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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권

[(전문자료)][인물] 캄보디아 여성인권의 진주 : 무 소쿠 여사

작성자울트라-노마드|작성시간09.12.04|조회수260 목록 댓글 2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오늘날 캄보디아 정치를 살펴보면, 아마도 다음의 세 사람을 가장 대표적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전 재정경제부 장관 출신으로 제1 야당 삼랑시당(SRP)의 총재인 삼 랑시(Sam Rainsy) 의원.

(2) 장기간 풀뿌리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일해온 인권당(HRP) 총재 껨 소카(Kem Sokha) 의원.

(3) 장기간 여성문제 및 인신매매와 투쟁해온 전 여성부 장관이자 SRP 국회의원인 무 서쿠 의원.

 

이 중 무 서쿠 의원은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로서, 현역 국회의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훈 센 총리를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아, 캄보디아의 언론탄압에 대한 국내외적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 관련기사 및 가두시위 동영상 바로가기]

 

본 정보는 현재 캄보디아의 가장 대표적 여성 지도자이자 2005년도 노벨평화상 공동 후보자였던 무 서쿠 의원에 관한 인물정보들로, "크메르의 세계"가 수집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캄보디아 여성인권의 진주 : 무 소쿠 여사

 

 

 

(자료출처) 오메가 통합적 학문 연구원(Omega Institute for Holistic Studies)/ 뉴욕

 

 

무 소쿠 

 

Sochua Mu

 

 

(크메르의 세계 추가사진) 가가호호 방문을 통해 주부들과 대화 중인 국회의원 무 서쿠 여사. [http://musochua.org]

 

무 서쿠 의원은 1998-2004년 사이의 "제2기 캄보디아 왕립정부 내각"에서 단 2명밖에 없는 여성 각료 중 1명이었다(역주: 다른 한 명은 문화예술부 장관이었던 보파 데위 공주였음). 그녀는 사회적 행동주의자이자 선출직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캄보디아 및 세계 여권 신장을 위해 바친 전국적 조직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캄보디아 여성 운동의 주요한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3년 유엔(UN)이 후원한 최초의 총선이 치뤄질 때, 그녀는 비폭력과 평화를 주장하며 수천 명의 승려 및 여성수행자(돈찌)가 참여한 가두행진을 선도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노벨평화상 공동 후보자로 지명되기도 했다.

 

무 서쿠 의원은 프놈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1970년대 초부터 베트남전쟁의 영향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캄보디아 상황으로 인해, 이후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난민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들은 탈출하지 못했고,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거의 4분의 1이 희생당했다고 알려진 "크메르루즈" 정권 하의 학살 광풍 속에서 실종됐다. 이후 무 서쿠는 18년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그녀는 미국의 버클리대학에서 심리학 및 사회복지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했다. 이후 캄보디아로 돌아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의 재건에 참여했다.

 

무 서쿠 의원은 2005년에 힐러리 클린턴(Hilary Rodham Clinton) 상원의원이 공동으로 창립한 "바이탈 보이스 재단"(Vital Voices Foundation)으로부터 "올해의 지도자 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 그녀는 12,000명의 여성들을 지방선거에 출마시켜 그 중 900명을 당선시켰고, 이들이 여전히 캄보디아 풀뿌리 차원의 여성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같은 해 그녀는 국회에서 "가정폭력 방지법"(Prevention of Domestic Violence Bill)도 발의해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부부간 강간 및 미성년자 추행에 대하여 무거운 벌칙을 가하도록 되어 있다.

 

(크메르의 세계 추가사진) 2008년 여름 무 서쿠 여사는 장거리 캠페인 행진을 벌였다. [http://musochua.org]

 

무 서쿠 여사의 캄보디아 내 활동들에는 남성들로 하여금 가정폭력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고, HIV 및 에이즈(AIDS)의 전파를 예방하고자 한 것도 포함된다. 또한 여성 기업가의 권익 증진, 여성 노동자들에게 공정한 급료와 노동조건이 제공할 수 있도록 <노동법>이 제대로 가동되도록 만드는 일, 소외받은 공동체들에 학교 및 보건의료체계, 그리고 위생시설과 고용기회를 제공하는 일 등도 포함된다.

 

무 서쿠 여사는 또한 "여성보훈부" 장관에 임명되어 동남아시아 역내 인신매매 근절을 위해 노력했고, 현재는 관련 재단인 "캄보디아의 영혼"(Soul of Cambodia)을 창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1989년 이래로 무 서쿠 여사는 캄보디아의 부활을 위해 적극적이고도 지칠 줄 모르는 행보를 보여왔다. 그녀는 처음 태국 영토 내에 있던 난민촌에서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후에 연립정권에 참여하는 왕당파 푼신펙당(FUNCINPEC)에 입당했다. 그녀는 1998년 총선에서 북서부 지방의 밧덤벙(Battambang) 도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 지역은 캄보디아 내에서도 특히 전쟁의 상처를 많이 받은 지역 중 하나이며, 그녀의 부모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무 서쿠 여사는 캄보디아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일이 부정부패 및 가난한 이들의 착취를 필연적으로 요구함을 자각하고, 캄보디아 재건을 기층에서부터 시작하기 위해 현재의 주요 야당인 삼랑시당(SRP)으로 당적을 옮겼다. 삼랑시당 및 국정에서 그녀는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고, 현재는 다양한 기구들의 수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06년 캐나다의 궬프대학(University of Guelph)은 그녀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녀는 또한 곧 공개될 다큐멘타리 영화 <처녀 수확>(Virgin Harvest)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보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포스트"[The Jakarta Post] 2009-2-6   (번역) 크메르의 세계

 

 

 

무 소쿠 : 캄보디아의 보배

 

Mu Sochua: One of Cambodia's precious gems

 

 

기사: Sara Veal

사진: Lucia De Giovanni

 

캄보디아의 훈 센(Hun Sen) 총리는 최근 어떤 사람이라고 특정하진 않았지만 한 여성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훈 센 총리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반응을 보인 이 여성에 의해 오히려 고소까지 당해있다. 

 

훈 센 총리의 이러한 공개적 비난은 여성차별이 일상화된 캄보디아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무 서쿠(Mu Sochua)를 쓰러뜨릴 수 있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지난 20여년 동안 무 서쿠는 캄보디아의 착취당하는 국민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녀는 1972년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부모님께 인사도 못드리고 캄보디아를 떠났고, 그 후 18년 동안 해외망명 생활을 했다. 부모님은 결국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희생됐다. 18년간의 해외생활을 통해, 그녀는 미국과 프랑스 파리, 그리고 이태리에서 공부 및 일을 했고, 이후 태국-캄보디아 국경 지대의 난민촌에서 활동했다. 1989년 귀국한 이래로 그녀는 조국의 재건에 매진해왔다. 여성 및 아동 문제를 중심으로 처음에는 활동가로, 그리고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해왔다.

 

"저에게 캄보디아 재건에 동참한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사항이었지만, 저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현재 집권여당인 "캄보디아인민당"(CPP)의 최대 견제세력인 삼랑시당(SRP) 소속 국회의원 무 서쿠(Mu Sochua)의 말이다.

 

1991년 무 서쿠 의원은 캄보디아 최초의 여성조직인 "케마라"(Khemara)를 창립하고, 푼신펙당(FUNCINPEC)에 입당하여 1998년 총선에서 밧덤벙 도 선거구에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그녀는 곧장 여성보훈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제가 장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라가 서구세계에 공식적으로 문을 열기 전에 귀국했다는 점도 작용했죠. 1975년부터 1990년까지는 엠바고(금수조치)가 있던 시절입니다."

 

장관직에 취임한 그녀가 최초로 시도한 것은 양성평등에 관한 캠페인 "니어리 로따나"(Neary Rattanak: 여성은 보석) 운동이었다. 이는 오래된 크메르 속담인 "남자는 금, 여자는 하얀 천"이란 말을 "남자는 금, 여자는 보석"이라고 바꾼 것이다. 이러한 개작은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가치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으로, 만일 여성이 "더럽혀졌더라도" 보석과도 같이 새롭게 빛을 발할 수 있다고 하는 의미로, 여성은 한 번 물들면 마치 진흙묻은 하얀 천처럼 되돌리기 어렵다는 기존의 관념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04년 7월, 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부정부패들이 존재한다고 폭로한 후 사임을 했다. 이후 삼랑시당에 입당한 그녀는 2006년에는 이 정당 최초의 여성 서기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투쟁에 대해, 2005년 노벨평화상 후보 지명 및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이끄는 "바이탈 보이스"의 "올해의 세계 인권지도자상"을 비롯해, 여러 상들이 수여됐다.

 

무 서쿠 의원은 영어, 프랑스어, 크메르어가 유창하며, 미국 대학에서 받은 심리학 및 사회복지 학위도 소지하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국제적 배경은 그녀의 사업들을 강화시켜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포인트를 중심으로 해서만 그러하다. 그녀는 말한다.

 

"서양의 지식인들은 저로 하여금 인권, 양성평등, 삶의 질과 같은 국제적 표준들을 캄보디아 여성들에게 적용할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하지만 이러한 가치들과 문화 사이에서 어떤 균형이 필요합니다."

 

"저는 캄보디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완벽하게 서구로부터 들어온 것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캄보디아 국민들 누구라도 차별없이 국가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긍정적 변화의 핵심이라고 믿고 있다.

 

"[발전이란 것은] 그 국가가 가진 원초적 자원들을 보존할 수 있는 데 토대를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법치주의 지배가 정착되지 않아 이러한 풍부한 자원들이 잘못 관리되고 있습니다."

  

(크메르의 세계 추가사진) 2006년 미국 버클리대학이 수여한 인권관련 공로상 시상식에서의 무 서쿠 여사. 그녀는 이 대학의 동문이기도 하다. [출처: 버클리대학] 

  

무 서쿠 여사의 세 딸들도 그녀의 인도주의적 행보를 뒤따르고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들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동양인들은 대체로 "안스럽게" 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자신은 딸들이 지독하게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들이 교육과 보건, 그리고 양성평등 문제에 관해 오히려 보다 강경한 투쟁을 하도록 자신을 자극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가 성차별적 폭력의 피해자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에 갈 때마다, 제 자신 혹은 제 딸들이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에 피해를 입는다면 어찌할까를 상상하곤 합니다."

 

그녀의 투쟁은 훈 센 총리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결정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지역구 껌뽀웃(Kampot)을 방문한 훈 센 총리가 그녀를 지칭하여 공공연하게 "강한 다리"(cheung klang: 쩌응 클랑)라고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이 말은 여성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크메르 전통 어법이다. 그녀가 훈 센 총리를 고소하자, 훈 센 총리는 맞고소를 한 후 집권 여당을 통해 국회에서 그녀의 국회의원 면책특권 박탈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캄보디아 변호사협회"(Cambodian Bar Association)에 대해서는 그녀의 변호사인 꽁 삼 온(Kong Sam Onn)을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면책특권이 없다면 그녀는 투옥될 수도 있고, 그녀의 변호사 역시 변호사 자격 박탈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대해 더욱 강력한 투쟁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만일 제가 훈 센 총리의 말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더 이상 저에게 도움을 청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훈 센 총리의 발언은 그녀 자신의 권리를 짓밟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폭력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무 서쿠 의원은 캄보디아 사법부가 행정적으로 종속되어 있어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을을 잘 알고 있지만, 이 재판을 통해 취약한 캄보디아의 사법적 현실을 공개하고 어떤 사람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보이려 시도하고 있다. 판결이 어떤 결과로 나오든, 그녀는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인도네시아를 모델로 언급하면서, 캄보디아가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아세안 공동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날이 와야 한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그러한 날을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 국민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아세안 공동체의 눈들에 신뢰를 심어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가 지금 하고있는 일은 장기적 투자에 해당합니다. 제가 정치권에 남아 활동하는 이유는, 캄보디아의 새로운 리더십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이웃국가들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의 이번 결정은 어떤 누구라할지라도, 또한 그녀에게 더러운 말을 던질지라도, 그녀가 결코 물들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자 해설) 이 기사가 언급하고 있는 고소고발 사건은 2009년 8월 4일 캄보디아 법원이 무 서쿠 의원에 대해 벌금형을 부과하는 유죄를 선고했다. 이에 대해 쿠 서쿠 의원과 삼 랑시 의원을 비롯한 야권인사들은 프놈펜 시내를 항의행진하기도 했다. 이에 관한 기사 및 경찰과 충돌한 당시의 동영상 등은 다음 게시물들을 참조하라.

 

   ☞ 바로가기 : "유죄판결 AFP 기사 및 가두행진 동영상"

   ☞ 바로가기 : "캄보디아 야당 삼 랑시 총재, 훈 센 총리의 언론탄압 비판 (SEAPA 2009-9-23)"

 

 

 

(자료출처) 무 서쿠 의원 홈페이지(http://musochua.org)

 

무 서쿠

국회의원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이기도 한 무 서쿠 의원은 캄보디아 여성 권익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지난 25년간 성차별 문제에 관해 쉼없는 투쟁을 전개해왔다.

 

인생 초반 18년 간을 해외에서 보낸 그녀는 1989년 캄보디아로 돌아왔고, 여성 문제에 관한 총리 자문위원을 맡았다. 이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무 서쿠 의원은 1998-2004년 사이에는 "여성보훈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캄보디아 주요 야당인 "삼랑시당"(SRP)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당시 54세였던 2005년에는 "노벨평화상2005재단"이 추천한 노벨평화상 후보 "1,000명의 여성 인사들" 중 1명이었고, 여러 인권관련 상들을 수상했다. 그녀는 캄보디아의 사법정의와 인권에 기여한 공로로, 캐나다의 "궬프대학"(Guelph University)으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헌정받기도 했다.

 

(크메르의 세계 추가사진) 의료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환자를 방문한 무 서쿠 여사. [http://musochua.org]

 

 

 

무 서쿠 의원 자신의 말

 

내전으로 인해 저는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조국을 떠났습니다. 1975-1979년 사이의 학살은 이 잠깐 동안의 시간에 100만명 이상의 동포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우리 캄보디아의 초록색 들판이 "킬링필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무장충돌은 1991년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성년 초반에 고국을 떠났던 저는 자녀를 둔 어머니이자 행동가가 되어 귀향했습니다. 당시 저는 여성 네트워크들 및 인권 단체들과 함께 1993년에 선포된 <캄보디아 제헌헌법>에 여성인권 증진에 관한 조항들이 삽입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1998년 저는 캄보디아에서 가장 황폐한 지역인 북서지방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동년 "여성보훈부" 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당시 내각 전체에서 단 2명뿐인 여성장관 중 1명이었습니다. 이후 제가 정부의 전횡과 부정부패에 대항해 투쟁하는 세력인 야당으로 당적을 옮기자, 다음 정권에서 이 장관직은 해임을 당했습니다.

 

장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저는 가정폭력 방지법 초안을 국회에 발의했고, 동남아시아 내의 인신매매 방지를 위해 태국 정부와 교섭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NGO들 및 사법당국과 함께 캠페인을 벌였고, 시골지역 여성들을 위한 국가적 토론을 발족시키기도 했습니다.

 

저는 장관으로 근무하면서 시민사회 및 NGO들과 함께 여성들이 풀뿌리 지방의회 선거에 많이 출마할 수 있도록 고무시키는 노력을 했습니다. 2002년에 실시된 역사적인 최초의 지방선거에서는 25,000명의 여성들이 후보로 출마하여 그 중 9%가 당선되었습니다. 아직 정부 측에서 수용하지 않고는 있지만, 저는 여성할당제(gender quota)의 강력한 주창자이자 옹호자입니다. 2007년 지방선거와 2008년의 국회의원 총선에서 적어도 30%의 의석은 여성들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캄보디아 여성계의 목표입니다.

 

야당에 참여하면서부터 저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해 보다 더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저는 민주주의 확장을 위해 광범위한 시민사회 및 노동조합들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평화를 위해 항상 국내외 및 역내 차원의 다양한 그룹들과 공조하여 여론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진행해왔습니다. 저는 두려움과 폭력이 없는 삶을 신봉합니다. 저의 노력은 크메르루즈 정권 때 수많은 교사와 박사들, 판사들이 사망하여 척박한 캄보디아의 인적 자원 개발을 포함하여, 보다 장기적인 발전 목표들을 추구합니다.

 

제가 캄보디아 군대나 경찰과 직접 대면을 하는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제가 스스로 방어하는 방법은 오직 끊임없이 호소하고, 보여주며, 또한 활동해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국가 발전을 위해 보다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고, 보다 많은 여성들이 공정한 몫을 차지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정부가 강력한 실천의지를 천명하고, 여성 평등을 위한 실천적 정책들을 시행할 때만 가능합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이 사회가 여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동등한 동반자로서 인정할 때에만 사라질 수 있습니다.

 

여성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여성들이 가정과 지역 공동체, 그리고 국가 전체의 안정과 평화를 증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보다 많은 여성 네트워크가 연대하고, 비판적 언론을 형성하는 동시에 정치적 공간을 확대하는 데서 저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크메르의 세계 추가사진) 2009년 3월 "바이탈 보이스"의 역대 수상자로서 금년 시상식에 참석한 무 서쿠 여사가, 이 재단의 창립자인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과 오랫만에 만나 반가움을 나눴다. [http://musochua.org]

 

 

 

시민사회 및 공적 활동과 수상경력

 

  • Elise and Walter A. Haas International Award (2006) 캄보디아 사회에 공헌한 업적을 기려 미국 버클리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이 수여한 상. 
  • 명예 법학박사 (2006) 캐나다 "궬프대학"(Guelph University)이 정의와 인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수여함.
  • 노벨평화상 후보에 지명 (2005) 비폭력 투쟁에 대한 공로로 "1,000명의 여성 인사들" 중 1명으로 포함됨.
  • 바이탈 보이스 올해의 지도자상 (2005) "바이탈 보이스"(Vital Voices) 명예의장인 힐러리 클린턴(Hilary Rodham Clinton) 상원의원이 직접 수여함. 아시아-태평양 지역 여성 및 아동 인신매매에 대항하는 국제적 활동에 대한 공로.
  • 삼랑시당 운영위원 (2004-현재), 노동/사회분야 담당. 여성 분야에 대한 당 자문위원 겸직.
  • 세계여성기금(Global Fund for Women) 해외자문위원 (2004-현재)
  • 베이징 캄보디아여성연맹(Coalition of Cambodian Women for Beijing) 의장 (1995), "제4차 세계여성회의"에 참가한 115명의 풀뿌리 여성지도자들의 모임. 1,000명의 풀뿌리 여성 지도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제1회 캄보디아 여성 평화의 리본" 캠페인 기금 모금.
  • 세계를 엮는 여성들(Women Weaving the World Together: WWWT) 지역 코디네이터 (1995),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만리장성에 장식된 2,000 m 길이의 여성평화리본(Woman's Peace Ribbon) 조직을 위한 국제적 공조.
  • 캄보디아 인권연구소(Cambodian Institute for Human Rights) 이사 (1994-현재)
  • 민주주의, 발전, 평화를 위한 캄보디아 NGO연맹(Coalition of Cambodian NGO's for Democracy, Development and Peace: Pounleu Khmer) 자문위원 (1993-1995)
  • 캄보디아협력위원회(Committee for Cooperation in Cambodia) 이사 (1992-1994)
  • 케마라(Khemara) 재정위원 및 소장 (1991-1995), 여성의 국가 건설 참여를 주장하며 만들어진 NGO로, 캄보디아 국내에서 만들어진 자생적인 여성분야 NGO로는 최초였다.
  • 샌프란시스코 캄보디아인회(Cambodian Community in San Francisco) 회장 (1975-1981)

 

 

 

 * 관련 게시물 바로가기 : 

 

     - "[특집] 캄보디아의 2013년으로 떠나는 순례의 뱃길"(뉴욕타임스 20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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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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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꼬르 | 작성시간 09.12.05 아름답게 보입니다,,,얼굴이,,
  • 작성자허의철학 | 작성시간 09.12.05 황량한 죽음의 들판에 핀 한송이 "인동초"로 보입니다. 무 서쿠의원님이 추구하는 목표가 이루어져 캄보디아에도 인권이 존중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 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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