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삼황오제를 공부하고 지나가자.
삼황三皇을 ‘사기史記’에서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또는 태황泰皇으로, 역易을 만든 복희伏羲, 인류를 낳은 여와女?, 농업을 가르쳤다는 신농神農을 꼽으나, 다수의 사서史書에서는, 복희와 신농을 공통이 하고는, 공공共工, 축융祝融, 수인燧人, 황제黃帝를 끼워 넣고 있다.
대체로 ‘십팔사략十八史略’(남송南宋 말에서 원元초의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의 삼황三皇으로 정리 하는데,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가르쳤다는,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한 ‘태호복희太昊伏羲’와 태양신(炎帝)이며,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친 농업신이자,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쳤다는,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염제신농炎帝神農’과 집짓기, 직조술, 수레발명, 천문과 역산, 의료술를 망라하는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한다.
삼황三皇의 전설에 이어서, ~황제가 세상을 다스린 후로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자, 황제는 태산泰山으로 천지 사방의 신을 모두 부르니, 큰 코끼리가 끄는 보물로 된 수레를 타고 있는 황제의 위세에 뭇 신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으나, 눈이 넷, 손이 여섯이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에 쇠와 돌을 즐겨 먹는 신으로 자신의 72명의 형제와 함께 싸움에 능한 치우신蚩尤神만이 저항함에, 황제는 판천과 탁록에서 치우와 부하인 풍백, 우사를 평정한 후, 백 살이 되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에게 하늘로 돌아가기를 간청함에, 백성들은 황제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원했지만,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 이후 황제의 다섯 자손(五帝)이 세상을 다스렸다~하여, 오제五帝를 출현 시키는 설화가 있다.
역시, 오제五帝 대해서도 일치하는 설이 없으며,
복희伏羲(=태고太?), 신농神農(=염제炎帝), 황제黃帝, 소고少?(=소호금천少昊金天), 전욱?頊(=전욱고양?頊高陽), 제곡帝?(=제곡고신帝?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돌려 섞고 있으며,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 ‘황제黃帝·전욱?頊·제곡帝?·요堯·순舜’을 오제로 꼽고 있으나,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인,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도당(요堯), 제순유우(순舜)를 꼽고 있다.
소호금천少昊金天은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승천한 후 왕위에 오르니, 봉황이 날아들어 소호의 정치를 도왔다하고, 소호의 뒤를 이은 전욱고양?頊高陽은 소호 형兄의 아들인데, 아직 반고班固가 천지 창조를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시대라, 전욱이 엄격한 법으로 하늘과 땅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 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다하고, 전욱의 뒤를 이은, 소호의 아들인 제곡고신帝?高辛은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하며, 제요帝堯는 당唐나라를 세워 당요堯로, 제순帝舜은 우虞나라의 시조인 우순虞舜인데, 오제五帝에 꼽음으로 정리함이 통상인 것 같다.
중국 고대 전설의 3황5제三皇五帝는 오로지 중국의 역사라 볼 때, 우리와는 하등 관계가 없을 수 있지만, 위서라 하는 환단고기, 규원사화 등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들이고, 고고학적 성과에 따라, 점차 삼황오제 전설은 사실성 있는 신화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삼황오제의 기록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제외하면, 모두 춘추전국시대로부터 한대에 걸친, BC 5세기부터 1세기까지 형성되어 온 지나支那의 기록에 나타나나, 이들을 위서라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등에 기록하고 있음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욱 발전하는 고고학적 성과에 따라서 삼황오제의 진면목이 서서히 드러나, 전설과 신화의 베일이 하나하나 벗겨지길 기대하며, 삼황오제는 중국역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중국은 주장하나, 사료에 기록된 ‘동이東夷’의 역사적인 범주가 산동성이나 요동성 등을 포함했으며, 이들이 모두 동이족이었다는 지나의 사료들도 존재한다.
의견이 분분한 인물을 대강 나열하면, 농사법과 의학을 발전시켰다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최초의 철기인 철갑鐵甲에 구리투구로 무장한 돗가비 군사를 부렸다는 치우蚩尤, 주역과 역법曆法을 창안했다는 희화자羲和子, 지나 역사의 최고의 성군聖君인 요堯임금과 순舜임금, 절개로 유명한 백이伯夷와 숙제叔弟, 해동성인海東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 등등이 동이족이며, 한자漢字를 만든 것도 동이족이라 의견이 분분하다.
이처럼, 삼황오제를 비롯해 동이 전체를 한민족으로 보는 비주류 역사관이 존재하나, 중국에서 1930년대에 시작된 장려화와 문하생들의 대륙 역사의 삭제, 왜곡, 조작 시기에도, 1940년대의 홍콩 대만 등을 중심으로 한, 중국학자들의 역사 왜곡 작업시기에도, 동이족은 한민족을 지칭하는 단어임에 무리함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동북공정을 정리한 중국의 사학계는 ‘은나라가 동이족’이란 고고학적 사실 앞에서, 중국의 기원은 화족, 묘족, 동이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중화 삼족설’로 급선회 하여, 치우마저도 중국조상으로 삼고 있으나, 앞서 기술함을 기준하면, 화족을 제쳐놓더라도, 묘족은 동이의 지류임을 알 수 있으니, ‘중화삼족설’에 동의하기엔 무리가 있다.
반증으로, 지나의 사서들이 ‘동이전’이라는 별전을 따로 두어, 만주와 한반도일대의 민족들의 역사를 적고 있음을 들 수 있으며, 이夷자를 ‘오랑캐’로 해설함에서도, 화족과 동이족은 적대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동이족 자체를 순수한 우리민족이라고 단정함도 무리수이고, 대륙의 기나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륙의 족속들이 진한秦漢 시기에 잡탕이 되었다는 전제를 둔다면, 최소한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와 한漢나라 이후의 동이를 차별적 존재로 파악함이 학문의 긍정적 자세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5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