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商나라(BC1600년경~BC1046)는,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여겨지는 전설의 왕조로, 단군의 둘째아들 부우夫虞씨氏가 준후俊候(100명의 제후를 거느리는 장)의 자리에 있을 때, 손자 설楔이 요순시대에 백성을 교화한 공이 크고, 후에 우나라 순을 도와 홍수를 치수한 업적이 크다 하여 봉해 준 나라로, 동이족인 상족商族의 설契을 시조로 보기도 한다.
설楔은 제곡고신帝?高辛(황제의 증손자라고도 함)의 둘째부인인 간적簡狄이 현조玄鳥(제비)의 알을 먹고 낳은 아들로, 설이 젊어서 순舜을 도와 홍수洪水를 다스리고, 순을 왕위에 오르게 하니, 설에게 사도司徒(교육부장관) 벼슬을 내려 우虞나라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게 하니, 설이 교육하여 우虞나라를 문명국으로 발전시킨 공이 크고, 순이 죽자 설이 단군조선에 돌아오매, 할아버지인 제준帝俊은 설에게 영지 내의 박毫 땅을 봉해 주니, 설은 박 땅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상商이라 하니, 설契을 시조로 보기도 한다.
설契에서 14대째에 탕湯이 등장해 하夏왕조의 폭군 걸왕을 물리치고 상商왕조를 개국하니, 상商나라 시조는 황제黃帝의 후손인 탕왕湯王이라고도 하나, 이후 수차례 도읍을 옮겼다가 19대째인 반경盤庚 때에 수도를 은殷으로 옮겨, 마지막 주왕紂王까지 273년간 유지되었다.
문헌에는, 상商과 은殷이 혼용되이 쓰이는데, 상 왕조 멸망 후에 주족周族이 상의 주민들을 경멸해 사용하던 호칭이며, 주周나라 등의 기록에 은殷나라로 칭하여, 또는 ‘사기’에 ‘은본기殷本紀’라고 하고, 여러 차례 천도 끝에 반경왕盤庚王이 홍수의 근심을 피해 도읍을 다시 옛 박毫 땅으로 옮기고 국호를 은殷으로 고침등을 들어 은殷나라로 하거나,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몰아내고 은나라를 세워 수도를 상商이라 했기에 상商나라라 등으로, 정확한 바 없이 상商, 은殷이 혼용되나, 스스로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에, 학계에서는 상商나라로 통일해 부르고 있음이 무게감이 있다.
단군의 둘째아들 부우夫虞(=천우天虞)는, 산해경山海經에는 제준帝俊이라 기록하고 있고, 은허의 갑골복사甲骨卜辭에는 고조高祖라 기록하고, 단기고사檀紀古史의 동해왕東海王이라 하기도 하는데, 상商(은)의 시조인 설의 조부이신 ‘제준부우帝俊夫虞’씨를 은殷 민족이 섬기던 나라의 가장 높은 조상인 동방의 상제로 모셨다 하며, 갑골문을 보면, 상商(은) 민족의 선조신先朝神 제준의 ‘준俊’자를 나타내는 모양은, 새 모양의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 있으며 원숭이의 몸과 짧은 꼬리, 손에는 늘 지팡이를 들고 있다고 해석한다.
상商나라(은殷나라)의 건국에 관한 사서의 기록을 보면,
‘시경詩經’의 현조玄鳥에, ~하늘이 제비에게 분부하시어, 내려가 상商의 조상 낳게 하시고 망망한 은 땅에 살게 하시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의 ~상商의 시조 어미는 간적이다~.
‘순자荀子 성상成相’편의, ~(시조인) 설契 현왕이 아들 소명을 낳고 지석砥石에 거주했다~.
‘淮南子회남자 추형훈墜刑訓’의, ~요遼(요수=랴호허 강)는 지석에서 나온다~.
‘여씨춘추春秋 유시有始’편의, ~하늘에는 9개의 들이 있는데, 북방을 일컬어 현천玄天이라 한다~.는 기록을 두고 많은 이들의 해설을 정리하면,
~시조 설은 북쪽에 자리한 왕이므로 현왕으로 불리는데, 요수遼水의 발원지인 지석에 살았으며, 지석은 산 이름으로 변방에 있고, 요수는 현재의 내몽고 적봉시 부근인 지석에서 발원하여 남쪽인 발해만으로 흐른다~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서의 기록과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중원으로 내려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다시 동북으로 갔다~는, 안양현 은허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부사년傅斯年(1896~1950)의 주장을 미루어 보면, 상나라는 동이족임에 무게가 있다.
그 외에도,
‘시경詩經상송商頌’편의, ~상토(설의손자)가 맹렬하게 퍼져(相土烈烈), 해외까지 가지런히 했다(海外有截)~는 내용을 두고, 무공이 뛰어나고, 마차를 발명하여 해외에까지 세력을 떨친 상토相土 때, 상족의 활동무대를 발해 연안까지로 보고 있으며,
7대 왕해王亥와 8대 상갑미上甲微 시절에, ~하백河伯의 군사를 빌려 유역족有易族을 쳐 멸망시켰다~는 기록을 두고, 유역족은 역수易水 부근의 족속이니, 상족은 초기에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 일대까지 세력을 떨쳤다 하며,
고고학자 소병기蘇秉琦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헤이룽강)까지 이른다~고 주장하여, 상나라의 실존과 세력을 증거한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설은 자라서 우를 도와 치수에 공을 세웠다(契長而佐禹治水有功), 임금 순은 이에 설에게 명을 내려 말하길(帝舜乃命契曰)....상에 봉하고 자씨 성을 하사하였다(封于商 賜姓子氏), 설은 당(당요), 우(우순), 대우(하우)의 시기에 흥성하였다(契興於唐 虞 大禹之際)~하여, 요임금 시절의 설契의 가문은 흥성했었는데, 순임금 시대에는 우禹의 치수를 도운 공적으로 순에 의해 자子씨로 성姓을 받고, 상商(하남성 상구)이라는 곳에 봉지를 책봉 받아 제후국인 상나라가 되니, 상商나라 설의 자손들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기며 여러 번 수도를 옮기며, 동북에서 중원으로 내려와, 13대째의 탕이 박毫(현재의 허난성 상추시)을 수도로 삼아, 이윤伊尹의 도움으로 11차례의 접전 끝에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을 제거, BC 1600년에 상나라를 건국했다고도 한다.
~걸왕이 망하고 탕왕이 흥한 것은 이윤에게 있다(桀之亡 湯之興 在伊尹也)~라는 고사처럼, 상나라 건국에 이윤이 빠질 수가 없다. 이윤의 출신과 등용에 관한 설도 분분하다.
‘사기’에 보면, ~혹자가 말하기를, 이윤은 처사處士로서, 탕이 사람을 보내어 초빙하고자 했으나, 다섯 번이나 거절한 후에 탕에게 가서 따랐으며, 옛 제왕과 9명의 군주에 관한 일을 이야기했다(或曰 伊尹處士,湯使人聘迎之,五反然後肯往從湯,言素王及九主之事)~는 고사를 두고, 의義와 도道가 아니면 천하를 준다고 해도 받지 않는 이윤이, 탕왕이 다섯 번을 모시고자 함에 수락했다는, 카더라 통신식의 설화를 등용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중국식의 옛 성현에 대한 예의인지, 삼국지에는 삼고초려나 삼방순욱 등의 세번을 거절함을 미덕으로 하는 고사를 수록함도 재미로 알아 둘만하다.
‘사기’와 다른 사서나 전래설화를 취합한, 이윤의 출생에 관해 정리하면,
~이윤을 잉태했을 때, ‘이수伊水에 절구가 떠내려 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동쪽으로 달리되 뒤를 돌아보지 마라’라는 꿈을 꾼 어미가 이수강변에 가니, 진짜로 절구가 떠내려 옴에, 뒤도 보지 않고 동쪽으로 한참을 달린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마을은 홍수에 잠겨버렸고 그녀는 순식간에 뽕나무가 되어버렸는데, 마침 뽕을 따러 온 여인이 뽕나무 안에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유신씨의 왕에게 바쳤다.(뽕나무 속이 비었다는 공상空桑이란 지명의 유래) 유신씨 나라에서 요리와 학문을 배우고 자란 이윤은, 탕왕과 유신씨국의 공주가 혼례를 함에, 탕왕을 만나고자, 유신씨 딸의 혼수를 가져가는 남자 노복을 자청하여, 탕왕의 나라에 가게 된다.
‘사기’에는, ~이윤의 이름은 아형이다(伊尹名阿衡). 아형은 탕왕을 만나고자 했으나 방 도가 없었다(阿衡欲奸湯而無由). 이에 유신씨 집안의 잉신(혼수를 가져가는 남자 노복) 이 되었다(乃?有莘氏?臣)로 기록됨에, 노비 출신이라 하고,
이윤의 요리 실력이 소문나매, 왕과 만나게 되는데,
‘사기’에는, ~솥과 도마를 지고(負鼎俎), 탕에게 음식의 맛을 이야기를 하면서(以滋味 說湯), 왕도를 행하게 했다(致於王道)~로 기록됨에, 요리사라 하고,
탕이 걸왕의 폭정을 간언하던 관용봉이란 신하가 참수를 당하는 사건을 두고, 그의 죽음을 애도 했다하여, 걸왕이 탕을 ‘하대’라는 곳에 감금함에, 이윤은 걸왕에게 갖은 금은보화로 탕을 구해낸 다음에 하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하나, 걸왕의 폭정에 불만을 있던 곤오씨 국이 먼저 반란을 일으킴에 선수를 빼앗기자, 이윤은 탕왕과 함께 반란진압이라는 군사를 일으킬 명분을 얻어, 곤오씨국을 쳐 반란을 진압하고는, 각 제후국들에게 탕왕의 포부와 걸왕의 폭정을 비판하고 하나라를 정벌하니, 제후국들이 모두 따랐다 한다.~
비주류 사학자들은 이윤을 동이족으로 보는데,
~황보밀이 말히길(皇甫謐曰), 이윤은 역목의 후손이며 공상에서 태어났다(伊尹 力牧之後 生於空桑)~는 기록의, ‘공상空桑’이라는 지명에 주목함인데, 치우蚩尤가 유망을 도와 소호를 물리치고, 유망마저 정벌하고 제위에 오른 곳이 ‘공상’이라는 한단고기의 기록에 의거함인데, 일부 학자들은, 이윤은 역목力牧의 후예이고, 역목은 황제헌원의 7현 중의 한명이니, 이윤을 동이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기’에, ~설에서 탕에 이르기까지 8번 도읍지를 옮겼다(自契至湯八遷). 탕이 비로소 박에 거하였다(湯始居?)~ 라는 기록에서, 제곡과 탕왕이 같은 박?을 수도로 삼으니, 천도는 8번이나 장소는 7군데인데, 모두가 황하 주변으로, 홍수로 황하가 범람하면 천도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사회의 고민을 보여주는 사실로, 우가 치수를 성공하여 하나라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건국된 상(은)나라는, 요순시대의 고민인 홍수에 계속 시달림을 볼 수 있으며, 역사에 의하면, 은나라의 왕인 반경盤庚이 황하의 홍수를 피하여 오늘날의 안양현 소둔촌인 은허로 도읍을 옮겼다 하는데, 이 소둔촌에서 갑골甲骨이 발견되면서, 전설의 왕조인 상(은)나라의 실체가 밝혀지는데, 갑골문甲骨文은 짐승 뼈에 글을 새기고 그것을 불에 구어 골 판이 갈라지는 형태를 보고 점을 쳤던 상나라 왕들의 점복서로 파악한다.7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