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불교를 통해 본 캄보디아 사람들의 세계관과 윤리관
Ⅰ. 캄보디아 불교(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현황
A. 캄보디아의 역사와 상좌부불교와의 관계 캄보디아는 인도 문화에 뿌리를 둔 불교국가로서 동남아시아에서 매우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톤레삽 호수 주변의 비옥한 메콩강 하류에 가장 먼저 왕국을 건설하였는데 약 9세기경부터 깜부자(Kambuja, 캄푸치아)라고 불리웠다. 오늘날 캄보디아는 톤레삽 호수를 둘러싼 넓고 비옥한 평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대평원에서 캄보디아의 불가사의하고 찬란했던 문명이 만개되었던 것이다.1)
1. 푸난왕조(서기 1-6세기), 첸라왕조(6-9세기 초) 푸난왕조는 ‘부남’왕조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서기 1-6세기에 메콩강 하류에 출현한 최초의 국가이다. 기원후 1세기경 바다에서 약 20마일 떨어진 오늘의 비남 근처에서 건설되었다.2)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 있는 다수의 봉신국가를 거느리며 번영하였고,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한 국가로서 당시 같은 시기에 출현한 베트남 중부의 참파 왕조과 경쟁하였다.3) 그러나 푸난 왕조의 역사 또는 사료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3세기경 이 지역을 여행한 중국인의 기록에 근거해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첸라왕조는 오늘날 크메르족의 조상격인 컴(Khom)족의 왕국으로써, 푸난 왕조의 북쪽에서, 오늘날 남부 라오스의 북부 캄보디아 지역에서 살았다. 산스크리어로 “이싼푸라”라고 불리웠던 이 왕국은 원래 푸난왕국에 종속되었지만, 소위 “태양왕조”치하의 첸라시대에서 푸난에 예속되었던 첸라의 크메르인들이 그 구속에서 벗어나 오히려 푸난인들을 복종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들의 왕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4) 첸라왕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의 형태가 아닌 해상무역을 하는 소규모 세력의 느슨한 형태의 연합을 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635년에 남베트남의 침파왕조를 지배할 정도로 막강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반면 8세기경에는 자뱌의 사일랜드라는 왕국이 강해져서 위협을 받아 한때는 예속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첸라왕조는 790년경에는 독립을 하고 수마트라의 스리워쟈야(Sriwijaya) 왕조에 도전할 정도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자야바르만 1세의 죽음으로 706년에 왕국이 양분되었고, 이후 군소 왕국으로 분열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5)
2. 앙코르 제국 앙코르 제국은 9세기 초에 일어나 15세기 중엽까지 이어진 캄보디아 역사상 최대의 왕국으로 알려진다. 앙코르 제국의 융성기는 12-13세기로(수르바야만 2세와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있었던 때6)) 이때에는 주변의 태국, 미얀마, 베트남 왕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앙크르라는 명칭은 산스크리트어로 도시를 의미하는 “나가라”에서 유래되었다. 11세기경부터 앙코르는 거대왕국의 모습을 갖추었고, 더불어 백성들은 끊임없는 전쟁들과 옹들의 건축열을 통해 요구된 엄청난 노고에 의해 피폐된 시기이기도 하였다.7) 이후 자야바르만 7세 때 앙코르 제국의 영토는 태국,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자야바르만 7세의 선왕인 수리야바르만 2세가 힌두교에 심취하였던 것과 달리 자야바르만 7세는 대승불교를 신봉하였다. 그가 건설한 바욘 사원의 수 많은 얼굴 조각은 관세음보살을 형상화한 거시며, 자신을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고 자처하며 백성들을 믿게 하였다. 이후 자야바르만 7세가 죽자 앙코르 왕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대규모의 신축공사와 태국 북부에서 일어난 수코타이왕조와 전쟁을 치루면서 국력이 약해지고 그 뒤를 이은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와의 전쟁을 통해 앙코르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때의 종교는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로 바뀌었다.8)
3. 후기 상좌부불교 왕국의 위기와 식민시기 13세기로 접어들면서 크메르 제국 주변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국내적으로는 힌두의 의식을 버리고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로부터 전래되었다. 캄보디아는 이후 18세기까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동쪽으로는 베트남과 서쪽으로는 싸얌 왕조의 막강한 두 세력 사이에서 생존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840년에는 쌰암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그 후에 방콕으로 망명했던 캄보디아 왕국의 옹두엉이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후 이 나라는 제한적으로 쌰양 왕조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가 있었다. 18세기 말에는 앙코르 제국의 유적이 있는 씨엠리엡 지역을 포함한 캄보디아 북서쪽을 태국이 차지하였다. 후일 1907년에 반환되었으나 1941-1946년의 5년간 다시 태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베트남 역시 19세기 중엽, 친 베트남파인 왕실을 이용하여 캄보디아를 베트남에 병합시키려고 하였다.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위협을 느낀 노로돔 왕이 명목상의 왕위만 유지하고 통치권을 프랑스에 넘긴다는 협정에 서명함으로서 1861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의도는 인도와 미얀마를 수중에 넣은 영국과 오랫동안 캄보디아와 이웃하여 적대세력인 태국을 견제하고 이들의 동진을 막아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이며 식량자원의 보고인 메콩강 델타지역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9)
4. 크메르 루즈 시대, 이후의 시대 세계대전이 끝난 1954년 5월 초 베트남 디엔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는 베트맹에게 대패하게 되었다. 이의 관련하여 정치적 해결을 위해 인도차이나 당사국인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3개국을 포함한 다자간 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렸고, 이 회담에서 캄보디아는 관련국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어부지리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10) 시하누크 왕은 캄보디아를 국제적 분쟁에서 중립국으로 선언하였고, 이후 신병치료의 목적으로 프랑스에 머물고 있을 때 군부에 의해서 쿠데타가 일어나 1970년 론놀 장군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친미성향의 론놀 장군의 실정11)으로 게릴라전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반군의 크메르 루즈에 의해 축출되었다. 공산주의자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 정권에 의해서 장악된 1975년에서 1979년의 4년 동안 일어난 공산혁명은 적게는 170만명에서 많게는 300만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만들어 내었고, 30만명이라는 난민을 만들어낸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에 유래없는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다.12) 이후 베트남은 캄보디아 내의 친 베트남계를 이용하여 1978년 12월 25일 캄보디아로 진군하여 1979년 1월 크메르 루주 정권은 실각하고 파이린으로 폴 포트와 그의 세력은 도망쳐 그들의 정권은 정복되고 말았다. 이후 캄보디아의 훈센 정부는 1989년 4월 30일 캄보디아 공산당의 국명을 캄보디아 왕국으로 개명하고 탈 공산주의를 추진하여 당명도 캄보디아 인민당(CPP)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B. 캄보디아 불교의 현황 1. 캄보디아 불교의 기초 – 불경의 형성과 상좌부 불교 석가모니 입멸 후 그의 제자들은 경전을 편찬하였다. 그의 입멸 직후에 500명의 제자들이 왕사성(Rajariha)에 모임으로 “제1결집”이 이루어졌고, 이때 불경 “삼장”(Tripitaka) 중의 경장과 율장13)이 제자들의 암송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불멸 후 100년경에 바이샬리에서 700명의 상좌부 장로들의 제2차 결집이 있었다. 이때에 주로 율장이 편집되었다. 비구들은 계율 문제로 큰 분란을 일으켰고 결국 대천(Mahadeva)이라는 비구가 교의를 신설하여 최초의 분열을 겪었다. 그것은 음식물과 금전에 관한 규율을 좀 완화한 내용이었다. 이때 이를 찬성하는 진보파 “대중부”(Mahasamghita)와 이를 반대하는 보수파 “상좌부”(Sthaviravada)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이를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상좌부는 인간 석가모니와 그의 가르침에 중점을 두고 부처는 되지 못해도 아라한(출가승)이 되려고 애쓰는 반면에 대중부는 대중구제에 관심을 보이며 부처는 초자연적 존재의 화신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아라한이 되는 대신, 수행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200년간에 걸쳐 대중부는 9개로, 상좌부는 11개로 분열되어 모두 20개의 부파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소승불교는 석가모니와 같은 부정적인 세계관을 가졌다. 세상은 환상(Illution)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영혼도 아니고 아트만(Atman)도 아니다. 인간은 다만 업보를 따라 윤회 전생하여 나타난 것뿐이기에 행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포기하고 촛불처럼 꺼져버림으로 해탈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영원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모든 운명에 대한 판정은 업(Karma)이 내린다. 그들은 업의 존재 근거에 관해서 묻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존재 근거에 관해서 묻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14)
2. 캄보디아의 승단15) 1855년 이래로 1981년-1991년 사이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곤, 캄보디아 불교 승단은 “머하니꺼이”(Maha Nikaya) 종단16)과 “텀마윳”(Dhammayuttika Nikaya)의 두 종단으로 나뉘어졌다. “머하니꺼이”종단(대파)은 캄보디아 승려 대부분을 대표하는 종단으로 양 종단 중 주류적 종파(승려의 90%)가 되고 있다. 반면 “텀마윳”종단(법집파)은 왕실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규율과 태생적으로 태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로 소규모 군소종단으로 고립되어 있는 실정이다. 캄보디아 승단 내의 근대주의자(modernists)와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s)로 나뉠 수가 있다. 근대주의자란 불교에 대한 서구적 비판에 대하여 현대의 세속적 견문과 상좌부불교의 경전인 빨리어 대장경을 함께 참조하면서, 철학 및 명상과 관련된 불교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그러한 비판에 응답하고자 하는 이들이며, 전통주의자란 승원의 구전전통, 즉 집중적인 명상을 통해 ‘최고의 경지’를 획득하고, 공덕을 짓기 위한 종교적 의식에 중점을 두는 수행방법을 고수하는 이들을 말한다. 캄보디아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머하니꺼이 종단의 보수주의자(전통주의자)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특정한 게송들을 암송하는 공덕으로써 시주를 한 재가 신자나 경제나 사회적 신분 면에서 즉각적인 복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의 텀마윳(법집파) 종단은 머하니꺼이 종단의 근대주의자와 전통주의자의 중간적 입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경전 연구와 그 지식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승려가 사회발전의 참여자로서 참가하는 참여불교의 입장은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학습과 명상, 그리고 시주한 속인들에게 공덕을 짓도록 기회를 부여하는 전통적인 승원의 역할을 더욱 고수하고 있다. 캄보디아 승단의 또 다른 분파로는 “청년 승가”(young monks)운동이 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적극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주로 머하니꺼이 종단 소속의 승려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현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공식적으로 내고 있기도 하다. “청년 승가”는 주로 프놈펜 인근 사찰 소속의 젊은 승려들로 구성되어 있다. 참여불교를 실천한 근대주의자들과 달리, 이들은 승단의 영향력을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는 데 사용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정부의 정책과 부정부패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3. 캄보디아 불교의 특징 역사서에 의한 캄보디아의 특징 중 하나는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의 하나이기도 한 불교의 전래가 국가의 건국보다 앞선다라는 것이다. 캄보디아 국가의 목표는 “국가, 종교, 국왕”이다 캄보디아의 현행 헌법에서는 불교는 국교로 정해두고 있다. 캄보디아인들은 불교문화 유산과 크메르어 그리고 앙코르 왕국의 영광을 바탕으로 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17) 여기에서 캄보디아의 불교를 깊게 연구함으로써 캄보디아인들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민족성을 알고자 한다면, 캄보디아인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불교의 면면을 볼 때, 캄보디아인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캄보디아 불교는 개인의 해탈에 중점을 두고 있고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네악타(neak taa)라는 정령숭배와 조상숭배 등이 혼합되어 있는 복합종교의 형태를 띤다.18) 동남아의 불교는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종교이자 생활이다. 인간이 먹고 자는 행위처럼 불교의식이나 교리의 수행은 일상생활의 한 과정으로 간주되며, 생활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는 개인의 정체성의 표상이자 문화적 연속성의 상징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19) 현대의 캄보디아 불교는 대부분 상좌부 불교 국가가 그러하듯이 캄보디아인들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리고 사후에도 역시 불교 안에서 존재한다고 한다. 태국처럼 모든 남자들이 일생에 한 번은 승려 생활을 하며 결혼은 물론 사후의 문제 등의 풍습이나 축제도 역시 불교식으로 행한다. 이러한 생활 속의 불교는 외세의 힘에서 견뎌냈다. 특히 불교사원은 민중들에게 교육하는 기본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대중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사회적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20) 현대의 캄보디아 불교는 1991년에 캄보디아의 국교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훈센의 프놈펜 정부는 신앙의 자유(헌법 제 6조)를 인정하고, 전국 각지의 사원복구와 승려들의 복권, 복직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를 이용해서 국민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현재는 정치적 격량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불교는 현재 활기를 되찾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21)
Ⅱ. 캄보디아 불교와 캄보디아인의 세계관
A. 상좌부 불교와 캄보디아인의 행동양식 1. 상좌부 불교와 캄보디아인의 행동양식 캄보디아인들은 메콩강 상류지역으로부터 남하하여 메콩강 중류지역인 지금의 평야지대에 거주하면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선사시대 이래 원주민(크메르족, 몬족 등)과 인도계 식민자와 혼혈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사고에는 과거 대제국으로서의 동남아 대륙부 지역을 지배했던 크메르인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있다. 특히 앙코르 와트 등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과 애착이 국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잦은 정치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항상 국기에 앙코르 와트 문양을 배치가 되어 있는데서 그들의 자부심을 알 수가 있다.22) 또한 태국과 미얀마 등 동남아 대륙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인도의 문화의 결합을 통해 독특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으며 중국과 베트남으로부터 유교적 가치질서가 유입됨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과 연장자에 대한 공경 등의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인도로부터는 전통적인 남방문화가 유입되어, 힌두교, 불교 문화의 영향도 강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소승불교의 일종으로 고대 앙코르 왕조 시기에 유입된 “상좌부 불교”(Thravada Buddhism)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95% 이상이 개인의 해탈과 윤회, 구복에 영향을 받고 있는데 특히 오랜 기간 경혐했던 외침, 내전 및 경제난 등의 영향으로 불교가 개인 생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특히 결혼식, 장례식에 반드시 승려의 축원이 필요하며, 장례를 치른 후 유해는 강에 뿌리거나 사찰에 안치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또한 승려가 머무는 사찰은 주민들에 대한 기본 교육과 고민 해결을 담당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23) 캄보디아인들의 삶에서 불교의 승려들은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들은 공식적인 마을의 제전과 의식인 결혼과 장례에 참여한다. 또한 신생아의 작명을 해주거나 혹은 보다 작은 규모의 제사 등에도 참석한다. 하지만 승려들은 이러한 의식들을 직접 집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역할은 주례, 즉 “아짜”(achar)로써 축원과 축복을 내려줄 뿐이다. 크메르의 문화적 전통에서 불교의 승려들은 오늘날의 정신과의사와 유사한 역할을 담당했고, 종종 영혼의 의식에 관한 치유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또한 점성술에도 능하다. 전통적으로 승려들은 크메르 문화와 가치들을 보존하는 담지자이었다. 이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모든 불자(佛子)들이 본받아야만 할 덕스러운 삶의 모습을 제공해왔다. 수세기 동안 시골지역에서는 승려들만이 문자해독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승려들은 사원의 하인들과 행자들, 그리고 새로 수계를 받은 승려들에게 교육을 베풀기도 하였다. 1970년대까지 대부분이 문자해독이 가능한 남성들은 바로 이 승원에서의 교육을 받았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가장에 신당이 없다면 캄보디아인이 아니라고 할 만큼 개인이 살고 있는 주택의 입구나 적당한 장소에 신당을 설치하는데 이는 일부 산간지역에서 점술, 주술, 무속 등의 중심으로 하는 애니미즘이 성행25)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이러한 애니미즘이 불교와 융합되어 현지화로 나타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26) 캄보디아인들의 기질과 가치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캄보디아인들은 겉으로는 친절하나, 그러나 주변 국가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오랜 외침과 내전 등으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심을 가지게 된 것에 그 원인을 둘 수가 있다. 또한 자국 영토를 침공한 적이 있는 베트남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베트남보다는 못하지만 오랫동안 침공과 내정 간섭을 자행한 태국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다. 과거로부터 경제력을 장악한 중국 화교들을 배척하여, 크메르루주 정권시절에는 대량학살을 자행하였다. 또한 식민지령으로 지배했던 프랑스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오랜 역사의 앙금을 잔재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독립 이후 여섯 차례의 국명(國名) 변화 등 ‘소용돌이 정치’를 경험하면서 현대 정치과정의 굴곡과 내전의 상흔이 잠재되어 있으며, 특히 폴포트 시절의 민족적 대학살인 ‘킬링필드’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꺼려하며, 이러한 상흔이 캄보디아인들에게 한(恨)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동남아적 특성으로 자신들을 비하하거나 구박하면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사례가 많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캄보디아인들은 전통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국왕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윗사람에 대한 공경심 등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근대화의 더딘 발전 속에서 민(民)보다 관(官)이 더 우선시 되고, 상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가치관이 지속되어 있다. 특히 사회주의 체제의 영향으로 마을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집단적 의사결정을 존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급격한 서구 문물의 유입과 프놈펜, 씨엠립 등 도시 확대 등으로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공동체의 질서가 약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근대 이후 잦은 정치변동과 내전 속에서 전통적 농경문화와 가부장적 가치체계가 급격하게 약화되고 개인의 생존과 안위가 최우선 순위의 가치관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심한 빈부격차를 유발하여 캄보디아인들 사이에 물질만능 중심의 사고방식이 급격하게 확산되어가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27) 캄보디아인들의 기본적인 생활양식을 이끄는 가치관은 다음과 같다. 과거 문화적 풍습과 가치관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상호 경쟁보다는 공동체 중심의 협력과 상부상조가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개인보다는 집단과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고유의 미풍양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잦은 정치변동과 오랜 내전의 상흔 그리고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이 퇴보하고, 개인 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여타 동남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이 높은 편이며, 특히 오랜 내전과 정치변동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대한 귀속성이나 소속감도 높은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과거 앙코르 왕국에 대한 문화적 자긍심이 캄보디아인들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갖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있어서 불교가 어떻게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승불교를 신봉하고 있어 결혼식 및 장례식에는 반드시 승려의 축원이 필요하며 승려들은 높고 귀한 존재이기에 가급적 신체 접촉은 금해야 하며(특히, 여성들), 불당에 들어갈 때는 모자와 신발을 벗는 것이 원칙으로 한다. 한편, 남성들은 태국이나 라오스, 미얀마 등과 마찬가지로 성인(20세)이 되기까지는 일정 기간 출가하여 불교사원에서 수도생활을 수행하여야 한다. 또한 주요 정치인들, 관료들 및 사업가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표시하는 징표로 거주지 주변 및 고향 등에 사찰을 신축하고, 기증하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다.28)
2. 정령신앙과 캄보디아인의 생활 캄보디아 불교인 상좌부 불교가 도래하기 이전의 정령신앙(animism) 및 바라문교적 요소들과 나란히 혹은 융합된 형태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캄보디아인들은 불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초자연적 세계를 믿고 있다. 병이 들거나 인생의 위기가 닥쳐 초자연적인 도움을 원할 때 캄보디아인들은 다양한 영들을 불러들려 도움을 얻게 해준다고 믿는 종교인들(무속인)을 초빙한다. 다양한 존재물에 거주한다고 믿어지는 토착적 신들을 위한 작은 신당들을 집 안이나 절은 물론이고, 도로가나 숲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캄보디아인들이 존재하다고 믿는 초자연적 존재들에는 몇 종류가 있다. 이 존재들은 설명이 불가능한 소리나 사건을 통해 현시한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존재들이 대표적이다. 첫째, 크마웃(khmoc) : 유령, 둘째, 쁘레앳(pret)과 버이삿(besach) : 특히 사고나 비명행사를 당한 불쾌한 영혼들, 셋째, 아레악(arak) : 특히 여성이며 악령임, 넷째, 네약 따(neak ta) : 비 정신적 사물들을 주재하는 수호령, 다섯째, 믄니엉 프떼아(mneang phteah) : 집의 수호령, 여섯째, 메바(meba) : 조상의 영혼, 일곱째, 머렌 꽁위얼(mrenh kongveal) : 요정을 닮은 가축들의 수호령. 므니얼 프떼아와 머렌 꽁위얼을 제외한 모든 영들은 자신들의 적절한 측면들을 보이게 되어 있으며, 작은 장소에서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현시한다고 한다. 이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이 영들을 위해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다. 만일 음식을 공양하지 않으면, 이 영들은 사람을 위협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만일 살아있는 자식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공양하지 않으면 영혼은 자식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때는 끄루(kru 무속인), 아짜(achar 제관), 트몹(thmup 마술사), 룹 아르악(rup arak 영매, 대체로 남성)의 도움을 받는다. “끄루”는 영들을 달래는 수호물을 만들거나 부적을 적어 신들인 사라믈 보호하는 사람이다. 그는 병을 치유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거나 마술적 환약을 만든다. 전통적으로 캄보디아인들은 수호물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군인들이 총탄을 피하게 해줄 부적을 소유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다. “끄루”는 부적을 만들고 그것과 그 소유자 사이의 초자연적 관계를 만들어주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 통상 “끄루”들은 지역 공동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직 승려였던 경우가 많다. 또 다른 마법적 실행자인 “아짜”는 제의에 관한 전문가이다. 그는 통과의례(life-cycle ceremonies)와 관련한 영혼 숭배를 사찰에서 행할 때, 그 의식을 주관하여 집전한다. 굼 아레악은 영혼을 빙의하여 영계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영매이다. 트몹은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저주)를 가진 마술사를 말한다. “히오 따이어”(haor teay)라 불리는 역술인들도 캄보디아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은 결혼이나 건물 신축, 장기간의 여행과 같은 문제에 대해 상담해준다. 이들은 미래의 일을 예견하고 다양한 활동의 길흉을 점칠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촌락 사람들은 영계 및 그 힘에 대해 민감하다. 1970년대 미국 선교단의 조사는 촌락민들이 이듬해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토착적인 수호령에게 제사를 지냈고, 신임 도지사가 지역의 안위를 위해 고사를 지내고, 병사들은 영매나 무속인들에게서 적군의 총탄을 피할 부적이나 마법 옷을 받았음을 기록한다. 또한 적군과 전투를 치루기 전에 지방 사령관이 향을 피우고 적군을 패퇴시키도록 영혼을 청하기고 하였다. 국가의 안녕과 관련한 다양한 바리문교적 제의들도 통치자 및 바꾸(baku 왕실의 바라문 사제)를 통해 거행되었는데, 1970년 시하누크(Sihanouk)공이 실각한 후 중단되기도 하였다.29)
B. 캄보디아 불교와 캄보디아인의 세계관 : 윤리를 중심으로 1. 캄보디아 불교의 윤리적 전통 불교는 반세속적이며 반문명적인 종교로 여겨져왔다. 그들의 관심사는 세간(世間)이 아니라 출세간(出世間)의 그것이며, 출가(出家)라는 행위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또한 교리에서도 불교는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을 극복하고, 진정한 행복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다고 한다. 또한 불교는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를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존재의 실다운 모습 즉, 실상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단지 연기(緣起)이다. 연기란 빨리어의 Paticca-Samuppada의 역어로 ‘말미암아(Paticca) 일어난다(Samuppada)’, 혹은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란 뜻을 가진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깊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더불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 불변한 실체는 없으며(無我) 항상 흐름 속에 있을(無常)뿐이라는 것이다.30) 서로간의 관계가 중시된다면, 상대방에게 아무렇게나 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즉, 생각하고 배려하게 된다. 아울러 그 관계에 걸맞게 행동하게 된다. 여기에서 가치관으로 출발하는 윤리가 나오며, 도덕이 출발하며, 행동양식이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상좌부 불교의 전통윤리라는 개념은 그 외연이 넓은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동남아 상좌부 불교의 윤리적 개념은 폭넓게 계율, 업과 윤회설, 열반설31) 등으로 설명될 수가 있으며, 좁게는 공덕과 복전사상이 있다. 불교 윤리는 출세간적으로 승가에 귀속된 규율, 즉 계율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일반 대중들에게 윤리적 개념은 업설을 바탕으로 전개된 사회적 규범으로 그 범위를 확정지울 수가 있다. 이 중에서 계율은 승가의 생활을 규범하는 위치에 있으며, 업과 윤회설은 공히 승가와 재가 일반을 아우르는 윤리규범이라고 할 수가 있다. 상좌부 불교는 불교의 계율을 중시한다. 계율 중에 계라는 것은 불교도가 항상 지켜야 할 마음가짐이고, 율이란 상가 내부의 규칙이다. 계율의 의미가 타율적이고 외적인 규범으로서의 율과 자율적이고 내적인 규범으로서의 계와 통합되면서 승가의 자율적인 운영은 물론 그 구성원들 개개인의 삶에서 청정함을 지탱하게 하는 지렛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32) 상좌부 불교의 전통적 윤리체계에서 계율만큼이나 불교의 업설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불교의 업설은 인과응보의 근본적인 교리로서 자업자득을 그 핵심내용으로 한다. 불교의 업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한다는 점과 그에 따른 도덕적 책임과 윤리적 노력을 강조한다. 업설은 인간의 운명이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스스로의 주체적인 노력과 사회적인 구조 및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얼마든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 가능하다. 특히 상좌부 불교의 업설은 붓다와 승가에 대해 보시하고 공양함으로써 현세와 내세의 공덕을 쌓으려는 공덕 지향적 측면이 있다. 재가 신자33)들은 다양한 공덕 행위들을 통해 한편으로는 내세에서 더욱 행복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에서도 더욱 많은 복을 누리고 자신과 가족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란다. 사실 일반 사람들은 내세보다는 현세의 일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덕을 통해 죽음 이후의 행복보다는 우선 눈앞에 당장 놓여 있는 문제가 해결되어 현세에서의 삶이 개선되는 것을 더욱 중시한다. 이와 같이 상좌부 불교는 출가자의 계율적인 삶과 재가 신자들의 공덕축적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의 윤리적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다.
2. 캄보디아인들의 세계관으로서의 윤리관 상좌부 불교의 전통적인 윤리관인 계율과 업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캄보디아는 근대시기까지 츠밥과 속담이라는 두 가지의 독특한 윤리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행위의 규범이라는 뜻을 가진 츠밥(chbap)이다. 츠밥은 전근대시기 캄보디아의 도덕적 규범을 담은 중요한 교훈시 모음이다. 츠밥은 캄보디아 사회에서 14세기부터 발달되었으며34), 또한 문화적 관습에 의거하여 츠밥은 현재까지 크메르 어린이들에게 엄격한 교육을 실시하는데 중요한 교재로 사용되었다.35) 프랑스 식민지 전후로 하여 츠밥은 크메르 언어와 문학을 배우기 위한 중등학교 기본 교육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근대시기에는 츠밥은 주로 불교의 승려들이 신자들에게 도덕적 규범을 가르치기 위해 저술되었다.36) 이런 관점에서 츠밥은 불교사상과 접목되어 일반 대중들이 도덕적 행동과 태도를 유발하도록 고안된 캄보디아 전근대적 사회의 적절한 윤리덕목으로 나타난다.37) 예를 들어 캄보디아 사회의 윤리적 관계성을 설정할 경우에 여성의 덕목(chbap srey), 남성의 덕목(chbap proh), 손자의 덕목(chbap kun cau), 조상의 덕목(chbap baky cas), 유산상속에 관한 덕목(chbap keru) 등이 예시되고 있다. 이 중에서 여성의 덕목은 부모와 남편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거나,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내용으로 적혀있다. 따라서 츠밥은 전근대적인 캄보디아 사회적 윤리전통을 잘 대변하고 있다.38) 윤리적 내용을 담은 츠밥은 널리 알려진 속담들의 출처로 자주 언급된다. 전근대시기 뿐만 아니라 혁명 전의 캄보디아에서는 속담이 매우 존중되어서 어린이 공교육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속담은 독본, 소설, 그리고 츠밥과 같은 필수교육 자료에 많이 산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속담 그 자체가 학습 또는 학교 커리큘럼의 일부분이 되었다. 속담에 관한 크메르 문헌은 속담의 표현 유형에 따라 몇 가지 특정한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올바른 말씀(pheasit와 sopheasit), 장로의 말씀(peak chas), 옛 말씀(peak bauran), 전통적인 말씀(peak tumneay), 그리고 붓다의 말씀과 예언(putthapheasit와 putth tumneay)이 그것이다. 널리 알려진 데로 일부분 속담의 주제는 윤리적 행위에 관련되어 있다. 이 속담들의 기원은 인도 고대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일부는 그 기원이 전적으로 크메르에 있다. 속담에서 찾을 수 있는 굵직한 논의의 주제들은 대체적으로 첫째, 칭찬받는 자질의 찬양과 격려, 둘째, 서툰 자질과 이것이 일으킬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훈계, 셋째, 전통의 존경과 보수주의 경향, 넷째, 지위와 인간관계에 대한 언급, 다섯째, 가정사에서 특별히 여성에 대한 강조, 여섯째, 중용과 업에 대한 불교의 개념, 일곱째, 말과 언어의 힘 등이다. 속담에서 표현된 주제들은 매일 사용하는 말과 일상생활의 경험 속에서 나온다. 속담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쌀 생산, 야생 동물과 가금과 같은 모든 종류의 동물, 식물과 나무, 강과 물고기, 자연적인 현상, 친숙한 지형, 가구들과 같은 일상적인 배경에서 접할 수 있는 친숙한 것들이어서 속담 그 자체가 어느 정도 인간의 행위를 규약 하는 윤리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의 단순성으로 표현되는 이미지의 친숙함은 사회나 개인의 윤리적 행위를 선도하는데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39)
3. 캄보디아인들의 세계관으로서의 현대적인 윤리관 근대시기 캄보디아의 대중적 윤리성을 재고할 경우에는 불교교육기관의 역할을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전근대시기의 캄보디아 교육은 전적으로 승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대시기에 이르러 이러한 불교사원의 교육적 역할이 다소 침체를 가져왔고, 이를 대신하여 새로운 근대적 연구소가 출현하게 되었다.40) 불교연구소의 역할과 더불어 근대시기 캄보디아 대중적 윤리체계의 질서를 확립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근대적 출판물이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진 붓다의 전기를 기술한 근대적 출판물은 이성주의에 접목되어 근대적 가치관을 형성하게 하였다. 이런 배경을 통하여 캄보디아 승가와 승려들은 근대적 사유로 간주되는 이성주의에 입각하여 새로운 불교의 윤리적 자각과 각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불교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붓다의 역사적 삶에 대하여 새로운 강조를 시도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보편적인 진리로서 경장과 율장에 나타난 붓다의 가르침에 집중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근대주의에 입각한 캄보디아 승려들은 경장과 율장에 대한 근대적 각성을 통하여 태국에서 유입된 팔리어 삼장을 크메르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1933년 폐엽경에 의지하는 과거의 전통을 버리고 활자본이나 인쇄본에 의지하여 경전을 이해하였던 사실로부터 그 진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근대적 접근을 통하여 캄보디아 승가는 점차적으로 근대주의에 입각하여 새로운 승가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근대화를 지향했던 승려들은 팔리어 삼장의 해석을 통하여 초기불교의 교리와 수행적 측면을 근대적 가치에 적합하도록 불교경전을 재해석하였는데, 특히 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문헌적으로 시도하였다. 이들은 전근대적 불교에 대한 불신을 뛰어넘어 근대주의에 걸맞는 새로운 불교를 창안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은 잠정적으로 근대주의를 주창했던 승려들에게 서구적 문헌주의에 맞는 경전 해석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하여 신화적 존재로 각인되었던 붓다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전환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신화적 붓다에서 인간적 붓다로의 탈바꿈은 근대시기 캄보디아 개인들의 윤리적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상호주의에 입각한 집단 혹은 공동체 사회의 윤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41) 또한 가톨릭 신부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을 포함한 다양한 서양인들과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라틴어와 영어 그리고 서양의 학문을 배움으로써 얻어진 서양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캄보디아 불교에서 미신 및 주술 등 비불교적 요소들을 제거하는데 있어 주요한 틀을 제공하였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캄보디아 불교에서는 ‘전통주의를 고수하는 자들(buak dharm thmi)’과 ‘근대주의를 주창하는 자들(buak dharm cas)’로 나뉘어 서로 상반된 입장으로 나뉘어졌다.42) 전통주의를 고수하였던 자들은 대부분 “머하니꺼이”(Maha Nikaya) 종단에 소속되었다. “머하니꺼이”(Maha Nikaya) 종단는 20세기 전후까지 캄보디아 전 지역에 골고루 포진되었으며, 타이불교의 영향을 받는 북서 지방의 400개의 사원을 포함하여 대략 2300개의 사원이 이 종파에 소속되었다. 근대시기 “머하니꺼이”(Maha Nikaya) 종단 승려들은 불교경전을 새롭게 연구, 번역, 해석하기보다는 그 문구들을 암송하고 암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반면 근대주의를 적극적으로 신봉하였던 캄보디아 텀마윳 승려들은 태국(시암)의 탐마윳 운동에 영향을 받아 전근대적인 비불교적 유산을 청산하고, 근대주의에 분기되어 캄보디아 불교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불교의 전근대적 유산을 철저하게 부정하였으며 경전근본주의 입각한 철학 및 명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텀마윳”(Dhammayuttika Nikaya) 종단에 소속된 승려들은 팔리어 경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추고 그에 걸맞는 행동규범을 실천함으로써 여타 승려들과 구별되었다. 이들은 1914년 프놈펜에서 새롭게 편집된 서적을 출판하게 되는데, 대체로 상좌부 불교에 대한 교리를 근대적 사유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다. 이들의 최대 목표는 신격화에서 벗어나 인간 붓다의 재건이며, 또한 주술신앙으로부터 정법을 수호하는 불교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상좌부 불교의 원형을 복원시키고자 계율적인 삶을 중시하였다.43) 이러한 캄보디아의 근대불교운동이 사회와 승가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20년대부터 쭈언 낫44)에 의해 크메르 승단 내에 일련의 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쭈언 낫은 경전을 보존함에 있어서 폐엽경에 필사하던 방식을 바꿔 인쇄 작업을 하도록 하였고, 승려들 중에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연구에 매진하도록 하였으며, 승가와 재가 신자 모두에게 윤리적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율장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45) 쭈언 낫이 캄보디아 근대시기까지 유통된 전통적 도덕적 규범을 수집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가띠로께(Gatiloke, 세상의 길)이다. 가띠로께는 불교의 도덕적 규범을 근대화, 즉 합리성 발휘에 초점을 맞춰 간략히 서술한 민담 설화집이다. “가띠(gati)”라는 말은 인생의 길이라는 의미를 취하며 “로께(loke)”는 이 세상을 반영한다. 따라서 가띠로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바른 길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가띠로께 이야기의 대부분은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응축되어 있지만, 더불어 일반적인 캄보디아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가띠로께는 일반 사람들의 도시와 시골 그리고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테마로 등장한다. 또한 승려들의 이야기도 많이 등장하는데, 일반사람들은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승려들의 경고 메시지가 주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가띠로께는 승려들에 의해서 일반 대중에 삶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하여 혹은 행위에 대한 선악의 기준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또한 동물에 관한 우화는 지혜와 자비 혹은 정의에 관련하여 교훈을 주는 형식으로 취하고 있다. 또한 많은 이야기들이 왕과 그이 고관대작에 그릇된 행위를 지적하여 한탄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다른 이야기들은 승려들에게 힌두교의 브라흐만적 요소들로부터 멀리 벗어나도록 경고하는 내용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부에 대한 탐욕과 신비적인 의식과 신앙 그리고 동물을 희생하는 제사주의를 경계하는 내용들이다. 따라서 가띠로께는 근대시기 캄보디아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행동을 윤리적으로 제어하는 아주 실용적인 모델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윤리적 행위를 분별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46) 1) 양승윤 외, 『캄보디아·라오스』 (서울: 한국외국어대출판부, 1999), 27-28. 2) Mayer, Miton, 『동남아사입문』, 김기택 역, (서울: 한국오국어대학교출판부, 1984), 32.5) 양승윤 외, 33-36. 6) Osborne Miton, 『한권에 담은 동남아시아 역사』, 조홍국 역, (서울: 오름출판사, 2000), 31. 7) Weggel Oskar, 247.10) 이우상, 373-374. 11) 론놀 장군의 급진적 우파적 성향, 즉 친미성향으로 베트콩을 몰아내려는 미국에 협조하여 캄보디아 농촌지역의 국경지역을 폭격하도록 국경을 열어줌으로써 캄보디아 인들이 무려 80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다.12) 이우상, 376-377. 폴 포트는 모택동주의 정권을 통해 캄보디아의 농촌 유토피아를 만들 계획이었다. 민족주의, 농민개혁주의라는 크메르 루주의 자찬에도 불구하고 폴 포트 정권은 ‘앙카’라는 강력한 조직을 통해 억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여 반체제 인사뿐만 아니라 무고한 인민들을 강력히 통제, 억압, 희생시켰다. 13) 경장(Sutra-Pitaka)은 다문제일이라고 하는 석가모니의 사촌 형제인 아난(Ananda)의 암송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되며 내용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시편들, 전생 및 출생 신화, 기적들이 포하되어 있으며, 율장(Vinaya-Pitaka)은 지율제일이라고 하는 우바리(Upali)의 암송으로 확립되었으며 내용은 승려 및 승원의 규율이 기록되어 있다. 이동주, 『아시아 종교와 기독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24. 14) 이동주, 『기독교 문서 선교회』,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25-26. 16) “마하 니까야”(Maha Nikaya)는 직역하면 ‘큰 뭉치’로 해석되며, 이 종단은 태국과 캄보디아에 존재하는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의 최대 종파이다. 캄보디아에 있는 “담마윳띠까 니까야”(텀마윳) 종단은 1855년 태국에서 전해져 창종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텀마윳 종단 이외의 승려들은 모두 “머하니꺼이”소속으로 간주된다. 17) 이시영, 『캄보디아의 문화와 종교』 (서울: 열린출판사, 2008), 28. 18) 정영규, 『동남아시아 사회와 문화』 (서울: 율곡출판사, 2003), 148. 19) 양승윤, 422. 20) 정영규, 148. 21) 양승윤 외, 197-198. 22) 국가정보원 편, 『동남아 사회·문화 바로알기 :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편』 “자원·에너지 시리즈 2000-8호”, 85. 23) Ibid., 86-87. 24) 미국 의회도서관, 『국가연구: 캄보디아』(A Country Study: Combodia) 제2장 - 본 자료는 “미국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이 1987년에 발행한 『국가연구: 캄보디아』(A Country Study: Combodia) 제2장을 본인이 가입한 캄보디아 연구 모임인 “크메르의 세계” http://cafe.daum.net/khmer-nomad 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혀둔다. 25) 영혼의 존재를 중시하는 애니미즘의 영향으로 머리를 만지는 것을 금기시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26) 불교국가이면서도 힌두교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각종 양식이나 형태는 힌두교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 27) 국가정보원 편, 88-89. 28) Ibid., 90-91. 29) 미국 의회도서관, 『국가연구: 캄보디아』(A Country Study: Combodia) 제2장에 발췌. 30) 동국대학교 불교교재편찬위원회, 『불교사상의 이해』 (서울: 불교시대사, 1997), 341-342. 31) 소승불교의 특징은 인간은 자기 자신밖에 없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해탈에 이르며, 이 해탈을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교를 소수의 수도승에게 국한시키면서도 많은 의식을 피하고 명상을 강조한다. 결국 소승불교는 보수성이 강하고 구원론에서 힌두교처럼 귀족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석가에서 연유된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체험한 깨달음은 누구든지 지혜를 얻지 못한 자라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지혜와 최대의 금욕과 절제를 하지 않으면 해탈은 불가능한 것이다. 전호진, 『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207-208. 32) 박병기, 『상좌불교 공동체의 계율은 여전히 유효한가』, 불교평론, Vol, 12, No, 3, 2010, 118-120. 배상환, “동남아시아 불교의 전통윤리와 그 근대적 적응-캄보디아 불교를 중심으로”, (서울: 대각사상, 2011), 379. 재인용. 33) 출가하지 않는 일반적인 신도들을 가르킨다. 34) May Ebihara, “Societal Organization in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y Combodia,” Journal of southeast Asian Studies, Vol.15, No.2, 1984, 280. Ibid., 380. 재인용. 35) Marie Alexandrine Martin, Translated by Mark W. Mcleod, Combodia: A Shattered Society,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1994, 10. Ibid., 380. 재인용. 36) Ibid., 346. Ibid., 380. 재인용. 37) Rebecca Surtees, Negotiating Violence and Non-violence in Cambodian Marriages, Ed., Caroline Sweetman, Oxfam GB, Gender, Development ans Marriage, Vol.11, Issue 2, 2003, 32. Ibid., 380. 재인용. 38) Mona Lilja, Power, Resistance and Women Politicians in Cambodia: Discourses of Emancipation, Nordic Institute of Asian Studies, 2008, 70. Ibid., 381. 재인용. 39) May Ebihara, Carol Anne Mortland, Judy Ledgerwood, Cambodian Culture Since 1975: Homeland and Exile, Cornell University, 1994, 31-38. Ibid., 382. 재인용. 40) 1921년 시소왓(Sisovat) 당시 국왕이 불교학연구소의 전신이 되는 크메르도서관을 설립하였고, 이후 1925년에 왕립도서관(Preah Raj Bannalai)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왕립도서관을 모태로 1930년에는 시소왓 국왕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불교연구를 담당하는 프랑스의 극동연구소(Ecolle Francaise D’extreme-Orient: EFEO)가 설립되었다. 이와 별도로 1914년 프놈펜에 팔리어를 전문적으로 수학하는 고등교육기관인 살라팔리(salapali)연구소가 개소되었다.이 기관은 캄보디아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교수법을 도입하여 캄보디아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Ibid., 384 41) Ibid., 387-388. 42) Ian Harris, Sangha Groupings in Cambodia, Buddhist Studies Review, UK Association for Buddhist Studies, 18, 2001, 78. Ibid., 389. 재인용. 43) Anne Ruth Hansen, How to Behave: Buddhism and Modernity in Colonial Cambodia, 1860-1930, University of Hawai’i Press, Honolulu, 2007, 3. Ibid., 391. 재인용. 44) 정식 이름은 “섬다잇 성까 리엇 쩌딴냐노 쭈온 낫”(Samdech Sangha Raja Jhotanaon Chuon Nath; 1883. 3.1 – 1969. 9.25)이다. 쭈언 낫 스님은 캄보디아 머하니꺼이 종단의 대종사(승왕)이었다. 그의 치적 중 가장 큰 것은 크메르어 사전을 편찬하여 크메르어의 보존에 기여한 것이다. 그는 크메르 불교 승단 개혁운동의 지도자였다. 이 개혁운동은 빨리어(Pali) 경전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에 기반을 둔 것으로, 합리적이고 학문적인 경향의 불교를 지향하였다. 이 새로운 운동은 “담미윳ㄸ카 니까야”(Dhammayuttika Nikaya, 텀마윳)란 명칭으로 불렸고, 20세기 초반에 젊은 캄보디아 승려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크메르어를 통한 정체성과 문화를 고양하고 캄보디아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http://cafe.daum.net/khmer-nomad 에서 발췌. 45) 상좌부 불교에서의 윤리적 생활의 당위성은 출가승이나 재가 신자에게나 모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상좌부 불교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있어서 반드시 출가승이 될 필요가 없다라고 가르치지만 재가 신자들의 높은 정신적 경지인 열반에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출가승들과 마찬가지로 열반에 이른 재가 신자들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로서 청정한 행을 닦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재가의 몸이지만 불타의 가르침의 완전성을 부각시키는 출가지향적인 태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밝히고 있다. 김승혜, “초기 불교의 출가에 대한 종교학적 이해 – 상좌부 불교의 경전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문학석사 논문, 1991), 22-27. 46) 배상환, 393-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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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hop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2.07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지속적으로 좋은 자료를 함께 공유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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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시간 15.02.08 출판본으로 하기 위해서는
고유명사나 외래어들의 표기법 통일 등..
교정과 윤문이 좀 더 필요하겠습니다만..
캄보디아 불교에 관해서는
워낙에 자료가 별로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해외의 최근 연구결과들까지 인용하여 소개해주심으로써
무척 유익한 글이 됐다고 생각되네요.
앞으로도 많은 성과가 있으시길 빌겠습니다. -
작성자임희모 작성시간 15.02.12 불교 종교문화에서 살고 있는 캄보디아인들의 삶과 윤리를 소개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최신 자료는 Alexandra Kent and David Chandler eds, People of Virtue: Reconfiguring Religion, Power and Moral Order in Cambodia Today, Copenhagen: Nordic Institute of Asian Studies, 2008. 입니다. 2012년엔가 프놈펜펜에서 샀는데 온라인 구매처는 www.niaspress.dk에서 확인해보셔요. 캄보디아 종교문화와 캄보디아인들의 삶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에 정진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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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시간 15.02.12 좋은 자료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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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hop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2.12 자료 감사드립니다. 참조해서 좋은 결과를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