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 柳成龍 ]
- 원본글 출처
유성룡의 행장(行狀)
- 저자
정경세(鄭經世)
- 이명
자 : 이현(而見)
호 : 서애(西厓)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 상신(相臣)
공(公)의 증조 휘(諱) 자온(子溫)은 진사(進士)로서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이며, 비(妣)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증 정부인(貞夫人)이다. 조 휘 공작(公綽)은 군수(郡守)로 증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이며, 비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이다. 부 휘 중영(仲郢)은 관찰사(觀察使)로 증 순충 적덕 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領經筵)ㆍ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藝文館)ㆍ춘추관(春秋館)ㆍ관상감사(觀象監事)ㆍ세자사(世子師) 풍산 부원군(豐山府院君)이며, 비 안동 김씨는 증 정경 부인이다.
공의 휘는 성룡(成龍)이고 자(字)는 이현(而見)이며 성(姓)은 유씨(柳氏)로 대대로 풍산(豐山)사람이다. 그 선대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드러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뒤 유종혜(柳從惠)는 본조(本朝)에서 벼슬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5대를 지나 관찰공(觀察公)에 이르러 강직하고 직무를 잘 처리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고(故) 영의정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공이 바로 관찰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은 분이다.
공을 수태(受胎)하였을 때 정경 부인이 기이한 꿈을 꾸었다. 어떤 사람이 공중에서 내려와 말하기를, “부인은 훌륭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안지나 공을 낳으니, 바로 가정(嘉靖) 21년 임인년(壬寅年, 1542년 중종 37년) 10월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맑고 순수하여 명주(明珠)가 물에서 나온 듯 하였다. 4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6세에 ≪대학(大學)≫을 배우니 몸가짐이 성인과 같았으며 아이들과 어울려 유희(遊戱)를 일삼지 않았다. 8세에 ≪맹자(孟子)≫를 읽었는데, ‘백이(伯夷)는 눈으로는 사악한 것들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사악한 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개연히 상상하며 그 사람됨을 사모하여 심지어는 꿈속에서 만나보기까지 하였다.
승관(勝冠, 약관(弱冠))에 관악산(冠岳山)의 낡은 암자에 들어가 깨끗이 쓸고 공부하였는데, 종 하나만을 데리고서 밥을 짓게 하고는 읽고 또 생각하며 침식을 잊다시피 하였다. 밤이 깊어 간혹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도 하였으나 공은 못들은 척하였다. 하루는 어떤 중이 밤에 갑자기 앞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홀로 공산(空山)에 있으니 도둑이 두렵지 않은가?” 하였다. 공은 느긋하게 말하기를, “사람은 본디 헤아리기 어려운데 네가 도둑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하고, 태연히 글을 읽었다. 중이 다시 절하며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선비의 뜻이 확고하다는 말을 듣고 짐짓 시험해 본 것이오. 훗날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오.” 하였다. 이때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도산(陶山)에서 도(道)를 강하고 있었다. 공은 관찰공의 명으로 책 상자를 지고 찾아뵈었다. 선생은 한 번 보고는 훌륭하게 여겨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내었다.”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 19년)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 융경(隆慶) 정묘년(丁卯年, 1567년 명종 22년)에 추천되어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갔다. 기사년(己巳年, 1569년 선조 2년)에 인묘(仁廟, 인종)를 연은전(延恩殿)에 부묘(祔廟)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상소하여 그 일이 시행될 수 있었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겼다가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중국에 갔다. 장차 입반(入班)하려는데 태학생(太學生) 수백 명이 모여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공이 묻기를, “중국에서는 명유(名儒)로 누구를 첫째로 치는가?” 하니, 서로 돌아보다가 한참만에 “왕 양명(王陽明)ㆍ진 백사(陳白沙)를 꼽습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진 백사는 도(道)를 정하게 보지 못하였고, 왕 양명의 학문은 선학(禪學)에서 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정(正)에서 나온 설문청(薛文淸)만 못하다.” 하였다. 신안(新安)의 오경(吳京)이란 자가 반겨 나서며 말하기를, “근래 학술이 그릇되어 선비가 추향(趨向)을 잃었습니다. 공이 정론(正論)을 펴서 배척하니 우리 도의 다행입니다.” 하였다. 서반(序班)이 승ㆍ도(僧道) 2류(流)를 인도하여 전열(前列)에 세웠다. 공이 제생(諸生)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이 선비의 관(冠)을 쓰고 저들 뒤에 선단 말인가?” 하니, 제생이 “저들은 관직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공이 서반을 불러 이르기를, “우리들은 관직에 있으므로 도ㆍ석(道釋)의 뒤에 설 수 없다.” 하였다. 서반은 홍로(鴻臚)에게 말하여 2류를 물리쳐 뒤에 세우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돌아오자 퇴계 선생이 글을 보내 하례하기를, “육선(陸禪, 육상산(陸象山)의 학설과 불교)이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려하는 데 공이 능히 수백 제생을 상대하여 그 혼미(昏迷)를 지적하였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년)에 부수찬(副修撰)ㆍ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 매번 입시하여 답변할 때마다 명백하면서 적절하고 그 분석이 정미(精微)하니, 당시 강관(講官) 가운데 제일이라는 명성이 있었다.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假讀書)하였고, 정언(正言)ㆍ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다.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년)에 병조로 옮겼고, 다음 해에 다시 수찬이 되었다. 영부사(領府事) 이준경(李浚慶)이 죽음에 임해서 유소(遺疏)를 올렸는데, ‘조정에 붕당(朋黨)의 조짐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이를 보이며 조신(朝臣) 가운데 누가 붕당을 짓느냐고 묻자, 바깥 논의는 흉흉해지면서 이준경이 사류(士類)에게 화를 빚으려 한다고 하였다. 삼사(三司) 및 호당의 관원이 모두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면서 이준경의 관작을 추삭(追削)하라고까지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대신이 죽음에 임해서 진언(進言)한 내용에 부당한 점이 있다면 가부를 분변하면 되지 죄를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조정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체모에 손상이 될까 걱정이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이에 따라서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다시 이조 좌랑이 되었다. 관찰공의 상을 당하고 복제를 마치자 부교리(副校理)ㆍ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 봄에 교리(校理)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나아가다가 도중에서 사임하고 돌아왔다. 여름에 헌납(獻納)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이때 대관(臺官)이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 한 사람을 논계하자 전조(銓曹)에서 곧바로 그 대관을 외방 수령으로 의망(擬望)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언관(言官)이 한 번 입을 열어 척리를 논하자 갑자기 내쫓으려 하면 언로는 막히고 척리는 횡포를 부리게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이조(吏曹)를 논하니, 모두 교체되었다. 검상(檢詳)에서 전한(典翰)으로 옮겼는데 사임하였다. 겨울에 부응교(副應敎)로서 상소하여 부모 봉양을 청하였으나 불허되었다.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에 휴가를 청하여 근친(覲親)하였고,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겨울에 응교에 임명되어 조정에 돌아왔다.
인성 대비(仁聖大妃, 인종비)가 승하하자 예관(禮官)과 대신이 의논하여 임금에게 기년상(期年喪)을 행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동료에게 이르기를, “명묘(明廟, 명종)는 인묘(仁廟, 인종)의 계통을 이었으므로 부자(父子)의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상(主上)은 마땅히 적손(嫡孫)으로 아버지가 죽으면 조모를 위하여 승중복(承重服)을 입는 예를 따르는 것이 옳다.” 하고 강력히 논하니,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논의케 하라는 전교가 내렸다. 그러나 대신은 앞서의 주장을 고집하였다. 성복(成服)하는 날에 이르러 공은 “오늘 그 청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뒤에 다시 고치기는 어려우니 밤새워 논계할 것이며, 명을 받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겠다.” 하였는데, 첫 닭이 울 무렵에야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졸곡(卒哭) 뒤에는 경연(經筵)을 열도록 되어 있었다. 공은 ≪시전(詩傳)≫은 곧 가영(歌詠)을 위해 만들어 진 것으로서 그대로 진강(進講)함은 미안한 일이라고 하여 ≪춘추(春秋)≫로 바꾸었다.
무인년(戊寅年, 1578년 선조 11년)에 군기시 정(軍器寺正)ㆍ사간(司諫)ㆍ응교를 역임하고, 이듬해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옮겼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얼마 안지나 교체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다가 곧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또 상소하여 부모 봉양을 청하였는데, 그 말이 슬프고 간절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마침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비었으므로 특명으로 제수하였는데, 사조(辭朝)하는 날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편히 봉양하려는 뜻에 어쩔 수 없이 따른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러 고을로 하여금 본을 뜨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부임해서 예양(禮讓)으로 다스리니 사민(士民)이 그 덕화에 젖어들었다.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 봄에 부제학으로 소환되었다.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자 차자를 올려 열 가지 일을 아뢰었는데, 실덕(實德)을 닦아 천심(天心)에 답하고, 내외를 엄격하게 해서 궁금(宮禁)을 엄숙하게 할 것이며, 치체(治體)를 살펴 규모를 세우고, 공론을 중히 여겨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을 것이며, 명실(名實)을 규명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공도(公道)를 넓혀 요행을 바라는 문을 막을 것이며, 염치를 길러 탁한 풍속을 맑게 하고, 형정(刑政)을 밝혀 간남(奸濫)을 줄일 것이며, 적폐(積弊)를 제거하여 민생을 보살피고, 학술을 제창하여 사풍(士風)을 진작시키자고 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특별히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니, 곧 오게 될 중국 사신을 인도하고 돕기 위한 인선(人選)이었다. 사신이 도착하여 임금의 앞에서 공의 동작과 일의 주선이 모두 규범에 맞는 것을 보고 매우 칭찬하니, 임금이 금포(錦袍)를 벗어 하사하고 품계를 올려 대사헌(大司憲)에 제수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 봄에 이탕합(尼湯哈)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공은 부제학으로서 왕지(王旨)에 응하여 다섯 가지 계책을 올리니, 화의 근원을 막고, 전수(戰守)를 정할 것이며, 노정(虜情)을 살피고, 궤향(饋餉)을 공급할 것이며, 황정(荒政, 기근에 대한 구호책)을 수행할 것을 아뢰었다.
사론(士論)이 갈리면서부터 공은 깊이 우려하여 동지(同志) 제공(諸公)과 더불어 화평(和平)하여 진정시킬 계책에 힘썼으나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붕비(朋比, 붕당을 이루어 자기편을 두둔함)가 더욱 심해져서 서로 다른 편은 배척하고 자기 편은 두둔하였다. 공은 조정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았고, 정경 부인도 노병(老病)이었므로 근친(覲親)의 편의를 위하여 시골로 물러났다. 가을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을 들어 사임하였다. 체직되어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겨울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먼 곳은 사양하고 가까운 곳에 나아가는 것은 미안스러운 일이라고 상소하여 사임하고 이어 퇴휴(退休)를 청하였는데, 경안령(慶安令) 이요(李瑤)가 때를 틈타 배척하였기 때문이었다.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기를, “내 의심스러운 말 한 마디 한 적이 없음에도 지금 상소 내용이 이러하니 아마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유성룡은 현사(賢士)로서 재능이 있고, 조정 신하로서 걸출(傑出)한 사람이다. 다만 노모가 있음으로 해서 늘 부를 수 없을 뿐이었다.” 하고, 이어 따뜻한 유시를 내리며 불허하니, 어쩔 수 없이 부임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 가을에 부제학으로 소환되었는데 네 번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얼마 안있어 다시 제수하니, 상소하여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세가지 이유를 아뢰고 해임되어 돌아가 부모 봉양하기를 청하였으나 불허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승진 임명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하게 하니 글을 올려 힘껏 사임하였다. 이에 임금은 수찰(手札) 십행(十行)을 내리니 이르기를, “옛 임금 가운데는 신하에게 신하로 대하는 자도 있었고, 벗으로 대하는 자도 있었으며, 스승으로 대하는 자도 있었다. 이 뜻은 비록 후세에 전하진 않으나 경이 10년 동안 경악(經幄)에 나오면서 한결같은 덕으로 아무런 흠이 없었으니 의리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라 하나 정의로는 붕우(朋友)와 같다. 그 학문을 논하면 장구(章句)에 편집(偏執)을 갖는 선비가 아니오, 그 재능을 말하면 족히 큰일을 감당할 만하다. 나만큼 경을 아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다시 사임하였으나 불허하였다. 이에 글을 지어 관학 제생(館學諸生)에게 효유하고, 또 전국에 향약(鄕約)을 반포하여 삼가 효제(孝弟)를 돈독히 하고 예양(禮讓)을 진흥시켜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는 근본으로 삼게 하였다.
부마(駙馬)를 간택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이성(李姓)이라도 관(貫)이 다르면 피할 것이 없다고 하니 대체로 다른 뜻이 있는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예(禮)에 동성(同姓)과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혐의를 멀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총(劉聰)이 유은(劉殷)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는데, 계통은 전혀 다름에도 ≪강목(綱目)≫에서는 이를 개와 양이 혼잡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당ㆍ송(唐宋) 이래로 공주(公主)에게 장가드는 자는 모두 이성(異姓)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소종(昭宗)만이 이무정(李茂貞)의 아들을 취하여 부마로 삼았습니다. 이는 강신(强臣)에게 억눌린 경우로서 법으로 삼아서는 옳지 않습니다.” 하니, 그 일이 거두어졌다.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의주 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이 상소하기를, “정여립(鄭汝立)이 이이(李珥)에게 보낸 글에서, ‘3인은 유배시켰으나 거간(巨奸)은 아직도 있다.’ 하였는데, 거간은 유성룡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찰(御札)을 내려 이르기를, “유성룡은 군자이다. 당대의 대현(大賢)이라 해도 옳다. 그 사람됨을 보고 말하노라면 저도 모르게 심복(心服)된다. 어찌 학식과 기상이 이와 같은 사람이 거간이 될 리 있는가? 어떤 담대한 자가 감히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물러나야만 하는 다섯 가지 사유를 아뢰고, 또 말하기를, “거취(去就)의 의리는 의식(衣食)처럼 당장 해야하는 데 있는 것이지 미적거릴 일이 아닙니다. 나아감은 이(利)를 탐해서가 아니며, 물러남은 은혜를 저버려서가 아닙니다. 백세(百世)가 앞에 있고 천세(千世)가 뒤에 있습니다. 스스로 꾀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면 이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비록 불허하였으나 떠나려는 공의 뜻은 더욱 굳어졌다. 근친(覲親)을 이유로 휴가를 청하고 남쪽으로 돌아가 다시 글을 올려 해임을 청하였다.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은 지 3년이었다.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 겨울에 비로소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소환되어 대제학(大提學)을 겸하였는데, 여러 번 사임하였으나 불허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대사헌(大司憲)과 병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겨울에 역옥(逆獄)이 일어났다. 처음에 정여립(鄭汝立)은 관료들 사이에서 분수에 넘치는 명성을 얻어서 전후로 사류(士類)들이 많이 그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허망하고 기세를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찾아왔으나 만나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정여립이 반역을 꾀한 일이 드러났다. 옥사(獄辭)가 만연하여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화를 입었는데 공의 성자(姓字)도 백유양(白惟讓)과 정여립의 글에서 나왔다. 여러 번 체직을 청하였으나 불허되자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였다. 그러나 비답(批答)은 매우 은혜로워 경의 심사(心事)를 백일(白日)에 질정할 수 있다는 등의 말이 있어 사류들이 자못 힘입었다. 특별히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근친하러 가는데 내전(內殿)의 어복(御服)을 하사하면서 돌아가 정경 부인에게 주라고 명하니 특별한 예우(禮遇)였다. 곧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어 소환되었는데, 힘써 사임하였으나 불허되었다. 종계(宗系)를 고치는 데 공로가 있어 광국훈(光國勳)이 기록되어 풍원 부원군(豐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이조 판서를 겸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사양하기를, “국조(國朝) 이래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만일 후일에 조정을 농단하는 자가 나와 신을 빌미로 삼는다면 국가의 무궁(無窮)한 화가 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그러면 재상에 있으면서 조정의 권병(權柄)을 농락한 자는 모두 이조 판서를 겸해서 그런 것인가? 사양치 말라. 인재의 취사(取捨)가 마땅함을 얻는다면 조정은 맑고 밝아진다.” 하였다. 곧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하였다.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왜추(倭酋) 평수길(平秀吉)의 글에 한 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간다는 말이 있었다. 공이 곧 문서로 명나라에 통보해야 한다고 하니,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명에서 만일 왜와 교통(交通)한다고 우리의 죄를 물으면 달리 할 말이 없으니 숨기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사신이 오가는 것은 나라라면 없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화(成化) 연간에 일본에서 우리를 통해서 중국에 공물(貢物)을 바치기를 원했습니다. 곧 사실을 들어 통보하니 중국에서 칙서(勅書)를 보내 회답하였습니다. 전의 일은 이러합니다. 지금 이 글을 보고서 숨기고 알리지 않는다면 비단 의리상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倭)가 만약에 실제로 난을 일으킬 모략이 있고 중국에서 타국을 통하여 이를 알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를 깊이 의심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더욱 해명할 길이 없어집니다.” 하고, 통보할 것을 아뢰었다. 이때 복건(福建) 사람 허의후(許儀後)와 진신(陳申)이 왜(倭)에 잡혀있으면서 벌써 왜정(倭情)을 몰래 보고하였고, 유구(琉球)에서도 사신을 보내 그 정황을 알렸으나 우리나라 사신은 오지 않아 중국에서 우리나라가 왜에 두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각로(閣老) 허국(許國)만은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우리가 지성으로 사대(事大)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였다. 과연 오래지 않아 보고가 도착하니 황제가 매우 아름답게 여기며 상사(賞賜)를 더 후하게 하였다.
이때 왜(倭)의 정황이 날로 급변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 명하여 각각 장수감을 추천하라 명하였다. 공은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여 명에 응하니 두 사람은 당시 하료(下僚)로서 이름이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후에 능히 공을 세워 당대의 명장(名將)이 되었고 이순신은 더욱 뛰어났다. 공은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이 늙고 재능이 없으므로 이일(李鎰)로 대신하기를 청하고,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은 필패(必敗)의 방도이므로 조종조(祖宗朝)의 진관(鎭管) 제도를 다시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제학을 겸직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4월에 왜(倭)가 대거 침입하였다. 임금이 공을 병조 판서를 겸하게 하고 융무(戎務)를 총치(摠治)하라 명하였다. 공은 건의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성우길(成佑吉)과 조경(趙儆)을 좌우방어사(左右防禦使)로 삼아 세 갈래로 나누어 내려가게 하고, 변기(邊璣)와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으며, 또 신입(申砬)을 순변사로 삼아 이일을 지원케 하였다. 조금 뒤 이일과 신입이 패했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적병은 충주(忠州)에 도착하였다.
대가(大駕)가 관서로 행행(行幸)하면서 공에게 경성(京城)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항복(李恒福)이 아뢰기를, “관서로 행행하여 국경에 이르러 강만 건너면 바로 중국의 강토입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수작(酬酌)하고 응변(應變)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정신(廷臣) 가운데 명민하고 숙련되며 고사(故事)를 잘 알면서 사명(辭命)에 능한 이로는 오직 유성룡(柳成龍) 한 사람 뿐입니다. 호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진(臨津)에 이르러 대신들을 불러 같은 배로 건너자 하면서 공에게 이르기를, “만일 훗날 국가가 중흥(中興)한다면 경에 힘입은 것이다.” 하였다. 동파(東坡)에 이르러 임금이 대가가 머무를 곳을 물으니 제신(諸臣)들은 갑자기 대답을 못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의주(義州)에 진주(進駐)하면 만약에 전국이 함몰(陷沒)되는 경우 중국에 가서 호소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니, 공이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대가가 한 발짝이라도 동토(東土)를 떠난다면 조선은 더 이상 우리의 땅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항복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임금도 “내부(內附, 중국에 의지함)는 본래 나의 뜻이다.” 하니, 공이 아뢰기를, “지금 동북(東北)의 병력에 변동이 없고 호남(湖南)의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곧 봉기할 것인데, 어찌 급하게 이런 일을 논의할 수 있습니까?” 하니, 이항복이 깨닫고 중지하였다. 물러 나와 공이 이성중(李誠中)에게 말하기를, “내 대신 이 승지(李承旨)에게 말하여 주오. 어찌 가벼이 기국(棄國)의 논의를 한단 말이오? 공이 바지를 찢어 발을 감싸고 길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는 부시(婦寺, 궁녀와 내시)의 충(忠)에 지나지 않소. 만약 일단 기국한다는 말이 퍼지게 되면 인심이 와해될 것이니 그 누가 수습할 것이오?” 하였는데, 이항복이 듣고 탄복하였다.
송도(松都)에 이르러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신잡(申磼) 등이 은밀히 아뢰기를, “이산해(李山海)가 파직되었으니 홀로 벗어남은 옳지 않다.” 하여 그날로 파직되었다. 평양(平壤)에 이르러 다시 부원군(府院君)에 서용되었다. 뭇 논의는 처음에 평양을 굳게 지키자 하였으나 적세(賊勢)가 점점 가까워지자 모두 피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오늘의 형세는 경성(京城) 때와는 달라 인심이 자못 굳습니다. 또 앞에는 강물이 막혀 있고 서쪽으로는 중국과 가깝습니다. 수일만 굳게 지킨다면 중국 군대가 반드시 올 것이니 이에 의지해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니,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도 그 뜻에 찬동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재신(宰臣)이 먼저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성을 나서니, 성안 사람들이 크게 혼란을 빚으며 몽둥이와 칼을 들고 내려쳐서 묘사주를 길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재신을 가리키며 크게 꾸짖기를, “너희들이 평소 국록(國祿)을 도둑질하고 국사(國事)를 이 지경으로 그르쳤다. 성을 버리려 한다면 무슨 이유로 우리들을 속여 입성(入城)하게 해놓고 적의 손에 어육(魚肉)이 되게 한단 말이냐?” 하니, 조당(朝堂)에 있던 제신들은 모두 질린 낯빛이었다. 공은 변이 생길까 걱정이 되어 섬돌 위에 서서 나이 든 토관(土官) 한 사람을 손으로 불러 효유하기를, “너희들이 힘을 다해 굳게 지키려 하니 충성스럽긴 하다. 그러나 어찌 궁문(宮門)에서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조정에서 현재 성을 지킬 방법을 논의하고 있다. 너희들이 조용히 있지 않으면 그 죄는 용서될 수 없다.” 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평소 공을 신복(信服)하였으므로 즉시 병기를 버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이때 성에서 나간다는 결정은 하였으나 어디로 갈지 몰랐다. 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였으나, 공은 굳게 반대하기를, “거가(車駕)가 관서로 행행한 것은 본래 중국 군대에 의지해서 수복을 꾀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 청병(請兵)해 놓고 우리가 도리어 북로(北路)로 깊이 들어간다면 의리상 용납될 수 없고, 또 들어간 뒤에 적에게 차단이 된다면 중국과 연락이 통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회복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형세는 궁하고 땅은 줄어들어 더 갈 데가 없으면 다시 북쪽 오랑캐 땅으로 달아난단 말입니까? 이보다 더 잘못된 계획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조금 뒤 거가는 영변(寧邊)으로 떠났다. 공은 명장(明將)을 접대하기 위하여 평양에 머물렀는데 곧 거가가 박천(博川)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 명장도 언제 올지 모르므로 드디어 행재소(行在所)로 뒤쫓아갔다. 의주에 이르러 전수책(戰守策) 16개 조를 아뢰었다.
이때 중국에서 우리나라가 왜와 공모(共謀)하였다고 의심하여 요동(遼東)의 자문(咨文)에 힐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공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우리나라가 본래 도의를 저버려 병란을 초래한 사실이 없고, 시종 중국에 의리를 지켜 마음을 바꾸지 않다가 이에 이르렀으니 이는 천지 신명이 실로 굽어살피는 바입니다. 다만 요즘 인정이 응대하고 사명(辭命)하는 일에서 사실을 근거로 말을 다하지 못하고, 늘 가리고 덮어서 하고자 하는 말을 하지 못해 우리의 실정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이 애초에 우리에게 아름답게 여기거나 안쓰럽게 생각하는 뜻이 없고, 도리어 허물을 닦달하는 말이 있으니 자못 가슴이 아픕니다. 또 들으니 중국에서 왜어(倭語)를 이해하는 자를 곧바로 평양에 보내 왜인과 상대해서 그 연유를 묻게 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간사한 무리가 헛된 말을 교묘히 꾸며서 우리에게 불측한 말을 더해 이간책을 쓰고, 중국의 사자(使者)가 반드시 충신(忠信)하고 멀리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므로 혹시라도 달콤한 말과 많은 뇌물에 흔들려 돌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아래로는 왜적에게 핍박을 당하고 위로는 중국에 호소할 수 없어 그 낭패는 이루 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근일 중국에서 우리를 의심하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변(變)의 통보를 늦춘 것이 하나요, 일찍 청병(請兵)하지 않은 것이 둘이며, 중국 군대의 초탐(哨探)하는 자를 보호하지 않아 굶주리게 한 것이 셋이요, 청병해 놓고도 양향(糧餉)이 떨어졌다고 말한 것이 넷이며, 중국에서 우리나라의 향도(嚮導)를 청하였으나 현재 장수 하나 군졸 하나라 눈앞에 세운 사실이 없는 것이 다섯이요, 옛부터 비록 극도의 위난(危難)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승여(乘輿)가 머무는 곳에는 반드시 호위병(扈衛兵)이 있어야 하나 지금은 전혀 없으니 누가 보든지 평일과 같이 태평한 것이 여섯이며, 나라가 위망(危亡)에 처하게 되면 반드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피눈물을 흘리며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난에 뛰어드는 신하가 있는 것인데 지금의 기상은 급한 것 없이 느리고 응대나 지원도 대부분 제때에 늦는 것이 일곱입니다. 이러고서 어찌 중국의 의심을 자아내지 않고 질책을 불러오지 않겠습니까? 이 자문의 회답이 가볍지 않으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속히 회보하게 하되 매우 명백히 설명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이 전사(前史)를 두루 살펴 보건대 길게 향유(享有)한 나라치고 중간에 쇠하였다가 다시 떨치고 일어나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인택(仁澤)이 깊고 두터우며 종사(宗社)가 영장(靈長)하니 어찌 한번 미친 도적에게 능멸 당했다고 해서 끝내 일어서지 못할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용렬한 자들의 옅은 소견은 나라를 위하여 멀리 내다보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적병이 꽤 정예하다는 말만 듣고 나라 일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놓아두고서는 앞으로 나아가고 진작시킬 기백이 전혀 없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쇠함을 일으키고 난을 평정하는 데 성심(聖心)을 굳게 정하시고 군신(群臣)들을 채찍질하여 조금도 게으른 뜻이 생기지 않게 하여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계책을 내게 하소서.” 하였다.
7월에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병사 5천을 이끌고 지원하러 왔다. 임금은 공의 병이 중함을 염려하여 윤두수(尹斗壽)에게 명하여 나가서 군량(軍糧)을 보급케 하였다. 그러나 공은 행재소에 대신이 한 사람만 있으므로 (윤두수를) 내보내서는 아니 된다 하고, 자력으로 수행할 것을 청하였다. 소곶역[所串驛]으로 달려가니 촌락이 모두 비어 있었다. 공은 군교(軍校)로 하여금 두어 사람을 찾아 데려오게 하고 직접 효유하기를, “국가에서 평소 너희들을 지극히 어루만져 길렀다. 그런데 지금 어찌 도망쳐 숨는단 말인가? 중국 군대가 막 도착하였고 국사가 위급하니 너희들이 노력하여 공을 세울 때이다.” 하고, 책을 꺼내 그들의 성명을 기록하며 또 말하기를, “후일 이것으로 등급을 정하여 상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성명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 하니, 와서 이름 올리기를 청하는 자들이 뒤를 이었다. 공은 인심을 모을 수 있음을 알고 곧 공문을 각처로 보내 고공책(考功冊)을 비치해 두고 그 노력과 실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서로 이끌고 나아가 열흘이 채 못되어 관곡(館穀)과 제구(諸具)가 모두 해결되었다. 조승훈이 평양(平壤)을 공격하다가 불리해 물러나자 공은 그대로 안주(安州)에 머물면서 인심을 진정시키며 후군(後軍)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때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 10여 건을 말하였다.
12월에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병사 4만을 거느리고 안주에 이르렀다. 공이 입견(入見)을 청하여 소매에서 평양 지도를 내보이며 형세와 군대의 진격로를 가리키니, 제독이 크게 기뻐하고 붉은 점으로 표시하며 말하기를, “적의 동태가 환하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이 적이 후하게 주는 것을 이롭게 여겨 왕래하며 우리 사정을 염탐해서 보고하여 적의 귀와 눈이 되므로 공이 매우 우려하였다. 그러다가 우두머리 첩자(諜者) 김순량(金順良)을 체포하여 조사해서 그 일당 수십 인을 각진(各陣)으로 하여금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하고, 김순량을 참하여 널리 알리니 이때부터 그 무리들이 흩어져서 중국 군대가 많이 도착하였으나 적은 알지 못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정월에 이 제독은 평양으로 진격하여 크게 싸워 이겼다. 앞서 공은 안주(安州)에 있으면서 황해도 방어사(黃海道防禦使) 이시언(李時言)과 김경로(金敬老)에게 비밀 격문(檄文)을 보내 연로(沿路)를 따라 매복하여 적이 도망치기를 기다려서 소탕하게 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유영경(柳永慶)은 김경로를 불러 자위(自衛)하게 하여 김경로는 중화(中和)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이때 적장 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현소(玄蘇)ㆍ평조신(平調信) 등은 남은 졸개를 수습해 가지고 밤에 도망치는데 굶주려 더이상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이시언은 단독으로는 들이칠 수 없다 하여 다만 잔적(殘賊) 60여 급(級)만을 참하였다. 공이 김경로의 죄상을 행재소에 아뢰고 참하려 하니, 이 제독이 무사(武士)를 베는 것은 애석한 일이라 하여 제지시켰다.
행조(行朝)에서 공을 호령(湖嶺, 호서ㆍ호남ㆍ영남) 3도 도체찰사에 임명하였다. 이 제독은 파주(坡州)에 주둔하였다가 부총병(副摠兵) 사대수(査大受)가 벽제(碧蹄)에서 많이 참획(斬獲)했다는 말을 듣고, 홀로 가병(家兵) 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다가 적의 요격을 받고 패하여 동파(東坡)로 돌아갔다가 다시 개성부(開城府)로 물러났다. 공은 말리다가 어쩔 수 없어 홀로 동파에 머물렀는데, 곧이어 이 제독이 장차 평양으로 군대를 물리고 또 임진강(臨津江) 남쪽에 있는 우리 군대를 모두 강북으로 물러나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공은 종사관(從事官) 신경진(辛慶晉)으로 하여금 달려가서 퇴군해서는 안 될 다섯 가지 이유를 아뢰게 하기를, “선왕(先王)의 분묘가 모두 경기(京畿)에 있어 적의 소굴로 빠지게 되면 귀신과 사람의 소망이 간절하여 차마 버리고 갈 수 없는 것이 하나요, 경성 이남의 유민(遺民)들은 날마다 임금의 군사가 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더는 굳은 뜻이 없어져 서로 나서 적에게로 돌아갈 것이 둘이요, 우리의 경토(境土)가 비록 작더라도 쉽사리 저버리는 것은 옳지 않음이 셋이요, 장사(將士)가 비록 힘이 약하나 바야흐로 중국 군대에 의지해 다같이 진취(進取)를 꾀하고 있는데 철수하라는 명을 듣게 되면 반드시 모두 원망하고 분하게 여겨 흩어질 것이 넷이요, 한 걸음 물러났다가 적이 그 뒤를 쫓게 되면 임진강 이북도 지킬 수 없음이 다섯이다.” 하니, 이 제독은 아무런 말없이 듣고는 퇴군하였다.
공은 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권율(權慄)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蘋)으로 하여금 파주산성(坡州山城)에 웅거하며 적의 요충로를 막게 하였고,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ㆍ이시언(李時言), 조방장(助防將) 정희현(鄭希賢)ㆍ박명현(朴名賢)을 좌익(左翼)으로 삼아 해유령(蟹踰嶺)을 차단케 하고, 의병장(義兵將) 박유인(朴惟仁)ㆍ윤선정(尹先正)ㆍ이산휘(李山輝)를 우익(右翼)으로 삼아 창릉(昌陵)과 경릉(敬陵) 사이에 매복해 있으면서 출몰하며 공격하여 적이 성을 나와 땔감을 취할 수 없게 하였다. 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기 수사(京畿水使) 이빈(李薲),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 등으로 하여금 주사(舟師)를 이끌고 서강(西江)에 주둔하여 적의 세력을 분리케 하였으며, 충청 순찰사 허욱(許頊)은 본도로 돌아가 파수하고, 경기 이남 각도의 관병(官兵)과 의병(義兵)에게 공문을 보내 좌우로 나누어 적의 퇴로를 차단케 하였다. 또 유격(遊擊) 왕필적(王必迪)에게 글을 보내기를, “적은 현재 험준(險峻)한 곳에 웅거하여 공격하기 쉽지 않다. 대병(大兵)은 마땅히 동파와 파주로 진주(進駐)하여 적의 꼬리를 누르고, 남병(南兵) 1만을 뽑아 강화(江華)에서 한남(漢南)으로 진출해서 불의에 적을 노려 충주(忠州) 이북의 여러 둔소(屯所)를 격파하면, 상주(尙州) 이남의 적은 중국 군대가 크게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분명 소식만 듣고도 도망칠 것이요, 경성의 적은 퇴로가 끊겨 반드시 용진(龍津)으로 도망칠 것이니, 이때 후군(後軍)이 강진(江津)으로 핍박해 들어가면 일거에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왕필적은 무릎을 치며 기계(奇計)라 찬탄하고 기일을 정하여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제독은 북쪽 장수여서 남병(南兵)이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 허락하지 않았다. 적을 염탐하던 자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적이 사 총병(査摠兵)과 유 체찰(柳體察)을 잡으려 한다.” 하니, 사 총병이 공에게 말하고 함께 후퇴하려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적은 현재 대군(大軍)이 가까이에 주둔할까 의심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가벼이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헛된 말로 공갈(恐喝)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만약 한번 움직이면 바로 그 계책에 떨어지는 것이니 조용히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하니, 사 총병이 기뻐하며, “매우 옳다. 적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공과 생사를 함께 할 것이니 어찌 감히 혼자 가겠는가?” 하고, 용사(勇士)를 나누어 가지고 와서 여러 달 동안 호위하였다.
이때 적이 경성을 점거한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 서울의 남은 백성들이 공이 동파에 머물러 있음을 듣고 늙은이와 어린 것을 부축하고 이끌고 와서 먹여주기를 바라는 자가 길에 줄을 이었다. 공은 전(前) 군수(郡守) 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監賑官)으로 삼아 다방면으로 구제하였는데, 마침 호남에서 모은 곡물 수천 석이 배로 운반되어 왔다. 공은 이를 치계(馳啓)하는 한편, 즉시 내려 주어 진휼하게 하니 생명을 보전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적장 등이 주사장(舟師將) 김천일(金千鎰)에게 글을 보내 화해하고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공은 이를 사 총병에게 보이었고, 제독은 보고를 듣고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적에게 보내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돌려보내고 부산(釜山)으로 퇴각한 뒤에 화친을 허락한다고 약속하고 즉시 병사를 거느리고 개성(開城)으로 나아갔다. 공은 정문을 보내 화호(和好)는 잘못된 것이고 공격하느니만 못하다고 극언하였으나, 이 제독은 회답하기를, “이는 나의 생각도 그러함을 먼저 알아차린 것이나 실은 받아들일 뜻이 없다.” 하고, 또 유격 진홍모(陳弘謨)를 적진(賊陣)으로 보냈다. 공은 이때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파주에 있었다. 진홍모가 도착하여 기패(旗牌) 입참(入參)하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왜영(倭營)에 들어가는 기패로서 우리 일과는 관계가 없다. 또 송 시랑(宋侍郞)의 적을 죽이는 일을 금하는 패문(牌文)이 있으니 더욱 입참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진홍모는 서너 번 강요하였으나 공이 끝내 응답하지 않으므로 동파로 바로 돌아갔다. 이 제독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기패는 곧 황명(皇命)이다. 어찌 절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마땅히 군법(軍法)을 시행하고 철병(撤兵)하리라.” 하였다.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이 공에게 급보(急報)하기를, “아침에 가서 사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공은 어쩔 수 없이 김명원과 함께 갔다. 영문(營門)에 가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이 제독은 화가 나서 만나주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문 밖에 서 있은 지 한참만에 들어오라고 하였다. 공이 앞으로 나아가 사죄하기를, “소인이 비록 어리석으나 기패를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기패에 우리나라 사람이 적을 죽이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패문(牌文)이 있었습니다. 사삿 마음이 절통하여 감히 참배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니, 제독이 부끄러워하며 “과연 옳소. 이는 곧 송 시랑의 영이요, 내가 알 바 아니오.” 하였다.
며칠이 지나 또 유격 척금(戚金)과 전세정(錢世楨)을 보내 화친을 허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나, 공은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전세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희 나라 임금은 어찌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단 말인가?” 하였다. 공은 천천히 말하기를, “도읍을 옮겨서 보존을 도모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였다. 전세정 등이 돌아가자 공은 또 글을 보내기를, “적은 달콤한 말로 우리를 꾀면서 동래(東萊)ㆍ상주(尙州)ㆍ평양(平壤)에 투서하였다. 우리의 형세는 비록 매우 급박하나 끝까지 화친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오로지 천하 대의(大義)를 위함이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욕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종묘(宗廟)는 불타 재가 되었고 구롱(丘壟)은 발굴되었다. 이 나라 신민(臣民)들은 모두 부모의 원수가 있다. 원수를 잊고 원망을 풀고 적과 더불어 같이 사느니 차라리 적을 무찌르다가 노야(老爺, 이 제독을 가리킴)의 법도에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4월에 적이 물러가자 이 제독은 경성으로 들어갔다. 공도 따라 들어가 종묘에 나아갔다가 이 제독을 문안하였다. 공이 급히 적을 추격하자고 청하니, 이 제독은 “한강(漢江)에 배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은 미리 이빈(李蘋) 등을 시켜 적이 퇴각하는 틈을 타고 강에 있던 배들을 급히 수습하여 이때 대어놓은 배가 80척이나 되었다. 공이 이를 알리니 이 제독은 영장(營將) 이여백(李如栢)에게 만여 병사를 주어 쫓게 하였는데, 강을 반쯤 건넜을 때 병이 났다고 핑계대고 돌아가니, 대체로 이 제독은 본래 적을 추격할 생각이 없었고 다만 거짓말로 응했을 뿐이었다.
적은 퇴각하여 동래와 부산 사이에 웅거하여 소굴을 만들어 놓고 좌우로 약탈하였다. 중국 군대는 사면으로 에워싸고 있었으나 감히 더 진격하지 못하고, 제독이하 여러 장수들은 차례로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다. 공은 여러 번 장계를 올리기를, “이 도적들이 한가운데를 점거해 있으나 중국 군대는 또 믿을 수가 없으니, 이러한 때에 아래위가 협력해서 자강(自强)할 방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하고, 청하기를, “서둘러 정병(精兵)과 적과의 싸움에 익숙하고 담이 큰 자들을 뽑고 맹장을 배정해서 특별히 어루만지고 돌보되 늘 조련을 시켜 불시의 조용(調用)에 대비토록 할 것입니다. 또 적이 믿고 전승(全勝)을 거두는 것은 조총(鳥銃) 때문이니, 우리나라도 밤낮으로 훈련하여 군사로 하여금 모두 학습토록 한다면 적의 장기(長技)를 우리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절강(浙江) 군대가 돌아가기 전에 대포(大砲)ㆍ낭선(狼筅)ㆍ창검(槍劍)ㆍ기계(器械)를 일일이 전습(傳習)받아 한 사람이 열 사람을 가르치고 열 사람은 백 사람을 가르치며 백 사람은 천 사람을 가르친다면 수년 뒤에는 수만의 정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적이 온다 하더라도 방어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공이 처음에 경성에 들어갔을 때 죽은 백성들이 널려 있었다. 공은 힘을 다해 계획을 짜 진휼하였다. 이에 이르러 건강한 자들을 선발하여 절강 참장(浙江參將) 낙상지(駱尙志)에게 보내 화포(火砲)의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였다.
공은 남쪽의 일이 급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영남으로 내려갔는데, 9월에 부름을 받고 행재소로 돌아왔다. 10월에 거가(車駕)를 호종하여 서울로 돌아오니, 이때 성은 황폐하였고 관사(官司)는 담장만 남았으며 기근까지 겹쳐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경성은 고립되고 위태로웠으며 인심은 굳지 못하였다. 공이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근본을 굳히자고 청하니 임금은 공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공은 당속미(唐粟米) 1만 석을 방출하여 사람을 모집하니 구름처럼 몰려들어 얼마 안지나 건아(健兒) 수천을 얻었다. 조총과 창도(槍刀)의 기예를 가르치고 파총(把摠) 초관(哨官)을 세워 거느리게 하되 한결같이 절법(浙法)처럼 하여 번(番)을 나누어 직숙(直宿)케 하고 행행(行幸)이 있을 때에는 이들로 호위하게 하니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곧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가 쇠약하여 다시는 떨쳐 일어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논의가 매우 많았다. 급사중(給事中) 위학증(魏學曾)이 글을 올려 분할(分割)하고 역치(易置, 임금을 바꿈)할 것을 청하니, 그 일이 병부(兵部)로 내려졌다. 상서(尙書) 석성(石星)은 옳지 않다는 뜻을 견지하고, 행인(行人) 사헌(司憲)을 보내 칙서(勅書)를 받들어 선유하면서 아울러 우리의 국사(國事)를 살피게 하였는데 칙서의 내용이 매우 엄하였다. 칙서에 이르기를, “조정에서 속국(屬國)을 대하는 은의(恩義)는 여기에서 그친다. 지금부터 왕은 돌아가 자치(自治)하되 만약 또 다른 변이 생길 때에는 짐(朕)은 왕을 위하여 꾀할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은 칙서를 받고 환궁해서 곧 공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이런 일이 있을 줄 오래전부터 알았으나 일찍 피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내일 조사(詔使)를 만나 선위(禪位)를 청하리라. 경과 만나는 것도 오늘 하루뿐이므로 비록 밤은 깊었으나 부른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우려함이 지극합니다. 칙서의 뜻은 격려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어찌 갑자기 이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경과 같은 신하가 나를 만나 그 재능을 다 펴보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상위(相位)에 있으면서 국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무슨 재능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자사(子思)는 위(衛)나라에 있었으나 그 쇠망을 구제하지 못하였고, 공명(孔明)은 한실(漢室)을 부흥시키지 못하였으니, 성패를 가지고 사람을 논할 수는 없다.” 하고 술을 내려 마시게 하고 이르기를, “이로써 결별(訣別)하려 한다.” 하였다. 공은 일어나 절을 하며 말하기를, “내일 일을 이렇게 하면 천만 불가합니다. 감히 죽음으로써 청합니다.” 하였다.
다음날 조사와 만났을 때 임금이 소매에서 첩(帖)을 꺼내었는데, 병으로 국사를 맡을 수 없음을 극진히 설명하고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니 주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조사는 즉석에서 직접 써서 답하기를, “이번의 복국(復國)은 비록 중국의 힘을 빌리긴 하였으나 역시 왕의 복이 높아 다함이 없어서입니다. 전위(傳位)는 당 숙종(唐肅宗)의 고사가 있긴 하나 왕께서 이런 마음이 있다면 글을 써서 청하십시오. 저는 행인(行人)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감히 주장하겠습니까?” 하고, 끝에 가서 “유성룡은 충성심이 특출하고 인의(仁義)가 독신(篤信)하여 중국의 장리(將吏)가 모두 좋아하고 있으니 왕께서는 현상(賢相)을 얻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성안에는 다른 장수는 없고 다만 척 유격(戚遊擊)이 밤낮으로 조사와 있으면서 매우 친밀하였다. 이날 밤 공과 만나기를 청하고 좌우를 물리치고 지필(紙筆)로 문답하였는데, 척금(戚金)이 6, 7개 조를 써서 공에게 보였다. 그 가운데에는 ‘국왕의 전위(傳位)는 조기에 한다.’라는 조항도 있었다. 공은 깜짝 놀라 일어서며 다른 일은 답하지 않고 바로 쓰기를, “제3조에서 논한 바는 배신(陪臣)이 차마 들을 바 아니오. 노야(老爺)는 만 권의 책을 읽었을 것인데 고금의 사변(事變)을 어찌 모를 리 있겠소? 우리의 형세가 지금 위급한데 만약 또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처치에 타당성을 잃게 되면 이는 패망을 재촉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니, 척금이 옳다 하며 즉시 그 종이를 촛불에 태워버렸다.
다음날 공은 백관을 거느리고 조사에게 글을 올려서 주상께서는 본래 도적을 불러들일 만큼의 실책이 없었고 변이 일어난 뒤에 왜적을 막기 위한 조치가 매우 세밀하였음을 힘껏 진술하니 조사는 이를 믿고 받아 들였다. 이날 밤 척금은 또 공을 만나서 말하기를, “조사의 뜻이 크게 돌려졌으니 다른 염려는 없다.” 하였는데, 이로부터 조사가 임금을 뵐 때의 예모(禮貌)가 더욱 공손해졌다. 돌아갈 때 자문(咨文)을 보내 신칙하고 또 차부(箚付, 공문서)를 공에게 보냈는데, 산하(山河)를 재조(再造)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처음에 조사가 도착하기 전에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차부를 접반사(接伴使) 윤근수(尹根壽)에게 주어 대신에게 전하게 하였다. 공은 “경략이 국사를 공언(公言)하려 한다면 마땅히 주상께 자문을 보내야 한다. 지금 자문 없이 다만 차부만 있으니 그 말한 바는 반드시 조신(朝臣)이 처치할 일이 아닐 것이다.” 하며 거부하고 받지 않았다. 조사가 도착하자 공은 벽제(碧蹄)로 나가 맞았다. 조사는 공에게 “내가 경성에 도착하면 새로운 거조(擧措)가 있을 것이오.” 하였으니, 대체로 이때의 급박한 상황은 잠시도 용납이 되지 않았으며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 있으면서 자못 예성(譽聲)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역치(易置)를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은 그 와중에서 홀로 정색(正色)을 하고 성의를 다해 주선해서 임금으로 하여금 흔들림이 없게 하여 나라의 명운(命運)을 다시 굳힌 것이다. 후인들은 당시 전선(傳禪,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의 득실과 이해가 과연 어떠했는지를 보겠지만 공의 높고 멀리 내다보는 견식(見識)은 능히 미연(未然)을 내다보고 묵묵히 사기(事機)를 처리하였으니 참으로 그 공(功)은 사직(社稷)에 있다 하겠다. 그러나 공은 일찍이 스스로 말한 적이 없었고 세상에서도 알지 못하였다.
12월에 호서(湖西)의 적 송유진(宋儒眞) 등이 무리를 모아 격문(檄文)을 돌리며 약탈하면서 북상하였다. 외구(外寇)는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데, 내홍(內訌)이 또 일어나니 서울이 동요하였다. 그러나 공의 행동거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성색(聲色)하나 변하지 않았다. 임금이 공에게 궁중에 들어와 숙직하라 명하니, 공은 “지금까지 위태롭고 의심이 많은 시기에 갑자기 대신에게 궁중에 들어와 숙직하라 명하시면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놀라게 할까 걱정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은 전혀 몸을 돌보지 않는다. 어찌 (당나라 때 자객에게 암살 당한) 무원형(武元衡)의 일을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어느 날 저녁 날이 몹시 추웠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 공을 살피고 오라 하였는데, 깊은 밤 등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명하여 따뜻한 술을 내리게 하였다. 적이 사로잡히자 옥사(獄事)를 평번(平反, 공정하게 조사하여 억울한 죄를 무죄로 하거나 감해주는 것)하니, 체포된 자 거의가 석방되었다.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신장(訊杖, 형구(刑具))은 점점 무거워져 거의 사람이 들 수 없게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공이 건의해서 ≪대명률(大明律)≫의 척촌(尺寸)에 따라 견본을 정하니, 이로부터 헛되이 죽는 사람이 없어졌고 지금까지도 이에 힘입고 있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를 논하였는데, 간절한 말이 수천 마디였다. 그 모두가 나라의 근본을 굳히고, 절용해서 식량을 비축하며, 병사를 선발하여 훈련시키는 방책이었다. 또 청하기를, “국내의 전결(田結)을 통계(通計)하여 헤아려서 쌀과 콩을 거두어 경창(京倉)으로 수송하고 각사(各司)에 공물(貢物)과 방물(方物)을 진상(進上)할 때 모두 물건 값을 따져 정한 뒤 유사(有司)로 하여금 사들이게 하되 그 나머지를 군수(軍需)에 보태게 하면 병식(兵食)이 힘입는 바 있고, 외방(外方)에서 바치는 쌀이 고르지 않은 점과 각사의 방납(防納)에서 조등(刁蹬, 물가를 농단하는 일)하는 폐단이 모두 제거될 것입니다. 만약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혹 별도의 조도(調度)가 생길 경우에는 공물과 방물에서 적당히 헤아려 재감(裁減)한다면 창고에 있는 쌀과 콩을 번거롭게 환작(換作)하지 않아도 한없이 취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 바야흐로 그 시행을 강구하고 중외(中外)에서 모두 편하다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근거 없는 논의에 저지되니 논자는 애석히 여겼다.
적이 오래도록 물러가지 아니하자 중국에서는 천하의 병력(兵力)이 궁해 지면 불가하니 적이 친교(親交)를 청할 때에 들어주고 군대를 푸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석 상서(石尙書)는 그 논의를 주장하였고 과도관(科道官)은 이를 반박하였다. 송 경략(宋經略)은 이로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갔고, 시랑(侍郞) 고양겸(顧養謙)이 와서 대신하였다. 4월에 참장(參將) 호택(胡澤)을 보내 차부(箚付)로 우리 대신에게 유시하여 구천(句踐)이 몸을 굽혀 자강(自强)한 사실을 들어 책하고, 또 왜(倭)를 위해 봉공(封貢, 벼슬을 봉하여 주고 조공하게 함)을 청하게 하였다. 조정의 논의는 제각각 이어서 오래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호택은 화를 내며 속히 보고하라고 다그쳤다. 공은 이때 폐(肺)를 앓아 파리해 일어나지 못한 지 달포나 되었다. 이에 차자를 올리기를, “왜를 대신해 봉(封)을 요청하는 문제는 참으로 따를 수 없는 일입니다. 자세히 적정(賊情)을 갖추어 알려서 중국의 처치에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스스로 떨치고 일어설 수 없고 다만 중국에 의지해 부흥을 꾀하고 있습니다. 송 경략과 이 제독은 모두 파직되어 돌아갔고 고 시랑이 막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언급한 일들을 또 계속해서 완강하게 거절하여 일을 맡은 사람이 화를 내고 돌아앉아 선뜻 한마음이 되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나라의 형세는 더욱 고립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택(胡澤)이 주문(奏文)의 초본(草本)을 보자 하고 말단에 봉을 요청하는 일을 반드시 명언(明言)토록 하였다. 공이 거절하였지만 어쩔 수 없어서 다만 “위엄을 보여 그 완악함을 징계하고 기계(奇計)로 얽어 그 화를 그치게 하소서. 이 두 가지는 옛 제왕이 오랑캐를 제어하는 대권(大權)으로 모두 흉포를 금하고 생령을 보전하는 일에 함께 돌아가는 것이니, 시기에 따라 정세를 살핌은 오직 성조(聖朝)에서 선택할 일입니다.” 하였다. 공이 글을 다 쓰자 호택은 그 말이 불쾌하다고 싫어하여 계(計)자를 관(款)자로 고쳐서 갔다. 이때 친교를 받아들이자는 논의는 중국에서 쥐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명을 받는 형세였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후일 공을 공격하는 자들은 곧 주화자(主和者)라고 지목하니, 그 모함은 심한 것이었다. 공은 병이 깊어지자 네 번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받지 못하였다.
6월에 차자를 올려 전수 기의(戰守機宜) 11조를 아뢰었다. 7월에는 병조가 연병(鍊兵)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기를 계청하였다. 9월에는 널리 인재를 구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임용토록 하되 시용(時用)에 절실한 자를 10개 조로 나누어 재신(宰臣)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각각 그 아는 인재를 천거하게 하되 귀천을 가리지 말고 실질 재능을 보도록 하며, 포부(抱負)는 있으나 인정을 받지 못한 자는 감사ㆍ병사ㆍ수령으로 하여금 찾아서 아뢰도록 청하고, 이렇게 하고서도 또 빠진 자가 있는 경우에는 스스로 추천하게 하였다. 겨울에 군국기무(軍國機務) 일책(一冊)을 올리니, 그 조목은 척후(斥候)ㆍ장단(長短)ㆍ속오(束伍)ㆍ약속(約束)ㆍ중호(重壕)ㆍ설책(設柵)ㆍ수탄(守灘)ㆍ수성(守城)ㆍ질사(迭射)ㆍ통론 형세(統論形勢)였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차자를 올려 연강(沿江)에 둔보(屯堡)를 조치하기를 청하였고, 또 차자를 올려 방수(防守)에 관한 사의(事宜)를 아뢰었다.
호남 사인(士人) 나덕윤(羅德潤) 등이 상소하여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원통함을 씻어주기를 청하였다. 공은 당초 치옥(治獄)이 확대된 사유를 통렬히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초에 윤음(綸音)을 널리 펴 법에 연좌시켜야 할 자를 제외하고 모두 풀어준 것은 인심을 위로하고 하늘에 명운이 길어지기를 빌어서 중흥(中興)의 근본을 세운 것으로서 참으로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죄적(罪籍)에 들어있는 자 가운데 생존자는 거의 모두 은혜를 입었으나 먼저 사망한 사람은 일시에 원통함이 풀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최영경(崔永慶)은 신원(伸寃)되고 또 증작(贈爵)이 되었으나 정개청(鄭介淸)ㆍ유몽정(柳夢井)ㆍ이황종(李黃鍾) 등 여러 사람은 아직도 원통함을 안고 있으니 지금 특별히 그 호소하는 바를 윤허하여 아울러 원통함을 씻게 하소서. 이밖에 상소에 미처 거명되지 않은 자들도 임진년의 하교에 의하여 의금부로 하여금 상세히 기록하여 올리게 해서 일체 용서하여 풀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9월에 귀근(歸覲)을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불허되었다. 10월에 휴가를 받아 귀성하다가 여주(驪州)에 이르러 소환되어 경기ㆍ황해ㆍ평안ㆍ함경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니 공문을 보내 4도 관찰사에게 효유하여 군병을 교련시키게 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연병 규식(鍊兵規式)을 제정하여 4도에 반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국에서 이종성(李宗誠)과 양방형(楊方亨)을 책봉사(冊封使)로 파견하여 평수길(平秀吉)을 일본(日本) 국왕(國王)으로 봉하려 하였다. 심 유격(沈遊擊)은 늘 왜영(倭營)을 왕래하며 그 일을 중재하였다. 이에 이르러 책봉사가 바다를 건너감에 심 유격이 우리나라에 자문을 보내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책봉사를 따라 같이 건너도록 하니 조정의 논의는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공은 아뢰기를, “지금 조신(調信)이 돌아옴은 그 형색이 의심스럽습니다. 가령 평수길이 중국 사신을 환영하는 데 다만 우리 사자(使者)로 하여금 동행케 할 뿐이라면 조신이 어찌 연일 그 부류들과 밀의한 뒤에 비로소 유격을 보며, 유격 또한 어찌해 병을 내세워 문을 닫고 책봉사를 만나지 않고 다만 아랫사람을 시켜 알리는 것입니까? 신은 늘 이 도적들이 끝에 가서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청을 해서 말썽을 빚을거라 의심하였습니다. 지금의 사세는 점점 이런 경우에 가까와집니다. 아마도 그 요구는 통신(通信)에 그치지 아니하고 혹 약속을 어기려고 이를 빌어 말하는 것이요, 유격 역시 그 일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궁하게 되자 우리에게 허물을 돌려 스스로 모면해 보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곧바로 거절하면 바로 그 농간에 떨어지는 것이요, 그 말에 따른다면 또 인정이나 의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사자를 보낸 뒤에 적이 물러갈 지 머무를 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이 그렇다면 마땅히 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애초에 일본과 조금도 원수진 일이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일본이 천리(天理)를 어기고 까닭 없이 군대를 일으켜 우리 백성을 살해하고 우리 묘사(廟社)를 불사르고 우리 구릉(丘陵)을 발굴하였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피눈물을 흘리며 죽음만 있을 뿐 어찌 감히 화친을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중국에서 남북의 백성을 모두 사랑하고 훈척 대신(勳戚大臣)을 불측(不測)스러운 땅으로 보내 수고하게 하는 것은 어지러운 병란을 종식시키기 위함이다. 대인(大人)이 일을 맡아 명을 받들고 우리를 훈계하니, 예의상 당연히 견책을 받겠으나 이는 실로 중국의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일이다. 일본인은 반복 무상하여 믿을 수 없다. 비록 조사가 황제의 명으로 임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요령(要領)을 얻지 못할 것인데, 기장(機張)ㆍ죽도(竹島)ㆍ안골(安骨)에 왜가 여전히 모여 있으니 우리가 더 무엇이 있어 사신 한 사람을 보내는 것을 중시하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치욕만 더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요, 대인이 끝까지 담당한 일도 헛된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바라건대 다시 저들의 정형(情形)을 살피고 책봉사와 더불어 상의하되 목전의 일만 보지말고 장원(長遠)한 계획을 생각하시오.’ 하고서 저들의 답을 기다려 볼 것이며, 한 마디의 말로 가벼이 허불허(許不許)를 말하여 수습하기 어렵게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 유격이 계속하여 독촉하자 이때 황신(黃愼)이 유격의 접반사(接伴使)로서 부산(釜山)에 있었는데 드디어 황신을 파견하였다.
4월에 이종성이 왜영(倭營)에서 도망치니 도성이 들끓으며 수일만에 떠나는 자가 태반이었고, 재상ㆍ대간(臺諫)ㆍ근시(近侍) 중에도 가속(家屬)을 은밀히 내보내는 자들이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상사(上使)가 왜영에서 나왔다는 보고가 막 도착하였으나 부사(副使)는 아직도 왜영에 있고 처치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다. 가령 적병이 과연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 하루 이틀에 도성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인심이 먼저 무너지면 나라를 위해 몸을 내던질 의사가 전혀 없게 된다. 이것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池)와 견갑 이병(堅甲利兵)이 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하고, 계청하기를, “조신(朝臣) 가운데 먼저 가속을 내보내 백성의 원망이 된 자를 법관으로 하여금 살펴서 계문케 하고, 방민(坊民)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성명을 기록하여 후일의 처치를 기다리게 하소서. 또 방을 부쳐 이를 효유하여 민심을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군(三軍)과 백성의 마음은 한 사람의 진퇴에 매여 있습니다. 만약 근본을 지키지 않을 생각이라면 지엽(枝葉)을 어찌 보호하겠습니까? 국도(國都)를 옮겨 보존을 꾀한다는 말이 한 때의 갑작스러움에서 나왔으나 예로 삼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하였다.
7월에 호서(湖西)의 적(賊) 이몽학(李夢鶴)이 병을 일으켜 연이어 두 고을을 함락시키고 진격하여 홍주(洪州)를 포위했다가 목사(牧使) 홍가신(洪可臣)에게 사로잡혔는데, 사대부 가운데 체포된 자들도 있었다. 공은 한결같이 공정하게 옥사를 다스려 한 사람도 억울하게 걸린 자가 없었으니 원근(遠近)에서 모두 감복하였다. 윤8월에 임금이 대신에게 동궁(東宮)의 청정(聽政)을 받으라 명하니 참소의 말이 들어간 것이었다. 공이 백관을 거느리고 불가함을 쟁집한 지 수십 일이 되었으나 임금의 뜻은 더욱 굳었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따르는 것이 무해(無害)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공은 “어찌 그다지도 생각지 못하느냐?” 하고, 합문(閤門) 밖에 엎드린 지 달포만에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9월에 해직을 청하니 임금이 친필로 유시하기를, “이러한 때에 경은 하루도 상위(相位)에서 떠날 수 없다. 경이 아니면 그 누가 제세(濟世)의 공을 이루고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한단 말인가?” 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 봄에 평행장(平行長)이 사람을 시켜 김응서(金應瑞)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청정(淸正)과 행장(行長)이 공을 다투어 틈이 생겼다. 책봉이 성사되지 않는 것도 청정이 방해한 것이다. 청정이 지금 일본에서 나오니 주사(舟師)로 바다에서 요격하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대체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에 주둔하면서 여러 번 왜병을 격파하자 행장이 이를 근심하여 그 허실을 엿보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거짓임을 의심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독촉하였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이 이순신의 공이 높은 것을 시기해서 머뭇거린다고 상소하니, 이순신은 어쩔 수 없이 군을 출동시켰으나 청정은 벌써 되돌아 온 뒤였다. 임금은 이순신이 군기(軍機)를 그르쳤다 하여 처벌하고 원균으로 하여금 대신케 하려 하니 공이 아뢰기를, “통제사는 이순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금 사태는 급한데 장수를 바꾸어 한산을 지킬 수 없게 한다면 호남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화를 내며 비변사(備邊司)가 아부만 하고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니, 모두 두려워해서 감히 말을 못하였으나 공은 나라의 성패가 달렸다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임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순신은 끝내 죄를 받았다. 그 후 원균은 과연 크게 패하여 공의 말처럼 호남은 와해되고 말았다.
공은 병을 이유로 네 번의 차자와 네 번의 정고(呈告)를 하였으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은 평소 말이나 얼굴빛으로 남을 따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감히 사사로이 끼어들지 못하였다. 국사를 오랫동안 맡아보면서 원망을 듣게 되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매우 많아져서 공을 쓰러뜨리려고 꾀하였다. 8월에 공에게 기호(畿湖)의 경계에서 적을 막으라 명하니 공은 명을 받자 바로 떠났는데, 참소하는 자가 가속을 데리고 떠났다고 하였다. 어느 날 하교에서 “들으니 대신이 가속을 이끌고 도성을 빠져나갔다고 하는데 대간은 한 마디도 없으니 대신은 권세가 있다고 할만하다.” 하였다.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이 공과 다른 대신들의 가속의 소재를 일일이 들어 밝히니 임금의 마음은 풀리어 곧 공을 소환하였는데, 공은 명을 받기 전에 또한 차자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니 임금이 글을 내려 따뜻이 유시하였다. 이때 적세는 매우 급박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은 흩어져 거의 비다시피 하였다. 드디어 공이 관할하는 4도의 병사를 징발하여 호위하게 하니, 수만 인이 이르렀는데 부오(部伍)가 정연하고 호령이 엄숙하여 한 사람도 도망치는 자가 없었다. 9월에 임금이 강탄(江灘)을 순행(巡行)하는데 이르는 곳마다 장사(將士)들을 위문하였다. 그리고 바로 공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군용(軍容)이 이와 같음은 곧 경의 힘이다.” 하였다.
11월에 명을 받들고 영남으로 내려가 군량을 조치하니 대체로 경리(經理) 양호(楊鎬)의 출병을 위한 것이었다. 경리가 도착하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 나라의 일은 유모(柳某)와 같은 이로 하여금 보필토록 해야 한다.” 하였다. 뒤에 누군가가 경리에게 모함하기를, “유모가 공을 깎아 내리며 일을 해 낼 재능이 없다고 한다.” 하며, 인하여 많은 무고를 하였으며 심지어는 비방하는 글을 경리의 관문(館門)에 붙이기까지 하였다. 하루는 경리가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과 사사로이 말하기를, “유모가 형군문(邢軍門)에게 죄를 얻어 군문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도피하여 여기에 와 있으니, 군량의 수송 등은 윤승훈(尹承勳)에게 전담시켜야 할 것 같소.” 하였다. 공은 역관(譯官)을 통해 이를 듣고 믿을 수 없어 이덕형에게 물으니 그런 말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날 저녁 도사(都司) 백황(白璜)이 역시 경리의 뜻으로 남이공(南以恭)에게 분부하되 한결같이 이 말과 같았다. 공은 비로소 잘못 전해진 말이 아님을 알고 드디어 치계(馳啓)하여 직명을 깎아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 봄에 소환되자 여러 번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오늘같이 위태로운 때에 대신이 어찌 사퇴한단 말인가? 비록 비방은 있다 하더라도 더욱 국사에 힘을 다해야 하고 가벼이 스스로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하였다. 9월에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20개 죄목(罪目)으로 경리를 핵주(劾奏)하니, 임금이 좌의정 이원익(李元翼)으로 하여금 주문(奏文)을 가지고가서 해명하게 하였다. 정응태가 듣고 크게 화를 내어 우리가 기만하려 든다고 아울러 탄핵하고 또 왜(倭)와 통모(通謀)한다고 무고하니 임금이 분개해 시사(視事)하지 않고 피위(避位)하려 하자 공이 백관을 거느리고 그럴 수 없는 일이라 쟁론하였다. 대신을 보내 변무(辨誣)하는 문제를 논의하던 중 이이첨(李爾瞻)은 당시 지평(持平)으로 앞장서서 공을 탄핵하였는데, 공이 가기를 자청하지 않으니 대신으로서 나라를 생각하는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윤홍(尹宖)ㆍ유숙(柳潚) 및 무뢰 유생(無賴儒生) 홍봉선(洪奉先)ㆍ최희남(崔喜男) 등이 간사한 자의 사주를 받아 연이어 상소하여 힘을 다해 공격하였으나 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이 여러 번 차자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자 곧 성밖으로 나가 명을 기다리며 세 번 차자를 올렸으나 역시 윤허받지 못하였다. 10월에 체직되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니 언자(言者)가 계속 쟁론하여 11월에 파직되어 돌아갔다. 처음에 정인홍(鄭仁弘)은 평소 공을 원수로 여겨 음해하려 하였는데 대신으로서 공을 미워하는 자와 멀리에서 서로 결탁하였다. 이에 이르러 정인홍의 문객 문홍도(文弘道)가 정언(正言)이 되자 어깨에 힘을 주며 맡고 나서 온갖 말로 헐뜯으며 (당(唐)과 남송(南宋) 때의 간신인) 노기(盧杞)와 진회(秦檜)에 견주기까지 하였다. 12월에 공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6월에 명하여 직첩을 되돌려 주니, 삼사(三司)에서 또 논핵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논사(論事)가 실상에서 지나치면 비단 그 사람만 불복할 뿐만 아니라 옆에서 보는 사람도 불복한다. 주화(主和) 두 글자로 꼬투리를 삼아 유성룡을 진회에 견주기까지 하였다. 진회는 오랑캐의 뜻을 받아들여 처자를 보전하고 금인(金人)을 위해 모략을 꾸미기 위해 은밀히 송(宋)나라에 들어와 화의(和議)를 강력히 주장하고 악비(岳飛) 등을 살해하였다. 지금 유성룡 역시 음모에 은밀히 통한 사실이 있는가? 이 말이 족히 인심을 진복(鎭服)시키고 국시(國是)를 정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그의 마음은 종사(宗社)가 망하려는 것을 민망하게 여겼고 중국에서 이미 화의를 허용하도록 하였으므로 권도로 그 일을 성취시킨 것이다. 직도(直道)로 따져보면 나 역시 그르쳤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 실상을 살펴보면 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아! 그때 그 누가 쏠리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지금에 와서 서로 벗어나려고 나는 그런 일이 없다, 나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니, 그렇다면 이 모두 우의정이 죄인이란 말인가? 또 중론을 물리치고 밤중에 사자(使者)를 보냈다는 말은 더욱 말할 것이 없고, 그 당시 널리 조정의 논의를 모아 정한 것이다. 그 논의는 정원(政院)에서 상고할 수 있다.” 하였다. 위대하다! 임금의 말씀이여. 훗날 공의 심사(心事)와 모함하던 자의 정상(情狀)을 알려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 대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대간(臺諫)이 화의 문제로 공을 공격할 때에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남도(南道)에 있으며 이원익(李元翼)과 시사(時事)를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신이 ‘오늘의 국세(國勢)는 사람의 기(氣)가 목에서 막혀 온갖 맥이 끊어질 것과 같으니 먼저 이 기를 서둘러 내려보낸 다음에야 살길을 논할 수 있다.’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오직 이원익만 들었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감히 사람들이 모른다 해서 없었던 일처럼 숨기겠습니까? 지금 이러한 일로 유성룡에게 죄를 주었으니 차례로 삭직 시킨다면 당연히 신에게도 미쳐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정직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비답에서 특별히 이를 언급하여 삼사(三司)를 탓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삼사의 논의에 따랐다.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에 퇴계 선생의 연보(年譜)를 지었다. 11월에 명하여 직첩을 돌려주었다. 12월에 예조의 통보로 도성의 동교(東郊)로 나가 의인 왕후(懿仁王后, 선조비 박씨)의 상(喪)을 길 왼쪽에서 곡송(哭送)하고 그날로 남쪽으로 돌아왔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 8월에 정경 부인(貞敬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12월에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내렸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조정에서 염근(廉謹,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기록하였다.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첫째로 공을 추천하며 동료에게 말하기를, “이 분은 한 가지 선행(善行)으로 이름지을 수는 없다. 다만 미오1)(郿塢)의 무고를 씻어주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문홍도(文弘道)의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 계사(啓辭)를 말한 것이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 정월에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다. 10월에 복을 마치자 다시 부원군이 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 3월에 고신(告身, 사령장)이 비로소 도착하니 공은 즉시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명을 얻지 못하였다. 7월에 호성훈(扈聖勳)에 기록되고 소명(召命)이 내려지자 상소하여 소명을 사양하고 또 녹권(錄券)에서 제명되기를 청하였다. 9월에 다시 소명이 있었으나 또 사양하였다. 충훈부(忠勳府)에서 화사(畵師)를 보내 상(像)을 그리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현재 녹훈(錄勳)된 것을 사양하였다며 돌려보냈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 정월에 회맹 제례(會盟祭禮)를 마치자 교서(敎書)를 내리고 은견(銀絹)과 마필(馬匹)을 하사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장리(長吏)를 보내 식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3월에 명하여 봉조하(奉朝賀)의 녹을 지급케 하니, 공은 일 없이 받는 것은 미안스럽다고 하여 상소하여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불허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 2월에 또 소명이 있었으나 이때 공은 오랜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아니하니, 내의(內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와 구호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유소(遺疏)를 초하여 덕을 닦아 정치의 도를 확립하고, 공정히 보고 들으며, 백성을 기르고 어진 이를 임용할 것이며, 군정(軍政)을 닦고 양장(良將)을 가려 뽑을 것을 말하고, 후장(厚葬)치 말라고 유계(遺戒)하였다. 명하여 병중에 지은 시(詩)를 ≪관화록(觀化錄)≫이라 하였다. 병문안 오는 손님을 사절하라고 명하면서, “안정을 취해 조화(造化)로 돌아갈 따름이다.” 하였다.
5월 정묘일(丁卯日) 밤에 부축없이 스스로 일어나 앉으며, “오늘은 거뜬하니 무병한 때와 같다.” 하고, 홍범(洪範) 한 편을 끝까지 외웠다. 이튿날 해 뜰 무렵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울 밖에서 소를 노리고 있었다. 종들이 큰 소리를 지르니 아들 유진(柳袗)이 공이 놀랄까 보아 급히 나가 제지하였다. 공이 천천히 유단(柳褍)에게 이르기를, “네 아우는 어리석구나. 호랑이를 본 사람에게 놀라지 말라 하니 될 일이냐?” 하고, 내의(內醫)에게 서둘러 들어오게 하여 손을 잡고 결별(訣別)하며 “멀리 와 병을 치료해 주니 임금의 은혜 망극하다. 며칠이면 경성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당(堂)에 자리를 펴게 하고 북쪽을 향하여 바로 앉아 편한 마음으로 서거(逝去)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은 매우 슬퍼하였으며 철조(輟朝)하고 조상(弔喪)와 부의(賻儀)를 예와 같이 하였다. 원근에서 공의 부고를 듣고 모두 슬퍼하고 애석히 여겼으며, 서울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서로 나서서 공이 거처하던 옛집에 위(位)를 설치하고 매우 슬피 곡을 하였다. 시민(市民)들도 분주히 모여 곡을 하였으며 4일간 저자의 문을 닫았고, 서로 부포(賻布)를 내며 말하기를, “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7월에 풍산현(豐山縣) 동쪽 수동리(壽洞里) 오향(午向)의 묘원에 장사지내니, 4백여 명이 모였다.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 여름에 사자(士子)들이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사당을 세워 제향을 지냈다. 뒤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의 퇴계 선생 사당에 부향(祔享)하였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매우 높고 남달리 슬기로웠다. 어려서부터 학문은 정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학문은 생각을 근본으로 삼는다. 생각지 않으면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을 뿐이니, 비록 날마다 많은 책을 외운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고, 또 “옛사람이 말한 바 지(知)란 참되게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언어 문자의 말절(末節)에서 주워 모아 성(性)을 논하고 이(理)를 논하며 스스로 지(知)라 하지만 신심(身心)에 전혀 간섭이 없다면 모두 공자(孔子)가 말한 바 덕(德)을 버리는 것이다. 이를 지라 하면 거리가 어찌 천리뿐이겠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문사변(學問思辨)과 성찰극치(省察克治)는 참으로 급무(急務)이나 마음의 본바탕에 배양하고 함축(涵蓄)하는 힘이 없으면 역시 어디에 근거한단 말인가?” 하였고, 또 “≪중용(中庸)≫에서 덕성(德性)을 높이고 문학(問學)의 길을 간다고 했지 문학의 길을 가서 덕성을 높인다고는 안 했으니, 그 선후를 다투는 바 얼마인가? 결국 지향과 귀결되는 바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하였으니 그 소견의 뛰어남과 독실함이 이러하였다. 그러므로 공을 잘 모르는 자들은 혹 선(禪)에 가깝다고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실은 정주학(程朱學)의 사상이었다.
평소 몸가짐이 장중하여 종일토록 엄연(儼然)하였으니 집안사람이나 자제들이라도 일찍이 몸을 기댄다거나 해이해진 공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과 사귀고 데는 봄의 화기(和氣)가 흘러 넘쳐 다가서는 듯하였다. 비루하고 이치에 어긋난 말을 입에서 내지 않았고, 태만한 태도를 몸에 짓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을 보면 자연스럽게 존경하는 마음이 나왔으니, 대체로 예(禮)에 따라 몸을 움직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경 부인을 모실 때에는 우스개 소리를 하고 유희하며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못하는 일이 없었다. 효성과 우애는 타고 난 것이어서 형 목사공(牧使公)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봉양하여 그 정성과 사랑을 다하였는데, 늘 말하기를, “자식으로서 하루라도 어버이를 잊으면 이는 효가 아니다.” 하였다. 관찰공(觀察公)이 머리에 종기가 나자 늘 그 피고름을 빨았고, 상을 당해서는 3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 3년을 마쳤다. 정경 부인의 상사(喪事) 때에는 나이 이미 60세였으나 슬퍼하고 예를 다함은 앞서의 상사 때와 같았다.
공은 성균관 유생시절부터 원대(遠大)한 뜻을 품었는데, 비록 굽혀서 과제(科第)에 나아갔으나 부귀와 이달(利達)을 덤덤하게 여겼다. 그러나 경제(經濟,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일에는 늘 뜻을 두어 예악(禮樂)과 교화(敎化) 외에 치병(治兵)과 이재(理財) 등의 사무를 자세히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재능은 족히 그 사무에 응할 수 있었고 학식은 족히 그 쓰임을 다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임금의 마음을 바루는 것을 정치를 안정시키는 근본으로 삼아 등대(登對)할 때마다 정백(精白)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성의(誠意)를 다해 의리(義理)를 개진하되 자세하고 간절하게 하니, 선묘(宣廟)가 매우 소중히 여겨 바라보면 공경하고픈 생각이 든다고 여러 번 탄복하였다.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의 만남은 말세에서 드물게 보는 바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맞서며 헐뜯음과 칭찬으로 알력을 빚어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상란(喪亂)을 맞아 복망(覆亡)할 즈음에 소임을 맡게 되어서는 마음을 졸이며 모책을 꾀한 것이 소차(疏箚)로 올린 글과 조치하는 가운데에서 간절하게 드러났으니, 공이 부흥을 도모한 일은 흥원(興元, 당나라 덕종(德宗)의 연호) 때의 육지(陸贄)에 견주어도 역시 크게 양보할 것이 없다. 내외로 분주히 내달으며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 혹 과실도 있었으나 대체로 중흥(中興)에 참여한 여러 신하 가운데 노고와 공적은 가장 드러났다.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 여름에 대신이 공을 선조(宣祖) 묘정(廟庭)에 배향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혼조(昏朝)에서는 교분(交分)을 다하지 못했다 하여 윤허치 않으니 물의(物議)는 흠전(欠典)이라 하였다.
공은 읽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두어 번만 읽어도 일생동안 잊지 않았다. 배우는 자가 의문난 점을 질문하면 곧 입에서 나오기 무섭게 외우며 분석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간결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고 또 겸손하여 스스로 사도(師道)를 자처하지 않았으며 한번도 무리를 모아놓고 교수(敎授)한 적은 없었지만 후학들은 모두 스승으로 존숭하였다. 거처하는 곳의 산수(山水)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집 서쪽의 천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푸른 석벽(石壁)이 강에 임해 있었으므로 서애(西厓)라 자호(自號)하였다. 귀휴(歸休)할 때면 방에 한가로이 앉아 의리(義理)에 푹 잠기니, 그 스스로 깨닫은 정취(情趣)에는 다른 사람들이 엿보지 못할 것이 있었다.
늘 임금의 사랑과 은택이 지나치게 융숭하여 벼슬길을 떠날 수 없었음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는데, 당(堂)의 이름을 원지(遠志)라 해서 그 은미한 뜻을 드러내었다. 만년에 파직되어 돌아와서는 초복(初服,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으로 노니니 조예는 더욱 깊었고 즐거움은 더욱 참되었다. 그 문장(文章)은 다만 문리(文理)가 통달하게만 하고 꾸미지 않았으며, 붓 가는대로 써서 뜻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았으나 명백하고 전아(典雅)하며 자연스러워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사명(辭命)에 특히 뛰어나 분쟁을 해결하고 어려운 일을 풀어주니 대체로 심기(心氣)가 화평(和平)하여 시교(詩敎, 시의 가르침)에서 얻은 바가 있어서였다. 평생의 시문(詩文)을 병화에 잃고 지금 문집(文集) 10권, ≪신종록(愼終錄)≫ㆍ≪영모록(永慕錄)≫ㆍ≪징비록(懲毖錄)≫ 등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배위(配位) 이씨(李氏)는 종성(宗姓)으로서 현감(縣監) 이경(李坰)의 딸이다.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가 뒤에 정경 부인(貞敬夫人)으로 증직되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유위(柳褘)는 매우 빼어났으나 일찍 죽었고, 유여(柳袽)는 장수도 찰방(長水道察訪)으로 역시 일찍 죽었다. 유단(柳褍)은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이고, 유진(柳袗)은 형조 정랑(刑曹正郞)이다. 사위는 찰방 이문영(李文英)과 현감 조직(趙稷)이다. 또 측실(側室)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유초(柳初)ㆍ유첨(柳襜)이고, 사위는 변응황(邊應篁)이다. 내외손이 또 몇 명 있다.
내가 약관 시절부터 공의 문하에서 물 뿌리고 쓸며 매우 지극한 계도(啓導)를 받았으니 대체로 옛사람이 말하는 망극한 은혜를 입었다고 할 것이다. 정랑 유진이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서 공의 행장을 나에게 부탁하고 태사씨(太史氏)에게 고한다고 하니, 의리상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대강을 위와 같이 기록하여 채택에 대비토록 한다. 잗다란 언행은 모두 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