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中十高
"一中十高 月新木現"이걸 한글로는 '일중십고 월신목현'이라 읽는다. 이정도 한문자 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실력이면 누구던지 풀이 할만큼 쉬운 글귀다. 제법 한문에
대해 문리가 통했다는 내가 이 여덟 글자를 꼬박 두어해 남짓 걸려 겨우 터득 해 냈다.
붓글씨 쓴다는 아내가 주방 벽에 큼지막하게 써서 부쳐둔 것을 아들이 생색을 낸답시고
족자로 만들어 집안에선 가장 이목이 번다한 현관 앞에 걸어 두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한번씩은 훑어보며 읊조리곤 글 뜻을 물으면 그럭저럭 내 나름대로 적당히 풀이를 해 주었다.
"하나(一)가운데(中)를 열고 (十高).....반은 암시적이고 반은 이두문자식 풀이도
하면서 유식한 척 너스레를 떨어보기도 한다.
때로는 "하나부터 열중하면 열 정도는 무난히 해결된다.......그리고 나서....음,,,".
그러나 앞 귀절과 뒷 귀절을 맞춰보면 도저히 문맥이 맞지 않아 그냥 얼버무리기만 하고 만다.
더 버티다가는 그나마 좀 안다하는 유식이 탄로 날 가 싶어 길게 말하는 것을 피하여 어물쩍
그냥 넘어가기 일수고 완벽한 글 뜻은 알 수 없었다.
지난여름 어느 날 약간의 자존심마저 숙이며 지나가는 말투로 넌지시 아내에게 물어 보았더니,
아내: "그건 어렵지 않은데요! 아시면서 역부러 물으시는 거 아니예요?"
나 "앞 구절은 ...한가운데를 열고... 조금 알듯도 같은데...?"
아내: "그게 아녜요!" 1일은 중학교동창(一中), 10일은 고등학고 동창모임날이고(十高)
월요일은 신세계백화점 쉬는날(月新) 목요일은 현대백화점 쉬는날(木現)...
잊어먹지 않으려고 편한 김에 붓으로 메모한건데 큰애가 족자를 만들어 걸었더군요!"
- 세상에서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건 건망증이다. 특히 나이를 먹으면 더욱 그렇다.
세놈 손자 다음 운좋게 외손녀를 보았다. 막내딸이 아들다음 이번에는 딸을 낳았다.
시부모가 딸 하나 낳아 보라고 하시더라는 말을 가끔 하더니 아닌게 아니라 이목구비가- 똑 떨어지리만큼 반듯한 공주가 탄생했다.
- 아기들만 있는 신생아 방에 갔는데 면회때가 되어 들여다 본즉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라고
- 생각되었다. 나는 머리를 갸웃거려 봤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
- -언제 어디서 봤더라? 많이 본 낮익은 얼굴이긴 한데.......-
- -누굴 닮기는 닮았는데 그게 누구더라?-
-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 보아도 떠 오르지않아 그만 생각하기로 하고 산모를 위로해 준후
- 뒤돌아 차를 몰고 오는데 계속 머릿가를 어른거리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이젠 나이 탓인지 건망증에 걸렸나 싶어 덜컥 겁부터 터져 나온다. 환갑이 넘도록다니던
- 직장에서 정년을 맞았고 때마춰 미증유의 경제대란이 들이 닥쳐 생활에 많은 변화를 많이 겪고 있는 데다 갑작스레 주변도 바뀌게 되면 심신에도 좋지 않는 영향이 온다는데 나도 혹여 그런한 증세가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렵기도 했다. 늙으면 자연히 겁쟁이도 되나 보다
손자들을 셋 보았지만 그 동안 남자아이들이라 내 집에 오기만 하면- 야단법석을 떨고 간다. 축구가 한창 붐을 이룰 때는 축구 찬다고 온 방안과 거실을
- 쿵쾅거리며 누비고 다니는 바람에 아래층 사람이 몇 번 주의를 주고 가지만 별 도리 없다.
- 같이 늙어가는 아내는 그래도 그 손자애들이 놀다가 저네 집으로 가게되면 멀정하던 사람이
- 느닷없이 아프다며 자리를 펴고 들어 눕는다.
- 아이들 뒤치닥거리 하느라 수고했다는 위로말을 하지만 효과는 없다. 사실 몸이 불편해 지는
- 까닭은 제 부모들이 앞세워 데리고 가게 되면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방에 들어
- 와서는 가슴 속이 아프다고 들어 눕는데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는 동안 내가 관찰해서 얻은 결논은 이렇다.
- 손자애들 재롱속에 파뭍혀 있을 때에는 엔돌핀이 툭툭 터져 나오다가 애들이 가버리고 나면
- 이 앤돌핀이 딱 멈추게 되니 병이 난 것처럼 피로가 겹쳐지는 것이다.
- 나역시 말은 않지만 거의 비슷한 증세가 터질 때마다 생각해 본 건데 틀림없이 이런 까닭으로
- 마누라 발작이 일어난다는 걸 짐작해 내었다.
- 사내아이들이 분탕치고 지나간 집안은 온통 수라장이다. 이럴 때마다,
-손녀 하나 있었으면......-했는데 이번에 그옇고 소원을 푼 셈이다.
산바라지 하는 곳은 친정이 편해 좋다고 하면서 모녀는 한 달 넘게 집에 와 있다.
이젠 얼굴을 알아 보고 생긋거리면서 웃기도 하는데 때로는 응알이도 해서 우리 부부는 그저 들여다 보기만 해도 흥이 겹다. 마냥 좋다! 좋아! 허 허 허 허 .....
- 그런데 아기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노라면
- "언제 어디서 봤더라? 누굴 꼭 닮았는데??"
- 나는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길 한 달이 넘는 오늘 아침!
- 딱!! 무릎을 쳤다. "옳거니!!! 제 에미를 닮았군 그래!"
- 외손녀는 스물 몇해전 제 어미 어릴 때 모습을 꼭 빼 닮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잊어 먹었나 보다! 그제사 그 때 찍었던 사진을 찾아서 비교해 보았는데
- 틀림없는 제 어미 얼굴이다.
- 그때 막내딸 사진에서 보던 그 얼굴을 그대로 뽑아내었다! 이젠 알다 마다!
- 네가 누군지! 흐흐 흠 흠,
- 나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한방! 또 한방 박았다.
"찰칵!" "찰깍!"- 한창 바쁘고 젊은 그때는 자식얼굴을 제대로 들여다 볼 짬도 없었지 않았던가.
이제 한가한 세월을 만나 30년 옛일을 다시 살려낸 내가 대견스럽기도 하다.
그 요망스런 건망증이 훨훨 날아가 버렸나 보다.
- 1999년 9월 . 2244
- 똑 떨어지리만큼 반듯한 공주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