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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프놈펜 포스트' 선정 : 2014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작성자울트라-노마드|작성시간14.12.31|조회수485 목록 댓글 3

 

 

 

캄보디아의 주요 영자지 <프놈펜 포스트>(The Phnom Penh Post)가 올해부터 최초로 '캄보디아 10대 뉴스'를 선정해 발표했다. '크메르의 세계'는 프놈펜포스트 선정 캄보디아 10대 뉴스를 한국어로 번역해 공개한다. [크세]

 

 

(보도) The Phnom Penh Post 2014-12-31  (번역) 크메르의 세계

 

 

'프놈펜 포스트' 선정 : 2014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TOP 10 stories of the year  

 

 

올 한해는 의류노동자들에 대한 유혈진압으로 시작됐고, [한 시골마을에서] 대규모 에이즈/HIV 감염사태라는 끔찍한비극으로 끝이 나면서 대단히 드라마틱한 모습을 보였다. 2014년 캄보디아에서는 논란의 합의들이 확정됐고, 역사적인 판결이 내렸고, 오래된 문제점들이 새롭게 부각되기도 했다.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물축제가 재개된 것 정도가 기쁜 뉴스에 속할 것이다. 2015년을 맞이하면서, 본사는 금년에 발생했던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아래와 같이 선정하여 기억하고자 한다.

 

 

 

 

1. 노동자 파업 유혈진압

 

 

 

의류노동자들은 최저임금 160달러를 외쳤지만 노동부가 거부하면서, 2014년 벽두에도 노동자들의 전국적 파업은 이어지고 있었다. 이 파업 시위가 야당의 부정선거 항의시위와 결합하면서 시위의 동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하지만 3일 동안의 폭력사태는 이 시위를 단기적인 사태로 그치게 만들었다.

 

1월2일 프놈펜 뽀센쩌이 구에 위치한 '약진통상'(Yakjin) 의류공장을 지키던 '제911 공수여단' 소속 병력이 노동자들을 구타하고 승려 5인을 포함해 15명의 사람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나중에 석방됐다. 이 날의 폭력사태는 계속되어 '카나디아 산업공단'(Canadia Industrial Park)에서도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했다.

 

공단 내의 '웽스렝 대로'(Veng Sreng Boulevard) 근처에서는 야간에도 소요가 있었고, 시위대가 공권력을 대상으로 화염병과 돌멩이를 투척하면서 살상무기로 무장한 병력이 대응에 나섰다. 1월3일 아침,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최소 5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부상했다. 아마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 1명의 시신은 후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위가 해산된 다음날, 정부는 모든 대중적 집회의 금지령을 내리고 프놈펜의 '프리덤 파크'(Freedom Park)에 있던 농성장에서 야당 지지자들을 해산시켰다. 야당인 '캄보디아 구국당'(CNRP)은 당시 2013년 7월 총선의 결과에 항의하며 이곳에 농성장을 두고 있었다. 이후 8개 노조 연합단체 회장들에게는 파업과 관련하여 선동죄 및 여타 혐의를 적용하는 일이 이어졌다.

 

 

 

 

2. HIV(에이즈) 집단감염의 악몽

 

역주 : '프놈펜 포스트'는 이 항목만은 사진을 첨부하지 않았다.

 

연말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밧덤벙(Battambang, 바탐방) 도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HIV(에이즈) 집단감영 사태가 발생해 공황상태에 빠졌다. 감염자들은 약 200명에 달했고, 어린 아기부터 연로한 스님까지 다양했다.

 

이 사태는 11월 말부터 알려졌다. 상께(Sangke) 군, 로까(Roka) 면, 로까 리에 거주하던 74세의 남성이 HIV 바이러스 양성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날 이후 100명 이상의 주민들이 양성 반응을 보였고, 그 수치는 점점 늘어만 갔다. 최초로 양성 반응을 보인 노인을 비롯하여 최소한 30명은 이 마을에서 "의사" 라고 불리던 옘 쯔로엄(Yem Chroeum)이란 무면허 의사로부터 주사를 맞은 적이 있다고 알려졌다. 일상적으로 옘 쯔로엄에게 진료를 받곤 하던 한 가정의 경우, 가족 16명 중 15명이 감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마을 주민들의 살해 위협이 있자, 쯔로엄은 경찰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경찰에서 주민들을 치료할 때 주사바늘을 재활용했다고 밝혔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증거를 불태워 인멸하도록 지시했다고도 자백했다. 이후 곧 밝혀진 바에 따르면, 쯔로엄은 내전이 끝나기 전 태국 접경지대에 있던 난민촌에서 유엔(UN) 등의 기관들로부터 간호사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전문가들은 의사 한명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킬 수 있었던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하긴 했지만, 이번 사태는 캄보디아 전역에서 행해지는 주사요법을 통한 의료행위의 만연에 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의료 전문가들이 계속해서 조사를 진행하면서, 한때 존경받던 마을 의사가 감옥에 들어갔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엄중한 현실을 다루게 될 어려운 재판이 이 공동체에게 남은 상태에서 연말을 맞이하게 됐다.

 

 

 

 

3. 태국에서 일하던 이주 노동자들의 대규모 귀국

 

 

 

태국에서 이주민들에 대한 적대적 표현들이 증가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태국에서 일하던 캄보디아인 이주노동자들의 귀국이 시작되면서, 동남아시아 최대의 대규모 인구이동으로 발전되는 사태가 있었다.

 

5월22일 태국에서 발생한 쿠테타 이후 며칠 동안, 최초 소수의 귀국자들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대부분 적법한 서류절차가 없이 태국에 갔던 이들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수백명 단위였지만 이후 수많은 사람들로 변했고, 뽀이뻿(Poipet, 포이펫)의 국경검문소를 바로 넘어온 지역에는 캄보디아인 이주노동자들과 그 가족들로 넘쳐났다. 6월20일경, 태국을 탈출하거나 혹은 현지에서 체포돼 강제송환된 캄보디아인들의 수는 2주 동안에 22만5천명이라는 전례없는 규모를 보였다.

 

태국 경찰과 군 당국은 캄보디아인들을 철창이 설치된 정부 트럭들을 이용해 실어날랐지만, 새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이러한 엑소더스 사태를 자신들이 촉발시켰다는 주장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노동자들 중 일부는 강제로 추방됐고 많은 이들은 자발적으로 귀국한 것이지만, 그들 모두 태국 내에서 단속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태국 정부의 합동 단속반은 이주노동자들의 작업장이나 거주지로 들이닥쳤다고 한다. 그리고 캄보디아인 몇명이 총에 맞아 일부가 사망했다는 강력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더욱 더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귀국행렬에 올랐다.

 

하지만 캄보디아 내의 일자리 부족과 노동자들이 중개업자에게 진 빚, 그리고 태국의 고용주들이 돌아올 것을 부탁하는 등의 이유로 귀국했던 노동자 대부분은 곧 태국으로 되돌아갔다. 태국 군사정권도 노동자들의 이주민 지위를 합법화해줄 절차를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7월부터 11월 사이에 태국에서는 거의 68만2천명에 달하는 캄보디아인 이주노동자들이 등록을 마쳤고, 캄보디아 당국의 조력 하에 그들의 국적을 확인하는 절차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4. 여야 대치상황 종결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과 야당인 '캄보디아 구국당'(CNRP)이 7월22일 정치적 해법에 합의하는 서명을 하면서 일년 동안 이어졌던 정치적 교착상태가 타결됐고, 야당이 국회에 등원하는 길도 열렸다. 야당은 2013년 7월 총선 이후 선거결과에 불복하여 국회등원 선서를 하지 않은 채 국회를 비워둔 상태였다.

 

분석가들은 여야 합의가 야당 지도부 검거 사태로 서둘러 처리됐다고 말했다. 야당 지도부 검거 사태는 그보다 며칠 앞서 '프리덤 파크'의 농성장에서 구청 소속 용역 경비원들이 야당 지지자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하하는 폭력사태가 발생하면서부터 시작됐었다. 이 폭력사태로 야당 국회의원 당선자 몇명이 체포됐다가 여야 합의 이후 몇 시간만에 출려났다. 1월에 의류노동자 유혈진압과 야당의 프놈펜 농성장 강제해산 직후부터, 여야간 비밀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은 이미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야 협상 타결의 일환으로서, 여당은 헌법 조항 및 선거법 개정에 동의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NEC) 개혁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여야간 합의안의 세부사항들은 아직까지도 완벽히 확정되진 못하고 있다.

 

8월5일, 야당 국회의원 당선자 55명은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 앞에서 선서를 했다. 11월 말, 야당에서 선관위 개혁 약속 불이행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자, 정부는 야당이 아날로그 TV 방송국을 개설할 수 있는 허가를 내줬다. 또한 CNRP의 삼 랑시(Sam Rainsy) 총재를 총리급 의전 위상으로 격상시켜 소수파 지도자로서의 지위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5. 우리가 고통분담할게 : 캄보디아-호주 난민송환 협정 체결

 

 

호주와 캄보디아는 9월26일 매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협약을 체결했다. 호주 정부는 나우루(Nauru) 군도의 시설을 임대하여 그곳에 수용소를 설치해 자국 해상으로 밀려온 난민 1천명 이상을 수용하고 있는데, 그들을 캄보디아로 재이주시킨다는 것이다.

 

양국 정부는 서명식에서 샴페인 잔을 부딪혔지만 기자들의 질문은 받지 않는 어색한 장면을 연출했다. 난민 정착 협정에 관한 양국간 협상은 줄리 비숍(Julie Bishop) 호주 외무부장관이 2월22일 프놈펜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어, 이후 몇달 만에 타결됐다.

 

협정 체결 직후, 나우루에서는 몇몇 난민들과 망명신청자들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우루에 수용된 난민들의 다수는 정치적 탄압을 피해 중동에서 온 사람들이다. 입에 재갈이 물려진 난민들의 이미지는 호주 정부의 공식적 입장에 냉혹한 대비를 보여준다. 호주 정부는 자국의 "선박 정지"(stop the boats) 정책에 관해 난민들이 호주의 해안가에 당도하려 시도하다 익사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국간 협상의 토대가 되는 최초의 약속들에는 캄보디아 이민국의 확대와 같은 사안들이 포함됐지만, 협정 체결 후에도 구체적인 조치는 취해지지 않고 있다. 12월 초부터 시범사업이 실시될 수도 있다는 예고도 있었지만, 호주의 난민들이 조만간 캄보디아로 이주하게 될 것이란 징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한편, 베트남의 산악 소수부족 몽타냐르(Montagnards) 인 13명이 지난주 종교적 박해를 이유로 캄보디아로 도망쳐온 사실이 보도됐다. 그들은 현재 로따나끼리(Ratanakkiri) 도에 숨어 있고, 망명처를 찾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한 캄보디아 정부의 처리방식 역시 캄보디아 정부의 난민협정 준수 여부에 대한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6. 고3 학생들 졸업자격시험에서 대규모 탈락

 

() 고사장 앞에서 수험생 신원을 확인하는 감독관의 모습

 

12학년(=고3) 국가자격시험에서 커닝과 뇌물이 만연한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 교육부는 금년에 엄격한 금지조치를 시행했다. 이 조치는 오랜 전통을 가진 부정행위를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합격률은 극도로 저조한 상황을 보였다. 이에 훈센(Hun Sen) 총리까지 나서서 재시험을 요청하게 됐다.

 

8월에 실시된 제1차 시험에서 수험생들은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응시했다가 그 중 4분의 3이 불합격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총 9만명이 응시했지만 A등급을 받은 학생은 고작 11명에 지나지 않았다. 2013년에 대략 87%의 수험생이 합격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총리가 나선 덕분에 학생들은 6주 후 재시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정부는 학생들이 특히 저조한 성적을 거뒀던 수학, 화학, 생물학 과목에 대한 보충수업도 지원했다. 하지만 제2차 시험의 합격률 역시 그다지 인상적인 것은 못됐다. 10월에 치뤄진 재시험에서도 18%만이 합격권에 들었다. 제2차 시험에 응시생 중 7천명 이상이 고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금년도 고교졸업자격 시험에서 합격률이 저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급을 통해 재도전하려는 학생들은 별로 없는 상태이다. 대신 그들은 중등학교 졸업장을 포기하거나, 형편이 여유 있는 학생들은 2년 과정의 관련 학위 과정으로 진학했다.

 

 

 

7. 크메르루주 국제법원 제002-1호 사건 종결 : 정권 지도자들에게 종신형 판결

 

() 키우 삼판 피고인

 

8월7일, '크메르루주 국제법원'(ECCC)은 설립 이후 가장 중요한 성과를 기록했다.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의 전직 이데올로그인 누온 찌어(Nuon Chea) 피고인과 국가수반을 지낸 키우 삼판(Khieu Samphan) 피고인에게 반-인도주의 범재 혐의의 유죄를 인정하여 종신형을 언도한 것이다.

 

ECCC는 2010년 악명높은 '뚜올슬렝 보안감옥'(S-21) 소장이었던 깡 껙 이우(Kaing Guek Eav: '돗'[Duch]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종신형)한 바 있다. 하지만 8월에 내려진 '제002-1호 사건'의 판결은 당시 정권의 최고위 지도자들 중 생존한 인물들에 대한 최초의 유죄 선고였다.

 

국제법원은 키우 삼판 피고인이 크메르루주 정권 하에서 실질적인 권한은 별로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긴 했지만, 두 피고인 모두 공동의 범죄 기도에 죄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프놈펜 강제소개령, 몰락한 론 놀(Lon Nol) 정권 관리들의 숙청과 "여타 반인도적 행위들"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검사들과 외국 대사관들, 그리고 피해자와 업서버들은 이 판결을 환영했다. 오랜 기간 이 재판을 모니터해온 히서 리얀(Heather Ryan) 씨는 이 판결에 관해 "국제법원 및 캄보디아에 매우 중요한 날"이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변호인단과 피고인들은 여러 근거들을 제시하며 이 판결에 불복했다. 그들은 항소장에서 350가지 결점을 지적했다. 항소심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국제법원은 두 피고인에 관한 2번째 재판인 '제002-2호' 사건의 증거 심문을 향후 수 주일 이내에 시작할 예정이다.

 

 

 

8. "The 23" : 유혈진압 사태에서 임의로 수감됐던 23인

 

() 구속된 본 뽀우(Voor Pou) 씨가 2014년 5월 프놈펜 지방법원에 출두하고 있다.

 

1월3일 프놈펜에서 정부 군 병력이 시위 중인 의류노동자들에게 총기를 발사해 유혈 진압한 이후, 캄보디아의 인권운동 진영에서는 분노가 촉발됐다. 발포자에 대한 기소요구가 거셌지만, 현재까지 살인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실정이다. 도리어 인권운동가 및 활동가 23명이 사법처리됐다.

 

1월 2일과 3일에 체포된 수감자들은 인근의 군 부대로 끌려갔고, 구타를 당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 중 21명은 이후 깜뽕짬(Kampong Cham) 도에 위치한 '제3 교정센터'(Correctional Centre 3)에 수 개월 동안 구금됐다.

 

이전에 있었던 철거민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유명한 재판들인 '벙꺽 13인'(the Boeung Kak 13)의 재판이나 욤 보파(Yorm Bopha) 씨의 재판과 마찬가지로, '23인'(the 23)의 재판 역시 정치적 동기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조롱을 받았고, 강력한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다.

 

23인 중 많은 이들은 법정진술을 통해 자신들은 단순 참가자로서 구영만 했고, 경찰에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경찰이 자백을 받기 위해 구타를 했다고도 주장했다. 이 재판이 끝나기 전 판사 스스로 증거를 들고 나오는가 하면, 검찰은 새로운 혐의들을 적용하기도 했다. 5월30일, 법원은 23인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지만, 집행유예를 결정하여 피고인들은 자유의 몸이 됐다. 이러한 방식은 시위 참가자들에 대해 적용된 수많은 유사 사례들 중 하나였다.

 

이후 10월이 되자, 많은 이들이 회유를 당하거나 해고를 당했다고 진술하여, 이 판결이 자신들을 의류산업에서 실질적으로 배제하는 효과를 냈다고 밝혔다. 11월에는 철거민 운동가 11명이 유사한 상황에서 구속되어, 2014년 캄보디아의 사법체계는 정치적 간섭에 관한 증언으로 얼룩졌다.

 

 

 

9. 캄보디아 전통 물축제 "본옴뚝" - 4년만의 부활

 

 

11월에는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프놈펜 물축제(본옴뚝)가 부활했다. 2014년에 캄보디아에서 "좋은" 소식이 있다면 이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떤레삽(Tonle Sap) 강변에서는 4년만에 용선경주가 재개됐고, 도박꾼들이 강둑에 모여앉고 도시 전체에 군중이 몰려들었다. 시민들은 지난 2010년 353명이 사망한 비극적인 압사사고 이후 이 사랑받는 이벤트가 부활한 것을 축하했다.

 

작년의 경우, 이 행사는 홍수와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전 국왕 추모를 이유로 취소됐지만, 많은 이들은 2010년 사고 이후 정부가 대처를 잘 하지 못한 것이 오랫 동안 재개되지 못한 이유라고 보고 있다.

 

금년에 진행된 3일 동안의 행사는 과거에 비해 거리의 인파가 줄어들었다. 이는 2010년 사고에서 파생된 두려움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용선경주에 참가한 보트의 수도 적어서 행사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하지만 3일간의 보트 경주와 유쾌한 분위기는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됐다.

 

본지와 인터뷰한 빠오 사오(Pao Sao, 48세) 씨는 고향인 쁘레이 웨잉(Prey Veng) 도에서 상경하게 돼 "매우 기쁘다"면서, "물축제를 정말로 기다렸고, 이곳에 올 수 있어서 기쁘다"고 기분을 표현했다.

 

 

 

10. 반-베트남 감정의 고조

 

 

반-베트남 정서의 분출은 캄보디아에선 오래 된 풍경 중 하나이다. 외관상 금년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새로운 동력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2014년 내내 여러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반-베트남 정서는 결코 대중들의 눈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1월에 웽스렝 대로에서 발생한 유혈진압 당시, 한 베트남 커피숍이 동 시례를 받앗는데, 분노한 폭도들의 공격대상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한달 후에는 베트남계 캄보디아인 남성 한명이 야만적으로 구타당해 사망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요운"(youn, 유은)이라고 외친 게 화근이었다. '요운'이란 말은 일각에서는 베트남인들을 폄훼하여 사용하는 말로 여겨지기도 하며, 야당 집회의 연설 중에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말이다.

 

6월에는 야당 CNRP의 껨 소카(Kem Sokha) 부총재가 반-베트남 정서를 부채질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2010년 물축제 기간 중에 353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사망한 것이 사실은 베트남이 "꾸민" 사고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하여 여러 부문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두달 뒤, 캄보디아는 [외국인 거주자]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가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들에 대한 조사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진 않았지만, 강제송환의 압도적인 비율은 베트남계 사람들이었다.

 

연말이 되자 베트남 정부가 공격 대상이 됐다. '주 캄보디아 베트남 대사관' 대변인이 발언을 통해, 캄보디아에서 '캄푸치아 끄롬'(Kampuchea Krom)이라 불리는 현재의 베트남 남부지역이 오랴 전부터 베트남 영토였다고 말했는데, 이후 여러 주 동안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이어지면서 대사관 밖에서 베트남 국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해당 대변인은 교체됐지만, 2015년을 앞둔 현재까지도 긴장은 저강도로 유지되고 있다.

 

 

 

 

   * 참조용 게시물

 

        - "크메르의 세계 선정 : 2013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 "크메르의 세계 선정 : 2012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 "크메르의 세계 선정 : 2011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 "크메르의 세계 선정 : 2010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 "크메르의 세계 선정 : 2009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 상위화면 "[기사목록] 2014년 캄보디아 정치 외교 안보 진행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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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1.02 올해부터 우리 카페는 <캄보디아 10대 뉴스> 선정을 폐지했는데요..

    마침, <프놈펜포스트>가 올해부터 10대 뉴스를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정 내용에 대체로 동의가 되는군요..
    아마도 우리가 선정했어도 유사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 작성자벨몽도 | 작성시간 15.01.03 크메르어 신문들에서도 10대 뉴스를 선정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다를지도 궁금하군요. 아마도 아시안게임 최초 금메달 소식이 상위권에 들어있지 않을까요? ^^
  • 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1.03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 소식 중요하죠..

    그런데 그 아가씨 내무부 경호국 직원으로 특채됐더군요..
    결국엔 독재정권 하인 노릇 하게되 된거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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