갈등은 민족적 힘의 단합에 장애가 되었지만, 儒林의 '春秋義理' 정신이나 민중의 본능적인 민족적 구국이념은 매우 강렬하여 연합될 수 있었다. 이들을 '義兵'이라 하는데, '의병'이란 국가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 즉 백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백성의 군대[民軍]를 말한다.
한말의 외세의 침략에 있어서 유림이 이 '義理'에 기초하여 구국의 깃발을 내세운 소위 '義擧'(의병운동;의병전쟁)의 대응방식을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유림에 있어서의 '의리'는 멀리는 공자의 역사철학인 춘추정신, 곧 '춘추의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가까이는 주자학의 '理의 철학'의 보편주의와 그것을 받아 조선조 주자학자들이 병자호란 이후 내세운 자기완결적인 '小中華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의 기초는 동아시아 전근대에 있어서의 소위 '도덕적 문화주의'임은 물론이다. 그것은 근대 서구의 식민지 침략 앞에서 매우 비현실적이며, 추상적이며, 그리고 정신주의적인 성격을 띄었으나, 반면에 매우 도덕적이며, 휴머니즘적이며, 그리고 평화적인 문화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주었다.
19세기 동서 문명의 초기 교섭에서 식민지 침략에 동원되었던 과학기술과 전쟁무기는 선악 가치를 떠나서 서구문명의 우수성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을 동원한 자본주의적 침략은 인문주의(휴머니즘) 입장에서 보면 평화를 파괴하는 악마적(비도덕적) 행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금세기 내지 21세기 이후에 있어서도 서구가 주도권을 가질 이 과학기술은 인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이제 이미 동 서의 구분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동서교섭 초기에 있어서 그것이 동양사회에 던진 의미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특히 당시 강대국들이 이와 같은 식민지 쟁탈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제정치외교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인정해 준 은밀한 책략과 담합은 조선이 일본 침략에 맞서 게릴라전을 펴지도 못하게 만든 주요 여건을 조성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선 유림 및 민중의 의병활동은 매우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것일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국력의 쇠약, 즉 스스로 국가를 유지할 능력이 없는 데 있었다(당시 일본과 러시아는 우리나라를 그렇게 평하였다). 조선조에 있어서 오랫동안의 사대외교는 국내정치에 있어서도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정책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주자학적 보편주의는 개별 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의식 차원에서부터 봉쇄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역사적 전통 아래에서도 일반 유림이나 농민들의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은 높이 살 만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말의 이러한 척사위정, 항일의거 등은 비록 주자학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복고적 민족주의이지만, 이것을 통하여 점차 근대국가의 민족주의를 형성해 갔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큰 것이다.
한말의 의병운동은 척사위정론자 의암 유인석의 문제자들에 의해 경기 강원 지방을 중심으로 펼쳐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한강 이남의 전지역에서 시기적으로 다소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국적으로 의거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영남지방은 예로부터 퇴계학파의 요람이므로 많은 유림들이 일제의 침략과 단발령에 유교적 이념(춘추의리)를 내세워 의거에 나섰다. 특히 경북북부 지방은 산악이 많아 진을 치고 저항하기에 적합하였다. 그리하여 영남지방의 유림으로서 항일의병의 기치를 세운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이들 중 비교적 자료가 확실하고, 유림으로 거의한 경우나 또는 몰락한 寒門의 유생이지만 유림의거로서 특기할 만한 경우를 선정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지면관계상 척암 김도화, 벽산 김도현, 왕산 허 위, 운강 이강년 4인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그외 인물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Ⅱ. 拓庵 金道和의 의병활동
척암 김도화는 자가 達民이며, 척암은 그의 호이며, 관향은 義城이다(경주 김씨). 증조는 휘가 굉(土宏)인데, 순조조 예조참판이며 大山 李象靖의 고제였다. 湖門嫡傳으로 세칭 龜窩先生이라 한다. 祖는 휘가 弼秉이며, 考는 휘가 若洙이니 학행덕업으로 선대의 빛나는 업을 계승하였다. 搙는 진주 鄭氏 象觀의 따님인데, 立齋鄭宗魯의 손녀요, 損齋 南漢朝의 외손녀이다.
척암은 순조25년(1825) 경상도 안동군 일직면 구미동 본제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장자나 굴원의 서와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식의 문장을 탐독하였으나 20세를 전후하여 깨닫는 바가 있어 사서, [태극도], [서명], {근사록}, 朱子書 등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25세(1849)되던 해에 定齋柳致明 선생에게 나아가 집지하였다. 이후 10수년동안 정재 선생에게 배워 학문이 더욱 깊어졌다. 이 때를 전후하여 부모의 권에 못이겨 과장에 나아갔으나 비리가 심함을 알고 과업을 포기하였다.
37세 (1861) 정재 선생이 서거하자 정성을 다하여 敍傳을 찬하고 그의 문집을 인행하였다. 42세 때(1866) 先公의 상을 당하였고, 복을 마친 후 [太極圖], [玉山講義], [仁說] 등을 手抄해서 [聖學眞源]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과업을 완전히 단념하고 주자 퇴계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68세(1893) 때 遺逸薦으로 의금부도사를 제수받았고, 이어 성균관 直講司藝로 추천되었으나 시국의 혼란으로 이행되지 못하였다.
1895년 을미 (선생 71세)에 왕후 시해사건, 단발령 반포 등으로 민심이 격앙되었고, 이심전심으로 擧義討賊의 沙鉢通文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이 때 고종으로부터 衣帶의 密詔가 척암에게 내려졌다. 안동 지방에서는 척암을 비롯하여 면우 곽종석, 권진연, 강육 등을 중심으로 의병참모진이 결성되었다. 의병진은 성대 권세연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안동부를 점령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척암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안동부를 점거하니 부사 김석중은 도주하다가 조령에서 문경 의병장 이강년에게 처단되었다.
척암은 영일에서 거의한 농고 崔世允을 亞將으로 삼고 영주, 예안, 봉화, 의성, 청송, 예천, 영양, 진보 등의 제의진과 상호 제휴하고, 제천의 유인석 의병대장과 호좌 소모토적대장 敬庵 徐相烈과 연합작전으로 상주의 함창 태봉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초기 의병은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무기도 시원찮아 많은 손실만 입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흩어진 의병들은 다시 안동부를 중심으로 선생의 막하로 모여 副將에 柳蘭榮, 都總에 金夏休, 선봉장에 柳時淵, 召募將에 李忠彦 등으로 재편하여 병력을 보강, 다소의 전과를 올렸으나 관군의 압력과 해산을 촉구하는 왕의 윤음을 듣고 어찌할 도리 없이 파병하고 말았다.
척암은 파병 후 곧 '自明疏'를 올렸는데, 그곳에서 그는 말하기를, "복수토적은 춘추대의이며, 赴急死難은 신하의 할 일입니다."하고, 관군에 의해 민생이 도륙되니 이는 전일의 哀痛詔의 뜻과는 다르며, 매국간신이 아직 다 제거되지 않았으며, 왕후의 장례가 복수의 대의 보다 경한데도 시해 뒷 처리가 아직 되지 않아 의병을 해산하지 못하였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으로는 의병을 은밀히 유지시켜 장래 유효하게 쓰이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그후 그는 세사를 일체 사절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斯文을 부식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는 국가가 망하는 비상한 시기에 유림의 원로로서 그가 평소에 배운 바 대로 춘추의리로 거의를 하여 대장에 추대되었지만,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그를 추대한 사림들이 사세가 불리하니 閉門縮首하고 눈치를 살피는 일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당초 倡義를 하던 날 온 고을 사람들이 뜻을 같이 해서 老少가 다투어 분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뜻이 있는 자는 槍劍을 잡고 일어나고, 재산이 있는 자는 재물을 기울여 군비를 도와, 위로는 나라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부모의 遺體(몸)를 보존하고자 맹서한 것인데, 이것은 하늘의 이치요 사람의 도리로서 목숨을 버리는 길 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러나 한번 鳳亭에서 놀라 패한 뒤로는 홀연히 흩어져 幕中에는 部署를 맡을 자가 없고, 불러도 오지 않고 설득해도 깨닫지 못하고, 일체 피하는 것만 일삼으며, 심지어는 한가로이 쉬면서 비웃는 자도 있는가 하면 오며가며 작은 시혜를 던지는 자도 있다. 생각컨대 이 고장에 충의의 풍속이 뜻하지 않게도 사람을 이렇게 박하게 대접하는가!"라고 탄식하였다.
이어서 군수용 물자는 긴급히 소요되는데도 전연 협조하지 않거나 반만 내고 회피하는 일이 많아 사졸들이 주림에 시달리는 상황을 말하고, 또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으면서 나중에 공은 자기에게 돌리려고 하는 당시 세태를 그는 힐난하고 있다.
척암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즉 "차라리 한 사람의 손에 죽을지언정 만인의 입에 오르내려 매장되고 싶지 않으며, 지금 사람의 쇠망치에 맞아 쓰러질지언정 어찌 차마 평안히 죽어 뒷사람의 筆誅에 죽을 것이랴!"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다. 척암의 의리 정신은 당시 입으로는 대의명분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명철보신이나 釣名欺世하려는 속유들이 가련하였던 것이다.
척암은 당시 문장가로서 또한 성리학자로서 영남유림의 태두로서 추앙받는 걸출한 존재였다. 그의 문집을 보면 사제간의 왕래 서간문에는 [태극도설]이나 성리설, 또는 禮說에 관한 질의응답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또 문집 권 9에 실려 있는 잡저편에는 스승 柳定齋에게 受學할 때의 문답인 [記聞錄]이 있는데, 그 내용에도 역시 經義, 理氣性情, 涵養(수양)에 관한 내용이 많다. 또한 같은 잡저류 속에 있는 [讀書期義]는 [太極圖說], [西銘], [玉山講義](주자의 仁說)에 관한 주석이다. 이것 역시 모두 성리학에 관한 저술들이다. 그는 또 이기설에 있어서는 그의 학문연원이 말해주듯 퇴계의 理氣互發說을 계승하였다.
1905년 을사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강압적으로 맺어지자 척암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탄식하기를,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한 것만 아니다. 군주 보다 중한 것이 사직이요, 사직 보다 중한 것이 백성인데, 백성이 장차 오랑캐의 노예가 되려 한다."고 지적하고, 결연히 붓을 들어 [請罷五條約疏]를 초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81세였다. 그는 매국대신을 질타하기를 "저 오적이란 자는 짐승도 더러워서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이 있으니, 첫째가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가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가 君父를 협박한 죄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開化의 협약에 한 나라가 위약했을 때는 만국이 합공하기로 되어 있다는데, 오늘날 오랑캐가 이 나라에 뛰어들어 임금을 위협하고 나라의 器物을 옮겨가고 그 땅덩이마저 빼앗아가니 이것이 과연 협약의 본의이옵니까?"하고는 이어서 "각국 공사에게 포고하여 일본이 위약했음을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국제정세는 이미 일본에게 조선 침략의 권한을 준 마당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소박한 유림의 이러한 주장은 애절하게 보일지라도 바르고 정당한 외침이었다.
{척암집} 별집 제1권에 1895년(을미)에 고종이 내린 '哀痛詔'가 실려 있는데, 어떤 경로로 척암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로써 그가 조야에 명망과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합방이 되자 척암은 [請勿合邦疏]를 올리고, 통감 伊藤博文에게는 [檄告統監文]을 보내었다. 합방 직후 일본 문학사 高橋亨이 총독의 명으로 그를 방문하여 斯文의 진작을 부탁하였으나 한마디로 거절하고, 청에 못이겨 시률 2편을 적어주었다.
그는 '合邦大反對之家'라고 문에 크게 써 붙이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1912년 88세를 일기로 고종하였다. 그는 한말의 풍운 속에서 늙은 노구를 이끌고 구국의 일념으로 의거를 도모한 영남학파의 마지막 학자요 양심이었다.
Ⅲ. 碧山 金道鉉의 의병활동
김도현의 자는 明玉이고, 벽산은 그의 호이며, 관향은 金寧이다. 그는 1852년 경북 英陽군 靑初면 小靑리(현 靑杞면 上靑동)에서 부 金性河와 모 한양 趙씨 사이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조 때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忠毅公 金文起의 14세손이며, 충의공의 손자 光弼이 어릴 때 영양으로 피난옴으로써 입향시조가 되었다. 광필 이후 벽산에 이르기까지 관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가세는 떨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조부 夏述이 학문을 조금하여 유고를 남기고 있다.
영 정조 때 김문기의 신원이 이루어져 광필의 다른 형제들은 중앙정게에 진출하였으나 광필계는 게속 영양에서 향반에도 들지 못하고 한미한 집안을 유지하였으나 부 조 양대에 걸쳐 천석의 살림을 마련하게 되자 가세를 만회할 수 있었고, 그 재산은 나중에 벽산이 의거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또한 집성촌이라 을미의병 때는 12종반이 의병에 참여하였고, 지리적으로 상청동 일대가 진을 치기에 좋은 곳이라 가장 전투적으로 오랫동안 항쟁을 할 수 있었다.
벽산은 유년시에는 조부 槐巖 金夏述(1808-1864)에게서 배웠다. 자라서는 과거를 보려 하였으나 국사가 날로 잘못되는지라 과거를 단념하고, 朱子書, 退溪書를 읽었고, 그 중에서도 疏箚 封事와 같은 상소문 등에 더욱 관심을 많이 가졌다. 또 임오군란 후에는 군사 지리 천문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뚜렷한 사승관계는 없으나 경술국치를 당하여 당시 안동의 퇴계학통인 響山 李晩燾가 단식 순절하자 심상 3년을 한 것으로 보아 퇴계학통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유생으로서의 모습은 몇편의 시문이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창의 항쟁은 영남에서 특기할 만하다.
벽산이 창의를 결심하게 된 것은 을미년 11월 종제 한현으로부터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주상과 신민들이 머리를 깎으려 한다는 급보를 받으면서였다. 동년 12월 읍으로 나아가 통문을 띄우고 향유들과 기의를 의논하였다. 이 때 안동과 예안을 다녀온 후 거의하기로 하여 그는 안동과 예안으로 가 안동진의 대장 권세연과 의논하였다. 그의 눈에는 안동진이 매우 허술하게 보였다.그리하여 벽산의진은 산포수를 중심으로 의진을 구성하였다.
벽산의진의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1894년 벽산의 생가 뒷편에 검산성(검각산성)을 쌓음으로써 다른 의진과는 달리 효과적이고 장기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그의 부 조 대에 이룬 천석의 경제력이 의진을 장기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벽산이 이만도 의진을 둘러본 후 그는 거의에 앞서 청량산 지형을 10여일 답사하였는데, 그후 1896년 정월 유시연과 함께 청량산에서 거병하였다. 을미의거는 유림이 주도한 관계로 대개 서원이나 향교에서 거의하였으나, 벽산은 산에서 거의하였다. 즉 벽산은 기병시부터 전투의진의 태세를 갖추고 일군과 대적하기 위하여 산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이 벽산의진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의진은 문중 종반이 다수 참여함으로써 조직이 매우 공고하고 전투성이 강하였다. 이 점도 역시 특기할 만하다.
청량산에서 창의한 벽산의진은 조직을 정비한 후 먼저 봉화군을 점령하고 군수의 지원을 받아 동헌에 진을 쳤다. 벽산진이 안동에 도착했을 때 안동에는 김도화 의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영주에는 김우창, 영양에는 조승기, 진보에는 허 훈이 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때 선성(예안)진의 중군장 김석교가 제천진으로 옮겨감에 따라 벽산은 그 후임으로 취임하고 진을 합쳤다. 그리하여 7군과 연합작전을 계획하였다. 벽산은 당초부터 연합의진을 결성할 것을 구상하였는데, 이 점 또한 벽산의진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합의진은 함창의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을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선성진이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일군은 대구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패전하고 말았다.
벽산을 재기의 준비를 하던 중 강릉의진 閔龍鎬의 초청을 받게 되어 60여명의 의병을 데리고 강릉으로 갔다. 민용호 의진과 합한 벽산의진은 京軍과 대공산성에서 일대 접전을 벌였다. 화력이 우세한 관군을 당해낼 수 없어 의병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후 진을 정비하여 보현산성과 삼척에서 다시 관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화력 부족으로 퇴각하여 군사 10여명을 이끌고 영양으로 돌아왔다. 전국의 의병은 1986년 여름 거의 해산하였는데, 벽산은 검각산성을 보수하고 군영을 차린 다음 이곳을 중심으로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벽산은 마을을 의병활동 중 잠시 집에 들렀는데, 일군의 방화로 괴암서당과 민가는 소각 당하였으며, 부친은 아우의 집에 피신하고 있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이 무렵 선유사로 부터 해산을 종요하는 글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양력 10월 15일) 의병을 해산하였다.
벽산은 의병을 해산한 후 1903년을 전후하여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로부터 五邑都執綱을 위촉받아 영양 청송 진보 영덕 영해 다섯 고을의 화적 토벌에 힘을 쏟았다. 을미의병 해산 후 갈 곳 없는 의병들이 토비로 화하여 각지에서 탐관오리나 부호들을 약탈하고 교통을 두절시키고 하였는데, 특히 경상북도 북부와 강원도 소백산맥 일대가 심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의병이 일어나 이들이 의병과 합류하게 되자 벽산의 처지는 곤란하게 되었다. 특히 영덕 영양 지방에서 평민의병장으로서 이름이 높았던 신돌석 휘하에는 많은 영학당 활빈당이 모였기 때문에 더욱 벽산의 처지가 난감하였다. 그러므로 을사의병 때는 고종으로부터 거의의 권유를 받고서도 벽산의 의병활동은 을사의병 때 보다 규모에서 훨씬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벽산은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서울에 올라와 상소를 올리는 한편 서양 각국에도 포고문을 보내어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 포고문에서, "엎드려 원하옵건대 각국의 공사들께서 너그러운 도량으로 公法을 엄히 밝혀 저 일본국의 전횡을 책하시어 우리 대한 땅의 유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42년 동안 지켜온 우리 임금의 지위를 보호하여 우리 2천만 민중의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하였다.
벽산은 안동을 거쳐 귀가하여 1906년 1월 자신이 집강소 시절 양성한 포수 5, 60명을 이끌고 기의하였다. 그러나 안동 관군에게 진압되고, 벽산은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김씨가 노소 여러 사람이 잡혀가고, 가축과 재물 등을 모조리 뺏겼다. 출옥 후 고종의 기의 밀조를 받고 삼남 각군에 격문을 보내 기의를 독촉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기의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다시 기의할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이 있었다. 집강소 토벌 전역이 농민을 모으기에는 어려웠고, 일본 헌병대에 감금된 바 있어 감시가 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병운동이 여의치 않고, 또 을사조약 이후 상경했을 때 신문물에 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교우관계를 맺고 있었던 趙秉禧를 통하여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石農 조병희는 영양 주곡 출신으로 위암 張志淵과 가까이 지내던 인물로 국민교육회, 대한자강회 등의 회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혁신유림이었다. 그리하여 1908년 영양에서 '英興학교'를 세우고 계몽운동을 펴나갔다. 그러나 그 규모는 서당 정도로 작은 것이었고, 1911년 폐교되는 것으로 보아 그 활동도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벽산은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모든 것을 단념하고 순절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부친이 살아계시므로 죽지 못하고 있다가 부친 사망 후 결행되었다. 1914년 12월 18일(음력 11월 2일)손자 礪來에게 남겨준 遺詩에 잘 나타나고 있다. 즉 그는 "늦게 죽는 몸이 어디에서 죽겠는가, 허나 나라는 망하여 남은 땅이 없구나. 魯仲連이 죽은 지 천년이나 명월은 아직도 밝도다."라고 읊었다. 魯仲連은 전국시대 제 나라 변사로서 고절의 선비였다. 그는 趙 나라 평원군을 설복하여 秦 나라를 황제로서 섬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진 나라가 급히 조 나라를 포위하였으나 중련은 진이 마음대로 황제라 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나는 동해 바다를 밟고 가다 죽겠다(빠져 죽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진 나라가 물러갔고, 그 후 제왕에게 누가 권하여 벼슬을 내리려 하자 중련은 바다에 숨어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와 같이 벽산은 蹈海의 길을 가기로 작정하였다. 이는 땅을 모두 더러운 왜에게 빼앗겼으니 남은 깨끗한 바다에 몸을 의탁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12월 22일(음력 11월 6일) 국내동포에게 고하는 글과 絶命詩를 남기고, 12월 23일(음력 11월 7일) 大津(寧海) 앞 바다로 걸어들어가 생을 마쳤다. 그의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조선 왕조말에 태어나, 붉은 피 온 창자에 가득하다. 중년의 독립운동 19년에, 머리와 수염 서리와 같네.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그치지 않고, 어버이 여의니 마음 더욱 아프네. 머나먼 바다가 보고팠는데, 이레가 마침 冬至이더라. 홀로 서니 옛 산만 푸르고, 아무리 헤아려도 방도가 없네. 희고 흰 저 천길 물 속만이, 족히 내 한 몸 감출 만하네."
Ⅳ. 旺山 許 蔿의 의병활동
왕산 허 위(1855-1908)는 자가 季馨, 旺山은 그의 호이다. 父 聽秋軒 祚와 母 貞夫人 眞城李氏 사이에서 薰(호 舫山), 藎(호 露州), 唫(일명 魯, 또는 煥, 호 性山)를 형으로 4형제 막내로 태어났다. 증조부의 휘는 暾인데, 贈副提學이었고, 호는 不孤軒이다. 이 불고헌부터 김해에서 善山 林隱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초취는 순천 박씨이며, 계배는 평산신씨였고, 슬하에 4형제와 딸 넷을 두었다. 왕산의 집안은 형제와 부자, 숙질들이 모두 의병 항쟁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야말로 양반 독립유공자 집안이다.
왕산은 형 舫山에게서 배웠는데, 방산은 왕산의 종조부인 太初堂 許恁(1782-1855)에게서 배웠다(나중에 그 앞으로 양자를 갔다). 방산은 가학에서 출발하여 溪堂 柳疇睦, 性齋 許傳에게 집지함으로써 眉未, 星湖의 嫡傳을 이어받아 사림의 대표가 되었다. 방산은 시국이 암담해지자 고향의 토지를 팔아 동생들의 독립운동으로 대주고 자기는 청송으로 들어갔다. 문하에 종유한 사람이 많았으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저명한 이로는 동생과 韋庵 張志淵, 朴尙鎭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여느 선비 처럼 유교 경전을 배웠지만, 남 다르게 {춘추}나 {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와 {육도삼략}과 같은 兵書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는 1899년 관로에 나아간 이후로는 구학문에 집착하지 않고 신학문에 접하므로써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장지연을 만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의병활동도 초기에는 척사의 의병장이었으나 1905년 이후로는 애국계몽사상까지 수용하였다. 그는 유학의 전통을 지키면서 개화를 받아들이려고 한 진보적인 유학자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1904년 의정부참찬으로서 올린 10개조의 국정개혁안에 잘 나타나 있다.
허왕산은 진사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과 밀의한 후 1896년 2월 10일 金山(오늘날의 김천) 장날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한 후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3월 10일 기의하였다. 왕산은 참모장을 맡았는데, 이 부대는 규모와 사기면에서 괄목할 만한 부대였다. 병법에 일가견을 가진 허왕산이 참모장을 맡았는데다 추풍령 요새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금산군 금릉에 있는 무기고를 습격하여 그 무기로 무장을 한 후 금산과 성주에 진을 치고 격문을 띄어 모병을 하였다.
왕산의 작전 계획은 추풍령과 합천 지방을 장악하면서 영남의 중심인 대구부를 협공하여 서울 부산 사이를 대구 김천 근방에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를 입수한 대구 관군이 완전한 진용을 갖추지 못한 성주진을 급습하여 진을 와해시키고, 이어 서울과 공주의 관군이 출동하여 금산 부대를 공격하므로 두 부대는 패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은찬 조동호가 포로가 되고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왕산은 패퇴한 의병 중 포군 1백여명과 유생 7-80여명을 재집결시켜 직지사에서 의병을 재편성하였다. 그리하여 1진은 왕산이 지휘하여 진천으로 진군하였고, 이기찬이 지휘하는 1진은 영동, 황간, 문경으로 진출하였는데, 관군이나 일군과의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이 때 의병을 속히 해산하라는 왕의 조칙이 近臣 田慶雲을 통하여 왕산에게 전달되었다. 충군애국의 입장에서 거의했던 허왕산에게 있어서 국군의 조칙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또한 당시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단발령도 취소된 상태라 근왕의거를 했던 유림의병은 대부분 해산령에 동조하였다.
거의 실패 후 형 방산을 따라 진보 집에 돌아가 약 3년 동안 보내던 중 1899년 申箕善의 추천으로 45세의 나이로 뒤늦게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원구단(篹丘壇) 참봉에서 시작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후, 評理院 首班判事를 거쳐 마침내 평리원 署理裁判長에 올랐다. 이즈음 장지연과도 친교를 맺으면서 신학문에도 식견을 넓혀갔다. 관직은 빨리 승직되어 1904년 8월에는 의정부 참찬, 10월에는 釐正所 議定官이 되었고, 다음해에는 秘書院丞이 되었다. 이러한 관직에 있으면서 그는 항일 운동을 전개하여 일제를 당황케 하였고, 전국민을 고무시켰다.
1904년 음력 5월 왕산은 평리원 판사로 있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협의하여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는 '排日檄文'을 전국에 발송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일진회의 매국적 망동이 날로 심해지자 신기선 등과 협의하여 一進會 타파 계획을 세우고 聲討文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또한 일본의 재정 및 관리 임면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통박하기도 하였다.
왕산의 이러한 상소와 배일격문의 배포에 대해 일제는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하는 일이므로 당연하다고 하며 중지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 때 왕산은 판서 金鶴鎭 등과 상의하여 경성주재 각국공사에게 回文을 발송하여 한국의 독립을 각국이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는 찬정 최익현, 판서 김학진과 함께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두 사람은 곧 석방되었으나 그는 4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사직소를 올렸는데, 그 속에서 弊政개혁 10개조를 건의하였다.
10개조의 내용을 보면, 학교를 세울 것, 군정을 닦아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 철도, 전기를 시설할 것, 연탄을 사용하여 산림을 보호할 것, 건답에 水車 사용, 잠업과 목축 장려, 세금을 공평하게 할 것, 은행 설치, 노비해방과 적서 차별의 철폐, 관직에 차명하는 일을 없앨 것 등 시무에 절실한 것이었다.
관직을 사임한 후 집에 돌아갈 뜻이 없어 경북 지례 삼도봉 아래 두대동에 은거하고 있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왕산은 이 소식을 접하자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를 돌며 유인석 곽종석 등 유림과 현상건 이학균과 같은 동지관료들과 의논하였다. 을미의병 때의 일을 거울 삼아 신중하게 대처하기로 하였다.
1907년 7월에 왕으로부터 '起義' 두 글자의 依帶詔를 받았다. 그는 우선 정환직에게 군자금 2만량을 조달하고 산남의진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자신은 2개월 뒤 군대해산을 계기로 기의하였다.경기 연산 적성 등지를 근거로 창의의 기치를 올렸다. 5백여명으로 의진을 조직하고, 이인영, 이강년 부대 등과도 연락하여 서울을 위협하는 포위진을 구성하였는데, 9-11월 사이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때에 지평 지방의 연합의병 부대인 관동창의대가 서울 진공을 구상하면서 연합진영의 구성을 계획하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계획에 왕산의 인품과 지략에 큰 기대를 거면서 그에게 권유하여 왔다. 이에 왕산은 관동창의대 중군장이 된 전동지 이은찬의 주도하에 13도倡義大陣所를 설치한 후 지휘부서인 元帥府를 구성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한편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도 일본의 불법 행위를 성토하는 격문을 돌려 한국이 처한 입장을 알리고, 의병이 폭도나 비도가 아니고 국제법상 전쟁단체로 인정하고 성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 각국의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보내졌다. 물론 이인영의 명의로 보내졌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군사장이었던 왕산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산은 13도의병 연합진영의 편성과 함께 곧 서울진공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908년 1월 28일(음 12월 25일) 대장 이인영은 부친 사망으로 군무 일체를 군사장 왕산에게 맡기고 귀향하였다. 왕산은 원수부 병력 300명을 선발대로 이끌고 양주를 출발, 수택리로 남하하여 그곳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주력부대들이 집결하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진공작전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일군은 왕산의 선발대에 먼저 공격을 하였다. 급습을 받은 왕산의 부대는 고전하면서 주력부대의 도착을 고대하였으나 도착이 늦었고, 그 사이 부장이 부상을 입는 등 사상자가 속출하였다.부대는 양주로 철수하고, 결국 원대한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13도 창의대의 서울 진공작전의 실패는 의병항쟁의 한계를 들어내어 전의병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그 후 왕산은 1908년 2월 임진강 유역으로 다시 북상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창의원수부의 대장으로서 그곳에서 활약 중인 의병들을 통합 지휘하였다. 이완용이 회유하기도 하고, 신기선이 투항을 권유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한편 왕산은 화약을 구하기 위하여 사람을 서울로 파견하기도 하고, 휘하의 경현수에게 밀서를 주어 청국 혁명당에게 무기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의병의 전투력을 배양하면서 왕산은 다시 한번 서울 진공을 계획하였다.
4월 21일 왕산은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박정빈 등과의 연명으로 전국 의병의 재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하였으며, 5월에는 박노천 이기학 등을 서울에 보내어 태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반환, 통감부의 페지 등 30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서울 진공 작전은 6월 11일 영평에서 은신 중이던 왕산이 일본 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됨으로써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곧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헌병사령관 明石元二郞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한국이 독립되어야 동양의 평화가 유지된다 하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경고하였다. 그의 이러한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의 그것과 함께 유명하다.
안중근 의사는 "2천만 동포에게 허 위 선생과 같이 충을 다하는 용맹의 기상이 있다면 오늘날과 같은 나라의 욕은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왜경에게 말하였던 것이다." 왕산은 일제에 의해 억울하게도 1908년 9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고 10월 21일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의병 활동은 13년 동안으로 의병장 중 최장에 속한다. 그는 초기에는 척사 의병장이었으나 1905년 이후에는 애국계몽사상까지 수용한 특이한 의병장이었다. 헌병사령관 명석도 그를 '國士'라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군인이 칭찬한들 그에게는 오히려 욕이 될 뿐이었다.
왕산의 遺文을 통하여 그의 사상, 즉 救國論의 일단을 살펴본다. 그의 구국론은 자강혁신론, 동양평화론, 무력항쟁론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무력항쟁은 그의 의병활동으로 나타났으므로 앞의 두가지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왕산은 기본적으로 일반 유림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小中華'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외국의 침략에 무너지게 된 이유는 땅이 좁거나 인민이 적거나 재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정치가 바로 서지 못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치가 바로 서지 못한 이유는 소인들에게 정치를 맡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건네지고, 벼슬도 사고팔고 하고, 옥사도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죄가 있어도 징계되지 않고 원통함이 있어도 풀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또 일진회라는 친일 단체가 외세에 아부하여 조정을 어지렵히는 것도 큰 문제라고 보았다. 공정한 정치, 이것이 왕산의 자강혁신론의 핵심이었고, 그가 참찬을 사직하면서 올린 폐정개혁 10개조는 척사위정 사상의 범위를 넘은 상당히 진보적인 것으로서 그의 자강혁신론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왕산은 일본을 '東隣', 러시아를 '北隣'이라 칭하며 우리나라의 위기를 노 일의 대립구도 속에서 파악하였다. 북린은 우리나라가 제대로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하여 강한 나라에 먹힐 것이니 자기들이 대신 맡아 세력을 부식하자는 욕심이고, 동린은 우리 토지가 탐이나 우리가 이미 약하여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자기들이 원조하여 나쁜 강국으로 부터 지키자고 하는 의도라 분석하였다. 왕산은 아관파천에서 러시아를 탐폭한 나라라 규정하고, 일본이 동양평화를 지킨다고 보았으나, 일본이 점점 강제조약을 맺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러시아가 우리에게 세력을 뻗쳤다고 해도 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일본을 다시 규탄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잘못은 일본 정부의 잘못이 아니라 일본에서 보낸 사신이, 또는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이 잘못하여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이 군대를 거두어 가고 옛날 맺은 우호조약을 다시 수복하면 두 나라가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사령부에 잡혀가 있을 때 이렇게 시를 읊었다: "덧없는 생과 사는 말하지 말라.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몸이라. 칼을 뽑아 싸우다가 칼을 던지면 웃을 것을.돌아보면 바로 한 집안 사람이라."
적어도 이 시에 한하여 볼 때 그는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반일의식은 가지지 않고, 동양평화론의 구상 아래 일본을 달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제2기 의병에서 기의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대일인식과 유관하다고 볼 수 있다.
원래 노 일전쟁 초에 일본의 외무대신 小村壽太郞이 日露交涉始末을 각국에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유지하겠다고 하였고, 日皇의 宣戰詔勅에도 한국의 독립에 언급하였다. 이러한 것을 왕산은 믿고 일본의 동양평화에의 기여를 의심하지 않았다. 또 당시 국제적으로 公法이 있어, 일본이 이 공법을 어기고 우리나라를 침략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왕산은 일본이 만약 우리나라를 병탄하면 중국이 시기할 것이니 중 일 관계를 보아서라도 일본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왕산은 일본이 침략의도를 감추고 내세운 위장된 동양평화론(소위 大東亞共榮)을 액면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국제공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동양평화를 제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위정척사의 '華夷人獸之別'의 대외인식에서 크게 나아간 국제인식이었지만, 자본주의 침략전쟁의 속성이나 당시 국제정세의 냉혹함, 일본의 征韓論이나 대륙침략 야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족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한반도의 안보를 동양평화론의 틀 속에서 구상한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후일 안중근 의사도 그와 같은 사상을 피력한 바 있다.
Ⅴ. 雲崗 李康秊의 의병활동
운강 이강년(1861-1908)의 자는 樂仁이며, 운강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로서 1861년 문경군 道胎里에서 李起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담이 크며 위엄이 있어 무리를 압도하였다 한다. 그의 집안은 김자점의 외척이었던 까닭에 화를 피하여 안동 감천으로 낙향하여 대대로 벼슬길에 나가지는 못하였고, 운강도 일찍부터 벼슬을 구할 마음이 없었고, 다만 유학에 뜻을 두고 학문을 닦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그는 특히 의암 유인석에게 10년 정도 사사하였다.
20여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사과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4년 뒤인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행동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0년 후 1894년 동학군에 투신할 때까지 그는 산속에 깊이 묻혀 독서하며 민족의 울분을 달래었다.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농민군이 내세운 척왜는 민족의 사활에 관계되는 중대사로 생각하여 동학에 뛰어들었다.
그 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이어 을미년 왕후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곧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운강은 1896년 2월 23일(음력 1월11일) 문경에서 기의하였다. 수백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2인을 잡아 농암 시장에 효수하였다. 이어 안동에서 권세연이 거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를 모의하였다.
1월 29일에는 제천으로 의암 유인석을 찾아가 師弟의 의를 맺었다. 3월 14일(음력 2월 1일)에는 의암의 지시를 받아 유격장이 되어 6哨(약 1백명)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적 병참을 공격하고, 또 9초를 거느리고 중군 尹基榮과 함께 문경 枰川에 진군하여 조령의 三關要路를 끊는 등 주로 충북 일대에서 활약했다.
1896년 4월 張基濂이 거느리는 관군에게 제천에서 패한 후 의병을 거느리고 단양에서 풍기를 거쳐 정선으로 들어가 去守之計를 정하였다. 다시 압록강을 거쳐 요동으로 가고자 하다가 영월에서 더 전진할 수 없어 소백산으로 들어가 8월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운강은 다음해 5월 요동으로 건너가 의암을 만나고, 8월에 단양 금채동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할 때까지 약 10년간은 의암 밑에서 유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1907년 재기의한 후로부터 1908년 7월 2일(음력 6월 4일) 충북 淸風 까치성[鵲城] 싸움에서 부상으로 체포될 때까지의 활약과 전과를 {일록}에 따라 살펴보면 1907년에 27회, 1908년에 13회, 도합 크고 작은 전투가 40회에 이르고 있다.
운강과 민긍호는 강원도 충청도 경북 일대에 걸쳐 의병 세력을 주름잡아 활약하던 명장들로서 일군경들도 이들을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들이 체포된 후 이 일대의 의병활동이 갑자기 쇠해진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운강은 八域同志에게 고하는 告訣文에서 "大戰 30여회에 죽여서 얻은 敵酋가 1백여級이다."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전노장으로서 의병 투쟁상의 전과는 실로 위대하였다.
운강의 전투 중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인제 百潭寺의 전투(음력 3월 12일), 안동의 西壁 전투와 봉화의 乃城 전투(음력 4월 6일), 안동의 才山 전투(음력 4월 8일)를 들 수 있다(모두 1908년도).
{운강선생창의일록}을 보면 그는 능숙하고 담대한 유도 게릴라전으로 적에게 결적적인 타격을 주어 개가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1908년 7월 2일(음력 6월 4일) 까치성 전투에서 발목에 부상을 입고 적에게 체포되었다. 이 때 그는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탄환이여 너무나 무정하도다. 발목을 상하여 더 나아갈 수가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더라면, 욕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갈 것을."
그 후 운강은 10월 1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향년 51세였다. 동지에게 보내는 고결문을 남겼다. 운강 의병부대의 將任錄을 보면 경북 충북 강원도 등 넓은 범위의 지역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지역의 지리에도 밝아 게릴라전을 용이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운강 의병부대는 많은 전과를 올린, 의병사상 자랑할 만한 막강한 부대였다.
Ⅵ. 결 어
한말 의병항쟁의 정신적 바탕은 열강의 식민지적 침략에 대해 민족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척양척왜' 라는 배타의식(배외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또 조선조 주자학의 주자학적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던 배타적 민족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자학적 민족의식은 멀리 공자의 '춘추의리'라고 하는 역사의식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그것의 원류는 어느 민족이나 고대부터 가지고 있던 '민족우월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이 보인 이 민족우월의식은 특히 문화우월주의로 병형되어 나타났으며, 또한 그것은 예에 의해 국제관계도 계층적으로 질서지우는 '성리학'의 보편철학으로 포장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문화적 우월주의로 합리화된 민족적 배타의식은 군사적 침략 대신에 정치적 종속주의를 강요하는 방식이었고, 정치적 종속은 또한 문화적 종속을 통하여 일층 공고화되는 식이었다.
조선조의 문화적 사대주의라 할 수 있는 '소중화주의'는 임란시의 명의 군사적 원조에 대한 감사에서 '재조번방의 은'이라는 독특한 한 중 관계에서 시작되었지만, 명청교체기라는 국제적 변화에서 결국 소중화주의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매우 관념적이고 자기완결적인 길로 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소중화주의가 청의 군사적 강압 앞에서는 다시 사대주의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념적으로는 조선조 유림의 정신 속에는 여전히 '존명'이라는 명분 아래 우리 민족 나름의 문화적 우월의식이 잠재해 내려왔다. 그러한 잠재의식이 한말의 구미열강 및 일본의 식민지 침략을 당하여 일차적으로 '척양척왜'의 배외의식으로 나타났고, 차차 열강 및 왜의 군사적 침략을 전후하여는 소위 민족의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말 일본의 군사적 침략에 맞선 의병의 항쟁은 현실적으로는 한 나라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쟁과 같은 것이었지만, 그 항쟁의 이념은 여전히 공자의 춘추의리요, 주자학적 민족주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말 유림의 항일항쟁이 매우 허약하고 무모하고 승산없는 전쟁의 양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특히 초기 유림이 주도한 의병항쟁이 그러하였다). 열강의 침략이 자본주의적 침략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소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쇠약해진 조선의 국력 앞에서 유림의 유교적 의리론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침략에 대한 한 민족의 항쟁의지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식민지적 침략에 대한 약소국의 독립으로 점철된 현대사가 말하여 주는 바이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말의 항일의식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의 국제사회의 열강들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묵인하기로 담합을 함으로써 항일항쟁이 본격적인 전쟁(게릴라전)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만 것은 약소국으로서의 비운이랄 수 밖에 없다. 특히 일본의 침략은 조선에 있어 청조에 대한 굴복 이후 또 하나의 문화적 열등국으로부터 군사적 침략을 당하는 굴욕이었으므로 유림의 항일의식은 비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합리적 전략도 갖추기 전에 정신주의적 대항도 불사하는 그러한 항쟁 양상을 보여주었다.
의병운동을 을미, 을사, 정미 의병으로 단계적으로 고찰해 볼 때 초기 유림의 항쟁에서 차차 평민, 즉 농민, 병사, 빈민 등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성격을 띄게 되었고, 그 결과 의병운동이 민중운동으로 정착되어 가는 가운데 민족의식이 성장되어 간 것이 의병운동의 큰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또 당시 실제로 이러한 의병항쟁으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이 다소 늦추어지고 조선에서의 시민지 경략에 경제적 차질을 많이 가져오게 한 것이 민족의 저력을 선양한 소득이라고 할 만하다.
영남지방은 조선조 유학의 메카로 퇴계 이후 수많은 인재들이 나왔으므로 일본의 침략에 대해 유교적 의리론을 가지고 항일에 나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안동의 척암 김도화, 영양의 벽산 김도현, 김천(금산)의 왕산 허 위, 문경의 운강 이강년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무기도 없이 전술도 없이 대중적 힘의 결집도 부족한 상황에서 오직 기개만으로 거의하였다. 그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있다면 몰락 양반이나 하층 농민 및 평민의 반봉건적 저항의식과 결부된 항일구국 정신과 험준한 산악의 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당초부터 승산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애국심과 용기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의병항쟁이 힘의 배양과 근대사상의 고취, 민족국가의식의 각성에 중요한 촉진요소가 되어 민족세력을 결집하여 문화운동, 교육운동을 전개하게 하였으며, 훗날 3.1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더 나아가 치국의 국권상실 이후에는 해외에 독립기지를 만들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나아가게 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