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는 누구나 그저 본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 가장 옳은 생각이라고 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체험한 일 중에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 있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책이라고 하기보다는 소설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이 되었다. 여기서 소설책이라 함은 ‘거짓말을 정말처럼 엮은 책’이란 뜻일 뿐이다.
특히 삼국시대나 고려의 역사가 모두 그러한 맥락으로 왜곡되어져서 누구든지 이를 미리 짐작하고 읽지 않는 것이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김유신의 이야기다.
김유신 장군이 소년시절에 있을 법한 이야기 한 가지가 있다.
김유신이 타고 다니던 말(馬)이 말(言)을 하였다.
가야를 버리고 신라로 올 무렵 김유신의 조부께서 친히 타고 왔던 그 말의 손자였다.
“…도련님이 그렇게 아끼던 천관아가씨와 인연을 딱 짤라 버린 일이다. 물론 어머님 되시는 만명부인의 훈계하심도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사랑하던 어여쁜 아씨 천관(天官)낭자를 잊어버린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도련님이 드디어 8대 화랑으로 뽑히셨다. 조부 무력공이 내린 가야검(伽倻劍) 대신 신라의 세칼을 차고서 초라한 내 꼬락서니 대신 당나라에서 들여온 늠름한 호마(胡馬)를 타신다면 더욱 모습이 훌륭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내가 도련님 곁을 떠난다 해도 조금도 슬프지 않다. …최근 왕족인 춘추(春秋) 도련님과 도련님의 누이 문희아씨와의 공놀이 사단을 보더라도 모두 우리 유신(庾信) 도련님의 출세를 위한 발판이 된 것이라 여기니 비록 가슴은 아프지만 참아야 한다. 주인을 위해서… 차라리 도련님이 새로 다듬고 장만한 신라검(新羅劍)에 내 피를 첫 번째로 묻혀 드리고 싶다…….”
이 글은 작가 황순원이 김유신 공의 애마(愛馬)를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의인화하여 쓴 작품의 일부인데 어쩌면 당시의 김유신 공의 마음을 뼈속 깊이 들여다보는 듯한 글이다.
옛 기록을 더듬어 보면 경주에 천관사(天官寺)가 있었다. 김유신 공이 어릴 적에 사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엄한 훈계를 받고 출입을 끊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늘 타던 말 위에 얹혀 집으로 돌아가는데 말이 자주 찾던 천관아씨네 집 앞에 와 머물거늘 술이 깬 김유신 공은 즉시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실망한 천관아가씨는 슬피 노래하면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을 천관사(天官寺)라 했다고 한다.
이 작은 사건을 한낱 남녀간 작은 로맨스로 엮기에는 너무도 큰 사건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이것을 확대할 형편도 아닌 것 같아 암시적인 표현으로 슬쩍 숨겨 두었는지도 모른다.
옛날의 글들은 가급적이면 줄이고 줄여야 명문이라고 여기다 보니 이 정도의 암시적 단편으로 끝을 마무리한 것 같다. 마치 빙산의 작은 한 부분만 보여 준다고 해서 빙산의 크기를 그 보이는 정도로만 볼 수 없듯이 당시 소년 김유신 공의 심금은 이 정도 이상으로 착잡하였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나의 작은 자로 그 역사의 한 모퉁이를 재어 보고자 한다.
왜 부친 서현공은 그에게 유신(庾-노적가리 信-믿을 신)이라 이름지어 주었을까?
단순히 넉넉한 경제생활을 꿈꾸며 안일하게 여생을 보내도록 하기 위한 자식 사랑의 작은 기대감치고는 이름을 지은 유신공의 아버지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구석이 엿보인다. 영원히 머무는 창고도 아닌 ‘임시로나마 곡식을 쌓아 둘 노적가리를 믿는다’는 표현은 훗날 삼국통일을 이룩하라는 모험 가득한 소년의 이름은 아니다. 비록 이국의 서글픈 포로 비슷한 볼모살이를 하지만 다소 경제적 안정도 기대하며 타국에서 은자(隱者)답게 살기를 바랬던 자그마한 기대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망국의 설움을 안고 사는 가야의 귀화인이자 경주에서는 이방인으로, 먼 남쪽에 두고 온 산하를 그리는 처지에 바랄 것이라고는 마음과 몸 편히 사는 것 이상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과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임시로 지은 창고’로 지어 비록 가슴속에는 울분이 솟는 망국의 아픔이 있지만 적국에 얹혀서 사는 형편에 노골적인 큰 배포를 나타내어 보일 형편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음을 죽이고 다독거리고 살다보면 차츰 텃세도 덜 받게 되고 의심도 받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인정을 받아 언젠가는 아픔을 잊게 될 것을 기대하였을 심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라면 하나 같은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이 모두가 가야에서 신라로 귀화한 사람들의 고뇌의 한 조각이었을 것이며 불평을 들어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아픔의 치료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미 1300여년 전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날고 뛰는 솜씨를 갖춘들 어려운 일인데 나 같은 글장난이나 하는 자가 무얼 알겠는가. 사람마다 과거 일을 짚어보는 생각이 너무 박제처럼 편협하고 틀에 박힌 것처럼 옹졸한 것 같아서 그나마 몇 안 되는 자료를 뒤적거려 삼국통일의 가장 큰 공신이라 할 수 있는 김유신의 소년시절의 자그마한 가슴속을 뒤적거려 보고 싶었다.
역사를 읽는 시각은 움직이는 현실을 직감하는 방법이 동원되지 못하면 늘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여서 현실과 미래를 상고할 만한 살아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없게 된다. 한낱 조상의 뼈다귀나 훑어보는 일이 고작인 우리의 역사관은 항상 반복이 교차하는 가운데 비슷한 비극도 반복하여 당하고 사는 것을 보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박제가 마치 살아서 힘차게 허공을 박차고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가히 역사를 읽는 맛이 깨소금처럼 맛깔스런 향내가 나게 될 것이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공은 비록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가야인이라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변방에 배치를 받아 서울인 경주를 떠나 살아야 했다. 김유신이 소백산 북쪽 진천땅(당시 고구려와의 국경선)에서 태어난 것을 보더라도 신라 여인인 어머니 만명부인의 고민과 서글픈 객지 생활에 찌든 모습이 떠올려진다.
이미 신라인이 되었지만 본토박이 신라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릴 때부터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영특하기 짝이 없었던 소년 김유신은 이미 이러한 정신적인 고뇌를 극복하기 위한 갈등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어귀 골목에서 또래들에게 둘러싸여 이방인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당한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배짱껏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만명부인의 주도면밀한 감시 감독에 이끌려 신라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을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외지 변방에서 병영살이만 하고 있는 아버지보다는 집요한 신라 여인인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해야 했던 소년 김유신에게는 인생 설계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가야인이면 가야인으로서의 긍지가 있다.
구지봉 아래에 아홉 신선이 모여 나라를 세워 일찍이 남해를 손아귀에 잡고 뒤흔들던 대가야국! 벌레처럼 못난 섬나라 왜놈들을 종 부리듯 호령하며 철갑옷을 입고 우람찬 말을 타고 아홉 마리의 용이 춤을 추는 듯한 구룡일장기(九龍日章旗=왜놈들 해군이 이 깃발을 도용해 쓰고 있음)를 펄럭이며 가야산을 넘어 신라 경주에도 여러 차례 넘나들었던 가야의 무인들. 그들의 핵심 지도자인 구해왕과 그 일족이 신라에 귀화해서 순치(馴致)되어 길들여지고 있는 형편에 이르고 보니 비록 넘치는 패기를 억누를 길 없는 대가야인의 어린 지도자 김유신이지만 거의 손발이 묶인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 만명부인이 보기에도 이 폭탄처럼 위험천만한 소년의 마음을 짐작하고 집요한 가정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가고 남는 것이다.
당시의 천관아가씨는 가야인의 후손이거나 가야를 부흥시켜 보려는 운동권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인 집단을 상징하는 단체의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김유신이 타고 다니던 말은 가야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록 귀화는 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다시 가야를 부흥시켜야 하는 반신라적인 독립정신이 깃든 청년 김유신의 마음 한 구석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김유신이 ‘칼을 들어 사랑하는 말의 머리를 잘랐다’고 한 장면은 곧, 구질구질한 가야의 재건이란 독립운동을 팽개치고 새 나라 신라의 기치아래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보다 더 원대한 꿈을 실현해 보고자 하는 소년의 정신 세계와 같은 것이리라. 즉 그러한 마음 자세가 엿보이는 것은 작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삼국통일, 민족통일의 위업을 관철시킨 한 영웅의 작은 마음의 갈등이 아니었나를 짐작해 보고 싶었던 것이 이 글을 더듬는 나의 작은 관찰이다.
역사책 속에는 그대로 읽을 수 없는 뒷사정이 많이 깔려 있지만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무척 많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가야정신은 김유신이 말의 머리를 잘라 버림으로서 영원히 버려졌고 구룡일장기는 바다 건너에서 지금도 펄럭인다.
그리고 천관사는 가야재건 운동권의 아지트였을 것이라는 은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정으로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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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운동권대통령이 있었다.
지금 그 대통령을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막 퍼 주었다"에 강력한 비난을 쏟고 있다
까닭은 서부독일이 동부독일에다 막 퍼주어 드디어 통일 을 이루어 놓은 것을 보고서
이 운동권대통령도 그런 방법을 썼던 것 같기도 함직 하다.
그러나 이 운동권대통령을 탓 할 문제만 은 아니라고 생각든다
우리의 경우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인듯 싶기 땜문이다.
당시 동독이라는 나라는 퍼주기만 하면 되었지만 지금의 우리 경우는 상대가 워낙 다르기 때문이다.
무조건 흉내보다는 머리좋은 한국사람들 졿은 생각 없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