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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행정분야

[(전문자료)][분석연표] 캄보디아 정치의 최근 주요사건 (상) (작성: 크메르의 세계)

작성자울트라-노마드|작성시간09.05.18|조회수625 목록 댓글 0

 

   (기사작성) 크메르의 세계

 

 

 

 

 캄보디아 정치의 최근 주요사건 연표 (상)

 

 

 

20세기에 들어와 캄보디아만큼 복잡한 정치적 전개를 보여준 나라는 거의 없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캄보디아 내전은, 다양한 역학구도와 권력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영향은 20세기 말까지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고, 많이 완화된 형태로는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크메르의 세계"는 <캄보디아 정치구조>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현재까지도 캄보디아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최근 30년 간의 정국 변화를 연표로 만들어 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교적 단순화된 방식으로 최근사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사려된다.

 

  

○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시대와 파리평화협정 

 

 

 

사건 비고

 

1978. 12.  2.

 

  

1978. 12. 22.

  

1978.  1.   7.

 

1978.  1. 10.

 

 

 

 

 

 

 

 

 

 

 

 

 

 

 

 

 

  

  

 

 

 

 

  

 

1980년대

 

 

    

 

  

1980년대 중후반

  

1986년

 

1888 7

 

1988 7-8

  

1989년 4월 

 

 

1989년 말

 

 

 

1990 6

 

1991년 

 

 

 

1991 10월 23일

 

  

 

 

전직 크메르 루즈 출신 캄보디아인들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NUFNS)이 결성됨.

 

베트남 군대 12만명이 크메르 루즈 정권 전복을 목표로 캄보디아를 침공.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크메르 루즈 (KR) 정권을 붕괴시킴.

 

KNUFNS 멤버들을 주축으로 하여, 사실상 베트남의 위성정권이었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 수립됨. 이 정권을 "헹 삼린 정권" 혹은 "프놈펜 정권"이라고도 부르며, 이 정권을 통해 2009년 현재 캄보디아 집권당인 "캄보디아 인민당"(CPP)의 주요 인물들이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2009년 1월 7일, 크메르 루즈 정권 타도 30주년 기념일에 모습을 보인 3인의 권력자들이다. 우측으로부터 훈 센 총리, 찌어 심(Chea Sim) 상원의장, 헹 삼린(Heng Samrin) 국회의장이다. 헹 삼린(좌)과 찌어 심(중) 양 의장들의 경우, 이미 KNUFNS에서 각각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았고, 이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수립과 함께 헹 삼린 의장이 당시 국가주석을 맡았고, 찌어 심 의장도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물론 훈 센 총리도 초반부터 두각을 보이다 1985년부터 총리를 맡게 된다. 현재의 캄보디아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시절부터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 AP=연합뉴스)

 

PRK가 사실상 캄보디아 전역을 실효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베트남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던 PRK를 인정해주지 않아서 내전이 계속됨. 국제사회는 시하누크의 푼신펙”(FUNCINFEC)과 손 산의 크메르 민족해방전선”(KPNLF), 그리고 크메르 루즈 반군이 연합해 결성한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CGDK)를 지지하고 있었다.

 

냉전체제 해체 물결과 더불어 캄보디아 평화협상 분위기가 조성됨.

 

베트남(하노이) 측이 최초의 철군 계획을 발표.

 

캄보디아 평화를 위한 최초의 회의 <자카르타 회의>

 

<파리국제회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 "캄보디아국"(State of Cambodia: SOC)으로 개칭하고, 새로운 국기를 제정하는 등 이미지 변신에 노력.  

 

캄보디아 내에서 베트남의 마지막 군대 철수. 베트남은 국내의 혼란에 몰두하던 소련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졌고, 크메르 루즈를 지원하던 중국과의 관계개선도 필요했음.

 

<캄보디아 문제 도쿄회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의 사실 상 최고권력기관이었던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이 "캄보디아 인민당"(CPP: 현재의 캄보디아 집권당)으로 개명하고 새로운 이미지 쇄신에 나섬.  

 

분쟁 중이던 캄보디아 내 4개 정파 및 관련국들이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하여 협정이 체결됨. 이로써 20년 이상 지속된 내전이 사실 상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 협정은 새로운 총선을 통해 민주정부가 탄생할 때까지의 과도기 동안 UN에 주요한 통치권들을 이양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했다.

 

 

 

 

○ UNTAC 시대에서 신정부가 출범하기까지 

 

  

 

사건 비고

 

1991 10 23

 

1991 10

 

1991 11

 

 

 

 

  

 

 

 

1992 2

 

 

 

1992 3

 

  

 

1993년 4월 

 

 

1993 5

 

 

 

 

 

 

 

 

1993년 9월 24일 

 

 

 

 

 

 

 

1993년 11월 15일

            -12월31일 

 

 

파리평화협정조인.

 

국제연합 캄보디아 평화유지 선발대”(UNIMAC) 창설

 

캄보디아 국가최고평의회”(Supreme National Council of Cambodia: SNC) 결성.  시하누크 공을 의장으로 선임하고 각 정파의 대표자들로 위원을 선임. 대부분 정파의 위원들이 프놈펜으로 입국함.

 

동일한 시기에 UNIMAC도 캄보디아 입국. 각 정파들 사이의 연락업무 및 질서유지, 휴전상태 유지, 정파별 군대의 무장해제, 37만명에 이르는 난민 귀환작전, 지뢰탐사 등 수행. UNIMAC의 총 인원은 최대 1,200명 정도까지 되었다.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 창설. 이 조직은 UN 사무총장 특별대표인 아카시 야스시(일본)가 이끌었고, 기구 내 군 사령관은 존 샌더슨 중장(호주)이었다.

 

UNIMACUNTAC에 흡수되고, UNTAC이 본격적인 활동. 외국에서 온 군경이 약 2만명, 민간인 직원이 약 2,500명 정도의 규모(총 예산: 15억 달러). 선거를 준비하고 국가재건의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을 함.

 

크메르 루즈가 수백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 내에 불법으로 거주하고 있다면서, 프놈펜 사무소를 폐쇄하고 평화협정체제에서 탈퇴를 선언.

 

최초의 총선거 실시. 하지만 무장해제에 동의하지 않고 빠져나간 크메르 루즈(KR)는 이 선거를 보이콧해, 자신들의 장악지역(전국의 10-15% 면적, 인구 6%)에서 선거참여를 방해.

 

전체 유권자 90% 이상이 참여해 성공적으로 치뤄짐. 선거결과는 "푼신펙당"(FUNCINFEC: 이 때는 시하누크의 아들 라나릿[라나리드] 왕자가 이끔)이 45.5%(58석)의 득표율로 제1당, "캄보디아 인민당"(CPP훈 센)이 51석을 얻어 제2당, "불교자유민주당"(BLDP)이 제3당이 되었다.

 

선거에서 당선된 "제헌의회" 의원들이 만든 "캄보디아 왕국 헌법"이 선포됨. 헌법 선포 후 "제헌의회"는 "국회"(국민회의)로 전환되어 임기를 시작함. 시하누크 국왕이 왕국 국왕으로 추대되어 재즉위함. 내각신임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 확보를 위해, 제1당인 FUNCINFEC과 제2당인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연정을 구성해 집권을 했고, 노로돔 라나릿 왕자(푼신펙 당수)가 제1총리에, 그리고 훈 센(CPP 당수)가 제2총리에 취임해 공동으로 정부를 이끌었다.

 

UNTAC이 임무를 종료하고 단계적으로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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