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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돈

강등

작성자도니 윤형돈|작성시간26.06.13|조회수18 목록 댓글 0

降等의 형이상학

― 준회원으로 내려앉은 어느 노시인의 독백

 

 인생은 오르는 일보다 내려오는 일이 더 어렵다. 우리는 늘 승급을 꿈꾼다. 학교에서는 진급을, 직장에서는 승진을, 문학에서는 인정과 명예를 바란다. 그러나 어느 날 뜻밖에도 나는 강등(降等)이라는 단어를 삶의 한복판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어떤 글은 비판으로 읽히고, 어떤 글은 비방으로 읽힌다. 어떤 문제 제기는 애정 어린 충고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폄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해석은 늘 읽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해석이 권력이 될 때, 말은 때때로 족쇄가 된다.

나는 어느 문학단체에서 SNS 사용 중지 처분을 받고, 정회원에서 준회원으로 강등되는 징계를 받았다. 이유는 비방과 폄훼라는 것이었다. 내게는 문제 제기였고 의견 개진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품격을 훼손한 언어로 읽혔다. 그 옳고 그름을 떠나, 통보를 받던 날의 허탈함은 오래 남았다.

한순간에 회원의 등급은 내려갔다. 명찰의 글자가 바뀌고, 소속의 위상도 달라졌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강등되는 것은 신분일까, 아니면 자존심일까.

젊은 날의 나는 억울함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변명하고 항변하며 세상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되었다. 인생에는 법적 판결보다 더 무거운 것이 있고, 조직의 평가보다 더 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양심 앞에 서는 일이다.

산은 높이 올라갈수록 바람을 많이 맞는다. 나무도 가장 높은 가지가 먼저 흔들린다. 공동체 안에서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때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모든 발언에는 대가가 따른다. 때로는 박수가, 때로는 징계가 따른다.

그러나 강등은 반드시 추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왔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생명을 살린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성숙은 종종 하강의 형태를 띤다.

정회원에서 준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문학까지 강등되는 것은 아니다. 회원증의 지위는 낮아질 수 있지만, 문장을 향한 열망까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경험은 문학이란 결국 직함이나 자리보다 인간의 내면을 기록하는 일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돌이켜 보면 문학사는 수많은 강등의 역사였다. 배척당한 시인들, 오해받은 작가들, 시대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상가들. 그들은 조직의 평가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써야 할 문장을 써 냄으로써 살아남았다.

물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서운함이 남아 있다. 비방과 폄훼라는 이름으로 규정된 내 말들이 정말 그뿐이었는지 스스로 묻곤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깨닫는다. 징계는 외부에서 내린 판정이지만, 그 의미를 해석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오늘 나는 강등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 한다. 그것은 추락이 아니라 성찰의 기회이며, 배제가 아니라 자기 성찰의 광장이다. 정회원의 이름은 잃었을지 몰라도, 문학을 향한 마음까지 잃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평가는 회원 등급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살았고, 얼마나 정직하게 글을 썼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세상이 나를 준회원으로 내릴 수는 있어도, 영혼의 품계까지 강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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