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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이족東夷族과 화하족華夏族의 대륙의 역사 9편

작성자관희2244|작성시간12.11.09|조회수18 목록 댓글 0

학자들의 ‘갑골복사문 분석을 통한 상商의 지배층 신앙에 관한 설’을 정리, 소개하면.

~동방의 은殷 민족이 섬기던 선조신先朝神 제준帝俊을 상제上帝라 하는데, 갑골문을 보면 준을 나타내는 모양은 새 모양의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 있으며 원숭이의 몸과 짧은 꼬리, 손에는 늘 지팡이를 들고 있다. 상나라의 신앙형태는 천신天神, 지지地祗, 인귀人鬼로 구별 하는데, ‘천신’인 ‘상제上帝’는 우주의 주재자로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만물을 통제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상제와 직접 소통하지 못하고 반드시 조상 신령을 매개로 상제와 소통할 수 있으며, 조상의 능력은 상제에게 복을 내리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제사가 중시되어, 왕은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여 정치적 권위를 정당화하여, 제족을 통솔했다.

‘지지地祗’는 자연계의 신으로 토지나 산천, 비바람, 동서남북 사방에도 신이 있다고 믿었으며, ‘사社’로 표현되는 토신이 대표 신격이며, ‘인귀人鬼’는 사후의 영혼을 의미 한다~ 하니, 핵심적인 신과의 소통 매카니즘이 현재 한민족의 전통신관神觀인, 무巫 신앙관과 큰 차이를 볼 수 없음에 주목할 하다.

 

‘사기史記’의, ~상나라의 고대 임금들은 거동하기 전에 반드시 점을 쳤다~라는 기록처럼, 상족의 왕들이 시도한 갑골을 이용한 복사를 얻어내는 점복신앙의 양상을 정리해 보자.

 

~상제上帝는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이며 절대신으로, 의지에 따라 모든 세상사를 결정 한다 믿었고, 자연신 중에서도 10분의 태양신이 땅속에 있어, 매일 한분씩 교대로 천상에 나타나는데, 10분의 이름은 일갑日甲부터 일계日癸까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10간十干이 계시어 숭배를 받으시는데, 왕은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자(巫)로서, 상제의 뜻(神意)을 신탁神託받는 지상의 유일한 존재~라는, 신과 조상, 인간을 구별하고, 이를 연결하는 무巫적 매카니즘과 천체에 관한 태양숭배의 철학을 생성함을 볼 수 있다.

초기의 이러한 신탁神託은 지배층의 독점으로, 대부분의 점복과 복사는 왕가의 권력유지와 관계된 것으로, 복사를 기록하기 위한 노력으로 원시문자의 생성을 유추할 수 있다

 

상(은)왕은, 10분의 태양이 교대로 천상에 나타날 때, 매일 점을 보는데,

1일에 본 갑甲날의 점은, 10일인 계癸날 태양이 진 밤에, 돌아오는 갑甲날의 태양이 떠오르는 밤(새벽)에 점을 치고, 2일에 본 을乙날의 점은 돌아오는 11일인 갑甲날의 태양이 진 밤에 보는 식의, 열흘 다음 태양이 떠오르는 밤(새벽)마다 일상적으로, 왕은 태양신에게 상제의 신의神意를 갑골을 사용하여 점복하는데, 갑골을 준비하여 갑골에 열을 가하여 나타난 표면의 가로 세로의 금인 점복의 결과물인 복사卜辭를 ‘정인貞人’이 만들어 내면, 왕은 점복의 결과물인 복사를 보고, 왕 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복사의 의미를 해석하여, 그 복사를 정인에게 새기거나, 쓰게 하여 신성하게 보관한 것이,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이다.

 

갑골 복사의 내용을 보면,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가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여행시의 재해 유무, 10일 간격이나 매일의 재해 유무, 질병이나 임신 등 공적, 사적으로 알아야 했던, 점복의 내용이 다양하나 주로 제사에 관한 것을 왕이 점을 쳐서 국정을 수행했다.

점복을 통한 신탁은 일반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행위로, 갑골을 가지고 복조卜兆를 만들어 내는 ‘정인貞人’과 그 복조의 의미를 해석하여 복사卜辭(신의 의도를 알아냄)를 만듦은 왕의 몫인, 지나족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점복문화로, 점복占卜으로 하늘의 뜻(神意)을 받아서 백성을 통치했던 제정일치의 모계적 습속의 계급사회로 파악한다.

 

정인에게 신이 내려 만들어진 ‘복조卜兆’(열에 의해 갈라진 금)의 형상을 왕이 관찰하여 길흉을 판단하고, 그 점복의 내용을 정인이나 정해진 누군가에게 명하여, 갈라진 금(복조卜兆) 옆에 새겼는데, 이것을 복사卜辭라 한다.

동작빈의 연구에 의하면, ~복사卜辭에는, 왕명을 받들어 점을 쳤던 무인巫人이 자신의 이름을 복사卜辭에 직접 써서, 점복의 책임과 기록을 분명히 했다~한다.

지금까지 출토된 갑골에는, 필획이 일정하지 않아 편방의 위치가 바뀐 글자도 있는가 하면 일자형태一字數形의 글자도 적지 않다하나, 개판改判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함을 볼 때, 왕은 점을 쳐서 묻고, 점占의 결과는 신령(上帝)의 의지이니, 복사卜辭는, 신의神意와 관계된 신성한 기물로서 오기誤記가 없어야 되므로, 무인巫人(=정인貞人)이 직접 쓰거나, 또는 전문적인 工人 기술자들의 작품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갑골을 준비하여 점을 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갑골에 기록되어 있다.

정인貞人은 점복占卜에 이용될 거북을 가을철에 산 채로 잡아 기르다가, 이듬해 봄에 그 중 몸집과 색깔이 좋은 것을 골라 죽여, 그 뼈를 추려, 뼈의 안쪽에 홈을 파고 그 곁에 구멍을 뚫은 다음, 여기를 청동 부젓가락(송곳)을 달구어 누르거나, 열을 가열하여, 그 표면에 가로 세로로 생기는 금가는 형상(선)을 만들어 왕에게 바치는, 왕명을 받들어 복조卜兆를 만드는 무격巫覡으로 파악함도 무리는 아닌듯하다.

갑골에 기록된 정인의 명칭에서 지명이나 족속을 나타내는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왕의 혈족, 측근이나 피지배 연맹족속의 왕이나 대리인으로 파악됨을 볼 때, 초기의 상나라의 왕은, 씨족에서 교대로 선출되는 형제상속 정도의 왕으로, 신정정치를 보좌하는 피지배씨족의 대표자인 정인貞人들과 함께 신탁을 공유하는 부족연합적인 미약한 왕권으로 족속을 다스렸을 것으로, 상나라 초기의 정인은 지배자 층이며, 부족연합적인 국정 수행의 한 가지 수단인 점복을 위해 파견된 자로 학자들은 파악한다.

갑골문에서 확인되는 정인은 120명 정도인데, 왕이 퇴위하면 정인들도 바뀜을 볼 때, 초기의 정인들은 정인기구를 구성해, 왕의 측근으로서 신탁神託을 공유하여, 백성을 통치하는 부족연합적인 신정통치로 지배층의 권위를 유지했으나, 지배 족속의 왕이 주변족속을 정벌, 복속시키며 왕권이 강화되자,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인 부족연합적 성격은 약화되고, 정인기구도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점차 전제적 절대 권력인 1인 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왕권에 예속됨으로 파악함을 볼 때, 상나라 말기에 무격巫覡들이 신분 격하됨을 유추 할 수 있다.

 

상나라를 청동기 문화로 이해하는데, 청동기는 지배층의 독점물로, 무기나 제기祭器로만 사용 되어, 청동무기로 무장한 수천 명의 귀족 전사들이 대규모 원정을 수없이 감행하여, 주변 족속들을 복속시켜 영토를 확대하면서, 초기의 왕과는 달리 점차, 다른 씨족장급들과는 현격하게 구별되는 신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가 되었다.

평민인 백성들은 청동기문화의 혜택이 없이, 토기나 목기, 석기를 사용한 생산활동을 전담하였으며, 반지하식 움집에서 기거하였으며, 복속된 연맹부족들은 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제공하거나, 신의 후예인 은나라 조상의 제사를 연맹부족의 공동제사로 받아 들이는 등의 상나라 지배층의 정권유지를 뒷받침하는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다.

가혹한 수탈은, 왕이나 지배층의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살아서는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다시 토성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궁궐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가, 죽어서는 청동기, 옥기 등이 대량으로 부장된 화려한 무덤에, 가솔을 매장하는 순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상나라의 신앙관인, 절대 신神인 상제로부터 10분의 태양신, 각종 자연신들로부터, 조상들이 각종 신들에게 자신들의 간절한 바람을 전해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제사의 제물을 마련하기 위한 전쟁을 벌일 정도로 조상숭배를 각별히 했으며,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음은, 왕의 가장 중요한 업무의 하나로, 제사는 연맹체의 백성들을 위압, 결속시켜 지배력을 확인하는 의식 절차로서 영향력이 지대했다.

 

충격적인 제사의식의 고고학적 분석은,

신을 위한 제단에는, 술과 음식 외에도 수백 마리의 양, 소 등의 동물과 함께 전쟁포로이거나 피정복민의 노예로 파악하는, 적게는 몇 명, 많을 때는 수백 명이 목이 잘린 채 제물로 바쳐지거나(벌제伐祭), 왕의 사후 생활의 편의를 위해 생매장하는 대규모 순장의 풍습이다.

상나라 전기(BC1700년경)의 언사偃師현 이리두二里頭 유적(하남성 낙양)등에서 순장자가 발견되었고, 후기(BC1300년경)의 갑골문이 발견된 은허유적에서 300명 이상의 순장자殉葬者가 발견된 곳도 있고, 갑골문에는 무려 2,500명 이상의 희생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발견된 갑골문에서 확인된 희생은 모두 14,000명 이상에 달한다 한다.

순장의 풍속은, 훗날 진시황의 무덤에서는 수천 명의 도용들이 이를 대신하고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삼한三韓의 순장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다.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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