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를 '뽕짝'이라는 이유 그리고...........
"1934년 고복수의 <타향살이>,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쯤 도달하면 트로트적인 선율에 '쿵짝쿵짝 쿵짝쿵짝' 하는 2박자가 붙게 된다.
나는 7살때 부터 <낙화유수><진주라 천리길>을 들으면 지금도 잊지 않고 좋아 한다.
낙화유수는 노래가사가 자유롭고 노랫말을 마음대로 모아 쓴 것이라 호탕해서 좋고
진주는 왜 그런지 가고싶은 도시였기에 이끌려 이노래의 장면을 그리면서 좋아했다.
진주에는 400년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님은 홀로 살고 계셨다
지금도 임께서 살고 있는 진주에는
사그라질꽃(櫻-사꾸라)은 없다, 한포기도 없었다,
진주사람도 이 가사를 잊어 버렸던 노래지만 이 노래가 노래방에 나오지 않아
직접 찾아가서 노래를 넣어달라고 권했다
<황성옛터>와 <타향살이>는 3박자인데, <목포의 눈물>은 트로트 선율에 2박자가 붙어 전형적인 트로트 형태이다.
지금 우리가 트로트를 '뽕짝'이라고 하는게 바로 이 박자 대문이다.
'붕'하고 베이스를 울리고 '짝'하고 위의 음이 연주되는 것을 '뽕짝뽕짝'이라고 다소 비하적인 발음으로 처음 부르게 된 것이지만 지금은 애칭이 되었다."
뽕짝에 대한, 아니 트로트에 대한 우리 생각을 조금은 고쳐서 우리것으로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중 트로트를 촌스럽다, 수준 낮더로 생각하지만 이건 몰라서 무식한소리다.
트로트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매우 어려운 고급노래였다.
이유는 우리 민족이 그 동안 불렀던 장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민족의 정서를 크게 건드린 그야 말로 고급중 고급의 음악이 되었다
일제식민지와 한국전쟁 때 불려진 트로트는 나라와 가족을 잃은 비극을 잘 드러낸 노래들이 많았는데 이것 땜에도 우리 민족이 다시 용기를 얻은 것은 고마운 음악이 다.
가끔 타령조의 아리랑이 뽕짝과 어우울리면 더욱 멋진 노래랄까?
아리랑을 무르다가 왜놈순사에 달리면 이놈들은 주제소에 앞ㅅ우고 갔다.
해방되고 "붉다"{라는 노래말만 들어도 못부르게 한때가 있었다.
찔래꽃이 약 20년간 못부른 모래이기도 하다. 찔레꽃 붉게피는 남쪽나라 내고향....이 노랫말은 독립군시절에 부르던 군가가아닌 특징의 정서를 담은 특히 애창된 노래 인데 해방이 되고 금지곡이 되었다.
내가 남쪽나라 거제도에 가서 -여차=라는 마을에서 불게피는 찔레곷을 보고 내 마음껏 충무통영 거제 노래방을 누비면서 마음껏 불렀었다.
이때 송x관이 와서 이노래를 함께 불러 주었다.
그리고 그의 노래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이 시들어갈때 리바이벌 시켰었다 통영땅에...
일제때는 어른들은 '순사'라는 단어를 매우 무서워했지.
순사는 일제식민지 용어로 요즘 말로 하면 경찰인데. 친일부역자 첨병이 바로 이들이요.
일제식민지 경찰은 체포 권한이 있었다.
나아가 체포한 사람을 억류해서 가둬놓고 합법적으로 고문할 수 있었다.
가벼운 죄일 경우에는 직접 재판까지 한다. 이것이 즉결 심판이다.
태형령을 통해서 직접 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경찰이 재판하고 집행까지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일제 36년의 거북스럽게 생각되던 시대의 말기 1937년 초여름에 나는 태어 났다
행복이 넘처나는 경상도 예천군 호명 송곡동 동쪽마실
연안이씨 별좌공파 영건소 종가댁 둘재 자재의 맏아들로 .....
왜놈들이 중일전쟁을 이르키고도 모자라 남경을 살륙하고 중국전체를 공습으로 피바다를 이루던 때다
이즈음 세계는 그야말로 최신의 무기와 전약으로 독일과 이태리는 유럽전체중 겨우 영국본토만 남긴체 장악하였고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 침략구실을 빌미로 중국과 동남아전체에 악마의 발굽을 드밀었다.
내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라 물렀다)에 입학하면서 일본말로 이름을 대어야 했는데
"나마헤노 난데스가?" 하고 내 이름을 물으면
"나는 이관희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칙쇼!"라는 꾸중만 날라왔다.
겨우
"니강끼데스"라고 대답해서 입학했다 영문을 모랐지만 일본이라는 존재를 알듯 말듯한 나이가 된것 같다
그때까지 우리집은 창씨를 않한 모양이다.
추운 어느날 아침에 학교 운동장에서 얻은 것은 찰랑달라붙는 고무공이다.
그리고 한입에 들어가기가 좀 크다고 느껴지는 큼직한 사탕이 덴모헤이가(천황폐하) 선물이라했다.
교실에서는 서로 일본말을 써야 한다고 했지만 서투른 사람은 이름이 적히고 그날 많이 실수한 사람이 청소를 해야했고 나는 늘 변소(화장실)를 청소하여야했다.
내가 가장 애써 부르는 노래가 있다.
학교 가는 아침에 군대처럼 줄을 서서 따라가며 부른다
도무지 뜻은 모르지만 불렀다( )안에는 나중에 알게 된 뜻이다)
"덴니가와리데 후기오우쯔(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친다).
주유무소오노 와가헤이와(충용무쌍한 우리 병사는)." ???다음은 잊었다
지금도 냐 혼자 웃는 일이 있다.
라디오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걸까?
유성기 속 어디에 여자가 잠자고 있는가?
집에는 나무와 헝겁(걸래쪽같은 걸로 감싼 소리나는 것과 한쪽에 손잡이를 돌리면 노래가 나오는 기계도 있었다
이것을 라디오라고 부르고 돌리는 것은 유성기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어릴 적 라디오에 사람이 숨은 줄 알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라디오는 제일 싼게 60원, 고급형은 1000원 정도 했습니다. 당시 전문직공 하루 임금이 1원이니, 왠만한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한 것이지요.
군사정권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방송사를 가장 먼저 장악하고 방송통폐합을 한 것도 여론을 통제하기 위함이였듯이
일제도 마찬가지로 전시체제로 치닫던 1937년부터 라디오를 통해 궁성요배, 황국신민체조(국민건강체조), 조선인 묵념 시간과 신체를 통제했다.
이같은 일제의 잔제는 자금도 남아있다.
이른바 국기하강식이 예입니다. 길가다가 국기하강식을 하면 길에 멈췄던 일이 생각나는 분들 많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다.
철이좀 들었다고 생각되는 나이 50이 된 이후,
늦게 알았지만
민족의 바탕이 되는 조직이 씨족들 마다 갖고 있는 족보가 있고 이것은 곧 씨족과 씨족끼리를 연결한다는 것이다.
이는 민족을 이르는 끼족 즉 종족을 바탕으로하는 가장 구체적인 민족의 명부인걸 알았다
민족의 바탕은 종족이요 종족을 지탱하는 조직은 곧 종중이라는 것,
한민족
그 기초를 보면 가정을 이어주는 것이고 가정이모여 씨족을 형성하는 것이고 족보속에 혼인관계는 곧 씨족간의
유대를 이어주는 조직력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아직도 족보를 옛날 캐캐묵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곧 무식한 것임을 알았고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개도 족보를 따지는 오늘날 사람의 족보를 갖인민족은 우리민족이라는 것 참으로 보물이 아닌가?
내가 신문을 일찌기 일게 되었도 한글도 일제때 엄버님이 그르켜 주셔서 배웠다
하루아침에 배운것이다. 종아리를 걷게 하시고 싸리나무휫초리를 옆에두신무 명주실로 문고리에 걸어 놓고
동내에 나가서 놀라거던 벼락박에 싸 놓은 글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가를 일고 외우라는 것인데
나는 놀러가고 싶은 마임이 앞서서인지 오전주에 다 외워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한글로 된 신문보는 것은 보통이리였다 한문이 조금섞여도 읽었다.
한문에서 육서(六書)부터 알면 천자문이나 소학이나 동몽선습을 읽지 않아도 시전 서전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이런 분야에서는 나자신도 모르지만 많이 알았던 것 같다
신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도 처음에는 한글과 한문을 섞었었다가 차츰 일본말로 변해갔다
동아 조산이 정말 민족지일까
<조선일보>는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초까지는 일제에 저항하고. <동아일보>도 비슷하집만.
<조선일보>는 문자보급운동, <동아일보>는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월남 이상재 선생과 안재홍, 조만식 선생이 사장으로 있을 때는 <조선일보>에 관여하는 이들이 신간회를 결성했다.
하지만 계초 방응모가 1933년 사주가 되면서 <조선일보>는 변절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 <조선일보>는 '민족지'라고 자랑하지만 방응모 시대가 아니라 이상재, 안재홍, 조만식 사장때가 민족지였고.
지금은 '수구 찌라시'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동아나 조선ㅁ이나 신문이란 신문은 대개 재벌이 장ㅇ낙하고 있고 자제 되지 못한 기사로 가득하고 보니 노인들을 제외한 대다수 젊은 국민들은 이들을 멀리하는 탓일 것이다.
일제, 조선 민중 땅과 정신을 빼앗아 간 철도 건설
조선인들의 눈물과 고통으로 부설한 철도가 당시 조선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소개한다면.
조선 사람의 땅을 빼앗고, 강제로 공사장에 동원해서 만든 철도를 건설하고,
지금 일본 우익은 이런 것을 두고 일제가 조선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고 말하지만 경북 안동에 가보면 당시 임시정부대통령에 계신 이상룡선생댁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철도를 놓았는데 이당시 안동이 선비의 마을이라고 하지만 꼼작 달싹도 못하고 지금도 그모양 그대로 있는 것은 곧 민족의정기를 빼았아 갔다고 할 수있다.
민족이 정기(精氣)가 무너지면 민족의기력이 무너진다.
2012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100년 전 조선민중들 삶과 욕망이 별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현대 문명이 더 욕망이 찌들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가 100년 전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