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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행정분야

[(전문자료)][분석연표] 캄보디아 정치의 최근 주요사건 (하) (작성: 크메르의 세계)

작성자울트라-노마드|작성시간09.05.18|조회수451 목록 댓글 0

 

   (기사작성) 크메르의 세계

 

 

(바로가기) 이 기사의 상편을 먼저 읽으려면 여기를 클릭

 

 

 

 캄보디아 정치의 최근 주요사건 연표 (하)

  

 

20세기에 들어와 캄보디아만큼 복잡한 정치적 전개를 보여준 나라는 거의 없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캄보디아 내전은, 다양한 역학구도와 권력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영향은 20세기 말까지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고, 많이 완화된 형태로는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크메르의 세계"는 <캄보디아 정치구조>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현재까지도 캄보디아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최근 30년 간의 정국 변화를 연표로 만들어 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교적 단순화된 방식으로 최근사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사려된다.

    

 

○ UNTAC 시대에서 신정부가 출범하기까지 

   (이 부분은 상편의 마지막과 동일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중복 게시함)

 

 

사건 비고

 

1991 10 23

 

1991 10

 

1991 11

 

 

 

 

  

 

 

 

1992 2

 

 

 

1992 3

 

  

 

1993년 4월 

 

 

1993 5

 

 

 

 

 

 

 

 

1993년 9월 24일 

 

 

 

 

 

 

 

1993년 11월 15일

            -12월31일 

 

 

파리평화협정조인.

 

국제연합 캄보디아 평화유지 선발대”(UNIMAC) 창설

 

캄보디아 국가최고평의회”(Supreme National Council of Cambodia: SNC) 결성.  시하누크 공을 의장으로 선임하고 각 정파의 대표자들로 위원을 선임. 대부분 정파의 위원들이 프놈펜으로 입국함.

 

동일한 시기에 UNIMAC도 캄보디아 입국. 각 정파들 사이의 연락업무 및 질서유지, 휴전상태 유지, 정파별 군대의 무장해제, 37만명에 이르는 난민 귀환작전, 지뢰탐사 등 수행. UNIMAC의 총 인원은 최대 1,200명 정도까지 되었다.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 창설. 이 조직은 UN 사무총장 특별대표인 아카시 야스시(일본)가 이끌었고, 기구 내 군 사령관은 존 샌더슨 중장(호주)이었다.

 

UNIMACUNTAC에 흡수되고, UNTAC이 본격적인 활동. 외국에서 온 군경이 약 2만명, 민간인 직원이 약 2,500명 정도의 규모(총 예산: 15억 달러). 선거를 준비하고 국가재건의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을 함.

 

크메르 루즈가 수백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 내에 불법으로 거주하고 있다면서, 프놈펜 사무소를 폐쇄하고 평화협정체제에서 탈퇴를 선언.

 

최초의 총선거 실시. 하지만 무장해제에 동의하지 않고 빠져나간 크메르 루즈(KR)는 이 선거를 보이콧해, 자신들의 장악지역(전국의 10-15% 면적, 인구 6%)에서 선거참여를 방해.

 

전체 유권자 90% 이상이 참여해 성공적으로 치뤄짐. 선거결과는 "푼신펙당"(FUNCINFEC: 이 때는 시하누크의 아들 라나릿[라나리드] 왕자가 이끔)이 45.5%(58석)의 득표율로 제1당, "캄보디아 인민당"(CPP훈 센)이 51석을 얻어 제2당, "불교자유민주당"(BLDP)이 제3당이 되었다.

 

선거에서 당선된 "제헌의회" 의원들이 만든 "캄보디아 왕국 헌법"이 선포됨. 헌법 선포 후 "제헌의회"는 "국회"(국민회의)로 전환되어 임기를 시작함. 시하누크 국왕이 왕국 국왕으로 추대되어 재즉위함. 내각신임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 확보를 위해, 제1당인 FUNCINFEC과 제2당인 CPP가 연정을 구성해 집권을 했고, 노로돔 라나릿 왕자(푼신펙 당수)가 제1총리에, 그리고 훈 센(CPP 당수)가 제2총리에 취임해 공동으로 정부를 이끌었다.

 

UNTAC이 임무를 종료하고 단계적으로 철수.

 

 

 

○ 캄보디아 왕국 신정부 출범 ~  현 재 

  

 

사건 비고

 

1994년 7월 2일

 

 

 

1994년 10월

 

 

 

1994년 10월 

 

 

 

 

 

 

 

 

 

 

 

 

 

 

 

 

 

 

 

 

 

 

 

 

 

 

  

 

 

   

 

1995년 11월 21일

 

 

 

 

1996년 1월 24일

 

 

1996년 8월 

 

1997년 1월  

 

 

1997년 3월 30 

 

 

 

 

 

1997년 4월 15일 

 

 

 

 

 

1997년 6월 

  

 

1997년 7월 5-6일

  

 

 

 

 

 

 

 

 

 

 

 

1997년 8월 25일  

  

 

 

 

 

 

1998년 3월 30일 

 

 

1998년 4월 15일  

 

1998년 7월 

 

 

1998년 7월 26일 

 

 

 

 

 

 

 

 

 

 

1998년 11월 30일 

 

1998년 12월 4일 

 

1998년 12월 25일

  

 

1999년 3월 6일 

 

 

1999년 3월 8일

 

1999년 4월 

 

 

 

  

 

2002년 2월 3일 

 

 

 

2003년 1월 

 

 

2003년 7월  

 

 

 

 

 

 

2003년 11월

 

 

 

 

  

 

2004년 3월 

  

2004년 6월

 

 

2004년 7월 15일 

 

 

 

 

 

2004년 7월말 

  

 

 

 

 

 

 

2004년 10월 6일

  

 

2004년 10월 11일

 

2004년 10월 14일 

 

 

  

2004년 10월 29일 

 

2005년 2월 

  

 

 

 

2006년 2월 10일

  

 

2006년 10월 18일

 

2006년 11월 

  

  

2007년 3월 

  

 

 

2007년 11월 

  

 

 

2007년 12월 18일 

  

 

2008년 7월 27일 

  

 

 

 

 

 

2008년 8월 

  

 

 

 

 

 

 

 

2008년 12월 18일 

  

 

 

 

2009년 2월 17일

 

 

연립정부의 대(對) 크메르루즈 유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차크라퐁 왕자(전 부총리)와 신 송 전 내무장관이 쿱테타(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해외로 도피. 

 

크메르 루즈가 밧덤벙(바탐방) 지역에서 70명 정도의 주민을 납치해 총기를 난사해 50여명 사망. 크메르 루즈는 외교,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가기 시작함.

 

푼신펙당 소속 삼 랑시 재무부장관이 공개적으로 푼신펙당의 부정부패 문제를 비판하자, 노로돔 라나릿 총재는 그를 해임한 후 당적에서 제명시키고, 의원직도 박탈했다. 

 

 

 

현재 캄보디아 야당의 거의 유일한 지도자가 된 삼 랑시 의원의 모습

(사진: AFP, 2008년 8월)

  

 시하누크  국왕의 이복동생인 노로돔 시리웃(시리부드) 왕자(외무장관 역임)가 훈 센 총리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 체포명령을 박았으나, 프랑스로 망명. 망명 중 이루어진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시리웃 왕자는 1996년 말 및 1997년 4월 귀국을 시도했음.

 

캄보디아 정부의 대부분 부처들의 조직법이 선포되어, 현재와 유사한 정부부처 편제가 법률을 통해 제도적으로 설치됨.  

 

빠일른(파일린) 지역의 크메르 루즈 분파인 이엥 사리의 부대가 투항 

 

1월부터 라나릿 제1 총리 및 훈 센 제2 총리각 각각 세력 확장을 위해 군소정당과 제휴를 추진하면서 양 정파간 무력시위가 격화되는 등 정국 악화.

 

푼신펙당에서 제명당한 삼 랑시 의원이 새롭게 조직하여 이끌던 "크메르 민족당"(KNP) 집회에 "수류탄 투척사건" 발생. 한 미국인의 중상으로 미국 연방수사대(FBI)까지 조사에 착수해,  훈 센 총리 경호부대인 70여단이 개입된 정황이 포착되었으나 이후 사건조사는 중단됐고, 현재까지 미제사건으로 남음.

 

푼신펙당 소속 일부 중진 인사들이 라나릿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에 불만을 품고, 라나릿 왕자에 대한 불신임 선언.

 

4월 이래로 라나릿-훈 센 측 대립이 격화되어 국회는 의정중단 상태에 있었고, 양측 간 무력시위도 격화되었음.

 

정부측과 협상했다는 이유로 폴 포트가 자신의 오른팔 손 센을 일가족 13명과 함께 처형함.

 

제2차 총선을 앞두고 푼신펙과 CPP간 알력이 극에 달해 양측 간에 화포까지 동원한 무장충돌이 발생. 훈 센 총리 측이 사실상의 쿱테타(쿠테타)를 일으켜 국정을 장악하고, 2명의 장관을 비롯한 수십 명의 FUNCINFEC 당원이 처형당했으며, 수백 명이 투옥됨. 노로돔 라나릿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는 해외로 도피함. 궐석재판을 통해 라나릿 왕자에게 크메르 루즈와 결탁해 무기를 밀반입했다는 혐의로 실형을 선고했다.

 

훈 센은 이 사건이 쿱테다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사태수습을 위해 푼신펙당 소속의 완 프홋 외교부장관을 제1총리에 임명하는 등 노력을 했으나, ASEAN 가입 연기와 UN 의석의 공석화 등이 초래됨. 또한 라나릿 왕자도 해외에 머물며, 국제사회 개입을 주장했고, 태국 국경 부근에서는 푼신펙 계열 군대와 크메르루즈 반군이 미약하나마 계속 저항 중인 상태였음.

 

1998년 제2차 총선을 앞두고, 훈 센 총리는 반대파 정치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허용하고, UN이 이들 정치인 귀환을 모니터 할 수 있도록 허용.

 

크메르 루즈 내 재판에서 폴 포트를 손 센 일가 처형 및 반역죄를 이유로 종신형에 처하고 가택연금함(그는 이미 6월부터 체포상태에 있었다). 이 때부터 따 목(Ta Mok)이 크메르 루즈를 이끔.  

 

시하누크 국왕의 사면 형식을 통해 노로돔 라나릿 왕자가 귀국. 이후 여타 야당 정치인들도 귀환. 

 

연금상태에 있던 폴 포트가 태국 국경의 아지트에서 사망(심장마비).  

 

선거를 앞두고 삼 랑시 당수의 "크메르 민족당"(KNP)이 "삼랑시당"(SRP)으로 당명을 개정함. 

 

제2차 국회의원 총선 실시. 정치폭력과 언론통제 등으로 상당히 혼탁한 선거였으나, 선거결과는 인정됨. 선거결과: 제1당 "캄보디아 인민당"(CPP) 64석, 제2당 "푼신펙당"(FUNCINFEC) 43석, 제3당 "삼랑시당"(SRP) 15석.

 

CPP가 과반수를 넘겼지만 내각신임에 필요한 3부의 2 의석이 안 되어 다시금 CPP와 FUNCINFEC이 연립정부를 구성. 시하누크 국왕이 중재한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훈 센이 단독총리를 맡아 약간 우위를 점했고, FUNCINFEC의 라나릿 왕자가 국회의장, CPP의 찌어 심이 상원의장(국가원수 대행권한)으로 내정.

 

신정부 발족. (당시의 내각 명단 보기)

 

UN 의석 회복 

 

크메르 루즈 지도자 키우 삼판과 누온 찌어가 투항 후 사면을 받고, 이엥 사리가 다스리고 있던 빠일른 자치시에 거주를 허용받음. 

 

크메르 루즈 최후의 지도자 따 목안롱 웨잉에서 체포되어 투옥됨. 이로써 크메르 루즈는 거의 완전한 종말을 고함.

 

헌법 개정 및 상원(Senate) 신설

  

ASEAN 가입. 이후 2002년 8월에는 의장국을 맡기도 함. 캄보디아의 ASEAN 가입으로 국내정치의 안정과 국제사회 복귀를 통한 국정 개혁과 경제발전을 추구함. 2002년 11월 제8차 ASEAN+3 정상회의 및 2003년 6월 제10차 ARF 및 ASEAN PMC 등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국내외적 안정과 발전을 이룩.

 

최초의 지방자치선거 실시. 1,621개 읍,면,동장 및 지방의원 선출. 읍면동장의 경우 CPP가 99% 획득. 선거과정은 정치폭력 등으로 심각하게 혼탁했으나, 각 정파가 선거결과에 승복함. 

 

언론의 오보로 반 태국 감정이 격화되어, 프놈펜의 태국대사관이 군중이 침입하는 반 태국 폭동 발생. 훈 센 총리가 사죄를 표명하고 보상 약속.

 

제3차 국회의원 총선 실시. 선거결과: 제1당 "캄보디아 인민당"(CPP) 73석, 제2당 "푼신펙당"(FUNCINFEC) 26석, 제3당 "삼랑시당"(SRP) 24석. 내각신임 조건인 3분의 2가 되지 못한 훈 센의 CPP는 다시금 FUNCINFEC에 대해 연정을 제의했지만, FUNCINFECSRP가 "민주주의연합"(Alliance of Democrats)을 결성하고, 훈 센 총리 개인을 배제한 3당 연립을 주장해 정국은 교착상태에 빠져버리고 맘.

 

정국교착 상태 타개를 위해, 시하누크 국왕 주재로 3당 수뇌회담이 열렸고, 여기서 "3당 연립"을 합의했으나, "민주주의연합" 측이 "캄보디아 인민당"(CPP)의 "국회의장과 총리 동시표결" 주장을 문제가 있다고 반발하여 신정부 구성 논의는 이후 표류되면서 합의사항도 사장됨. 당시 시하누크 국왕이 두 야당에 대해 훈 센 총리를 인정할 것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도 했음.

 

훈 센-라나릿 영수회담을 통해 CPP와 FUNCINFEC의 2당 연립에 합의.

 

실무회담을 진행해 양당 간 정권직책 배분(6:4) 및 정책강령 조율 후 합의함.

 

내각신임과 국회의장(라나릿) 선임을 동시에 일괄(동시)투표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국회의 투표가 이루어져 선거 후 1년만에 신정부가 출범. 내무부, 국방부, 재정경제부 장관은 각각 2명의 공동 장관을 임명했고, 여타 부처에 대해서는 CPP에서 14명, FUNCINFEC에서 9명의 장관이 임명됐다. (총 26개 부처 2개 청)

 

훈 센 총리가 TV 및 라디오 공식연설을 통해 삼 랑시 당수가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불법 군대를 조직하고 있으며, 그 사령관은 삼랑시당(SRP) 소속 체암 체니라고 발표했다. 당시 삼 랑시 당수는 1997년의 수류탄 공격사건의 배후가 훈 센 총리라고 주장했고, CPP와 FUNCINFEC의 연정구성 과정에서, 노로돔 라나릿 왕자가  CPP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비판하던 중이었다. 곧이어 훈 센 총리와 라나릿 왕자가 공동으로, 삼 랑시 의원과 체아 포치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지병을 앓고 있던 시하누크 국왕이 퇴임 의사를 표명. 상,하원 및 정부 관계자들이 퇴임의사 철회를 요청했으나, 국왕의 의지는 확고했음.

 

급히 "국왕선출위원회 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

 

"국왕선출위원회"가 만장일치로 노로돔 시하모니 왕자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 위원 중에는 훈 센 총리와 시하모니 국왕의 배다른 맏형인 라나릿 왕자도 참가해, 왕위 승계는 원만하게 진행되었음.

 

신 국왕 대관식이 왕궁에서 거행되어 노로돔 시하모니 현 국왕 즉위.

 

국회의 비공개 회의를 통해 삼 랑시 당수 및 체암 체니와 체아 포치 의원에 대해서도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함. 체암 체니는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고, 삼 랑시와 체아 포치 의원은 해외로 도피했으나 궐석재판에서 1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삼 랑시 SRP 당수가 1년 만에 망명생활에서 귀국. 집권당의 사면정책으로 귀환한 것이었다.   

 

"푼신펙당"(FUNCINFEC)이 노로돔 라나릿을 당적에서 제명함. 

  

라나릿 왕자는 "노로돔 라나릿당"(NRP [노로돔 라나리드당])을 창당하고, 총재로 취임. 

 

FUNCINFEC 당사 매각 관련 불법부동산 거래 혐의로, 법원은 노로돔 라나릿 왕자에게 징역 18개월을 선고. 그러나 이미 라나릿은 해외에 머물던 중이었다. 

 

전 크메르 루즈 지도자 이엥 사리(Ieng Sary) 및 그의 아내 이엥 티릿(Ieng Thirith)이 학살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크메르 루즈 국제재판 절차를 기다리게 됨.  

 

라나릿 왕자의 부인이었던 노로돔 마리 왕자비가, 남편을 간통죄로 고발함.

 

제4차 국회의원 총선 실시. 선거결과: 제1당 "캄보디아 인민당"(CPP) 90석,  제2당 "삼랑시당"(SRP) 26석, 기타: "인권당" 3석, "노로돔 라나릿당"(NRP) 2석, "푼신펙당"(FUNCINFEC) 2석.

 

사상 최초로 훈 센 총리의 CPP가 3분의 2 의석 이상을 획득해 단독정부로 출범.  

 

재집권에 성공한 훈 센 총리가 건의하고 시하모니 국왕이 재가하는 형식으로 라나릿 왕자에 대한 사면령이 선포됨.

 

라나릿 왕자는 국왕과 훈 센 총리에 대해 공개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귀국함. 이어 노로돔 시리웃(노도롬 시리부드) 왕자(푼신펙당 사무총장) 및 국회의원이었던 노로돔 위쩨라(노로돔 비체라) 공주도 정계은퇴를 선언하여, 왕가의 인물들은 모두 정계를 은퇴했다. 여기에는 시하누크 전임 국왕의 의중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왕족 26명으로 구성된 "국왕자문위원회"가 설치됨. 의장(의전 상 총리급)은 노로돔 라나릿 왕자가 맡았고, 위원 중에는 라나릿 왕자의 전부인인 노로돔 마리 왕자비를 비롯, 시하누크 전임 국왕의 이복동생 노로돔 시리웃 왕자, 그리고 시소왓 왕가 계통의 시소왓 토미쪼 왕자도 포함되어 있다.

 

크메르루즈 국제재판 시작됨

 

   

 

캄보디아의 최근 정치사를 이끌어온 두 라이벌 노로돔 라나릿 왕자(좌)와 훈 센 총리(우). 1997년에는 서로의 목숨까지 노리며 경쟁했던 이들의 싸움은 2008년 7월 총선 이후 사실상 끝이 났다. 노로돔 라나릿 왕자는 "국왕자문위원회" 의장이라는 상징적 자리를 맡아 이제 조용한 왕실의 어른으로 돌아갔다. 한편 90석의 압도적인 의석을 획득해 절정의 집권기를 맞이한 훈 센 총리는, 부패와 권위주의라는 정권 내부의 적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봉쇄해나갈 지, 그리하여 역사 상 보기 드물게 장기집권 후 평화로운 은퇴가 가능한 권력자가 될 수 있을지, 역사가를 흥미롭게 하는 그는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다. 그 먼 길을 지금 그는 즐기는듯하다. 그러나 크메르 문화와 캄보디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이가 보기엔, 조금 위태로움을 느껴 마음졸이게 된다. 이 사진은 2004년 10월 29일, 노로돔 시하모니 신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사진출처: A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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