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학사전

[(전문자료)]앙리 무오 : 앙코르와트의 재발견자

작성자울트라-노마드|작성시간09.04.05|조회수411 목록 댓글 0

 

  

 (출처) 위키피디아 백과서전 한국어판

 

 

앙리 무오

 

앙리 무오

앙리 무오(Henri Mouhot)
출생 1826년 3월 15일
프랑스
사망 1861년 11월 10일
라오스 나판
말라리아
국적 프랑스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1861)는 프랑스의 자연학자이자 19세기 중엽의 탐험가이다. 그는 스위스 국경에 가까운 프랑스 몽벨리아의 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아시아와 가까운 러시아 변방에서 보냈다. 그는 앙코르와 연계되어 가장 기억되는 사람으로, 라오스 나판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초기생애

 

젊은 철학교수로 그의 생애에서 10년간은 러시아에서 언어학 공부를 하며 보냈다. 그는 루이 다구에르가 발명한 사진 찍는 법을 공부하며, 형제인 샤를과 유럽을 여행했다. 1856에 자연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에 스코틀랜드 탐험가 문고 파크의 딸과 결혼했다. 이듬해 1857년 제임스 보링 경이 쓴 "시암 왕국과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자마자, 무오는 새로운 종을 발굴하기 위해 자연탐사로 인도차이나를 여행하기로 한다. 첫번째 요청은 나폴레옹 3세의 정부와 프랑스 회사들의 거부로 좌절되었다. 왕립지리학회와 런던의 동물학회의 지원을 받아, 싱가폴을 경유하여 방콕으로 배를 타고 갔다.

 

 

앙코르

 

모오는 흔히 앙코르 유적의 발견자로 잘못 알려져 왔다. 앙코르 유적은 소실된 적이 없고, 그 위치와 존재에 대해서는 크메르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고, 16세기 이후로 계속 서방인들의 방문을 받아왔다. 무오가 밧덤벙(바탐방)에 기반을 둔 프랑스 사제인 보일러보 신부에게 잡지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서방의 탐험가와 수도사들이 앙코르와트크메르 사원에 적어도 무오보다 5년 빨리 방문했다고 보고했다. 보일러보 신부는 1857년에 "인도차이나 여행 1848-1846, 안남과 캄보디아"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식민지

 

무오의 사후에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병합되었기 때문에 무오가 프랑스 식민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식민주의를 달가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종종 유럽의 식민지 개척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였다.

 
"유럽 국가들의 동방에 대한 현재의 움직임이 이 땅들을 소개함으로써 문명사회에 축복을 가져다 줄까? 아니면 끝없는 탐욕의 맹목적인 수단으로 천벌을 받아 현재의 불행을 가져올까?"

 

탐  사

 

1885년 방콕의 탐사기지에서, 무오는 타이 왕국, 캄보디아, 라오스의 내부를 네차례에 걸쳐 여행을 했다. 그가 죽기 3년 전에 미지의 정글을 탐험하기 위해 그는 극심한 역경과 야생동물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첫번째 탐사에서, 무오는 시암의 전 수도였던 아유타야를 방문하여 많은 곤충의 표본과 토질과 강 조개 등의 표본을 수집하여 그것들을 영국으로 보냈다.

 

1860년 1월, 그의 두번째 탐사이자 가장 긴 여행이 된 앙코르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이미 개척된 땅이었고, 400 km²이상 퍼져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많은 고대 테라스와 연못, 해자 도시, 궁전 그리고 사원 등이 있었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앙코르 왓이었다. 그는 이번의 탐사의 3주에 걸친 상세한 관찰기를 여행 잡지를 기고하였다. 이 잡지와 도해들은 나중에 그의 사후에 유고작으로 책으로 출간되었다.

 

 

사망과 유산

 

무오는 4차 탐사에서 말라리아로 인해 라오스의 정글에서 사망했다. 그는 래인쌍 왕조의 수도이자 오늘 날에는 라오스로 병탄된 세 왕조 중의 하나였던, 루앙프라방을 방문했었다. 두 명의 하인이 남칸 강 언덕에 있는 나판의 프랑스 수도원 근처에 그의 시신을 묻었다. 무오가 가장 신뢰하던 하인이었던 프라이는 무오의 여행기와 표본을 다시 방콕으로 이송하였고, 그곳에서 유럽으로 그의 유물을 이송하였다. 프랑스 사령관 두다 데 라그리의 명령으로 1867년 그의 무덤 위로 작은 비를 세웠다.

 

그의 묘비석은 남칸 강의 홍수로 파괴되었고, 1887년 보다 견고한 건물로 교체되었다. 1951년 '프랑스 극동학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遠東博古院: EFEO)에 의해 묘지의 복원작업이 다시 이루어지게 되었다. 무오의 묘비는 다시 정글 속에 소실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재발견되었다. 1990년 몽벨리아의 고향 도시에서 이 복원을 지원하였다. 1990년 무오가 묻힌 장소가 다시 발견되었으며, 루앙프라방의 그곳은 지금 호텔과 여행사 건물 등이 밀집해 있다. 그의 묘지를 방문하려면 밴을 타고 먼지가 날리는 길을 약간 달려야 한다.

 

 

무오의 저서

  • 시암,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안남 여행 -- 앙리 무오 -- ISBN 974-8434-03-6
  • 시암, 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 여행, 1858-1860 -- 앙리 무오, 미셀 시미티에 - ISBN 0-19-588614-3
  • Illustrated by Profusely illus in b/w. - 인도 차이나의 중심부(시암), 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 여행, 1858, 1859, and 1860 -- 앙리 무오-- ISBN 974-8495-11-6

 

바깥링크

 
 
 

 이하의 자료는 앙코르왓 디지털콘텐츠화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정보이다. 

  

 

앙리 무오와 앙코르

 

 

 

성실한 소년 조수는 위대한 탐험가의 주검을 다시 찾기도 힘든 정글에 묻고 자료만 가방에 불룩하게 담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외로움과 더위와 해충과 싸우며 작성한 기록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탐험가의 정신은 살아서 후세에 전해지지만 그의 몸은 번지수도 알 수 없는 밀림에서 적멸했다.

무오의 기행문은 1861년 프랑스 잡지 <세계회유>에 실려 다음 해에는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앙코르’ 라는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그 책의 이름은 <샴ㆍ캄보디아ㆍ라오스 왕국 및 인도지나 중앙부 기행 ; Voyage dans les royaumes de Siam, de Cambodge, de Laos et autres parties centrales de l'Indo-Chine (1863)>이었다. 그 문장의 일부를 옮겨본다.

 

우리가 현재 답사하고 있는 지역에는 식물과 동물, 나비 등의 표본감이 얼마든지 있다. 원주민들은 정글에 대한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자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자연의 생명이 이처럼 번식하고 있는 곳은 세계 어디를 가도 없을 것이다. 이 지방, 곧 캄보디아 왕국의 중앙 구릉 지대를 원주민들은 ‘앙코르’라고 부른다. 앙코르라는 말은 인도의 오래 된 말인 산스크리트 말의 ‘수도’라는 뜻의 ‘나가라’에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나가라는 ‘큰 뱀이 있는 곳-용궁’이라는 뜻이다. 용궁이 있는 나라를 ‘난고르’라고 발음하는 듯한데, 이것이 원주민들의 발음으로 아름답게 변해 앙코르로 불리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나가(큰 뱀)의 나라였던 톤레이세프 호수 부근의 넓은 숲에는 수백만의 유령이 있으며 마법에 걸린 돌로 된 도시가 늘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설은 동남 아시아 다른 장소에서도 들을 수 있었는데, 말하자면 숲 속에 묻혀 있는 캄보디아식 잠자는 공주의 궁전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늘 만난 어부는 남쪽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더욱 자세하게 들려 주었다.

그러나 내가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는 그것이 단순한 전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과는 반대로 유럽 문화권의 이야기에는 이곳 전설보다 훨씬 나은 점이 많다. 젊고 씩씩한 왕자가 가시밭길을 헤치며 잠자는 궁전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공주에게 입을 맞추어 숲과 공주를 다시 살려 낸 이야기…….

이것은 아리아인들의 선조가 만들어 낸 전설이지만 아리아인들의 거주지인 힌두스탄 고원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듯이 이 지방에도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같은 전설도 유럽인들이 만든 전설은 이 고장의 전설보다는 밝은 내용이었다.

유럽에서는 즐겁고 밝은 옛 이야기가 이 고장에서는 어둠과 두려움, 그리고 저주가 섞인 기괴한 이야기로 다시 엮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설은 원주민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었으며 내가 남쪽에서 데리고 온 통역하는 사람이나 인부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아까 어부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잔뜩 긴장하고 겁을 먹은 표정들이다. 나는 매우 걱정이 된다. 앞으로는 더 많은 안내원이 필요한데도 안내원 얻기가 매우 곤란하리라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앞길은 더욱 암담하기만 하다. 많은 고난을 이겨 내고 간신히 오지까지 들어선 과학 탐험이 하찮은 전설 또는 신화 때문에 위험에 빠지거나 중단될지도 모른다.

1861년 1월 10일 밤
큰 호수 옆 앙코르 지방에서 앙리 무오

 

 

앙리무오가 바로 ‘앙코르’ 라는 지명을 세계에 널리 알린 장본인이다. 물론 무오 이전에도 앙코르를 방문하거나 소개한 사람들이 있다. 앞에서 말한 신부 비유브오를 비롯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앙코르를 말했으며, 포르투갈의 여행객들도 앙코르를 방문했다. 또한 훨씬 이전인 13세기에도 중국 기록자들이 관련 자료를 남겨 놓았다. 그 중 1296년 중국 사절로서 앙코르에 머문 주달관의 기록은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무오의 기행기가 책으로 엮어져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면서 앙코르는 중앙 무대로 나오게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무오를 앙코르 ‘발견자’ 라고 부르는 것이다. 앙리무오는 1826년 동부 프랑스 몽벨리아르에서 재무성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에 러시아 사관학교에서 강사로 일하던 무오는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다가 크림전쟁이 번지자 귀국했다.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2년에 걸친 유럽 여행을 하면서 은판 사진법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사실 무오는 원래 동식물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무오티아 글로리오사' 라는 멋진 풍뎅이의 이름을 명명하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여러 방면에 걸쳐 폭넓은 관심과 열정적인 탐구심을 갖고 있던 그는 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우연이지만 비유브오의 여행길을 따라 앙코르에 도착한 것이다. 무오는 앙코르의 유적을 발견한 수개월 뒤 충실한 고용인인 바오와 라오스의 정글을 탐험하다가 그곳에서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무오의 기록은 자기가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고 과시하지 않았고 부유보의 여행기를 인용하기도 했다. 1868년, 앙코르 일대를 탐험한 무오의 기록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암과 캄보디아 탐험>이 그것이다.

 
1874년이 되면서 앙리무오의 사후 영광이 빛을 발했다. 각종 논문들과 저작들이 발간되면서 앙리 무오는 정글 속에 묻혀 있던 캄보디아의 옛 수도를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로 자리매김 되었다. 앙리 무오가 남긴 앙코르에 대한 기록의 일부를 다시한번 살펴보자.

 

긴 탐사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나는 호랑이 가죽 위에 앉아 횃불의 도움을 받으며 이 글을 쓴다. 내 왼쪽에는 금방 벗겨낸 원숭이 가죽이 있고 오른쪽에는 분류와 포장을 기다리는 곤충 상자가 있다. 모기와 거머리가 자꾸 달려들어 나의 작업을 더디게 한다. 나는 지금 막 보고 돌아온 그 멋진 건축물에 대한 황홀한 인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주 웅장한 유물이 존재한다는 것, 서양의 고대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 이상으로 완벽한 예술적 감각을 갖춘 유물이 여기 동양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서 빨리 알리고 싶다 .


또, 앞으로 이 나라에 대한 사실과 전승을 보다 완벽하게 수집하여 나보다 재능이 뛰어나고 운이 좋은 탐사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나는 내 뒤를 이어 이 작업에 뛰어들 사람이 분명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정부나 단체의 도움, 또는 시암 정부의 지원을 업고서 내가 막 땅을 갈고 씨를 뿌린 이곳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사람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 앙리 무오,<시암과 캄보디아 탐험 ; Voyage dans les royaumes de Siam, de Cambodge,de Laos et autres parties centrales de l'Indo-Chine (1863)>-


안내서, 참고서가 없던 시절에 길을 뚫고 지도를 만든 그의 노력 덕분에 지금 앙코르는 꿈틀꿈틀 살아나고 있다. 앙리 무오가 앙코르왓에 대해 미처 조사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지상과제로 남았다

 

 

앙리 무오 여행기 원본

  

 

호수의 최북단에 수많은 펠리칸들이 밀집해서 무리를 이룬 채 모든 방향으로 떠다닌다. 펠리칸들은 먹이를 잡기 위해 부리를 때로는 들이밀고 때로는 늘이고 있다. 엄청난 가마우지 떼가 물의 표면 바로 위로 쏜살같이 날아간다. 펠리칸들 사이로 가마우지들이 섞여 있고, 가마우지들 등의 어두운 색깔은 펠리칸들의 밝은 색깔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특히, 강가 나뭇가지들에 모여서 거대한 눈덩이와 비슷해 보이는 백조들의 빛나는 흰빛과 뚜렷이 대비된다.

여러 지류들(그 중 하나가 바탐방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로 이루어진 쿤-보레에 Kun-Boreye 강에 이르자 같은 장관이 보다 협소한 장소에서 계속 펼쳐진다. 곳곳에 이 조류와 어류가 펼쳐 보이는 굉장한 광경들이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항해 시간을 즐겁게 보낸다.

태양은 사그라져 가고 있고, 그래서 새들과 동물들의 가죽을 빨리 벗겨내야 한다. 더위가 그것들을 매우 빠른 시간에 상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빨리 노를 저어 갔다. 하인들은 쌀을 끓이기 위해 불을 올렸고, 우리는 물결에 흔들리면서 좋은 파이프를 피운다. 우리는 귀여운 중국인 프라이Phrai가 프랑스어와 샴어와 중국어가 섞인 말로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새벽에 햇빛이 처음으로 비추고 신선한 미풍이 부드럽게 일어 우리의 악착같은 적인 모기들이 물러가는 사이 다시 배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강이 갈라지는 곳에 이르러 우리는 뱀처럼 굽이치는, 빠른 물살의 남동쪽 지류와 만나게 된다. 바탐방이 위치한 이 하천은 12에서 14미터의 넓이 밖에 안 된다. 나뭇가지들은 배에 늘어져 있고, 잔가지들에 매달린 거대한 원숭이들은 우리가 지나가는 곳을 보려고 놀이를 중단한다. 이따금 노 젓는 소리와 노 젓는 사람들의 노래에 놀라 깨어난 악어들이 잠자고 있던 젖은 땅의 강가에서 뛰어나와 물속으로 사라진다.

우리가 과장되기는 하지만 성채라고 부르는 것의 흙벽들로 둘러싸인 촌락을 우리는 결국 앞에서 보게 된다. 우리는 바탐방에 있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인 사제가 우리를 맞이한다. 여기서 실베스트르(Sylvestre)씨에게 우리를 친절히 맞아 준 데 대해, 그리고 나의 박물학적, 고고학적 탐색에 베풀어 온 도움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약 1세기 전에 바탐방 지방은 샴(Siam)에 복속되었다. 이후로 바탐방 지방은 20년 전에 캄보디아 전역을 점령한 안남(安南)인들(Anamites)에게 봉기한 적도 있었고 넘어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안남인들은 샴 사람들에 의해 프놈-펜(Penom-penh) 너머까지 쫓겨나게 된다. 이후로 캄보디아는 코친차이나인들(Cochinchinois)의 공격을 다시 받지 않았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샴에게 계속 조공을 바치게 된다.  만일 프랑스가 안남제국을 상대로 2년 전부터 벌인 전쟁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캄보디아라는 작은 왕국에 최후의 종소리가 울렸으리라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 왕국의 운명은 거의 의심의 여지없이 사라져 가거나 주위 국가에 흡수되는 것이었다.

이 작은 강가에 새겨진 모든 주거지들은 아름다운 바나나 나무 재배지로 둘러싸여 있고, 띠 두른 바나나 나무 나뭇가지들과 화려한 망고 나무의 강한 녹색 사이로 가려져 있다. 바탐방 주민의 대다수는 캄보디아인들이다. 농부들은 주거지 뒤로 논을 갖고 있다. 약 1세기 전부터 외국에 종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나라의 풍습들과 관습들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능숙한 정치로 그들을 캄보디아에서 확실히 보장된 자유 가운데 내버려둔다. 정부는 다른 지방들을 파산으로 몰아가고 있는 조세와 세금 부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준다. 이러한 혜택에 힘입어 바탐방은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바탐방의 주민들은, 첫눈에 보기에도 뚜렷이 나타나는 것처럼, 복지를 누리고 있다. 현재 부락이 이루어진 시기는 샴사람들이 바탐방 지방을 차지하게 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의 부락은 동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막아 물줄기 방향으로 바꾸어 놓은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모든 옛 주민들은 샘과 라오스(Laos)로 흘러 들어왔고, 이에 따라 프놈-펜과 우동(Udong) 그리고 캄보디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새롭게 주민들이 이루어졌다. 바탐방 사람들은 놀이와 가장 유치한 유희들을 즐기며, 그렇기에 출신이 어떠하든 진짜 샴 사람들이다. 그들은 특히 경마에 열광하는데, 그것은 매해 열리며 거기서 때때로 이 나라에서는 상당한 금액인 11넨(Naines ; 약 1100프랑)까지 거는 내기가 벌어진다.

경마에서 대단한 속도로 달리는 조랑말들이 있는데, 우리는 사슴과 물소 사냥 때 조랑말을 필요로 한다. 평원에 놓여지면 조랑말들은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는 야생동물을 앞지른다. 그렇기에 사냥꾼들은 야생동물들을 죽일 수 있게 된다. 또한 닭싸움과 거북싸움에 엄청난 내기가 벌어진다. 거북싸움은 매우 흥미롭다. 밀착해서 세운 두 나무판 사이의 좁은공간에 두 마리의 거북이 놓인다. 출구 구멍이 뚫린 또 다른 나무판을 기준으로 두 마리 거북은 갈라선다. 이어서 사람들은 그 두 마리를 단 하나의 출구로 내몰고 동시에 그 두 마리는 앞으로 나가지만 하나가 물러서야만 다른 하나가 우리에서 탈출할 수 있다.

사람들은 거북들의 등에 작은 점토 화로를 놓아두고 숯을 정확하게 잘라 거북들 등 위에 불을 피워 갖다 놓고 부채로 화기를 돋운다. 열기가 거북들의 살갗 위로 오르자마자 이 불쌍한 동물들은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출구로 달려든다. 약한 놈이 진력이 나서 결국 죽기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바탐방 지방은 미지의 시대가 남긴 폐허들로 뒤덮여 있다. 그 폐허들은 큰 호수의 최북단에 거대한 반원을 이루고 있다. 그 폐허의 반원은, 툴리-삽과 메콩(Mekong) 사이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황량한 숲으로 이어지고 사라져 간다. 이 모든 지역을 지나면서 매 발걸음마다 몰락한 한 제국과 사라진 한 문명이 분명하게 남긴 유적들과 만나게 된다.

바탐방 바로 근접지역에 바세트(Bassete), 바논(Banon), 와트-에(Wat-Eh)의 유물들이 있다. 우리는 앙코르(Onkor)로 가기 전에, 그리고 돌아오면서 두 번에 걸쳐 바세트를 찾아갔다. 그와 관련해 우리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완벽히 보존된 저부조(低浮彫)의 데셍이다. 그것은, 벽돌로 된 탑문의 아래를 이루고 있는 1m 50cm의 사암(砂岩) 덩어리 위에 새겨져 있다. 시간이 이 모든 유물들을 너무 심하게 망가뜨려 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의 모습은, 악착스럽게 훼손시키고 파괴하는데 전념하고 있는 어떤 질투심 낳은 적을 생각나게 한다.

너무 심하게 우겨져서, 겁나는 동물들의 소굴이 되어 버린 초목 하나가 그 모든 것을 뒤덮고 있었다. 인간이 홀로 그러한 난장판을 홀로 벌일 수 없고, 그것을 지진도 마찬가지로 일으킬 수 없다고 우리는 겨우 상상할 수 있었다. 주랑(柱廊)들은 땅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쪼개진 토대들과, 현재의 지반과, 바로 세워져 있는 유물조각들 2m 이상 위로 돌출되어 있는 문들의 상부를 본다. 초석이 어느 정도 흠 없이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건물은, 내벽으로 둘로 갈라져 있고 그 끝이 탑 모양을 하고 있는 높이 25m 넓이 6m의 건축물이다. 그것은 모두 재단된 사암(砂岩)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의 합각들과 앙코르의 보다 오래된 유물들과 비슷한 정교한 배내기들 위에 아름다운 조각들의 자취가 외면에 남아 있다. 내부에 벽들은 아무 장식이 없다.

곡괭이와 망치 자국이 없는 돌은 거의 없다. 창들은 하나나 둘만 남은 창살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다른 탑들의 문들과 건축물들 위에 재현된 것들은, 원통형의 거만해 보이는 머리스타일을 하고 앉은 채로 단도 자루 위에 수손을 포개어 놓고 있는 긴 수염의 한 인물과 머리 네 개만 한 크기의 코끼리 한 마리, 그리고 환상적인 형상들이다. 약간 위에, 몇 개는 아직 서 있고 다른 것들은 기울었거나 넘어져 있는 장려한 원주들과 상층부만 땅 위로 나와 있는 문들을 우리는 본다. 여기저기에 재단된 돌들, 거의 전부 무너진 탑들, 주랑들 벽면들이 있다. 이어서 넓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철분 응괴물로 된 벽이 각 면에 있는, 깊이 2미터 18입방미터의 마른 저수지가 있다.

역사적으로 바세트는 나라의 군주들이 이따금 머물렀던 별궁이었다. 바탐방의 기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바세트의 폐허 부근에, 캄보디아가 샴 사람들을 상대로 거듭 치른 전쟁 뒤에 사라졌던 많은 캄보디아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바탐방 주민들은 정복자들의 포로가 되었고, 정복자들은 그들을 나라의 수많은 황폐한 지역에 정착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샴과 라오스에서, 대다수가 캄보디아 출신 주민들로 이루어진 지방들을 보게 된다.

다른 지방에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한 지방을 황폐화시키는 것, 그것이 거의 근대 동양의 정치경제의 전부다. 나태와 굴종으로 오그라든 근대 동양은 고대 동양의 폐허 위에서 무심히 잠들며, 그 폐허는 이제 서양의 아들들을 위해서만 웅변적으로 교훈들을 전해 준다. 48에서 52 킬로미터에 이르는 바탐방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우리는 남쪽 방향에서 거대한 푸르사(Poursat) 산맥의 분지에서 처음 떨어져 나온 산들 중 하나에 이른다. 그 밑자락에 최근 지어진 초라한 파고다가 하나 있다. 주위에 몇몇 촌락들이 흩어져 있고, 한편 그 산 정상의 평평한 곳에 바논의 붕괴된 유물이 발견된다. 여덟 개의 탑이 주랑들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은 흙벽 하나를 두고 두 측면에서 지름 8미터 높이 20미터의 중앙탑에 연결되어 있다.

건축물은 수평으로 서 있고,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세트와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그 건축물에 특별히 인상적인 것을 없지만, 탑들과 주랑들의 온전한 부분은, 그것이 전체적으로 뛰어난 감각과 세부적으로는 뛰어난 기술을 갖고 능숙한 솜씨로 건축된 중요한 작품임을 입증하고 있다. 앙코르의 유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유물은 그 자재의 성격 때문에 벽돌과 자기로 된 건조물들뿐만 아니라 중국의 부서지기 쉽고 유치한 유물들과 대비된다. 바논은 사원이었던 것 같다. 중앙 원내 그리고 주랑 하나로 연결된 마주보고 있는 작은 두 탑에 분명 건물 자체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엄청나게 많은 불상들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 불상들은 이전 모든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다른 작은 신들에 의해 무한정으로 둘러싸여 있다.

옆 산의 자락에 깊은 동굴이 하나 있다. 그 동굴의 궁륭들은 어둡고 높으며, 거기에 아름다운 종유석들이 깔려 있는 석회암들이 발견된다. 몇 미터를 기어가야만 그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 캄보디아인들은 그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을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그 물이 과거, 현재, 미래를 알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신자들은 순례 차 가끔씩 그 동굴에 간다. 그들은 물에게 건강을 달라고, 또는 자신들의 운명과 나라의 운명에 빛을 달라고 빌고, 울퉁불퉁한 바위들 곳곳에 흩어져 있거나 땅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많은 우상들에게 기도한다. 와트-에의 사원은 바논의 사원과 반대편에 있고 바탐방으로부터 8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곳은 바로 이전 시기의 건축물로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다 
 
 

 

 우리가 방금 말했던 폐허들을 둘러본 후에 실베스트르씨와 나는 1월 20일 새벽 여명에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앙코르로 떠났다. 그리고 22일 우리는 작은 하천의 하구에 도달했다. 그 하천은 우기에는 다른 도시에까지 닿게 될 것이다. 그 하구 위로 2마일 거리에서 우리는 배에서 내렸고 아직도 통행 가능한 오래된 차도를 한 시간 약간 넘게 따라갔다. 이어서 우리는 모래와 키가 큰 풀들로 뒤덮여 있고 나무가 없는 황량한 평원을 가로질러 갔다. 그 평원을 남쪽에서 코라(Korat) 산악의 지류인 송레(Somrais)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그 평원은 서쪽으로는 아름다운 쉬롬(Chrome)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쉬롬 산 근처에서, 차도와 더불어 이 지역 고대 문명 최초의 유적인 돌출된 높은 탑이 보인다.

앙코르에 도달해서 우리는 여러 여행자들에 의해 반쯤 파괴된 숙소에 머물렀다. 그들은 쌀을 끓이기 위해 거기서 나무가 될 만한 것이라면 모조리 뜯어냈다. 캄보디아인들은 좀처럼 후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드물게만 이방인을 집안으로 들인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에도 잠시일 뿐이며, 이는 이웃나라의 풍습과 대비된다. 노코르(Nokhor) 또는 앙코르(Onkor)는 캄보디아 또는 크메르 고대 왕국의 수도였다. 앙코르는 과거에 인도차이나의 대국들 중 사이에서 명성이 드높아서, 지금도 유일하게 전해져 오는 전설에 의하면, 조공을 바치는 왕들이 120명에 이르렀고, 오백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으며, 왕가의 건물들이 여러 지역을 뒤덮었다.

파리Paris 동쪽 위도 14도 경도 102도 쪽으로 거대한 호수 툴리삽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앙코르라는 같은 이름의 지방에 폐허가 놓여 있다. 그것은 너무나 장엄하고 엄청난 노고의 결과여서, 그곳을 보고 우리는 마음 속 깊이 경탄해 마지않을 수 없으며 이 거대한 작품들을 만든 문명화되고 계몽된 강력한 민족이 이제 어떻게 되었을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사원들 중 하나는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성당들 옆에 영광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며, 그 장엄함에서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예술이 건립한 그 모든 것을 압도한다. 그곳은, 이 건축물들을 만든 위대한 민족의 후손들이 빠져들게 된 그 슬픈 야만의 상태와 놀랍고 고통스러운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간은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는다. 모든 지방에서 온 야만인들과 최종적으로는 근래 샴 사람들 그리고 아마 지진이 장대한 유물들의 대다수를 허물어뜨렸다. 퇴적들과 잔해들 옆에서 아직 남아 있는 장엄하고 장중한 유물들도 계속 파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존엄한 마하-노코르-크메르(Maha-Nokhor-Khmer)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던 모든 왕들에 대한 기억은 허망하게 사라지고, 이 거대한 사원을 지었다고 하는 문둥이 왕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잊혀졌다.

몇몇 벽들을 덮고 있는 비문들은 이 나라의 식자들에게 해독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앙코르를 세운 사람들에 대해 현주민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다음 네 가지 중 하나로 대답한다. “그것은 천사왕인 프라-엔Pra-Enn의 작품입니다.” 또는 “그것은 거인들의 작품입니다.” 또는 “유명한 문둥이 왕이 만들었습니다.” 또는 나아가 “그것들은 스스로 창조된 것들입니다.”

거인들의 작품! 그러한 표현은 분명 정확할 수 있다. 인간의 인내력과 힘과 재주가 한도를 넘어서 창조된 이 장대한 결과물들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그럴 수 있다. 그만큼 그 정경은 바로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한 표현은 인간의 능력들을 미래의 세대에 상상력을 섞어 증거 하기 위해서라면 정확할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이 유물들 중 어떤 것도 주거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불교의 이념들을 보여주는 징표 같다. 궁을 보더라도 조상들과 낮은 부조물들은 오로지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인 주제들만을 재현하고 있다. 그것들은 아내들에 둘러싸여 있는 왕족이다. 그들의 머리나 몸에 팔찌나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들이 많이 달려 있다.

한편 여기저기서 자기와 도기 부스러기들, 수많은 장신구들, 철로 된 연장들, 현재 코친차이나에서 넨스(naines)라 불리는 동전으로 쓰이고 있는 은괴들과 비슷하지만 훨씬 큰 은괴들이 발견된다. 넨스는 현재 376그램의 은에 해당한다. 여러 관점에서 아마 더 좋을 수 있는 다른 지점보다 이 지점을 택한 이유는, 그곳이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까이 석영(石英) 바위 안에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금광석은 우리 선택에 따라 약간만 고려되었을 뿐이다. 적어도 그렇게 가정할 수 있다. 거대한 호수에서 14마일 거리에 위치하며 대부분 사막이고 메마른 평원에 놓인 제국의 거대도시는 토양이 변하지 않았다면 대하의 주변에서 보다 자원이 풍부하고 특히 교통이 원활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곳이다.

고고학적 뿐만 아니라 건축학에 지식이 있다고 조금도 자신할 수 없지만 나는 스스로 앙코르에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해 묘사해 보려고 한다. 나의 단 하나의 희망은, 부족한 능력이지만, 새로운 장을 엶으로써 과학의 영역을 넓히는 것, 그리고 동양을 전공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의 관심을 새로운 분야로 돌리는 것이다.
 
가장 아름답고 특히 모든 유물들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앙코르 사원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연구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여행자가 앙코르에 도착할 때 그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던진다. 그것은 여행자로 하여금 피로를 잊게 하고 그를 감격에 흥분시키고 사막 한가운데에서 가장 상냥한 새를 만났을 때의 기쁨보다 더 강렬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든다. 마치 요술에 걸린 것처럼 돌연 우리는 야만으로부터 문명으로, 깊은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바탐방의 존경스러운 선교사인 E. 실베스트르 신부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고 싶다. 그는 한없이 친절하게, 불굴의 열정을 갖고 자신의 거처에서부터 우리를 동반해 주었으며 폐허의 일부를 뒤덮고 있는 빽빽한 숲 한 가운데 어느 곳에서나 우리를 인도해 주었다. 우리는 그 덕분에 많은 자료를 빠른 시간에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바탐방에서 앙코르와트로 갔다(하천은 이 두 지역을 건너 가로질러 가고 있다). 그때 우리는 건조기에는 2마일 면적에 이르는 물세와 만난다. 이어서 우리는 그 물세가 약간 높아져 선창의 역할을 하고 천연 저수지가 되는 지역에 도착한다. 거기에서부터 아직까지 통행할 수 있고 약간 솟아오른 흙으로 된 차도가 신(新) 앙코르에까지 이어져 있다. 그 차도는 홍수기에 물이 차는 지역까지, 즉 3마일 면적까지 펼쳐져 있다. 보잘 것 없는 신 앙코르는 호숫가 북부서 방향 15마일 거리에 위치해 있는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바탐방 지방의 부왕(副王)은 앙코르에 있었다. 그는, 앙코르의 가장 작지만 가장 아름다운 유물들 중 하나를 걷어 내서 방콕으로 옮겨 놓으라는 샴 정부의 명령을 받았다.

그 앙코르의 총독은 바탐방 사람들에 비해 볼 때 모든 점에서 훨씬 상냥하고 고상한 인격을 갖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건넨 선물은 비누 한 개가 전부였고, 실베스트르씨는 그에게 프랑스 군인들이 새겨져 있는 석판화 두 장을 주었다. 우리는 곧 그 각하의 후의를 받게 되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감탄하면서 내 수염을 손으로 만졌다. 그렇게 내 수염이 자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자신도 내 것과 같은 수염을 기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당신은 수염을 자라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그는 짐들을 앙코르와트에 갖다 놓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짐수레 하나를 빌려주었고, 관할장에게 우리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라는 편지를 써 주었다. 다음날 우리는 길을 떠났다. 우리는 지금 주읍(主邑)이 된 지역을 건너갔다. 그곳의 주민들은 모두 농민들로 1000명이 넘지 않고 그 끄트머리에는 1000입방미터 정도의 요새가 하나 있다. 그것은 총안(銃眼)이 있는 성벽이고, 폐허에서 얻어낸 철분이 함유된 아름다운 갈색 벽돌들로 이루어져 있다. 빽빽한 숲 전체에 걸쳐 놓여 있는, 먼지와 가는 모래의 깊은 지층으로 덮여 있는 좁은 길을 3시간 동안 걸어서 결국 우리는 갑자기 멋진 광장에 이르렀다. 그것은 서로 아주 잘 맞물린 거대한 돌들로 포장되어 있었고 아름다운 계단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사면에 화강암으로 된 두 마리의 사자가 있었다.

4개의 계단을 통해 약간 높은 표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북쪽 계단에는, 정문으로 가기 위한 길이 230미터, 폭 9미터의 긴 차도가 나 있다. 그것은 사암으로 덮여 있거나 포장되어 있고 엄청나게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차도는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넓이의 구덩이를 가로질러 나 있었다. 그 구덩이의 두께 1m 높이 3m의 돌담은 철분을 함유한 결석 블록으로 되어 있지만, 끄트머리만은 벽두께의 사암으로 되어 있다.

더위 가운데 요동치는 모래땅에서 고되게 걸은 결과 우리는 기진맥진해 있었고, 광장을 그늘지게 하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 아래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고 놀라움과 감탄에 사로잡혀 있었다. 산림 초목 지대 바깥의 넓은 중간 너머에서, 5개의 높은 탑이 꼭대기에 놓인 궁륭형의 용마루를 이고 있는 거대한 주랑(柱廊)이 솟아올라 펼쳐져 있다. 5개의 탑 중에 가장 큰 것은 입구에 얹혀 있고, 나머지 네 개는 건축물의 모퉁이에 각각 얹혀 있다. 한편 다섯 개 모두는 아래에 개선문 식으로 구멍이 나 있다. 하늘의 깊은 푸른빛 위에 이 적막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숲의 간결한 초록빛 위에 펼쳐진, 우아하고 장엄한 건축물의 거대한 외양은 내게 우선 사라진 종족의 커다란 무덤의 외관처럼 보였다.

바탐방 지방의 폐허도 찬연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장관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에 필적할 어떤 것도 상상하게 하지는 못한다. 과연 우리는 건축예술이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숲 속 깊은 곳에 놓여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진 나라들 중 하나에서, 야만적이고 알려져 있지 않고 황폐한 나라에서 발견된다. 거기서 인간의 흔적들은 야생동물들의 흔적들에 의해 지워져 있고, 거기서 호랑이들의 표호와 코끼리들의 목 쉰 절규와 사슴들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우리는 여기 이 장소들을 하루 종일 돌아다녔고, 더 커져 가기만 하는 황홀의 상태 가운데 경이와 경이 속에서 걸었다. 아! 내게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이나 라마르틴(Lamartine)의 글솜씨나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의 그림솜씨가 있었다면, 정녕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폐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민족의 유적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대한가를 예술을 애호하는 친구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그러한 재능이 내게 있다면. 숭고한 예술가들인 위대한 인간들의 이 민족은 분명 먼지와 잔해들 속에 묻힌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미 내가 말한 대로, 지주의 역할을 하는 매우 두꺼운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구덩이를 가로질러 가는 한 차도는 주랑으로 연결된다. 그 주랑은 하나의 입구일 뿐이지만, 거대한 사원에 버금가는 입구이다. 가까이 보이는 서벽 조각들의 아름다움과 완성미 그리고 장엄함은 멀리 보이는 경치와 그 위압적인 선들의 우아함을 크게 압도한다. 우리가 다가갈수록 우리는 실망하기는커녕 크게 감탄하게 되고 더 강렬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하나로 된 아름답고 높은 정사각형의 기둥들, 주랑들, 기둥머리들, 둥근 천정의 지붕들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조각되어 있고 잘 잘려 있으며 놀랄 만한 정도로 매끈한 큰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원을 보게 되면, 정신을 잃게 된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보고 감탄하고, 존경심에 사로잡히고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구상에 견줄만한 곳이 아마 없었고 결코 없었을 이 건축 작품을 찬양할 말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황금빛 색깔들은 건축에서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는 사실이다. 돌들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돌들이 얼마나 웅변적으로 말하는가! 그것들이 얼마나 높은 소리로 과거의 ‘크메르인들’이나 캄보디아인들의 천재, 힘, 참을성, 재능, 훌륭함과 능력을 대변하고 있는가!

그러한 작품을 구상해서 가장 경탄할 만한 예술로 모든 부분들을 통합 조정하고, 세부들의 무한한 변형과 전체의 장대함을 조화 가운데 둔 그 사람, 아직 만족하지 못했기에 어려움들을 극복하여 돌아올 세대들의 이해 능력을 뛰어넘는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어디에서나 어려움들을 찾았던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에게 동양의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기계적 힘을 빌려 이 수많은 거대한 덩어리들을 먼 산에서 채집해서 매끈하게 만들고 조각한 후에 건축물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려놓았을까?

해가 저물 무렵 내 친구와 내가 주랑과 사원을 잇는 멋진 차도를 가로질러 갔을 때나, 이 멋진 주 건축들 앞에 앉아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한 문명의 이 영광스러운 잔해들에 대해서 보지도 않고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생각하고 있었을 때, 우리는 위대한 천재를 가졌던 인간들에 대해 그들의 창조물 앞에서 경외심과 신성한 존경심을 갖는 것을 체험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재 캄보디아인들의 심각한 야만적 생태를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선조들의 앞선 문명을 보면서, 나는 그들에게서 문화 파괴자들의 후손이라는 사실 이외의 것을 보기가 불가능했다. 그들의 분노는 다만 개조(開祖) 작품들을 향해 표현되었을 뿐 그 후대들을 향해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땅 아래에 누워 있는 자들의 유령 하나를 불러서, 오래 지속되는 불행으로 이어진 평화로운 긴 시기에서의 그들의 역사를 듣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인들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망각에 묻혀진 것들 가운데 그들이 드러내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우리가 제시하는 이 유적의 일반 도면을 보면서 우리는 가장 기술적으로 세밀한 묘사가 줄 수 있는 관념보다 더 명료한 관념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유적은, 건축물의 꼭대기이자 지성소인 중앙의 정자까지 나 있는 도로들을 기준으로 직각으로 나뉘어져 있는 동심의 2입방미터 회랑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앙의 정자에 한 종교적인 건축가는 자신의 장식기술을 통해 가장 섬세한 조각을 새겨 넣어 간직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 성막에서 샴의 현 국왕이 살아 있는 현재, 한 부처상이 왕조에 여전히 앉아 있다. 그 부처상은 인접한 숲에 흩어져 있는 불쌍한 승려들에 의해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몇몇 충성스러운 순례자를 간간히 자신의 발아래로 이끌고 있다. 극동의 왕자들과 왕들이 강력한 제국의 신성(神性)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몸소 여기에 왔었다.

과거의 장엄함에 대해 볼 때 그 순례자들이 경배란 무엇이란 말인가? 수천의 승려들이 열을 지어 이 거대한 사원의 단들과 축대들을 즉 뒤덮었었다, 그 24개의 둥근 천정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옆에 있는 수도, 즉 이 대(大) 앙코르의 수많은 파고다에서 울리는 주명종 소리에 회답했었다. 당시 대 앙코르의 40km에 달하는 테두리 성벽 안에, 고대 서양이나 근대 서양의 가장 인구가 많은 거대도시의 거주민들만큼의 사람들이 분명히 살고 있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